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aver.me/GQN9IlAI
오늘의 시_내가 살을 빼야 하는 이유[시집 새의 얼굴]_윤제림 시인
책소개
타자의 얼굴과 시선에 응답하는 '얼굴의 윤리학', 그 안에 스민 지극한 연민과 휴머니즘
1987년 『문예중앙』을 통해 등단한 윤제림 시인이 『그는 걸어서 온다』 이후 5년 만에 찾아왔다. 그의 여섯번째 시집이다. 이홍섭 시인은 전작의 해설에서 “윤제림의 시는 누구보다도 세간(世間)의 윤리를 중요시하면서, 동시에 존재의
무상성을 드러낸다”며 “그의 시가 연기론의 무상성에 기반하면서도 쉬이 빠지기 쉬운 허무로 기울지 않는 것은 세간적 삶의 중요성과 가치를 누구보다도 믿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번 시집은, 시인이 그동안 보여준 ‘낡거나 모자란 것'에 대한 관심, 연기론(緣起論)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삶에 대한 연민을 고스란히 담으면서도 타자의 얼굴과 시선에 대한 시인으로서의 응답, 익숙한 풍경의 바깥을 향한 관조와 통찰을 더욱더 농밀하
게 보여준다. 특유의 이야기성이 강한 시들 역시 만날 수 있다.
『새의 얼굴』은 총 67편의 시가 4부로 나뉘어 담겼다. 특히 이번 시집에는 여행에 관한 시편들이 적지 않은데, 1부에 포진한 여행지는 2부에서 4부로 흘러가면서 자연 일반과 인생의 희로애락으로, 김
소월, 박목월, 오규원부터 배병우 함민복까지 실존인물에 대한 회상과 인연에 대한 소회로, 마지막 4부에서는 별주부, 토끼 부인, 이몽룡씨 부인 등 시인 특유의 상황극적 시로 이어지며 의미와 논리로 가득찬 세계를 일순간에 뛰어넘는다.
저 : 윤준호
카피라이터, 서울예술대학 교수. 충북 제천에서 나고 인천에서 자랐다. 동국대 국문과에서 말과 글을 배웠으며 같은 학교 언론대학원에서 공부를 더 했다. 1983년부터 1993년까지 오리콤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했고, 그뒤로는 거손, 동방기획,
코래드, LGAD, O&M 등 여러 광고회사에서 객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겸하며 독립 카피라이터로 활동했다. 뉴욕광고제에서 은상, 한국방송광고대상과 중앙광고대상에서 카피 부문 개인상을 받는 등 국내외의 많은 광고상을 수상하였
다. 서울시립대, 동국대, 서울예술대학등 여러 대학과 한국방송광고공사 광고교육원, 국립국어원 국어학교 등에 출강하다가 2003년부터 서울예술대학 광고 창작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젊음은 아이디어 택시다』『카피는 거시기다』
등의 저서가 있다. '윤제림'이란 이름으로 시도 쓴다. 1987년 『문예중앙』을 통해 등단했고 동국문학상, 불교문예작품상, 지훈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미미의 집』 『황천반점』『삼천리호 자전거』 『사랑을 놓치다』 『그는
걸어서 온다』 『새의 얼굴』 등이 있다
(예스24제공)
내가 살을 빼야하는 이유
윤제림
나는 곧 인도에 도착할 것이다, 길을
모르니
릭샤를 부를 것이다
체중미달로 병역이 면제된
본희 형보다 가냘픈 사내에게,
꽃을 밟아도 꽃잎 하나 다치지 않았을
피천득 선생만큼 가벼운 사내에게
몸을 맡길 것이다
사내는 나를 옮겨 실으며
눈으로 물을 것이다
뭐가 들어서 이렇게
불룩하지요?
그리고는 옛날 서울역 지게꾼처럼
기를 쓰고 일어나며 페달을 밟을 것이다
릭샤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할 때
맨발의 사내는
혼잣말처럼 또 이렇게 물을 것이다
- 무슨 물건이 이렇게,
https://naver.me/IgDLC5bt
설산 가는 길
윤제림
고작 삼십 리 길도 한나절을 가는 버스가
시커먼 연기를 뿜으며 올라오고
이웃나라에서 거저 얻어 온 트럭이
요란하게 산허리를 돌아가지만
길가의 나무도 돌도
군말이 없다
설산만큼 나이를 먹었을 늙은 구름들도
어린 것들처럼
새뜻하다
설산 가는 길
이 원시의 새마을에선
내가 제일
고물이다
설산 가는 길 2 / 윤제림
식당에도 여관에도 장마당에도
인간의 상품보다
하늘나라 물건이 흔하더군
세숫물도 목욕물도
신과 짐승과 사람이 함께 쓰더군
물건 참 오래 쓰고 곱게 쓰더군
만년 묵은 눈이
아직도
새것이더군
예토라서 꽃이 핀다 / 윤제림
대여섯 살 먹은 여자아이와 서너 살 사내아이
어린 남매가 나란히 앉아 똥을 눈다
먼저 일을 마친 동생이 엉거주춤 엉덩이를 쳐든다
제 일도 못 다 본 누나가
제 일을 미뤄놓고 동생의 밑을 닦아준다
손으로,
꽃잎 같은 손으로
안개가 걷히면서 망고나무 숲이 보인다
인도의 아침이다
세 가지 경기의 미래에 대한 상상 / 윤제림
올림픽 경기 중에 마라톤만큼 단조로운 경기도 없다. 신
문 한 장을 다 읽도록 드라마 한 편이 끝나도록 같은 장면이
다. 땀 얼룩의 일그러진 얼굴과 뜨거운 대지를 두드리는 나
이키 운동화 아니면 검은 맨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이 경기의 미래를 의심하지 않는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시쓰기만큼 쓸쓸한 종목도 드물
다. 시의 객석은 선수 가족과 동창생들 몇이서 깃발을 흔드
는 고교 축구대회장 스탠드를 닮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경
기의 미래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섹스를 보라. 마라톤만큼 시쓰기만큼 단순하고 오래된 경
기지만, 아무도 이 경기의 미래를 의심하지 않는다.
