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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살 딸, 세살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시오노 나나미
시오노 나나미.
아빠가 예전에 재미있게 읽은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를 지은 작가란다.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를 지은 이유가
일본이 100여 년 전, 침략전쟁을 벌인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있지만,
아빠는 그냥 수천년 전 살았던 이들의 이야기가 신기하고 재미있었단다.
암튼 그런 시오노 나나미가
몇 년 전에 십자군에 관한 이야기를 출간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한꺼번에 출간한 것이 아니고, 격차를 두고 3권으로 출간을 했단다.
아빠는 한꺼번에 읽으려고, 3권이 모두 출간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읽기로 마음먹었단다.
3권까지 출간한 지도 꽤 되었는데,
이제서야 책을 집어들었구나.
1. 십자군 이야기의 상식
아빠가 대학 입학 시험 때 세계사라는 과목은 필수가 아니고 선택이었단다.
즉 선택을 하지 않으면 시험을 안봐도 되었고,
아빠는 세계사를 선택하지 않았단다.
학교 수업에서 공부는 하지만, 열심히 할 생각은 없었어.
그리고 아빠는 당시 역사라는 과목을 좋아하지 않았거든.
어른에 되어서야 역사가 무척 재미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렇다 보니 십자군이라는 것은 뭐, 유명하니까 대충은 알고 있지만,
자세히는 알지 못한단다.
세계사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몇 번 접했지만,
아빠의 기억력은 그것을 지속시킬 능력이 되지 않는단다.
그래서 이번에 이 책을 통해서 십자군 이야기를 자세히 알고 싶었단다.
꼼꼼이 메모하면 읽으려고 계획은 했지만,
그리 꼼꼼하지는 못했단다.
2. 1차 십자군 결성
때는 11세기...
당시 유럽은 카톨릭 교회 중심의 서유럽과 그리스정교회 중심의 동유럽으로 나뉘어져 있었단다.
서유럽은 신성로마제국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들이 있었고,
동유럽에는 비잔틴제국이 자리잡고 있었어.
카톨릭 교회와 그리스정교회는 교리 해석을 두고 갈등으로 보이곤 했단다.
그런데, 비잔틴 제국이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어.
이에 동로마 비잔틴 제국의 황제 알렉시누스는
서로마의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대.
명목은 이슬람 침입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해 달라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빼앗긴 자신의 땅을 찾아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속마음이었을거래.
그런 속마음을 교황이 알면서도 알겠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교황에게도 있었어.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개혁 성향이 강한 교황이었는데,
당시 로마에 들어가시도 못하는 신세였단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아인리히였는데,
이 아인리히가 이전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고,
그것을 취소해 달라고 눈내리는 마당에 서서 용서를 구했다고 유명해진 카노사의 굴욕의 주인공이었거든.
그런데, 우르바누스 2세가 그때 교황의 측근이었거든.
아인리히의 영향력으로
우르바누스 2세는 로마에 입성하지 못하고,
자신의 지지 기반인 이탈리아 남부 노르만 왕조의 지원을 받았단다.
가톨릭은 공의회를 교황 주도하에서 로마에서 하는 게 정상인데,
앞서 이야기한 아인리히 교황이 이를 허락하지 않아,
프랑스 클레르몽이라는 곳에서 공의회를 했어. 이때가 1095년이었어.
그는 이 공의회에서 처음으로 이슬람 세력과 싸우러 가기 위한
성전에 참여해 달라는 연설을 했단다.
최종 목표는 카톨릭의 성도인 예루살렌 탈환이었단다.
그가 대립 구도에 있던 비잔틴 제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성전 참여를 독촉한 이유는
이를 이용하여 권위를 높이려고 이유가 있었대.
아인리히 황제와 맞먹을 수 있는 권한 말이야.
암튼, 사람들은 모였고,
오리엔트 원정을 하기로 했고,
붉은 십자가를 가슴과 등에 넣은 옷을 입기로 했고,
그래서 이들을 십자군으로 불렀단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황제는 참여하지 않아꼬,
프랑스왕은 불륜 문제로 교황에게 파문을 당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 또한 원정길에 오를 자격이 안되었단다.
결국 프랑스 지역을 주축으로 한 여러 제후들이 참여를 했대.
제후들은 십자군 집결 날짜인 1096년 8월 15일까지 시간이 남았으니,
이것저것 준비를 했어.
그런제 문제는 많은 제후들이 모이긴 했지만,
일관된 지휘 계통이 없었다는 거야.
아무래도 황제나 왕이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모양이었던거지.
여러 제후들 중에 대표적이고 영향력있는 3개파는 눈여겨 봐야해.
첫번째 툴루즈 백작 레몽과 교황의 대리인인 아데마르 주교.
두번째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와 그의 동생 보두앵
세번째 풀리아 공작 보에몬드와 그의 조카 탄크레디...
가 그들이야...
그들은 일단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모이기로 했어.
그런데, 그들보다 솔선수범해서 먼저 움직인 약간은 무모한 무리들이 있었다고 하는구나...
3. 은자 피에르
은자 피에르란 사람이 있었대.
