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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나라에서 드리던 제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은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주장하며 이기론(理氣論)의 주리론적 견해를 밝히어 이후 퇴계 이황(李滉)으로 이어지는 영남학파 성리설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조선 전기의 유학자이자 문신이었다.
중종 36년인 1541년에 두 해 연속 가뭄이 들어 나라의 인심이 흉흉해졌을 때,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자리에 있던 이언적은 홍문관의 다른 관리들과 함께 ‘재앙을 이기기 위해 왕이 힘써야 할 열 가지 일’이란 뜻의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라는 상소문을 중종에게 올렸다.
그 열 가지 항목의 다섯 번째에 <제사불가불근(祭祀不可不謹)>이라는 항목이 있는데 제사에 부지런히 힘써야 한다는 뜻이다.
유학이 통치이념이었던 조선에서 주자의 『가례(家禮)』는 유학의 실천윤리로서 국가적으로 권장되었고 그중에서도 조상에게 제사하는 의례를 다룬 제례(祭禮)는 조상숭배의 관념을 보편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이언적 등이 합계하여 올린 상소문에는 그러한 관념을 바탕으로 나라에서 힘써야 할 제사로 종묘와 사직단, 그리고 석전을 먼저 열거하였다.
석전(釋奠)과 석채(釋菜)는 향교나 서원과 같은 곳에서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올리는 제례(祭禮)를 뜻한다. 선성(先聖), 선사(先師)는 옛 성인과 성인을 도와 덕업(德業)을 성취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고대 중국의 주(周)나라 때에는 순(舜), 우(禹), 탕(湯)과 같은 고대의 임금이나 주공(周公)을 선성으로 받들었고, 후한(後漢)에 들어서 공자(孔子)를 선사(先師)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당나라 초기에 이르러 공자가 선성의 지위에 오르고, 공자의 수제자였던 안자(顔子)와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 그리고 증자(曾子)와 맹자(孟子) 등이 선사로 이름을 올린 뒤로는 그 전통이 후세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석전(釋奠)은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문묘(文廟)에서 공자를 주향(主享)하고 공자의 제자와 이름 높은 유학자들을 배향(配享)하는 의례를 뜻한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성균관(成均館)에서는 석전제를 거행하고 있다. 석전과 석채의 차이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으나, 대개 석전에는 소와 양 등의 희생을 쓰고 풍악을 연주하는 반면 석채는 석전보다 가벼운 의례로 희생과 음악이 없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태학계첩(太學稧帖)」中 <반궁도(泮宮圖)>, 1747년, 성균관 평면도, 서울역사박물관 : 「태학계첩(太學稧帖)」은 이정보(李鼎輔)가 성균관 대사성이던 때에 태학속전(太學續典)이 완성된 것을 기념하여 9명의 참여 유생(儒生)들과 함께 만든 계첩(稧帖)이다.중앙 남북방향을 축(軸)으로 삼문(三門), 대성전(大成殿), 명륜당(明倫堂)이 일직선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제사들은 우리의 유교에 관한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마을을 지키는 서낭신과 횡사(橫死)하거나 후사(後嗣)가 없는 귀신을 제사하는 여단은 복을 비는 곳이기 때문에 제사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재앙을 막고 환난을 물리치기 위하여 산천(山川)의 여러 신에게는 제사한다고 했는데 이것도 과연 유교의 제례에 속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조선시대의 제사는 주관자에 따라 국가 제사와 사가(私家) 제사로 구분된다.
국가 제사는 국가에서 주관하는 제사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그 종류와 시행 절차가 명시되어 있고, 사가 제사는 사대부를 비롯하여 서민에 이르기까지 일반 가정집에서 행하는 제사로 일반적으로 주자의 『가례(家禮)』를 따랐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천신(天神)에게 지내는 것을 사(祀), 지신(地神)을 뜻하는 지기(地祇)에게 지내는 것을 제(祭), 죽은 사람의 혼인 인귀(人鬼)에게 지내는 것을 향(享), 문선왕(文宣王)에게 지내는 것을 석전(釋奠)이라고 제사의 명칭을 구분하는 한편, 이들 제사를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의 3등급으로 분류하였다.
