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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가 어떻게 국방의무를 필했는지 군대얘기 한토막입니다
군대에 가보면 자기집에 금송아지 안메어 놓고 온사람은 한사람도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두 자기자랑 하고싶은 욕망 때문이랄까...
난 한번도 내 자랑을 의식적으로 한적도 없을뿐 아니라 자기자랑 하는게 진짜 팔불출이라는걸 알기 때문에라도 내 자랑을 하지 않습니다
말이 길어지기 때문에 줄이고 요약해서 얘길할까 합니다 사실은 내가 지금하는 이야기는 대한민국 육군에서 전사를 편찬하는 분들이 참고할만한 자료들이 있을것같아 파월장병들 홈페이지 같은곳에 올리고 싶지만 군의모든 기관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가늠조차 할수가 없습니다 군수뇌부에도 연관기관들에도(예를들면 원호처 같은곳) 사기꾼들이 진을 치고 있는걸 나는 압니다 아마도 틀림없이 5 18 유공자의 자녀들도 많이 근무할것 입니다 빨리 5 18 사건의 실체를 밝히고 간첩및 역적도당을 발본색원 하기를 염원합니다 어쩌면 이 요약한 짧은글이 내가 나의 모국(나를 바르게 길러주신 어머님을 흠모하여 조국이란 단어대신 모국이란 말을 씁니다)에 대한 마지막 애국활동이 아닌가 합니다
나는 해방도 되기전 1943년 2월 16일 대구시 대신동 에서 태어 났습니다
번지와 본적까지 밝힐 필요야 없겠지요 밝히라면 못 밝힐것도 없지만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한 경북중고 6년후배가 내 호적을 열람했다는 것을 압니다 이름만 알아도 호적열람이 가능한지 모르겠으나 그까짓거 뭐 대숩니까 훌쩍 뛰어넘어 1984년 8월말에 입대하라는 통지서를 받고 대구종합운동장에 집합하여 논산훈련소행 군용열차를 타고 입대를 했답니다
장편소설 한권은 족히 될만한 얘깃거리가 있으나 생략합니다 여러분이 어떤일들이 있었느냐고 물으신다면 한두가지는 밝힐수도 있습니다만...
논산 훈련소 수용연대엘 들어갔더니 우리사랑방 회원 한사람이 수용연대 기간병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모라는 동기생 한명은 나랑 같이 입대를 한 친구였지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안모라는 친구는 기간병으로 근무하는 친구의 권유인지 아니면 안모의 부탁이었는지는 확실하게 모르지만 나에게 접근했던 것으로 보아서 전자의 경우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군번을 받고 교육연대로 넘어 갔습니다 그때는 군번도 받기 전이었는데 벌써 전반기 교육만 끝내고 어느 특과학교로 보낼것을 정할수 있었던 모양이지요 하여튼 나는 교육연대로 넘어갔는데 안모는 군의학교(대구 효목동 소재 제1육군병원과 함께 있었답니다 )로 갔는지 안갔는지는 확인한바는 없으나 아마 그쪽으로 갔을것입니다 제대후 이 안모가 목재상을 했는지 나를 찿아 온적이 있었답니다 나는 장사를 한 사람도 아니고... 그러나 그때 너 위생병으로 갔었느냐고 물어 보질 않았었지요 - 수용연대에서 며칠지나서 군번을 받고 교육연대로 넘어 갔습니다
나는 26연대 제 6중대로 갔는데 우리연대 정문 맞은편에 제 30교육연대가 있었다는걸 기억합니다 우리 중대에는 인원편성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수가 없었으나 우리내무반의 구성원은 거의 정확하게 절반가량이 서울애들 이었고 나머지 절반가량은 전부 대구애들로 구성이 되었답니다
여러분 논산훈련소 전반기 교육기간이 그 당시에는 6주간 이었답니다
6주간 동안에 군인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이 훈련들을 교육하는데 제식훈련 발맞추어 행진한다든가 앞으로 갓, 뒤로 돌아섯, 우향우 좌향좌 겨수경례하는법 총검술, 사격, 무기분해결합,독도법(지도 보는법)등등 입니다
훈련중간 사이사이에 잠시 소변을 보라고 십여분간 휴식시간이 있는데 소변을 보아야 할것아닙니까 멀리갈 시간도 없고 여러 훈련병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바깥쪽을 향하여 소변을 보고 있는데 글쎄 여인네들과 심지어 젊은 아가씨 처럼 보이는 쳐녀들이 떡, 고구마 삶은 계란 등등을 담은 소쿠리를 들고 앞으로 오는게 아닙니까 수치심에 오줌이 나오질 않더군요 모두 누가 먼저랄 것도없이 여기 지금 오줌누는게 안보이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훈련병x도 x이가?" 이건 거짓말이 아닙니다 정말 그랬으니까요 오직했으면 논산쪽을 향해서는 오줌도 싸지 않겠다는 말이 생겼을까요
참 사람이란 요물인지 그 며칠안되는 기간에도 면역성이 생겼는지 젊은 처녀들이 오면 오줌줄기로 흔들면서 지도를 그리기도 하고... ㅎㅎㅎ
참 월남에서 아가씨가 옆에 앉아서 빤히 쳐다보면서 오줌을 누는것을 본적이 있었답니다 나는 처음에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일어선 자리에 물이 흥건히 고여 있어서... 비가 온것도 아니고... 내가 어쩔줄을 몰라 당황했던 적도....
6주간의 전반기 훈련을 끝내고 다시 수용연대로 넘어 왔습니다
자 여러분, 군인 이라고 다 싸움터에서 전쟁에 직접 맞서서 싸우는게 아니지요 군인들이 먹어야 할 양식을 보급도 해야하고(병참), 식량뿐아니라 탄약이라든가 군복, 군화등 모든 군수물자를 운반해야 하니까(수송), 막사도 짓고 교량도 건설해야하고 지뢰밭도 제거해야 하고(공병) 전투시는 말할것도 없고 부대간의 연락을 해야 하니까(통신) 다친사람 돌보는 (군의) 종교인들을 위한 (군종)
일반 인사행정을 보는 (부관) 일반사회의 경찰임무를 보는(헌병) 얼마나 더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상식적인 수준에서 적어 보았습니다 군종학교라고는 아마 없지 싶습니다 스님이나 목사 신부등은 일반사회에서 자격을 갖춘자를 선발하지 않겠습니까?
