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셈에서 아브라함까지 족보
창 11:10-26
10 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셈은 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11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2 아르박삿은 삼십오 세에 셀라를 낳았고
13 셀라를 낳은 후에 사백삼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4 셀라는 삼십 세에 에벨을 낳았고
15 에벨을 낳은 후에 사백삼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6 에벨은 삼십사 세에 벨렉을 낳았고
17 벨렉을 낳은 후에 사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8 벨렉은 삼십 세에 르우를 낳았고
19 르우를 낳은 후에 이백구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0 르우는 삼십이 세에 스룩을 낳았고
21 스룩을 낳은 후에 이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2 스룩은 삼십 세에 나홀을 낳았고
23 나홀을 낳은 후에 이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4 나홀은 이십구 세에 데라를 낳았고
25 데라를 낳은 후에 백십구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6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창 11:10-26 / [셈의 후손들;대상1:24-27] 셈 후손의 족보는 이러하다. 홍수가 난 지 2년 뒤 그의 나이 100세가 되어 아들 하나를 낳았다. 그 아들의 이름은 아르박삿이었다. 11) 셈은 아르박삿을 낳은 뒤에도 딸아들을 더 낳았으며 500년을 더 살았다. 12) 아르박삿은 35세에 셀라를 낳았고 13) 셀라를 낳은 뒤에도 딸아들을 더 낳았으며 403년을 더 살았다. 14) 셀라는 30세에 에벨을 낳았고 15) 에벨을 낳은 뒤에도 딸아들을 더 낳았으며 403년을 더 살았다. 16) 에벨은 34세에 벨렉을 낳았고 17) 벨렉을 낳은 뒤에도 딸아들을 더 낳았으며 430년을 더 살았다. 18) 벨렉은 30세에 르우를 낳았고 19) 르우를 낳은 뒤에 딸아들을 더 낳았으며 209년을 더 살았다. 20) 르우는 32세에 스룩을 낳았고 21) 스룩을 낳은 뒤에도 딸아들을 더 낳았으며 207년을 더 살았다. 22) 스룩은 30세에 나홀을 낳았고 23) 나홀을 낳은 뒤에도 딸아들을 더 낳았으며 200년을 더 살았다. 24) 나홀은 29세에 데라를 낳았고 25) 데라를 낳은 뒤에도 딸아들을 더 낳았으며 119년을 더 살았다. 26) 데라는 70세가 지난 뒤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
노아의 아들 셈으로부터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이 되는 아브람까지의 족보가 나옵니다.
셈의 족보는(10-23) 본문에서는 아브람까지의 거룩한 언약 백성의 계보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족보에는 홍수 전의 족보와 비교할 때 두 가지의 분명한 차이점이 나타납니다. 첫 아이의 출산 연령이 낮아졌고 인간의 수명이 매우 단축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놀라운 변화의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세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홍수로 인한 지구 기후의 변화이거나, 바벨탑 사건으로 인한 인간의 관습이 변했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로 이해하는 의견입니다. 한편 여기서 나오는 셈의 족보에는 각 사람의 최종 수명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5장에서 나오는 아담의 족보와 비슷합니다. 5장에서의 족보가 아담과 노아를 연결시켰듯이 여기서는 노아의 아들 셈에서부터 아브람까지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각각의 인물들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아담이 인류의 최초의 시작이라면, 노아는 하나님의 대홍수의 심판 이후의 새로운 인류의 시작이고, 아브람은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의 조상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아브람은 창세기 12장 3절을 선포하듯이 땅의 모든 족속이 그를 통해 복을 얻는 축복의 통로였습니다. 인류의 역사에는 하나님께 죄를 지은 최초의 인간이 에덴에서 쫓겨났고, 인류의 타락으로 대홍수의 심판이 있었습니다. 대홍수 이후에 바벨탑 사건으로 언어에 혼란이 생겼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죄악에 물든 인류의 타락과 하나님 앞에서의 무능력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24-26) 본문에 아브람이 등장합니다. 아브람의 등장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바로서 구체적인 첫 점이 찍어졌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택하시고 그를 통해 인류에게 복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람의 믿음의 대를 잇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셔서 만민에게 하나님의 축복의 증인이 되게 하시고자 하십니다.
적용: 사람을 보면 무능력과 좌절이지만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축복의 통로ㄹㄹ 사용하시고자 하십니다.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쓰임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봅시다.