대사(大祀)는 임금이 직접 참석하는 제사로 역대 임금의 신주(神主)를 모신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에 드리는 종묘대제, 그리고 토지신[地神]과 곡식신(穀食神)을 뜻하는 사직(社稷)에 드리는 사직대제가 이에 속했다.
[2015년의 사직대제, Ⓒ월인도령]
[2015년의 사직대제에서의 일무(佾舞), Ⓒ월인도령]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대사(大祀)를 행하는 시기에 대하여 이렇게 규정하였다.
▶맹월(孟月) : 4계절이 각각 처음 시작하는 달. 즉 맹춘(孟春)은 음력 1월, 맹하(孟夏)는 음력 4월, 맹추(孟秋)는 음력 7월, 맹동(孟冬)은 음력 10월. ▶납일(臘日) : 동지 뒤 세 번째 미일(未日, 지지(地支)가 ‘미(未)’로 된 날). ▶중월(仲月) : 춘하추동 각 계절의 가운데 달인 음력 2월, 5월, 8월, 11월. 중삭(仲朔)이라고도 한다. ▶무일(戊日) : 천간(天干)이 무(戊)로 된 날.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없지만 세조 때에는 원구제(圜丘祭)라 하여 하늘의 형상을 상징하는 원구단(圜丘壇)이라는 제단에서 천신(天神)에게 드리는 제사도 대사에 속했었다. 하지만, 이는 천자(天子)만이 할 수 있는 의식이라 하여 세조 10년에 폐지되었다가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대한제국 때에 다시 실시되었다. 고종이 제천의식을 행했던 장소는 현재의 조선호텔과 롯데호텔 사이에 환구단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는데, 환구단이라는 명칭은 1897년 10월 고종이 원구단에 제사를 지낸 일을 독립신문이 원구단(圜丘壇)의 ‘圜’자를 ‘환’으로 오독(誤讀)하여 환구단으로 보도하면서 유래된 것이다. ‘圜’자는 ‘둥글다’는 훈(訓)을 갖고 ‘환’과 ‘원’으로 음독되는 한자이기 때문에 발생한 해프닝이었다. 그럼에도 문화재청은 2005년에 원구단 대신 환구단을 공식 명칭으로 채택하였다.
[원구단 : 중앙 앞쪽에 삿갓 형태의 지붕을 한 곳이 원구단이고 왼쪽 뒤편의 3층 팔각지붕 건물은 태조 이성계를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로 추존하여 신위를 모셨던 황궁우(皇穹宇)이다. 원구단은 1913년에 일제가 현 조선호텔의 자리에 조선철도호텔을 건립하면서 철거되었다.]
[현재의 원구단 : 설치된 세 개의 ‘돌 북[石鼓]’은 1902년에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황궁우 옆에 세
웠던 석고단(石鼓壇)의 유물이다. 석고(石鼓)의 몸체에는 용무늬가 조각되어있다.]
[황궁우 내부, 문화재청]
대사의 아래 단계인 중사(中祀)에 대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규정은 이렇다.
풍운뇌(風雲雷)는 바람, 구름, 우레를 가리키며 비와 함께 풍운뇌우(風雲雷雨)의 제단이 용산구 청파동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악해독(嶽海瀆)은 큰 산과 바다, 그리고 큰 강을 가리키는 말로 조선에서는 4악(嶽), 3해(海), 7독(瀆)을 선정하여 제사를 지냈다.
4악(嶽)은 남쪽의 지리산, 중앙의 삼각산, 서쪽의 송악산, 북쪽의 비백산(鼻白山)으로 각기 남원, 한성부, 개성, 함경남도 정평에서, 그리고 3해(海)는 동해, 남해, 서해로 각각 양양, 나주, 풍천에서 제사를 거행했다.