그 사람은 교황의 연설을 듣자마자 원정을 떠날 사람들을 모았어.
원정 혜택으로 완전면죄를 내걸었기 때문에 귀에 솔깃한 사람들이 많았대.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빈민층이 대부분이었고,
제대로 군사 훈련을 받은 사람들도 없어서,
누가 보면 거지무리들로 볼 수도 있었다는거야.
암튼 그들도 십자군이고, 사람들은 그들을 민중 십자군이라고 불렀어.
그들은 약속시간보다 이른 1096년 봄에 출발을 했어.
처음 출발 인원은 10만명이었으나, 무기도 없고, 긴 행군에,
먹을 것도 없는데,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이도 많지 않아서,,,
먹을 것을 빼앗기 위한 싸움도 벌이지고, 병에 걸려 죽는 이도 많고..
사람수는 급격히 줄어들었어..
그리고 1096년 7월 콘스탄티노플에 십자군으로 가장 먼저 입성했는데,
그 모양새를 본 황제는 골치 좀 아팠을거야.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의 눈에는 거지무리들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들을 빨래 보내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여,
바로 배를 알선해 주어 소아시아로 보냈단다.
예상했겠지만, 무기도 없는 그들이 싸워서 이길 수나 있겠니?
대부분 죽고 말았어, 살아 있는 사람들만 일부 도망을 갔단다.
한 사람의 무모한 행동으로 죽은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독실한 신자였으니, 죽고 나서는 그들의 원하는 곳으로 갔으려나?
4. 1차 요충지 안티오키아 점령
'진짜'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에 모였단다.
비잔틴 황제는 그들에게 충성 맹세를 요청했어.
제후들은 자신들은 가톨릭교회 소속이고, 비잔티 제국의 황제는 그리스졍교회 소속이니
충성 맹세를 할 수 없다면서 반발하고 거절했지만, 배를 얻을 수 없어 형식적으로 응했다고 하는구나.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진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대.
비잔틴 황제는 왜 그런 걸 요청했을까? 웃음이 나오는구나.
...
당시 소아시아는 셀주크 투르크 인들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슬람 지역도 내분으로 늘 싸움이 많았어.
십자군은 니케아를 공격하였고,
그곳은 이슬람 쪽에서는 아르슬란이란 사람이 방어를 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미 작년에 민중 십자군을 손쉽게 무찌른 경험이 있어
이번에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을거라고 하는구나.
하지만, 이번에는 '진짜' 십자군이었으니, 아르슬란은 크게 지고 말았어.
하지만 십자군도 큰 피해를 입었대.
...
십자군은 군사요충지인 안티오키아로 향했어.
그들 중에 젊은 제후는 느리지만 편하게 돌아가는 길보다
산맥을 바로 넘는 길을 선택했어.
보두앵과 탄크레디가 그들이었는데, 그들은 산맥을 넘어서서
각자 독자 행동을 했단다.
보두앵은 에데사로 향했는데, 에데사의 성주가 그를 양자로 삼았고,
곧 그 에데사의 성주가 죽는 바람에 보두앵이 성주가 되었단다.
그렇다보니 다른 십자군들의 안티오키아 공격에 관심이 없어졌어.
에데사의 성주로 만족한 것이지.
한편, 탄크레디는 지중해 연안의 두 개 도시를 공격해서 점령했단다.
그가 이끼는 기사들은 적은 인원인데도 불구하고 이루어낸 승리였어.
뒤늦게 본군이 도착한 십자군은 안티오키아 성 밖에 진을 치고 대치를 했어.
당시 안티오키아 성의 성주는 시얀이라는 사람인데,
그는 쿠르크인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그들이 군대를 보냈으나,
오는 길에 십자군에게 패하고 말았어.
십자군들은 제후 별로 군대를 나누어 안티오키아의 성문을 지켰어.
그런데, 전투 시간이 길어지면서 식량부족으로 고생하였단다.
사실, 십자군 식량은 비잔틴 제국에서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 상식인데,
속 좁은 비잔틴 제국 황제는 비협조적이었어.
한편, 이슬람 세력에서는 모술의 케르보라는 사람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지원을 왔어.
하지만, 그들이 곧바로 안티오키아로 올 수는 없었어.
중간에 이데아를 거쳐야 하는데, 이곳은 보두앵이 지키고 있었잖아.
그가 이곳에서 방어를 잘 해서 3주를 지연시켰고,
그 3주가 십자군에게는 귀중한 시간이 되었단다.
..
그 3주 동안에,
안티오키아에서 보에몬드의 지략으로, 그리고 보두앵이 적군의 지원을 지연해 주어서 이겼단다.
성주였던 시얀은 죽고, 시얀의 아들은 도망을 갔대.
하지만, 성에 있는 식량창고에 실수로 불을 지르고 말았단다.
뒤늦게 도착한 이슬람의 원군을 이끌고 케르보가 공격해왔어.
첫 전투에서 십자군의 희생자가 많았어. 배도 고프고 말이야.
영악한 비잔틴제국의 황제는 군대를 이끌고 안티오키아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오다가
케르보의 공격에 도망을 온 제후들을 중간에서 만나서 안좋다는 소식을 듣고
비잔틴제국의 황제는 도망치듯 돌아갔어.