이 모든 병과들은 전투하는 군인들을 도우는 역할을 하는것이지요 모든병과에는 특화된 교육시설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학교들이 있겠지요? 전반기 교육이 끝난 군인들 중에서 특과학교엘 보내서 교육을 시키는것도 신병훈련의 일부입니다 그럼 진짜 전장에서 싸우는 군인들은 육군에서는 보병,전차병, 포병 이 3가지 병과입니다 그래서 전투병과라 하지요 이 보전포 전투병과들의 학교가 있는곳이 전투병과교육 사령부가 있는 상무대이고 옛날에는 광주에 상무대가 있었으나 지금은 어디로 옮긴모양 이더이다
어쨋거나 전반기 교육이 끝나고 수용연대로 와서 집합을 했는데 가장먼저 70명을 호명을 하더니 열외 라고 한쪽으로 따로 세워놓더군요 그러고는 다시 몇명씩 호명을 하고 이상 몇명은 명 국방부 또 몇명은 호명을 하고 명 육군본부 이런식으로 계속... 처음에 호명되고 열외로 세워둘때 어떤 애들은 우리 육본으로 갈것이라느니 어디로 갈것이라느니 했으나 국방부도 육본도 다 불려지고 명 부관학교 명 군의학교 등등...사람은 다 호명이 되었는데 그때도 우리들은 어디로 명이날지 아무도 몰랐답니다 그런데 어떤 하사관이 오더니 아마 중사가 아니었나 싶은데 "야 얘들 특식줘라" 하니까 군인 몇명이 바케스 몇개에다가 빵을 담아와서 한개를 주었는지 두개를 주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70명 모두가 빵을 지급 받았습니다 지금 얘길하지만 입대하여 군번받고 하루가 지난 후부터 월남에 파병되어 배를 타고 떠나는 순간까지 늘상 배가고팠던게 사실이었습니다 그날 빵을 어떻게 먹었는지 배고픈데 맛없는 빵이 있을까요? 어쨋던 흡족하긴 했습니다 아직 출발하지 않은 훈련병들은 빵을 먹는 우리들을 보며 무척 부러워 했을것입니다 우선 먹는 빵도 그렇겠지만 빵을 나누어 주면서 너희들은 매일 특식을 먹을수 있다는 얘길 해 줬기 때문에라도... 거의 다 떠나고 거의 끝무렵이 되어서야 우리를 데리러 온 추럭이 도착했었지요
그때 70명도 거의 절반 수준으로 서울과 대구출신 이었는데 대구에서 경북병무청의 징집영장을 받고(당시는 대구시도 경상북도에 속했음)온 친구들도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닌 애들이 많았기 때문에 얼핏보기에는 서울애들이 많았던 것처럼 보였답니다 나와같이 대구종합운동장에서부터 군번도 앞뒤로 같이받고(그친구가 나보다 군번이 1번앞이었고 내가 뒷번이었음) 이 친구는 그때 중앙대학교 수학과를 벌써 졸업한 친구였답니다 우리 사랑방의 고비 정인환 형은 광신호의 그 영어잘하는 아저씨를 아시지요? 그분의 막내동생이랍니다 그 사이에 또 한명의 남자 형제가 있는데 수방사에서 근무를 마치고 제대후 청와대 경호실에서 근무를 했답니다 나와 같이 입대했던 이친구는 2년 이나 학년은 나보다 선배였고 나랑 전방에 배치될때 헤어지고는 만나지를 못했는데 미국의 어느대학교에서 평생 수학교수로서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가운데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X수 형은 나랑 당구장에서 자주 만나서 놀았던 추억이 있었답니다 내가 고등학교 학생시절에 당구 200을 치면 너무 세다고 250을 안치면 나랑은 안치겠다고 했었지요 그때 벌써 300을 친 친구도 있었는데 한국의 체육계에서 누구라 하면 다 알아주는 유명인사가 되었답니다
그때 70명은 내가 알기론 전원이 대학재학중 이었거나 졸업생들 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거의 틀림이 없었을 것입니다 - 건너뛰고 -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연무대역이라는 곳에서 기차를 탔는데 날이 어둑어둑해 지고 기차는 달리고... 우리는 당연히 서울로 가리라고 짐작들을 하고 있는데 어떤 친구가 창밖을 내다 보더니 어? 차가 남쪽으로 가는것 같다고 해서 모두들 창밖을 내다보더니 이리역을 통과 했다는둥... 모두들 맥이 빠졌습니다
그래서 새벽녁에 송정리 역에 내렸는데 차가 대기하고 있지않아 나중에 도착한 운전병들이 약간의 체벌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기갑학교 연병장에 도착하니까 우리 선배기들의 피교육생들이 수업받으러 각 교장으로 책을 옆에끼고 행진을 하는데 직각구보에 아이쿠야 고생꽤나 하게 생겼구나 싶더랍니다 해병대에서 위탁교육을 온 2명의 수병들을 합해서 72명이 우리기수 였는데 EMBC (전차병 기본과정) 27X기 였답니다
2개 내무반으로 편성되고 구대장은 중사 XXX 였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네요 그곳에서 교육훈련을 14주간을 받았습니다 모든 특과학교 교육기간 중에서 기갑학교와 군의학교의 교육 과정이 가장길다고 들었던적이 있습니다
육군기갑학교에서는 차량학(조종술을 습득) 우리때는 한국군의 거의 전 부대가 M 47전차로 부대편성이 되어있었으나 그때 M 48 전차가 막 도입되든 시기라서 교육연대인 유일한 후방 광주에 위치한 제 11전차 대대에는 교육용 M48이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M47과 M48을 둘다 조종술을 배웠습니다
구성원도 5명과 4명으로 다르지만 조종술도 조종간과 반원형의 운전대가 있고... 그러니까 차량학에서는 조종말고도 궤도분리및 연결, 차량엔진과 트렌스미션, 보조발전기, 비상탈출구 사용법 적외선등으로 야간조종훈련등등 그리고 통신학은 송수화장구 사용법 (탱크 승무원 끼리도 상호 연락은 송수화 장구를 사용합니다 시끄러워서 그냥은 들을수도 없고 전쟁터에서야...)무전기 사용법 탱크와 탱크간의 연락, 뿐만 아니라 비행기나 포병과의 연락도 무전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사용법을 배우는건 필수이지요 화기학은 우선 전차에 장치되어있는 90mm 직사포, 상부에 거치되어있는 50mm 중기관총 30mm 전방기관총 전차장과 포수및 조종수의 개인화기인 45구경 권총 전방사수와 탄약수의 개인화기인 SMG(기관단총)등을 모두 배워야 합니다 부상병이나 어떤경우에도 임무교대를 할수있어야 하기 때문에 모두 사격도 해보고 배워야 합니다
우리 교육때는 전원이 전부를 다 경험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우리나라 경제가 그당시엔 그럴 여력이 없었던 것이지요 이 모든 화기를 다루고 M 16이라는 소총을 또 하나 더 사용을 했으니 대한민국에서 나만큼 총기를 많이 다룬 군인은 아마 몇 퍼어센트나 될까요?
