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물에도 파도 있다 – ETA에 대한 단상
지하철 플랫폼 천정의 모니터는 언제나 정확하다 믿었다. 역명, 열차 위치, 도착 시간—all clear.
그런데 그날따라 이상했다. 마이크에서는 “양산행 열차가 진입하고 있습니다”라는 방송이 흘러
나오는데, 모니터에는 여전히 전전역에 멈춰 있는 열차가 찍혀 있었다. 순간 생각했다. ‘아, 저
모니터도 사람처럼 피곤한가 보구나.’
나는 그때 비로소, 우리가 얼마나 “예정된 시간”에 의지하며 살아가는지 깨달았다. 버스, 기차, 비행기
—모두 출발과 도착의 시간을 약속하고, 우리는 그 약속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심지어 배까지도, 거센
파도 위를 달리면서도 ETA, Estimated Time of Arrival, 즉 ‘예상 도착 시간’을 계산한다.
하지만, 세상일이 다 ETA처럼 움직이지는 않는다.
한 스무 해 전, 실습선 타고 수단 항구에 갔을 때가 생각난다. 그곳 대리점 직원에게 물었다.
“여기서 수도까지 가는 기차가 몇 시에 도착하나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건 신만이 아십니다.”
정확한 시간표가 없는 기차라니, 그 말이 처음엔 낯설고 불편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생이란 것도
그렇지 않은가. 도착 시간을 모르는 긴 여정. 예측할 수 없는 지연과 우연의 연속.
한번은 이탈리아 남부 항구 타란토로 향하던 배의 ETA를 계산할 때였다. 바람도 잔잔하고 하늘도 맑아 자신 있게
예상 시간을 대리점에 알려줬더니, 막상 도착하니 세 시간이 늦었다. 원인은 지중해의 미묘한 바람 방향 때문이었다.
대리점 직원은 웃으며 말했다.
“See? Even dirty water has waves.”
우리 말로 하면, ‘똥물에도 파도가 있다.’
그 말이 妙했다. 아무리 평온해 보여도, 세상엔 늘 작은 변수들이 숨어 있다.
그래서 때때로, ETA는 틀려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가 겸손해지고, 기다림의 의미를 다시 배우니까.
플랫폼 모니터가 멈춰 서 있던 그날,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인생의 ETA는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고.
그러니, 늦는다고 조급해하지 말자. 열차가 제 속도로 달려오듯, 우리 각자의 시간도 결국엔 제자리에 도착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