7독은 봄가을과 가뭄 때에 제사를 지내는 큰 나루나 강으로, 남쪽으로는 공주의 웅진(熊津)과 양산의 가야진(伽倻津), 중앙에는 한강, 서쪽은 장단의 임진강 덕진(德津), 평양의 대동강, 의주의 압록강이고 북쪽은 함경도 경원의 두만강이다.
선농(先農)은 농사를 관장하는 신농씨(神農氏)에게 지내는 제사이며 선잠(先蠶)은 양잠법(養蠶法)을 시작한 서릉씨(西陵氏)에게 제사하는 것으로 선농단은 성북동에, 선잠단은 제기동에 있었다. 문선왕은 공자의 시호로 성균관 문묘의 대성전(大成殿)에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중사에는 대사와 마찬가지로 제례악이 연주되었다.
나라에서 드리는 제사의 가장 아래 단계인 소사(小祀)에 대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기록이다.
▶중춘(仲春) : 봄이 한창일 때. 음력 2월. ▶중하(仲夏) : 여름이 한창일 때. 음력 5월. ▶중추(仲秋) : 가을이 한창일 때. 음력 8월. ▶중동(仲冬) : 겨울이 한창일 때. 음력 11월. ▶중기(中氣) : 이십사절기 가운데 우수, 춘분, 곡우, 동지와 같이 달의 중순 이후에 드는 절기. ▶강일(剛日) : 일진(日辰)의 천간(天干)이 갑(甲), 병(丙), 무(戊), 경(庚), 임(壬)의 오기(五奇)에 해당하는 기수일(奇數日). 양(陽)에 해당하는 날이라 바깥일 하기에 좋은 날로 여겨왔다. ▶계동(季冬) : 음력 섣달. ▶강무(講武) : 왕의 친림 하에 실시하는 군사 훈련으로서의 수렵대회. |
마조(馬祖)는 말의 수호신이고, 선목(先牧)은 처음으로 사람에게 말 기르는 법을 가르친 양마신(養馬神), 마사(馬社)는 최초로 승마법을 창시한 인물, 마보(馬步)는 말에게 재해(災害)를 끼친다는 신(神)이다.
영성(靈星)은 농업을 관장하는 신으로 모셔진 별로 주로 눈에 잘 띄는 혜성(彗星)이 대상이었고, 노인성(老人星)은 사람의 수명을 관장하는 별로 남반구 하늘에 있는 용골자리(Carina)에서 가장 밝은 알파별이라고 한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별이라 수명을 관장하는 별로 여겨졌고, 이 별을 보게 되면 오래 사는 것으로 믿어졌다.
사한(司寒)은 날씨가 춥고 얼음이 얼고 눈이 내리는 등 겨울의 모든 일을 맡아본다고 하는 신(神)이며, 마제(禡祭)는 군신(軍神)인 치우(蚩尤)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둑제(纛祭)는 군대의 앞에 세우는 둑기(纛旗)에 드리던 제사로 전쟁에 출정할 때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며 지냈던 제사가 원형이다. 여제(厲祭)는 제사를 지내 줄 자손이 없거나 억울하게 죽은 귀신을 뜻하는 여귀(厲鬼)에게 지내는 제사로 여귀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위로함으로써 재난을 미리 방지하려는 뜻에서 행해졌다.
[<동대문밖 마장원전도(東大門外馬場院全圖)>, 국립중앙박물관 : 오른쪽에 아차산성의 용마봉과 아차산, 왼쪽에 마조단의 표시가 보인다. 그림 아래쪽의 건물은 나라의 말을 기르던 마장(馬場)을 관리하는 관청인 마장원 건물이다. 건물 위쪽의 화양정(華陽亭)이 지금의 화양동 건국대학교 부속병원 서쪽 언덕에 1911년까지 남아 있었다고 하므로 목장의 위치가 지금의 성동구 일대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마조단은 한양대학교 캠퍼스 안의 백남학술정보관 화단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제사들은 유교와는 직접적 연관성은 없어 보이지만, 멀게는 중국의 주(周)나라 때부터 시작하여 중국의 역대 왕조로 이어져 오면서 조선에서도 그 관습을 따르게 된 것들이다. 사삿집에서 드리는 제사가 조상에 대한 것으로 국한된 반면 나라에서 드리는 제사는 이처럼 종류가 많고 대상도 다양하였다.
