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비스 이전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비틀즈의 멤버 존 레논은 1965년 8월 27일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와의 역사적 만남 직후 이같이 말했다. 음악 선배에 대한 존경을 나타내는 동시에 비틀즈 음악의 근원인 로큰롤의 역사적 의미를 평가한 것으로 해석된다.
오늘날 로큰롤은 엘비스 프레슬리와 동의어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엘비스가 로큰롤을 만든 것은 아니다. 로큰롤은 점진적으로 발전해왔다. 재즈, 블루스, 가스펠, 컨트리 등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키면서 하나의 장르를 형성했기 때문에 ‘최초의 로큰롤’이 무엇이라고 단정하기는 사실 어렵다.
라디오 디스크자키(DJ)로 활동하며 로큰롤 대중화를 주도한 앨런 프리드는 1956년 자신이 출연한 영화 ‘Rock, Rock, Rock’에서 “로큰롤은 리듬앤블루스, 재즈, 래그타임, 카우보이송, 컨트리송, 포크송 등 많은 냇물을 흡수한 강”이라고 표현했다.
엘비스가 최초의 로큰롤 뮤지션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그의 인기를 바탕으로 오늘날 록 음악 시장이 열렸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가 이룬 상업적 성공은 척 베리, 보 디들리, 리틀 리처드, 자니 캐시 등의 인기로 이어졌고, 로큰롤은 하나의 산업이 됐다. 로큰롤의 인기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산업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현상이기도 했다.
엘비스의 음악 활동은 1954년 7월 19일 첫 싱글 “That’s All Right”으로 시작해 그의 사망 후 발매된 1977년 10월 3일 마지막 앨범 “Elvis in Concert”까지 24년 간 이어졌다. 그동안 그는 102개의 싱글과 30개의 미니앨범, 79개의 앨범을 발표했다. 이 가운데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른 것은 앨범 9개와 싱글 18개에 달한다. 음반 판매량은 인증된 것만 2억1020만장에 이른다. 인증되지 않은 음반까지 다 합하면 전 세계에서 10억장 이상 팔렸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엘비스는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을까? 엘비스는 전성기 때 공연 등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아도 연간 500만 달러씩 벌었다고 한다. 어머니에게 선물로 드리기 위해 단돈 4달러를 내고 첫 노래를 녹음했던 시골 청년은 그렇게 재벌이 됐다.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956년 12월 31일자 기사에서 “오늘날 엘비스 프레슬리는 하나의 사업체”라고 평가했을 정도다.
그러나 1977년 8월 16일 엘비스가 사망했을 때 그의 통장에는 500만 달러만 남아 있었다.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2000만 달러, 한국 돈으로 240억 원에 이르는 돈이다. 그의 저택 ‘그레이스랜드’와 그가 수집한 자동차들의 가치는 포함되지 않은 금액이지만, 엘비스의 인기에 비해 적은 돈이 아니냐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한국의 어느 엔테인먼트 회사 회장의 재산이 2000억원이 넘는다고 하니 그럴만도 하다.
사실 엘비스는 많이 버는 만큼 많이 쓰기도 했다. 그의 상징과도 같은 흰색 점프슈트는 디자인에 따라 2000~2300달러를 주고 맞췄다. 1주일 동안 보석을 사느라 8만5680달러를 썼다는 기록도 있다. 자동차와 제트기, 저택을 구입하는 데도 어마어마한 돈을 썼다.
엘비스가 평생 모은 돈이 생각보다 적은 것은 세금 때문이기도 하다. 1950년대 중반 엘비스와 같은 미국의 고소득층에 적용되는 소득세율은 90%에 달했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에서 연소득 41만5000달러 이상 개인에게 부과되는 소득세율이 39.6%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가 얼마나 많은 세금을 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부 팬들은 엘비스의 매니저인 커널 톰 파커가 돈을 빼돌린 것이나 다름없다고 보고 있다. 당시 다른 매니저들이 수익의 10~15%를 가져가던 것에 비해 파커는 최대 50%를 챙겼다는 얘기다. 그러나 엘비스는 생전 인터뷰에서 “파커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렇게 클 수 없었을 것이다. 파커는 똑똑한 사람이다”라며 오히려 그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영화 ‘러브 미 텐더’(1956) 영화 포스터.
실제로 파커는 돈벌이에 밝았다. 1956년 엘비스가 20세기 폭스와 영화 출연 계약을 체결할 때의 일화는 유명하다. 영화사가 파커와 협상을 거듭하다 지쳐 “2만5000 달러면 괜찮겠느냐?”고 묻자 파커는 “난 그거면 되지만 그 아이(엘비스) 몫은요?”라고 물어 더 많은 돈을 받아냈다. 이렇게 계약을 체결해 엘비스가 출연한 첫 영화는 ‘Love Me Tender’였다.
엘비스 사망 직후 기자들이 파커에게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묻자 그는 “나는 그저 계속해서 엘비스의 매니저를 할 것”이라고 답했다. 그리고는 멤피스에서 열린 엘비스의 장례식 직후 밤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날아가 엘비스 기념품 판매 계약을 체결하는 사업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엘비스 사망 후에도 돈을 번 것은 매니저뿐이 아니다. 엘비스 역시 지금까지 돈을 벌고 있다. 미국 경영전문지 포브스에 따르면 엘비스는 2014년 한 해 동안에만 5500만 달러를 벌었다. 생전 평생 모은 돈보다 더 많은 금액이다. 그가 살던 저택 그레이스랜드 입장료 수입과 끊임없이 발생하는 음원 판매 덕분이다. 엘비스의 재산을 관리하는 엘비스 프레슬리 엔터프라이즈(EPE)의 자료를 보면, 한 해 평균 50만 명이 그레이스랜드를 방문하며 기일에 맞춰 열리는 촛불집회에는 매년 3만~5만 명이 참석한다. EPE는 2017년 엘비스 프레슬리 사망 40주기를 맞아 그레이스랜드 방문객들에게 입장료 더 받기로 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사망한 엘비스가 버는 돈은 누구에게 돌아갈까? EPE의 지분은 2013년 11월부터 라이센싱 회사인 오센틱 브랜즈 그룹(ABG)이 85%를 보유하고 있고, 나머지 지분은 엘비스의 딸 리사 메리 프레슬리가 갖고 있다. 그는 엘비스의 상속 재산으로 월 10만달러와 건강보험 혜택을 받고 있으며, EPE에서 15%의 배당금을 받고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저택 ‘그레이스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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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1935년 미국 테네시주 투펄로에서 태어났다. 13살 때 멤피스로 이사를 하면서 흑인 음악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18살 때 어머니의 생일선물로 노래를 하고 싶다며 선 레코드에서 4달러를 내고 노래 두 곡을 녹음했다. 로큰롤을 흑인처럼 부르는 백인 가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선 레코드 사장 샘 필립스에 의해 가수로 데뷔했다. ’로큰롤의 제왕‘으로 불렸으며, 현재 팝 역사상 두번째로 많은 음반 판매고를 올린 솔로 가수로 기록돼 있다. 1977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피용익 기자 / 이데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