그리고 전술학, 이건 말 그대로 전투시 대형을 어떤형태로 변경 한다든가 진지를 점령할때의 중요한 점이라든가... 대략 교육과정과 내용이 이렇습니다
그 당시 우리기의 학생장을 제가 맡아서 했답니다 또 한명이 나도 학생장을 했는데 할지도 모르겠으나(실지로 교육중에도 그 친구가 학생장 이라고 했다가 동료들로 부터 따돌림을 당했던 적이있었답니다 70명이 한 내무반에 한꺼번에 있을수가 없으니 두개의 막사에서 나누다 보니 그 막사의 으뜸이었다 이것이지요 제 자랑한다고 해도 할수없지만 제가 기갑학교 생긴이래로 최고점을 받았다고 장창하 대위님이 얘길 해 준적이 있답니다 증거때문에도 장대위님의 이름을 거명하는데 이분은 이북출신의 장교님이신데 그 당시 전교사 내에서는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정도로 유명했다는걸 들어서 압니다
뿐만 아니라 왜 우리기수들이 전부 대학생들로 뽑혀 왔는지를 설명을 해 주었는데 그 당시엔 학력미달로 군대에 안가는 사람은 없던 시절이라 (지금은 중졸도 군대가지 않는다고 합디다만) 물론 특과학교 학생들은 어느정도 학력도 보고 선발을 하겠지만 전차부대에서 가장 골치아픈게 안전사고 였다고 합니다
예를 들자면 전방에서 자체 교육훈련을 하는데 탱크의 포탑은 전동식으로 돌아 갈수가 있습니다 포수나 전차장의 손잡이로 포탑을 전동식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는데 예를들어 엔진실의 상판을 열어놓고 훈련병들이 작업을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포탑을 전동식으로 돌린다면 긴 포신이 막대기를 휘두르는 것처럼 불상사가 나겠지요 이런 사고가 한두번도 아니고 다반사이고 부대운용에 막대한 지장을 준게 현실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기수를 논산 훈련소에서 부터 학벌괜찮고 체격등 모든걸 1등급으로 뽑아서 시험케이스로 한번 해보자고 육군본부에서 명령이 하달되었다는 얘길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는 10개 전차대대가 모두 육군본부 직할부대 였었답니다 지금처럼 기계화 사단이라던가 그런게 아니었고...
솔직히 군대교육 별것 아니지요 어쨋건 졸업 성적이 1등을 제가 했습니다
지금은 모르겠으나 그 당시엔 성적순 1 ,2, 3위는 10개 전차대대중에 자기가 희망하는 부대로 보내주는 특전이 있었답니다 졸업이 가까워 오니까 학교학생단 교수부에서는 다 알지요 누가 1등이고 2등 3 등... 하루는 학생단에서 나를 보고 어디로 지원할것이냐고 물어보드군요 그래서 아직 어디에 어떤부대가 있는지도 모르고 결정을 하지 않았다고 했더니 탱크부대는 후방이라고는 지금 교육받고있는 11전차대대가 유일하다고 하면서 모두 전방이라고 그러니 전방에 가서 고생하지말고 또 11전차 대대조차도 너희들 훈련받아봐서 알지만 고생이 많으니 기갑학교에서 근무하면 좋기도 할뿐만 아니라 만약 우리학교에 남겠다면 졸업과 동시에 2주간의 휴가를 보내주겠다는 얘기를 하드군요 또 그주인지 그다음주인지 광산군 비아면 이라는 기억이 나는데 축사포사격장에서 11 전치대대의 한 기간병이 나한테 오드니 너 기갑학교에서 그쪽으로 지원하라는 얘기를 들었지? 라고 물어 왔답니다 그래서 그렇다고 했드니 너 우리부대를 지원하면 3주를 휴가 보내주겠다는 얘기를 했답니다
사실 그 당시 전방가지않고 후방에 남겠다고 뒷돈주고 줄을대고 하던 시절인지라 엄청 구미가 돋는 제안 이었으나 우리기수가 전원이 서울 아니면 대구출신들이라 (해병2명은 포항 아니면 인천으로 가는게 뻔하니까 예외이고) 분위기가 아무도 광주에는 있을려는 사람이 없었고 서울이 가까운 연천 파주 가평등을 선호 했드랍니다 드디어 졸업때가 되어 선택해야될 시간이 되었을때 내가 물어 보았습니다 도대체 최전방에 있는 부대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철원에 12전차 대대가 있는데 그중의 1개 중대가 남방한계선 북쪽에 민간인 출입통제지역에 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차피 해야할 병역의무라면 그런곳에서 해 보는것도 괜찮을 것이라고 그곳엘 가겠다고 12전차대대를 지원하여 가게되었습니다 내 생각에 철원은 강원도 철원이니까 아마 103 보충대로 가겠구나 싶었는데 101 보충대로 명이 났길래 다시 문의하여 확인을 했지만 틀림없이 철원으로 가게 될것이니 걱정 말아라고 했었지요 우리동기들 중에서 광주에 남게된 친구들은 울기도 했었으니까요.
