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단상 101/연초록세상]그윽한 눈빛의 어르신이 그립다
지난 주말 1박2일, 반드시(?) 참가해야 하는 처갓집 가족모임(3남3녀)이 있었다. 1년에 두 번. 기다려지는 행사라 할 수 있다. 지난해 가을에는 속초 솔비치호텔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해가 갈수록 이런 시간이 좋다. 모두 육십을 넘긴 피붙이들이 옆지기와 함께 ‘같이 늙어가는구나’를 실감하는 시간이 아닌가. 아무튼, 요맘 때에는 산천이 온통 푸르름이다. 나의 무딘 표현으로는 “연초록 세상”이다. 토요일 오후 부안 변산국립공원 직소폭포 가는 길을 두어 시간 걷고, 일요일 오전 고창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을 두어 시간 걸었다. 연초록 세상을 실감하려면 숲을 멀리 바라보거나 숲속 길을 걸어보아야 한다. 가을 단풍숲을 걷자면 우리의 얼굴이 단풍든 것처럼 화끈거리듯, 봄 신록의 숲을 걸으면 우리의 얼굴에 신록의 물이 스며드는 것같다. 신록은 곧 젊음의 다른 말일 듯.
문득 우리 행렬 뒤를 따라오던 중년부부의 얘기가 떠오른다. “여보, 정말 이 신록을 믿을 수가 없네. 바로 일주일 전만 해도 산 전체가 칙칙한 잿빛이었는데, 자연은 어쩜 이럴 수가 있을까? 이렇게 나오니 너무 좋다. 우리 매주 나오자” 남편의 대꾸도 인상적이다. “그럽시다. 가을은 뭐 안그런가? 겨울 눈꽃은 또 어떻고?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 정말 좋은 나라야. 더구나 유엔이 인정한 ‘선진국’이잖아. 정치만 잘 하면 바랄 게 없는데 말이야” 하하하. 그것을 새삼 말해 무삼하리오.
처형과 처남, 아내는 걸으면서도 시종일관 ‘수다’로 일상의 스트레스를 푸는 것같다. 왜 아니겠는가? 돌아가신 장인 장모 화제가 영순위. 당신 부모의 장단점을 얘기하면서도 그리움이 착착 쌓일 것이다. 사위인 나로서도 그분들은 각별한 분들이었다. 결혼하기 10년 전부터 친부모처럼 아버지, 어머니라고 불렀으니, 결혼했다고 장모님, 장인어른이라고 부르기가 쉽지 않았다. 처남, 처형들도 마찬가지. 몇 년 동안 처형들을 누님이라고 불렀던 ‘친애하는 관계’였다. 그러니, 처가모임에 내가 빠지면 ‘앙꼬 빠진 찐빵’이라고 해도 될까? 흐흐. 격포항 회센터에서의 회식과 일욜 점심 고창 풍천장어의 전설적 맛집 ‘청림 정금자할매집’의 장어 소금구이. 여행은 여정(길)과 벗(가족 포함) 그리고 맛(맛집), 이 3박자가 갖춰져야 제맛이지 않겠는가. 하여, 고교 동창끼리 지은 이름이 <벗길맛>이었다. "벗따라, 길따라, 맛따라"의 줄임말이다. 혹자는 벗길맛을 불순하게 ‘벗길만(하다)’으로 오해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말이다.
올해는 유난히 날씨 때문인지 벚꽃 등 봄꽃들이 개나리-진달래-철쭉 등 순으로 약간의 시차를 두고 피어나는 게 아니고,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피어난 듯해 아쉬었다. 봄꽃들이 지자마자 사방의 산을 둘러봐도 며칠새 온통 연초록세상이 되었다. 단풍도 그렇지만, 초록색 나뭇잎들도 햇빛에 비치면 그 야리야리한 색깔이 우리의 눈을 황홀하게 한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35년생 집안형님이 성균관 담장을 타고 오르는 초록빛 넝쿨잎을 보고 혀를 차며 감탄했던 것이. 나에게 “우천은 어느 계절이 가장 좋으나?”라고 몇 년 전 물으며 “나는 저 넝쿨잎의 초록을 보면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라는 단편이 생각나네. 내년에도 저 연두빛 잎을 볼 수 있을까?” 희미하게 웃으시던 그 어른은, 솔직히 말해 내가 존경하는 몇 분 안되는 어르신이었다. 지지난해 부고를 받고 한동안 먹먹한 기억이 있고, 그때 슬픔에 겨워 그분의 오비튜어리를 쓴 적이 있었다. 전라고6회 동창회 | [obituary]무학无學 최창학 원장님을 그리며 - Daum 카페 아직은 내가 그런 느낌을 공유할 나이는 아니지만, 그분의 심정을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비가 오면 마구마구 솟아났을 뒷산의 고사리바탕을 뒤지고, 온 산에 향이 진동하는 산취나물을 뜯으러 다니는 나는 아직 젊은 것이리라. 엊그제는 20년도 더 되는 엄나무(개두릅)를 잘라 껍질을 베꼈다. 혈당 떨어뜨리는 특효라는데 그까짓 노동은 즐거움이었다. 몇 푸대를 가득 채운 엄나무순은 두릅순과 함께 데쳐 초고추장을 찍어 먹는 맛이라니? 먹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엄나무순 된장무침은 또 어떤가? 그러고도 무지하게 많이 남은 엄나무순은 장아찌로 담가놓았다. 맛보고 싶은 분은 아무 때고 방문하시라. 별미 중의 별미를 제공하리라. 아무튼, 나는 온 나라를 휘감고 있는 이 연초록 행진의 계절이 좋다. 초록이 green 아닌가. 초록이야말로 희망이다. 초록이 10대라면 녹음은 20대, 단풍은 60대일까? 벚꽃이 하르르 하르르 다 진 지 오래이다. 알록달록(나의 별명이다), 초록초록(내가 지금 막 만든 말이다) 살 일이다.
첫댓글 우리나라에 손 꼽는 명 오솔길을 걷고 오셨네.
여하튼 복도 많아, 처복 포함 등등등.
찬샘도원도 좋지만, 도솔암길도 그에 못지 않겠지.
부지런한 우천님, 앞으로도 바쁜가운데 여유를 잘 누리시길. 망중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