중사의 악해독(嶽海瀆)에 들어간 산과 강 말고도, 소사에 명산대천(名山大川)에 제사하는 항목이 더 있다. 조선시대 나라에서 제사하던 명산대천은 한성부의 목멱산을 비롯하여 경기도는 개성 오관산, 적성 감악산, 양주 양진(楊津), 충청도는 공주 계룡산, 단양 죽령산, 충주 양진명소(楊津溟所), 경상도는 울산 우불산과 문경 주흘산, 전라도는 전주 성황(城隍)과 나주 금성산, 강원도는 원주 치악산, 회양 의관령과 덕진명소(德津溟所), 황해도는 해주 우이산, 장연 장산곶(長山串), 안악의 아사진(阿斯津)과 송곶(松串), 함경도는 영흥의 성황(城隍)과 비류수(沸流水), 평안도는 평양 구진익수(九津溺水)와 안주의 청천강 등이 더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부도(附圖)인 동람도(東覽圖) 가운데 하나인 <팔도총도>에 표시된 악해독(嶽海瀆)과 명산대천. 1530년 목판본]
악해독(嶽海瀆)과 명산대천에 대한 제사는 해당 지역의 수령이 주관하였고 따로 제례악(祭禮樂)은 없었다. 산과 강에 드리는 제사는 민간신앙과의 연관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이 또한 중국 고대 왕조의 관습과 밀접한 것이다.
조선의 개국 초 대사헌 남재(南在) 등이 태조에게 아뢴 내용 중에는 이런 말이 있다.
여기에서 천자가 천지에, 제후가 산천에 제사했다는 유래는 멀리 중국의 전설적 왕조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서경(書經)』의 요순(堯舜) 두 임금의 시대를 다룬 우서(虞書)에는 순임금이 요임금으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을 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이후 중국의 천자는 흙으로 단(壇)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 지내고 땅을 정(淨)하게 하여 산천에 제사를 지냈는데 이를 봉선(封禪)이라고 하였다. 산꼭대기에서 하늘에 드리는 제사를 봉(封), 산기슭에서 땅에 드리는 제사를 선(禪)이라고 하여 이 둘을 합친 제례 의식이 봉선이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최초의 봉선은 진시황제이다. 즉위 28년째인 기원전 219년에 봉선을 행한 기록이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같은 『사기(史記)』의 <효무본기(孝武本紀)>에도 기원전 110년 음력 4월에 한무제가 양보산에서 땅의 신에게 제사하고 태산에 올라 봉선을 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봉선 말고도 중국에서는 전통적인 산악 숭배신앙이 오행(五行)사상의 영향을 받아 5악(嶽)의 개념이 만들어졌고 이 산들에도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왔다.
한(漢)나라 때의 5악은 중앙에 숭산(嵩山), 동쪽의 태산(泰山), 서쪽의 화산(華山), 남쪽의 형산(衡山), 북쪽의 항산(恒山)이었다.
생활 대부분을 자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전근대사회에서는 자연현상 자체가 곧 인간의 생존을 좌우하는 외경스러운 존재였기에, 특히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사회에서의 자연에 대한 숭앙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자연신 외에도 수많은 불교적 도교적 민속신들이 많이 있었지만, 조선이 들어서면서 잡다한 자연현상에 대한 음사(淫祠)를 대폭 정리하여 유교적 예제에 따라 그 등급과 서열을 조정한 것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내용이다.
참고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한국고전용어사전(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고중세사사전(한국사사전편찬회), 우리역사넷(국사편찬위원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조선시대 나라에서 드리던 제사 종심소욕
[출처] 조선시대 나라에서 드리던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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