졸업하고 보충대로 떠날때 나를 불러 그러더군요 101 보충대에 가면 틀림없이 그곳 기간병들이 너희들과 헌병학교 졸업생들과 기마전을 시합부칠거다 그러니 미리 작전을 잘 짜고 헌병놈들 실컷 패놓고 기갑학교의 명예를 더 높여라 라는 엉뚱한 지시랄까 충동질을 하더군요 진짜 기마전을 시켰고 기마전이 아니라 옆구리 지르기와 앞다리 걷어차기등... 지금 생각하면 웃어야 할지... 어쨋거나 기갑학교의 명예를 더 높이고? 철원으로 갔습니다 101보충대에 입대하기 하루전날 서울에서 1박을 했는데 모두 각자 집에가서 하룻밤자고 내일 약속한 시간에 어디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는데 단 1명도 이탈자가 없이 다 모였었고 나는 시구문 밖의 광희동에서 보성, 고려대 재학중(4학년 1학기를 마치고 입대) 이었던 강X웅 이란 친국의 집에서 자고 갔었던 기억이...그날 그 친구집에서 먹었던 총각김치맛을 지금도 잊을수가 없네요
그때 논산훈련소에서 전반기 교육 6주를 받았던 친구들 중에 몇명은 아직도 기억이 선명합니다 유X준, 내무반 향도를 맡았던 친구인데 자기네 집이 아마 종로에서 TV 학원을 경영한다던 친구, 고려대 법학과 재학중이던 최X식 가수 김상희와 한과였는데 샌님처럼 곱상하게 생겼고 앞머리가 벌써 대머리같았던 혹시 김상희가 작사를 한건 아니었겠지... 서울대 국악과에 재학중이었던 이X명 또 한친구는 서울 청담동에 집이 있었던 이X재 그친구 아마 졸부가 되었을 터인데 어떤 자식들이 사기를 치지나 않았는지... 가장 기억에 선명하게 남는 친구 한명은 서울 인현동 시장안에서 영남지물포집 아들 유X재 이 친구는 그집 상호를 보아서 알겠지만 고향이 경남 무슨군 이었는데 사격을 잘 못하여 유급될 처지 였는데 총을 쏘면서 겁이 많아 눈을 감고...
그렇게 지원했던 남방한계선 북쪽의 그 부대에선 정작 몇개월 근무도 못하고 대대본부를 거쳐 11 이동외과병원으로 양수리 후송병원으로 후송갔다가 제1육군병원으로 후송가서 의병제대를 해 버릴까 하다가 (엿장수 마음대로? 라고하겠지만 그 당시에도 국회의원 정도의 배경만 있으면 가능했지요 나는 어느당 어느의원인지 이름을 댈수도 있지요 나는 나의 형이 부관학교를 나오고 광주기갑학교에서 문서연락병으로 근무를 했었는데 그것도 뭐 군대생활이라고 대구 제1육군병원으로 입원을 시켜 시력장애로 군복무가 불가능 하다는 이유로 의병제대를 시키는걸 보았거든요 그당시 자유당 어느지역 국회의원 누구라고 이름까지 밝힐수가 있지요 뭐 대수롭지 않게 말 한마디면 여렵잖게... 당시 민주당 쪽에도 국회의원들이 있었고 또 다른 자유당 의원 반공청년단장을 지냈던 누구라면 다 알만한 국회의원들... 마음고쳐먹고 원대복귀를 했답니다 다만 내가 속해있던 2중대가 아니고 문혜리에 있던 3 중대로 갔는데 대대 본부중대 사병계를 보았던 강원도 삼척 근덕면 출신의 손X대 병장의 조언을 듣고 그쪽으로 갔었지요 그곳에서 계속근무를 하다가 파월을 하게 됩니다
내가 운천에 있던 미군부대에서 장갑차교육을 받고 있을때 내 형님이 면회를 와서 걱정하지마라 알아서 해 주겠다고 했는데 내가 무슨소리냐고 내가 지원을 해서 가겠다고 했었던 일이 있었답니다 명석하고 정의감 있고 사리판단이 분명한 내 형님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속물스런면이 있었던것 같습니다 특히 자식들 일이라면 사리판단이 안되는 모양입니다
이틀전 저녁에 서울에 살고있는 조카와 통화를 했는데 (이 조카의 아버지인 내 형님의 전화 한 통화로 의병제대를 했었고요) 내가 너의 신사동 삼촌께서 무슨 일을 그렇게 처리를 하느냐고 했더니 모두 자식을 사랑해서 그렇다나.... 재산 몇푼 물려주는것이 자식사랑이라고 그릇된 판단을 하기때문에 자식이기는 부모없다고 하는 것이지요 보통사람들은 다 그럴것입니다 나는 1974년에 태어난 아들 하나가 있는데 거의 절연을 하다시피 살고 있지요 인물도 그럴듯하게 생겼고 말도 잘하고 어떤 한국사람은 자기 딸이 현재 프랑크푸르트에서 근무하는 의사인데 일부러 우리집에 데리고 와서 내 아들이 아직 결혼을 하지않은 것을 알고 이런저런 핑계로 나에게 자기딸을 소개를 한적도 있었답니다 이 사람은 강원도가 고향인 인품도 훌륭한 사람이고 내가 지배인을 할때(1978년)에 붓글씨로 극동이란 간판에 쓸 한문을 부탁하여 아크릴 간판에 새겼던 그런사람이었지요 어림 반푼어치도 없지 어디 남의 집 귀한딸을 데려다가 팔자사납게 만들일이 있답디까? 내가 왜 내 자식이지만 되먹지 않았다고 하는것은 베토벤 김나지움의 라틴어 선생 한분이 있었는데 얘기가 또 쓸데없이... 그 얘기만 해도 단편 하나는 쓰고도 남겠습니다 결론은 나는 내 자식에게 단 한푼도 물려 주지 않습니다 물려 줄것도 없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내 집사람도 하나도 남겨주지 않기로 작심을 했습니다 제 연금으로 어떻게 살든지 말든지....