외로우나 뜨겁기 때문이다.
행선 / 윤제림
신문지 두 장 펼친 것만한 좌판에
약초나 산나물을 죽 늘어놓고 나면,
노인은 종일 산이나 본다
하늘이나 본다
손바닥으로 물건 한 번 쓸어보지도 않고
딱한 눈으로 행인을 붙잡지도 않는다
러닝셔츠 차림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부채질이나 할 뿐.
그렇다고 한 마디도 없는 것은 아니다
좌판 귀퉁이에 이렇게 써두었다
"물건을 볼 줄 알거든,
사 가시오."
나도 물건을 그렇게 팔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다,
노인을 닮고 싶은데
쉽지 않다.
새의 얼굴 / 윤제림
어떻게 생긴
새가
저렇게 슬피
울까
딱하고 안타깝고
궁금해서
밤새 잠을 못 이룬 어떤 편집자가
자기가 만드는 시집에는
꼭
시인의
얼굴을
넣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뒤로부터, 시집에는 으레
새의
얼굴이
실렸다
윤제림 시모음
* 사랑을 놓치다 - 윤제림
...내 한때 곳집 앞 도라지꽃으로
피었다 진 적이 있었는데
그대는 번번이 먼 길을 빙 돌아다녀서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내 사랑!
쇠북 소리 들리는 보은군 내속리면
어느 마을이었습니다
또 한 생애엔
낙타를 타고 장사를 나갔는데, 세상에!
그대가 옆방에 든 줄도
모르고 잤습니다
명사산 달빛 곱던
돈황여관에서의 일이었습니다 *
* 사랑 그 눈사태
침 한번 삼키는 소리가
그리 클 줄이야 !
설산(雪山) 무너진다, 도망쳐야겠다. *
*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손이 어는지 터지는지 세상 모르고 함께 놀다가 이를테면, 고누놀이나 딱지치기를 하며 놀다가 "저녁 먹어라" 부르는 소리에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 달아나던 친구의 뒷모습이 보였습니다. 상복을 입고 혼자 서 있는 사내아이한테서.
누런 변기 위 '상복 대여' 따위 스티커 너저분한 화장실 타일 벽에 "똥 누고 올게" 하고 제 집 뒷간으로 내빼더니
영 소식이 없던 날의 고누판이 어른거렸습니다.
"짜식, 정말 치사한 놈이네!" 영안실 뒷마당 높다란 옹벽을 때리며 날아와 떨어지는 낙엽들이
친구가 던져두고 간 딱지장처럼 내 발등을 덮고 있었습니다. "이 딱지, 너 다 가져!" 하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
* 강가에서
처음엔 이렇게 썼다.
다 잊으니까 꽃도 핀다
다 잊으니까, 강물도 저렇게
천천히 흐른다.
틀렸다, 이제 다시 쓴다.
아무것도 못 잊으니까 꽃도 핀다
아무것도 못 잊으니까
강물도 저렇게
시퍼렇게 흐른다 *
* 서정윤엮음[견딜 수 없는 사랑은 견디지 마라]-이가서
* 어느 날인가는
어느 날인가는 슬그머니
산길 사십 리를 걸어내려가서
부라보콘 하나를 사먹고
산길 사십 리를 걸어서 돌아왔지요
라디오에서 들은 어떤 스님이야긴데
그게 끝입니다
싱겁지요? *
* 가족
새로 담근 김치를 들고 아버지가 오셨다
눈에 익은 양복을 걸치셨다
내 옷이다. 한 번 입은 건데 아범은 잘 안 입는다며
아내가 드린 모양이다
아들아이가 학원에 간다며 인사를 한다
눈에 익은 셔츠를 걸쳤다
내 옷이다. 한 번 입고 어제 벗어놓은 건데
빨래줄에서 걷어 입은 모양이다 *
* [시가 내게로 왔다 3]-마음산책
* 가정식 백반
아침됩니다 한밭 식당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는
낯 검은 사내들
모자를 벗으니
머리에서 김이 난다
구두를 벗으니
발에서 김이 난다
아버지 한 사람이
부엌 쪽에 대고 소리친다
밥 좀 많이 퍼요 *
* 윤제림시집[그는 걸어서 온다]-문학동네
* 지하철에 눈이 내린다
강을 건너느라
지하철이 지상으로 올라섰을 때
말없이 앉아 있던 아줌마 하나가
동행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한다
눈 온다
옆자리의 노인이 반쯤 감은 눈으로 앉아 있던 손자를 흔들며
손가락 마디 하나가 없는 손으로
차창 밖을 가리킨다
눈 온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 있던 젊은 남녀가
얼굴을 마주 본다
눈 온다
만화책을 읽고 앉았던 빨간 머리 계집애가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든다
눈 온다
한강에 눈이 내린다
지하철에 눈이 내린다
지하철이 가끔씩 지상으로 올라서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
* 윤제림시집[그는 걸어서 온다]-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