러시아의 국민 시인 알렉산드르 푸쉬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수많은 선행이 보답받지 못한다고 해도, 남을 위한 사랑이 핍박받는다고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아끼고 사랑하는 많은 사람 덕분에 이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은 하기 쉽지만, 행동으로 실천하기란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의 태도가 바로 세상의 행복을 만들고 있습니다.
< 설 교 >
복된 인생
창 11:10-12:9
성경에서 복된 인생 하면 아브라함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12:2-3). 이 두 구절에서 ‘복’이라는 단어가 다섯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의 내용도 엄청납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아브람은 복이 철철 넘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누린 복이 얼마나 엄청난지 아브라함조차도 어렴풋이 알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천국에서 자기가 받고 있는 복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그리고 자기 때문에 열방에 부어지고 있는 넘치는 복을 보면서 매일매일 놀라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창 11:30을 보면 아브람이 원래 복 있는 인생은 아니었다고 말씀합니다. 그 당시 결혼한 부부에게 자녀가 없다는 것은 큰 불행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어도 자녀가 없으면 불행한 가정으로 여겼습니다. 아브람 가정은 결격사유가 있는 가정, 불행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했던 아브람의 가정이 복된 가정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유와 보다 근원적인 이유 한 가지씩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브람의 가정이 복 있는 가정이 된 데는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유입니다.
12:1을 보세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미지의 땅으로 가라는 것은 현재 네가 붙잡고 있는 모든 삶의 터전과 기반을 다 버리고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낯선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제1고향은 갈대아 우르였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로서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이 흐르는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이 그곳에서 고대도시의 유적들을 발굴했는데 발굴된 유물 가운데 여성들이 사용했던 화장품이 꽤 나왔다고 합니다. 그 사회의 풍요로움을 나타내는 증거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살기 좋은 곳을 아브람 가족들이 떠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 먼 곳으로 이주하는 것은 친척들과도 인연을 끊어야 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혈연이나 지연 중심의 고대사회에서 친척을 떠나 먼 곳으로 이주하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무모한 짓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아브람의 제2고향은 하란이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약 1200km 북쪽에 위치한 교통중심지였습니다. 그곳에서 아브람 가족들이 머물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긴 여정 중에 잠시 쉬었다가 갈 작정이었겠지만 상당한 기간 동안 그곳에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 데라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고령의 연세에 더 이상 여행하기가 힘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데라가 하란에서 정착하여 살자고 우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아브람 가족들이 하란에서 지내는 동안에 상당한 재산을 불렸습니다(12:5 참고). 다시 말해서 하란도 갈대아 우르처럼 살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데라가 하란에서 죽은 후 아브람은 다시 가나안으로 출발했습니다. 그 때 아브람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12:4).
얼마든지 아브람은 하나님께 떠나지 못할 이유와 핑계를 댈 수 있었을 것입니다.
• 여기도 살기 좋은 곳입니다.
• 가지고 있는 재산이 꽤 됩니다. 가축도 적지 않고 종들도 꽤 불었습니다. 이만하면 복 받은 인생 아닙니까?
• 더구나 이렇게 대가족을 이끌고 여행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도적 떼들로부터 약탈을 당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면 생명까지 위태로울지도 모를 일입니다.
• 제 나이 75세 아닙니까? 청년도 아니고 중년의 나이인데 지금은 모험을 감행할 나이는 지났지요!
• 정 떠나야 한다면 사전답사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400km만 내려가면 되니까 건장한 종 몇을 데리고 한 번 다녀온 후에 결정하겠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그렇게 핑계를 대며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마치 부친께서 돌아가시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부친이 죽은 후 즉시 가나안 땅으로 떠났습니다.