또 엊저녁에 영주에 동양대학이라는게 있는모양인데 언제부터 생겼느냐고 물었더니 그집딸이 내 동서의 며느리라나... 아이구 골치야... 그럼 네 처형이 그집딸 시어머니 겠구나 옛날에 촌수 따지고 뭣하면 사돈의 팔촌의 종이종 사촌이라 종고종 육촌이라고 빈정거리던 생각이 납니다 내 조카의 동서는 38회이고 내 친구는 42회이니 선후배간에 사돈이 되었네요 사실은 내 조카가 결혼을 할때 대구의 귀빈예식장에서한 모양이더이다 결혼사진에 보니까 귀빈예식장이라고 쓰여있는게 보이더군요 그 결혼식날 있었던 에피소드를 내 형수님이 훗날 한국을 들렸을때 나에게 들려주신 적이 있었답니다 내 형과 내 조카며느리의 오빠가 그 결혼식장에서 만났는데 야 니가 여기 우짠일고? 나는 오늘 내 동생 결혼식이 있어서 왔다 그런데 니는? 나는 내 생질이 오늘 몇시에 결혼식을 해서... 머라꼬 몇시에? 신랑 이름이 머꼬? 그럼 우리가 사돈아이가...
이 두친구는 모두 35회 친구지간 이지요 36회에는 내큰집조카 38회의 내친구 사돈은 신부의 형부이었지요
대한민국10개 전차대대에서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 6명 사병 60명이 선발 되었습니다 이들이 한국의 APC(Armed Personal Carrier) 인원수송용 장갑차란 뜻이지요 이 66명이 경기도 운천에 있던 Camp Kaiser에 가서 미군부대내에 천막을 치고 장갑차 교육을 받았습니다 당시 대한민국군은 장갑차를 한대도 보유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교육을 마치고 장교3명씩 그리고 사병 30명씩 두개의 무리로 나누었는데 그때의 장교 중위 6명은 모두 사관학교 동기생들 이었는데 그땐 6명의 이름을 모두 기억했으나 세월이 너무흘러서 지금은 4명밖에 기억을 못하고있습니다 그 4명은 맹호부대로 나와함께 근무했던 이호욱, 이영직, 채수옥 중위들 3명이었고 나머지 백마부대로 갔던 기억나는 1명의 중위는 이름이 고도웅 중위였다는걸 기억합니다 언잰가 어디에서 들었던지는 기억에 없으나 채명신 장군의 부관으로 근무를 했었다는 얘길 들었던것 같기도 하고 또 한번분명한 기억은 내가 독일 Oberhausen Sterkrade란 광산에서 근무할때 어떤 한국사람들이 얘길하는데 한국의 어떤탱크부대에서 근무를 했다나 뭐라나... 그래서 옛날에 나도 그부대에서 근무했던 고도웅 중위를 안다고 했더니 아 그분 중령으로 우리 대대장을 지냈다고 하더군요 67년에 대위로 진급했을테니 무슨 전공을 세웠던지 아무튼 진급이 엄청 빨랐던게 틀림이 없네요 나무날곳은 잎새부터 안다고 했던가 똑똑한 군인이었던걸 그때부터 나는 알아 보았으니까요
당시 두 무리로 헤어졌는데 알고보니 우리들은 맹호부대로 가고 다른무리는 백마부대로 갔던 모양입니다 내가 알기로 우리동기들이(61학번 ROTC 3기) 육군사관학교엘 간 친구들이 아마 육사 21기라고 알고있는데 65년에 임관을 했을테니까 67년에 중위로 진급을 했을터인데 이들은 67년에 전원 대위로 진급을 했으니 육사생들 중위에서 대위로 진급기간이 3년?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어쩌면 육사 17-18기가 아니었나 싶네요 어쨋거나 우리 장교3명씩 사병 30명이 주축이되어 일반병들을 지원받아 맹호부대와 백마부대의 장갑차중대를 창설하게 된것이랍니다
미군부대의 장갑차교육을 이수한후 현리의 그게 몇사단 유격훈련장인지 그곳에서 유격훈련을 마치고 홍천으로 집결하여 부대편성을 완료하고 파월이 되었는데 현리에서 보충병력을 지원받았던지 (장교 대위1명 중위 3명 및 사병 약 백수십명이 아니었나 싶은데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홍천에서 병력지원이 되었던지는 확실한 기억이 없습니다 그러니 미군부대에서 APC교육을 받은 장교들은 맹호 백마 공히 3명씩 이었다는 것을 밝혀둡니다
한국군이 가장먼저 장갑차를 수령한것은 퀴논항구에 한국해군의 L S T 810함과 815함이 싣고 왔었답니다 아마도 내가 추측컨데 그때 주월사에 백구부대가 창설되고 그 두척의 수송함도 백구부대 소속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항해일지를 보면 분명한 날자도 알수있을것이고 ...
나는 그날 그 함정에서 제일 첫번째로 장갑차를 몰고 육지로 나왔던 사람입니다 그날 사진이 미군부대에서 교육받았던 서류를 손에들고 810함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한장 있더군요 그날 점심식사는 그 810함에서 점심밥을 먹었는데 고춧가루도 하나도 넣지않은 것절이 배추로 담근 김치를 먹어 봤는데 오랫동안 한국김치를 먹어보질 못했기에 엄청나게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한국군에서 가장먼저 운용했던 차량은 M113 이라는 차종이었고 미군부대에서 교육 받았던 지휘및 통신용의 M 116 은 맹호부대에서는 내가 귀국한 1967년 9월 까지는 수령하지를 못했습니다
맹호부대 병기중대에 문의를 하면 우리는 한국군에 없는 무기라 교범조차도 없으니 주월미군사와 연락을 취하던지...
