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의 대항해 시대를 연 영락제였다.
정화는 포로 잡힌 이슬람교도로 거세당한 환관이다.
1405년부터 1433년까지 7번의 대원정을 떠났다.
대원정은 각국의 조공을 얻기 위해 아프리카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서구 중심의 세계사에서 인류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공식적인 인물은 페르디난드 마젤란이다.
그러나 과연 이 통념은 옳은 것일까?
마젤란보다 120여 년 앞서 세계일주를 했고, 바스코 다 가마보다 90여 년 앞서 인도양을 발견했으며, 콜럼버스보다 80여 년 먼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사람이 있다면 믿어지는가?
600여 년 전 살았던 명나라의 환관 정화, 그는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또 다른 대항해 시대의 주인공이다.
정화(鄭和)는 1371년 윈난 성 쿤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색목인(원나라 때 몽골 정권에 귀복한 서방계 민족의 총칭)인 사이드 아잘 샴스앗딘으로, 이슬람 교도였다.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울 때 윈난 성에서 포로가 되어 훗날 영락제가 되는 연왕 주체에게 헌상되었다.
그는 명(明)의 영락제[永樂帝]의 명령으로 62척의 선단을 끌고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총 일곱 차례의 대규모 해상 원정을 통해 인도, 사우디아라비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메카, 이탈리아 등 37개국을 순항했다.
그가 원정단을 이끌게 된 데는 연왕의 왕권 찬탈 과정에서 공을 세워 총애를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이슬람 교도 출신의 색목인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콜럼버스는 근대 이후 오랜 시간 유럽인들에게 위인이자 영웅적인 모험가로서 추앙받았으며 특히 아메리카 대륙에 터잡은 신생 독립국가 미국은 자신들의 건국 서사시를 마련하고 역사적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문화·예술계의 각 분야에서 콜럼버스의 항해 관련 신화를 발굴하고 재창조하는 데 엄청난 공을 들였다.
정치적으로도 수도를 컬럼비아 구로 명명한다든지, 콜럼버스의 날(Columbus Day)이 국경일로 정해져 있는 등 아직까지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러한 경향은 아메리카 대륙의 다른 독립국에게도 전파되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입장에서는 침략자, 학살자였고, 그 인성과 능력 또한 아래에서 볼 수 있듯이 대단히 저열한 수준이었다.
때문에 현대에 와서 사회 정의 운동의 붐을 타고 원주민 중심의 아메리카사 인식이 보급된 뒤로는 그에 대한 평가가 나빠진 부분도 있다.
미국 내 오리건, 보스턴, 필라델피아 등 몇몇의 주에서는 콜롬버스의 날 명칭 대신에 원주민의 날로 기념하기로 결정했다.
시카고는 2020년 콜럼버스 조각상 2개를 철거했고, 코네티컷에서는 콜럼버스 석상의 머리 부분이 잘려 사라지기도 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동생인 바르톨로메오 콜롬보와 지도 제작일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동방견문록을 읽고 지구는 둥글고 세상은 그다지 크지 않으며, 바다 서쪽 끝에는 낭떠러지가 아닌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지구는 둥글 테니까 서쪽으로 계속 항해를 하면 언젠가는 세계를 한 바퀴 돌아서 중국과 인도에 닿을 수 있으리라 믿었으며, 지중해를 점거하고 있는 오스만 제국을 거치지 않고 교역과 거래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획을 세우고 스폰서를 구하며 에스파냐, 영국,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국가들의 지도자에게 지원 요청을 하지만 대부분 거절당했다.
이는 콜럼버스의 거리 계산이 터무니없이 어긋났고 콜럼버스의 요구 조건이 꽤나 까다롭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땅(신대륙)에서 나오는 보물 10% 및 그 섬들의 총독 자리를 평생 보장할 것' 외에도 꽤나 많이 요구했다.
동시대에 살던 마젤란의 요구가 '보물 5% 양도 및 기록에 대한 저작권 요청'에 그친 것에 견줘보면 날강도 수준이다.
그러다 마침내 이사벨 1세의 후원으로 탐험을 시작할 수 있었다.
여왕도 권력이 꽤 있었음에도 콜럼버스의 요구가 워낙 까다로워 여왕 자신이 아끼던 보석까지 팔아가면서 개인적으로 후원 해줘야 했다고 한다.
또한 이사벨 1세는 자신의 왕관을 톨레도 대주교에게 팔았으며 그 왕관은 현재 톨레도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1492년 8월 3일 스페인 카디스를 떠나 2달 10일 뒤인 10월 12일 지금의 바하마 제도에 상륙한다.
당시 콜럼버스는 그곳이 인도임을 굳게 믿었으며, 다른 사람들도 딱히 교차 검증할 방법이 없었기에 그가 인도를 갔다고 생각하게 된다.
정화와 콜롬버스를 비교하자면, 정화의 항해는 행운을 바라고 침략을 하고 살상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문화교류와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라는 요구 때문이었다.
실제로 정화가 항해를 해서 도착한 나라들 중에 20 여개 나라가 조공을 바쳤다.
그러나, 명나라는 조공만 받아 먹은 것이 아니고, 명나라의 우수한 문물을 전해 주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유럽인들은 수많은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식민지로 삼아 금은보화와 향신료 홍차등을 약탈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플렌테이션 농장을 만들어 대규모로 생산하기 위해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끌어오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것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커다란 비극이었고, 오늘날 자본주의로 발전 하여 지구의 미래를 앞당기고 있다.
유럽 보다 훨씬 앞선 항해술을 가진 明이 淸으로 왕조가 바뀌고, 영국을 시작으로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으로부터 침략을 당한 것은 아이러니 한 일이다.
지하에서 정화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기가 막히고 원통해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