신약성경은 이때의 상황을 한 줄로 요약합니다.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가나안 땅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도, 그 후에 하란을 떠날 때도 그는 미지의 땅을 향해 미련 없이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가 안 것은 가나안으로 가는 방향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 외에는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처음 가는 길, 가다가 무슨 일을 만나게 될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길을 떠나게 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아브람과 그의 가정에 넘치는 복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상식적으로는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복을 넘치게 부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담대하게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아브람과 그의 가정이 하나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복된 인생이 된 데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보다도 더 근원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 혹은 무조건적인 부르심’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아브람이 복된 인생이 된 것에 우리가 크게 오해할 수 있습니다. 무슨 오해입니까? 아브람이 복된 인생이 된 데는 그 당시 주위 사람들과 다른 점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오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배격합니다. 대신에 성경이 부각하는 것은 아브람을 복된 인생으로 불러내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창세기를 보면서 확인한 사실 한 가지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께 반역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기를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끈질기게 사람들을 찾으셨습니다. 진노 중에도 인생들을 향한 사랑과 긍휼의 끈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에게 대홍수 심판을 내리실 때도 노아의 가족들을 방주 안에서 생존하게 하셨습니다. 지난 주일에 보았듯이 자기의 이름을 높이려고 바벨탑을 세운 인류들에게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온 땅으로 흩어지게 하시는 중에도 셈의 가계를 통해 구원의 끈을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11:10-26의 셈의 족보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어서 나오는 데라의 족보(11:27-32)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셈과 데라의 가계에 흘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셈과 데라의 가계에 하나님의 복을 받을만한 특별한 조건이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가문이 된 것은 단 하나,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셈과 데라의 가계도를 보면 적어도 두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수명이 현격하게 단축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950세까지 살았습니다. 그런데 데라는 205세를 살았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아브라함은 175세까지 살았습니다. 수명의 현격한 단축은 사람이 별 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계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셈과 데라의 계보에서 보여주는 또 하나의 특성은 하나님의 복이 장자에게로 흐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셈의 아들은 다섯 명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축복의 계보에 든 아들은 아르박삿이었는데 셋째였습니다.
그리고 데라에게도 세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축복이 아브람에게로 흘렀습니다. 11:27을 보세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이 데라의 세 아들이었습니다. 아브람을 제일 먼저 거론했다고 해서 아브람이 장자라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계속되는 문맥을 보면 장자는 하란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장자인 하란에게는 한 아들과 두 딸이 있었습니다. 아들의 이름은 롯이고 두 딸의 이름은 밀가와 이스가였습니다. 그런데 장자인 하란이 아버지 데라보다 갈대아 우르에게 먼저 죽었습니다. 자녀들만 남았는데 그 중에 밀가는 작은 아버지이자 데라의 아들인 나홀과 결혼합니다. 그리고 롯은 데라와 아브람이 거두었습니다.
어쨌든 데라의 세 아들 중에 아브람은 장자가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람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계보 속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의 계보에 드는 것이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행복하지 못한 인생들을 불러서 행복의 문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우선 아브람의 부친 데라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기로 결정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11:31을 보면 데라가 가나안으로의 여행길을 주도한 것처럼 말씀하지만 아브라함의 이주와 관련된 여호수아서나 사도행전을 보면 데라가 아들 아브람의 권유를 듣고 고향을 떠나기로 결정한 것 같습니다.
여호수아서 마지막 장에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별설교를 합니다. 그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수 24:2-3 / 『[2]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3]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스데반의 설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설교 때문에 그는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는데 그 설교 가운데 아브라함에 관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행 7:2-4) 『[2]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이 구절들을 종합해서 볼 때 고향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자는 아브라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브람이 아버지 데라에게 이렇게 얘기했을 것입니다. “아버지, 저는 여기를 떠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곳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와 함께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데라는 아브람의 말을 듣고 동행하기로 결정한 것 같습니다.
데라의 가문은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런데 장자 하란이 일찍 죽었습니다. 우상숭배에 회의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던 참에 아브람이 하나님에 관해 얘기하면서 그 하나님께서 여기를 떠나라고 하셨다는 말을 듣고는 ‘그래, 떠나자!’고 했던 것 같습니다.
롯도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하란)가 죽은 곳을 떠나는 것 별 미련이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아브람에게 아들이 없었기에 아들 노릇을 하는 것도 싫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할아버지의 강력한 권고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아브람 부부가 갈대아 우르와 하란을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무자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를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가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 아주 마음에 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족들이 고향을 떠나게 하신 분은 전적으로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복된 인생을 출발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셨다고 해야 옳습니다. 아브람의 가족들은 전혀 고향을 떠날 계획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계획을 세우시고는 그들로 하여금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의 부친 데라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란에 머물다가 거기서 죽었습니다(11:32). 물론 노쇠해서 그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과 비교해서 생각하면 데라가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중도에서 그 여정을 멈추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대신에 아브람은 가나안으로 향한 여행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을 끝까지 가나안으로 가게 한 원동력은 그가 갈대아 우르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행 7:2). 그래서 아브람은 그 동안 자기 가문이 섬겼던 모든 신들과 우상을 버렸습니다. 그 이후로 하나님만 섬겼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 때문에 할 수 없이 하란에 머물렀지만 거기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살아야 할 땅은 이곳이 아니라 저기 가나안임을 늘 마음에 두고 살았습니다. 그랬기에 아버지가 죽자마자 즉시 일어나 고대하던 땅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 가족들이 가나안으로 들어섰을 때 이미 그곳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12:6). 함의 후손들이었습니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곳이었습니다. 장막을 쳐야 할 적당한 곳을 찾아 이동하는 중에 가나안의 중심지역인 세겜에 들어섰습니다. 그때 갈대아 우르에서 나타나셨던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12:7입니다.