맹호사단 참모부에 기갑참모라는 최모라는 계급이소령인 장교 한분이 계셨는데 무슨 역할을 하셨는지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장갑중대는 월남에 도착즉시 사단영내에서 이틀인가 숙영을 하고 바로 19번 도로를 따라 기갑연대 조금 못미쳐서 도로에서 오른쪽으로 100미터쯤 들어간 곳에 자리를 잡고 중대기지를 자력으로 건설을 했답니다 내 기억으론 못한개 판자 한쪽도 지원받은 기억이 없네요
자 이제 제가 증언을 합니다
우리부대 중대장은 함경도가 고향인 이성일 대위였으며 6 25때 현지임관된장교였다는걸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부관 서정훈 중위 정비장교 나판열 중위 1소대장 김종훈 중위 이상 3명은 갑종장교라 하나요? 간부후보생 출신이라고 하나요 보병학교 졸업후 임관된 장교 그런분들 이고요 2 소대장 이호욱 중위 3소대장 이영직 중위 5소대장 채수옥 중위 였답니다 이상 마지막 소대장 3명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장교들 이었고요
여러분, 두코전투수기를 읽어 보십시오 정경진 대위라든가 새로 부임한 중대장 이라든가 모두 함경도 출신이고 대위들 아닙니까 우리 중대장도 함경도 출신이고 대위인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그런 장교들이 꽤나 있을것입니다
5 16 혁명이 일어나고 군인사법 이란게 생겨서 계급정년 이란것이 생겨 어떤 한계급에서 얼마동안 진급하지 못하면 무능장교로 자동으로 예편되는 그런 제도가 생겼답니다 그래서 현지 임관했다던가 6 25에 참전했던 많은 군인들이 참천하여 진급하는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함도 있었을 것이고 현실적으로 장교의 참전수당도 상당한 이유였을 것입니다
우리 중대에서 정말 아무것도 없이 개인장비인 야전삽과 야전곡괭이로 땅을 파서 참호를 만들고 부대 주위를 둘러가며 교통호도 만들고...
나는 우리중대의 군용추럭 2대를 끌고 운전병 정송출 일병 경상도가 고향임 또 한명은 김상순 일병 아마 거의 틀림없이 강원도가 고향이 아니었나 짐작합니다 왜 내가 이름까지 거명을 하느냐 하면 증언을 할수가 있을 것이고 사실 그런 병사가 맹호부대 장갑중대에 있었는지는 확인이 될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운전병 두명을 데리고 미군부대 보급창을 무조건 찿아 갔습니다 우리 맹호부대사단본부에서 1번도로를 따라 오다가 1연대쪽 봉손쪽으로 가는길과 기갑연대 안케, 플레이쿠 쪽으로 가는 19번 도로가 갈라지는 그 아래쪽에 규모가 상당히 큰 미군부대 보급창이 있었답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영어회화에 관심이 많아서 미군병사나 선교사 등과 많은 접촉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단 한번 또는 두어번 만난적도 있고 어떤사람은 몇개월간을 심도깊게 만난적도 있고... 덕분에 회화도 가능했고 정말 영어회화를 좀 배웠던 것이 이렇게 큰 효용을 발휘하리란건 나 자신도 꿈도 꾸지 않았던 일이었지요 무조건 책임장교를 좀 만나게 해 달랬더니 어떤 병사가 안내를 해 주더군요 그래서 어떤 사무실 같은곳엘 들렸더니 Major(소령) 계급장을 단 군인이 있더군요 경레를 절도있게 하고 찿아온 용건을 말했습니다 내 태도가 마음에 들었던지 아니면 내가 진솔하게 말하는 진정성을 높게 평가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정말 도와주고 싶어하는것이 보였습니다
그날 차량 2대에 실을수 있을만큼의 최대중량의 목재뿐 아니라 못이라든가 심지어 방충망으로 쓸수있는 그물같은것 우리 운전병 2명이 돌아 다니며 필요할만한 것을 자꾸실어 차가 펑크가 나던지 내려 앉지나 않을지 걱정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 소령님이 너무 무거울테니 또 오라고 하며 군데 군데에 가면 내가 얘길 해 둘테니 무거운것은 지게차로 싣는것까지 도와주고 나중에 나갈때 서류에 내가 서명만 해주면 된다고 했답니다 차를 끌고 중대에 들어오니 생각지도 않은 큰 수확에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중대 한가운대 쯤에 중대지휘호를 파고 가져온 재목으로 유개호를 만들고 그 위에 흙마대 주머니로 지붕을 덮고 흙은 교통호를 파내면 되니까 뿐만 아니라 우선 잠을 자는곳에 빗물이 안들어오게 지붕을 덮을수가 있으니...
그 당시 한국군들은 미군들에게 상당한 인기가 있었던게 사실입니다 어깨높이의 팔뚝에 호랑이를 그린 맹호마크만 보면 왠지 듬직하고 그랬던가 봅니다 그 후로도 퀴논부근에서 미군들을 보면 괜히 말을 걸어오기도 하고 특히 나는
다른 맹호부대원들과 달리 왼쪽가슴에 우리나라의 기갑병들만 달고있는 빨강 파랑 노랑 삼색의 삼각형 마크가 있는데 그것이 미군들에게 특별히 어필했다는걸 느꼈습니다 미군에서도 전투병과 군인들만 이 마크를 착용하는데 엘비스 프레슬리가 군복무를 할때(독일에서)도 이 마크를 달고 뽑냈던게 기억이 납니다 초창기의 월남에서는 총기사고가 엄청나게 많이 났습니다 심지어 하극상의 사고들도 많았던게 사실이었습니다 오직했으면 맹호 사단장이셨던 채명신 장군이 장교건 하사관이건 구타하는자는 신고만 하면 무조건 영창을 보내겠다고 하셨을까요 사실 한국에선 하급자에게 폭행 구타는 예삿일처럼 여겼던것도 한국군의 한 면목이었지요 그런데 월남에서 조차도 그 폐습을 그대로 할려니 모두가 언제나 실탄이 장전된 총을 소지하고 있다보니 걸핏하면 하극상 사고가 많이 발생했답니다 전쟁의 역사를 기록함에 있어서 사실을 기록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냥 부끄러운 부분은 감추고 아름다운 부분만 기록을 해야 할까요?
