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의 「포도와의 전쟁」 감상 / 손진은
포도와의 전쟁
강희근(1943~) 포도송이는 탱크다 쟁반에 담긴 채 거실 복판으로 유유히 들어온 진보라색 군가를 부르는 탱크다 거실 윗목이 적군에 이미 떨어지고 복판으로 금세 밀리어 밀리어 드는 알알이 군가를 부르는 탱크다 아 식구들은 포도의 우군友軍이다 눈짓으로 군호를 보내면 기꺼이 소멸로 답해 주는 이슬람교도들의 아름다운 자폭, 자폭의 테러 시시각각 군가 소리 가까워지고 혀 끝에 와 닿는 자폭의 감미로운 돌진 이대로 밀리면 단감, 단감에 밀리면 과일 과일들 종대로 밀고 오리라 당糖이여 탱크여 밀고 오지 말아라 내 미소를 주리라 미소로 만든 순금의 반지, 순금의 목걸이 채워주리라 당糖이여 포도여 그대들 우군에게도 내 미소를 주리라 촌지寸志를 주리라
—시집 『바다 한 시간쯤』 2006.6 .............................................................................................................................................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강희근 시인은 자신의 시세계를 “서정을 바탕으로 한 여타 기법들이 넘나드는 개방된 시편”이라는 뜻을 가진 ‘서정 융합’이라는 용어로 정리하고 “자연과 내면, 서정과 언어가 하나의 울타리 안에서 동거하는 그런 포괄”이라는 말(시집 『바다 한 시간쯤』 시인의 말)을 덧붙인다. 이런 미학적 특징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그의 시의 경향이기도 하다. 젊은 시인이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 한 편 「포도와의 전쟁」을 살펴본다. 이 작품은 이십 대의 시인이 썼다고 해도 될 작품이다. 포도송이가 “쟁반에 담긴 채 거실 복판으로 유유히 들어온” “진보라색 군가를 부르는 탱크”라니? 이 도발적이고 신선하고 상쾌한 비유, 동심과 이미지의 역동성, 예측할 수 없는 반전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이다. 정물로 얌전히 들어온 포도가 “기꺼이 소멸로 답해 주는/이슬람교도들의 아름다운 자폭, 자폭의 테러”가 되는 지점은 유쾌하기까지 하다. 껍데기가 수북이 쌓여갈수록 먹고 싶어져 “혀끝에 와 닿는 자폭의 감미로운 돌진”을 화자는 감당할 수 없다. 그게 뚫리면 “과일 과일들(이) 종대로 밀고” 올 것이기 때문이다. 화자의 상황은 시의 끝부분 “당糖이여 포도여”에 드러난다. 당뇨가 있는 화자는 식구들이 좋아하는 포도를 마음껏 먹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들어오니 시인의 의지마저 자꾸 꺾이어 가는 난감이라니! 여기서 “밀고 오지 말아라 내 미소를 주리라”로 화답하는 이 상황에 대한 시인의 보상도 참으로 신선하다. “미소로 만든 순금의 반지” “촌지寸志”까지 막 등장한다. 이는 “비야 오지 마라, 콩 볶아줄게” 같은 구비전승에서 많이 사용된 기법이 아닌가? 시인은 연치年齒와 관계없이 이런 싱싱하고도 탄력적인 상상력과 사유를 보일 줄 아는 것이다. 생각건대 강희근은 드물게 온몸과 정신이 시로 물든 영원한 젊은이가 아닌가 한다.
—계간 《시와편견》 2024 봄 --------------------- 손진은 /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고』 외 다수. 시론서 『서정주 시의 시간과 미학』 외 다수. 대구교육대학교 문예창작과 대학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