아브람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단을 쌓고 제사를 올렸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께 올린 최초의 예배였습니다. 이로써 가나안 땅이 비로소 거룩한 땅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로 이동하면서 잠시 머무는 곳마다 아브람 가족들은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12:8).
그런데 여러분,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다시 만났을 때 그 감격이 어떠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아브람의 마음상태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아브람에게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더욱 깊어졌을 것입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나와 이 식솔들, 나의 모든 장래를 책임지는 분이 하나님이시구나!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고 계시는구나!” 아브람에게 신령한 용기가 생겼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만 살펴보아도 아브람을 전혀 딴 사람으로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아브람을 복된 인생으로 살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아브람이 축복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라고 하셨을까요? 그냥 갈대아 우르나 하란에 살면서 하나님을 섬겨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왜 미지의 세계로 길을 떠나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에게만 집중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미지의 세계로 나아갈 때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의뢰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할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욱 실감나게 경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에게 떠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우리도 여기 대전이나 한국을 떠나야 하는 것입니까?
신약성경에 보면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된 종들에게 권면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너희들을 종으로 보지 않는다. 구원 받은 사람은 모두 자유자다. 구원 받지 않은 자는 아직 죄와 죽음과 율법과 사탄에게 종노릇하고 살지만 너희들은 당당한 나의 자녀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신분 때문에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너희들이 지금 종으로 살고 있느냐? 할 수 있으면 자유 하도록 하라! 하지만 생계가 어렵든지, 네 주인이 좋은 사람이면 그냥 종으로 지내도 상관없다! 사회적으로 자유인이 되기 위해 생사를 걸 필요가 없다. 종의 신분으로 지내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권면했습니다.
그러므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장소를 떠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인생여정을 오직 하나님께 맡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내 마음 전부를 드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떠나야 할 것은 하나님께로 내 인생과 내 마음을 향하지 못하게 하는 그 모든 것입니다. 그것이 재물일 수 있습니다. 직장과 사업일 수 있습니다. 가족이나 사람일 수 있습니다. 사회적 관습일 수 있습니다. 내 야망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걸음을 막는 그 모든 것에서 떠나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엄청난 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이 시간, 내가 버리지 못하고 붙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조용히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여러분의 생을 전적으로 맡기지 못하게 하는 것 그래서 그것이 여러분의 발목을 잡아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런데 이것보다도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왜 그런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에 매여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그것은 아직 영광의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만나긴 했는데 그 영광의 주님을 만난 기억이 희미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영광의 주님이 다름 아닌 예수님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셔서 우리에게 참된 소망을 주신 분, 믿는 자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셔서 이 세상을 복된 인생으로 살게 하시는 분, 나를 통해 그 복을 세상에 흘러넘치게 하시는 분, 그래서 오늘보다 내일을 더 복되게 하시는 영광의 하나님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친히 보았던 사도 요한의 증언입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러분은 영광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지금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인생여정을 예수님과 함께 걷는 자가 복된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면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과 동행하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그렇게 살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 말씀과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성경 말씀이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아브라함은 아주 가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175년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을 직접 만난 것은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불과 대여섯 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생애에 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하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셨습니다.
비록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여도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늘 동행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보다 더 큰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영광의 주님이신 예수님과 늘 가까이 동행하며 살 수 있을까요? 우리 곁에 있는 성경 말씀을 가까이하면 됩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고 성령님을 의존하면 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영안이 밝아져 영광의 주님을 환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브라함보다 더 복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도 복된 가정이 됩니다. 더 나아가서 만나는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주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2016년 한 해도 예수님과 함께 복된 인생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