나는 맹호부대 장갑차 중대에서 제일먼저 부상자가 생겼었는데 그게 전투에서 발생했던 사고도 아니고 소위 하극상 으로 일어난 사고였지만 몇시간을 두고 총을들고 대치하다가 사고병과 같은도시(원주)에 살고있었던 중대장이 제발 나를 봐서라도 진정하라고 모든일을 없었던 것으로 내가 어쩌구 저쩌구 ...얼마후에 총성이 1소대장 막사에서 났는데 이 전우가 자해를 한것입니다 자살 하려고 했겠지요 이 친구의 이름도 분명히 기억을 하고 있으며 나와 미군부대에서 장갑차교육을 받은 병사가 아니었고 보충을 받았던 병사였습니다 군번이 엄청 빨라서 아마 한국에서 탈영을 했거나 무슨 사고가 있어서 늦게까지도 제대를 못하고...
오후에 대치상황이 벌어졌는데 벌써 날이 어두워졌고 그때는 아직도 M 16 소총도 지급받기 전이라 M 1소총으로 자해를 한것입니다 앞가슴에 총을대고 쏘았는데 등뒤로 큰 구멍이 났지요 우리중대 육사출신 3소대장 이영직 중위와 내가 이 부상자를 짚차에 싣고 기갑연대 헬기착륙장까지 실어 날랐습니다 내 손으로 압박붕대를 앞에하나 뒤에 하나를 대고 손으로 막으면서 가는동안 허파에서 바람이 새는소리가 들리고 피는 양손으로 누르고 있는데도 계속 흘러나와서 피의 온기가 내 손에 느껴지고....자 이 전우는 어떻게 전상보고가 되었을까요? 당사자 1 소대장이란자는 다른 모든 장교들과 한날 한시에 대위로 진급되었답니다 우리 중대장은 소령으로 진급이 되었고요 내 평생 나를 괴롭혔던 한가지의 사실입니다
또 이런일도 있었지요
이 친구는 잠을 자는 참호가 나와 같은 곳이었고.. 그런데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던지 확실치는 않으나 한국에 후송되어 한쪽다리를 절단하고 제대한후 편지를 보내 왔는데 이제 너희들과 씨름도 할수 없겠다는 사연을 보내와서 가슴이 울컥했던 기억도 선명합니다 나는 또 내 자랑같지만 정비장교가 해야 할 일을 거의 내가 해야했고 이친구는 정비장교의 당번병을 했기때문에 나와 같은 참호를 사용하게 되었답니다
거의 날마다 나돌아 다녔기 때문에 중대에서 무슨일이 일어났는지는 잘 알수도 없었지요 그래서 이 친구가 언제 무슨일이 일어나서 다리를 절단하지 않으면 안되었는지 잘 모르는 사유입니다
우리 맹호사단 장갑차중대의 지휘차량은 차량번호가 우리나라 처럼 1 호차가 아니고 66번 차량으로 옆면에 차량번호를 붉은색의 페인트로 써 놓았지요 내가 1번을 쓰지말고 66번을 쓰게한 장본인 입니다 미군과의 연합작전을 한다든가 미군들이 보면 저차가 지휘차량 인것을 단번에 알아보기 때문이었지요
앞면 물막이판(강을 도하 할때 밀려오는 물결을 막기위해 앞에 펼치는 판)에다 호랑이 대가리를 그리고 차량번호를 새기고 한 일은 서무계 조수 강선배 상병이 했는데(서무계는 김장보 병장) 2003년쯤인가 인터넷을 통해서 전우를 찿습니다 란 곳에서 이 친구 이름을 발견하고 연락이 닿았던 적이 있습니다 알고보니 자기 아버지는 컴맹이라서 지금 선생님과 연락을 하시기 위해서 컴을 배운다고 했던가 뭐 그런일이 있었지요 자기에겐 아직 옛날 월남에서의 사진도 몇장이나 있고... 그 친구가 그림도 잘 그리고 차드같은것도 잘 만들고 재주꾼이었는데 월남에서 제일먼저 퀴논에서 수령한 차량을 중대까지 내손으로 몰고와서 부관 서정훈 중위의 숙소가 본부소대 천막옆에 붙어 있었는데 그 앞에다 APC를 세워놓았지요 그리고 중대장이하 모든장교 그리고 정문에 보초를 제외한 거의 모든 중대원들이 보는 앞에서 토의랄까 차량을 어떻게 도색을 할것이며 번호는 어떻게 표기를 하고,,, 이러쿵 저러쿵 그때 본인의 의견을 개진했던바 많은 부분이 내 의견대로 실행이 되었던걸로 압니다 앞에 호랑이 대가리를 그리자는 의견은 누가 했는지 모르겠고 하도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나서니까 소위 중구난방 이란것이었지요 내가 주장했던바는 지휘차량 번호는
1번이 아니라 66호 라고 차량번호를 쓰는데 그 이유는 사단작전에 이라든가 미군들과 작전을 자주하기도 하지만 우선 연합군이 첫눈에 어느차량이 지휘차량인지 알아볼수 있다는것,
각 소대마다 1소대장 차량은 11호 12호 13호 15호
2소대는 21호 22호 23... 3소대는 31호 32호... 5소대는 51호 52호...
이 강선배라는 친구가 초창기의 맹호부대 장갑중대의 모든 차량의 호랑이를 그리고 차량번호도 새겨넣고 그랬답니다
나는 명색이 중대 지휘차량 66호의 조종수 이었지만 내 직책에서의 임무는 거의 수행할수도 없을 정도로 대외업무에 바빴고 비록 사병이었지만 장교가 해야 할일을 늘상 나돌아 다니면서도 하고 때로는 중대에 있을때도 수시로 찿아오는 미군장교들이 심심찮게 있었는데 이건 약방에 감초입니다 심지어 중대의 탄착점 설정을 할때도(월남 도착한지 일주일도 안되었지 싶었는데)나를 불러서 통역을 하라는겁니다 화집점 알파 어쩌고 저쩌고 좌표를 불러주고 ... 연막탄 1발 쏘아보고 탄착점을 보고 줄이기 오십 우로 하나백 이런 식입니다
내가 포병의 지식이 있나 화집점 알파가 어떻다는데 내가 단 1분도 군사영어 교육을 받아본적도 없는데...급하긴 급하고 마냥 화집점이라기에 fire point라고 말했더니 알아 듣기는 했는지 아니면 화집점을 군사용어로도 fire point라고 하는지 나는 아직까지도 모릅니다 참 별일들이 많았었지요
나는 처음 장갑차 몇대를 수령하고 조종수를 양성해야 했기에 기갑연대 본부를 지나면 빈케라는 마을에 강을 건너는 다리가 있었지요 그 다리옆에는 취수장이 있었고... 우리중대나 거의 모든 기갑연대 장병들도 그 물을 식수원으로 사용했었답니다 우리중대에서도 트럭 한대는 매일 물을 길어러 한번씩 그곳에서 물을 싣고왔는데 어떨때는 취사반장 이었던 서상구 하사가 빨리 물실어 오라고 운전병들에게 성화를 부리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 취수장 에서 하류쪽으로 내려가면 강폭이 좀 넓어지고 수심이 깊은곳이 나오는데 시야도 툭 트이고 해서 교육장으로 좋겠다 싶어서 자대 장갑차 교육을 그곳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처음 갔던날 내가 경험했던것 하나- 장갑차는 물에 들어가면 지상에서 처럼 조향(방향을 바꾸는것)이 자동차 운전대처럼 금새 반응이 오질 않습니다
M113장갑차는 미국 Chrysler 자동차 회사에서 만든 엔진과 트랜스밋션이 장착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엔진의 성능을 테스트 해볼까 하여 기어를 3단으로 놓고 가속을 해 보았지요 그냥 3단으로 놓고 내리 밟았다간 자칫잘못하면 큰 사고를 일으킬수 있으니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내가 이 엔진 성능시험을 하는데 물론 장갑차 궤도에 물갈퀴처럼 달린것이 빠른 물의 움직임이나 진동을 못 견뎠던지 조종수 본넷트위로 커다란 물고기가 뛰어 올라서 퍼득퍼득 거리던 것이 생각이 납니다 아마 그때 내 차를 타고 같이 있었던 장교가 3소대장 이영직중위라고 기억합니다 M 113은 뒷문전체를 전동식으로 열수도 있고 작은 문이 손으로 여닫을수 있도록 되어있었지요 양쪽옆으로 보병들이 앉을수 있도록 긴 의자처럼 만들어 졌고 위쪽에는 사각형의 햇지를 열수있도록 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열고 머리를 내밀고 있었던 기억이... 그날 그 물고기는 내차에 뛰어 올랐던게 행운이었겠지요 내가 얼른 물속에 다시 넣어 주었으니까요
대한민국 원호처란곳이 어떤곳인지... 나는 월남전에 참전하고 귀국한 후에 독일로 왔습니다 그러니까 계속 외국에서 살고있었지요 또 지금은 미국에 살고있는 미국영주권은 물론있고 국적을 바꿨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친구가 있는데 어찌되었건 나랑 몇십년만에 연락이 닿았답니다 꽤 성공한 케이스라고 할까요 처음에 파라과이로 독일에서 떠났는데 아르젠티나로 가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한국과 장사를 시작해서 큰돈을벌어 정리하고 카나다에서 살다가 미국에 투자이민으로 들어가서 지금은 L A근교에서 살고 있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내 친구가 한국에 와서 남해에서 자기 병적조회를 하고 참전용사 수당를 신청할랬더니 컴표터로 조회를 해 보더니 이사람 지금 연금이 지급되고 있다는 얘길 들었고 또 내 이름으로도 누가 돈을 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놈들이 글쎄... 공문서를 위조도 하는것 같고 세상에 내가 한번도 서울에 내 병적을 옮긴적도 없는데 왜 내 병적이 서울지방 원호처에 올라있는지 누가 설명할수 있겠습니까?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뙈놈이 먹고...
대한민국은 과연 어디로 갈것이며..... 여러분 빨리 흥진호 사건 밝혀야 하는데 무얼 하십니까 대선이 무효라고 소송을 했는데 지금 아무소리도 없이 가만히 기다리고 있자는 겁니까?
앞뒤도 없고 무슨얘기가 럭비공처럼 이리왔다 저리갔다...
여러분 내 컴퓨터에는 많은 군상들이 들락거리기도 한다는걸 나는 압니다
독일에도 미국의 CIA FBI 같은 기관들이 있고 기관들도 여러곳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내 컴퓨터를 들여다 보고 있겠지요 왜? 내가 세계의 곳곳에 인터넷으로 연결을 하고 남미 중미 북미 등은 말할것도 없고 북구의 여러나라 남유럽의 나라들... 한번 조사를 해볼 필요가 있겠지요 테러리스트 들과 접촉은 없는지, 왜 이런 나라들과 접촉을 하는지 등등 만약 아무런 이유없이 남의 컴퓨터를 들여다 보면 불법이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면 재판부의 허락을 받아 들여다 볼수가 있을것입니다
내가 지난 2009년에 한국을 방문했을때 여행기록을 남기기 위해 본에서 프랑크푸르트 공항역까지 고속철을 탔는데 ICE열차의 멋진 모습을 담았습니다 몇컷을 찍었지요 어느날 보니까 그런 사진이 다 지워져 있더라구요 나는 압니다 내가 항의를 해 봤자 그들은 의심될만한 짓들(예를 들자면 콜럼비아에 자주 접속을 한다던가 왜 카나리아 군도에 연락을 취하는가 등등) 보나마나 판사의 허가증을 제시할수 있을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ICE는 독일 산업스파이 혐의를 씌울수도 있을테니까요
시간이 없어 이만 쓰렵니다 얼른 입원준비도 해야 하겠고 조금전에 서울과 통화하던 끝맺음도 해야 하니까요 여경우 교수처럼 이제 그만.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ㅣㅡ두번에 걸쳐서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