이 일로 제후들은 크게 격분했어.
....
공작 보에몬드는 케르보를 상대로 싸우는데,
협상을 하는 척 하면서 그들이 정보틀 캐냈어.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십자군은 드디어 안티오키아를 점령했단다.
자, 이제 이 안티오키아의 여주가 누가 될지가 문제였어.
다들 보에몬드가 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프랑스 출신 레몽이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하여 갈등을 일으켰지만,
보에몬드가 영주가 되었단다.
한편, 십자군에 동참했던 교황 대리 자격 아데마르 주교가 역병에 걸려 죽고 말았단다.
보에몬드가 안티오키아를 지키고,
나머지 십자군들은 레몽, 고드프루아, 탄크레디를 주축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했단다.
5. 예루살렘 점령
십자군의 군대는 전쟁을 치를수록 더욱 강해졌어.
십자군이 몰려온다는 소식에 예루살렘은 이슬람에서 교황에 해당하는 이집트의 칼리프에게 지원을 요청해서
지원군이 오긴 했지만, 사기충천 십자군에게는 역부족이었어.
결국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예루살렘 안의 모든 이교도들을 죽이는 만행으로 승리를 자축했어.
그리고 이번에도 예루살렘의 영주를 뽑아야 하는데,
레몽이 작전상 양보의 뜻을 내비췄는데, 다른 제후들이 얼씨구나 하면서
이번 전투에서 공을 많이 세운 고드프루아를 영주로 뽑았단다.
이에 삐친 레몽은 예루살렘을 떠나버렸어.
그리고 젊은 제후 탄크레디는 인근 성을 공격하고 점령하여 영주 자리를 차지했단다.
예루살렘이 이제 가톨록의 도시가 되었으니 대주교를 뽑을 필요가 있었어.
교황 대리 자격으로 왔던 아데마르 주교가 죽었기 때문에
다음 적임자로 십자군과 함께 온 고해를 해주던 신부가 대주교로 뽑혔다가
나중에 교황이 다시 보낸 대리인 다임베르트가 대주교가 되었단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나라로 지칭하고 고드프루아는 예루살렘 왕이 되었어.
...
십자군의 위기가 찾아왔어.
예루살렘의 왕 고드프루아가 역병으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고,
안티오키아의 영주 보에몬드는 시찰 중에 이슬람의 포로로 잡혔어.
그리고 영주 자리를 차지못해 삐쳐버린 레몽은 콘스탄티노플까지 가버렸고...
유력한 제후들의 한꺼번에 공석이 된거야.
하지만, 이슬람이 이런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는구나.
보에몬드가 포로로 잡힌 소식을 듣고 보두앵이 구출하려고 했지만, 어디에 잡혀 있는지 잘 몰랐어.
그 와중에 형 고드프루아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그와 이름이 똑같은 사촌 보두앵에게 에데사를 맡기고,
보두앵은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행했고,
고드프루아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 왕이 되었단다.
...
안티오키아의 보에몬드가 포로로 잡혀가 공석이 되어버린 안티오키아 성주로
보두앵의 지시로 탄크레디가 맞게 되었어.
그러다가 보에몬드가 석방되어 돌아와서 다시 안티오키아는 보에몬드가 성주가 되었단다.
....
6. 십자군 국가
십자군이 소아시아 일부를 점령하고 난 뒤에,
이슬람 세력의 반격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어.
그 중에 에데사를 처들어온 세력이 있었는데,
이 전투에서 십자군은 십자군 원정 이후 첫패배를 기록하였고,
에데사의 영주 사촌 보두앵이 포로로 잡혔어.
공석이 되어버린 에데사의 영주를 또 탄크레디가 임시영주가 되었고,
그는 계속된 셀주크 투르크 사람들의 공격을 잘 막아냈단다.
그리고 사촌 보두앵이 다시 석방되어 돌아오자, 다시 탄크레디는 백수가 되었다고 하네.
...
한편, 삐친 레몽은 심기일전을 했는데,
트리폴리를 점령해서 결국 그곳 영주가 되었는데,
얼마 못가 죽고 말았다고 하는구나.
...
보에몬드는 감소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이탈리아 남부의 자신의 영지에 도착했단다.
그리고 그때 교황인 파스칼라스에게 십자군 추가 요청을 하였지만, 미온적이었고,
프랑스 왕 필리프에게 도움을 요청했더니 적극적이었어.
그런데 보에몬드의 판단 미스...
그냥 병력으로 바로 오리엔트로 가면 될 것을...
아드리해 건너편 두리스란 곳을 공격했어.
그곳은 비잔틴 제국의 영향권에 있는 곳이고, 베네치아 공화국이 해상무역에 함에 있어 중요한 해상도시였어.
비잔틴 제국과 베네치아의 협공을 받아 보에몬드는 패배하고,
주변 국가들로부터 신용을 잃고 십자군 지원도 받지 못했어.
결국 이탈리아에서 머물다가 1년뒤 죽고 말았단다. 그의 나이 예순하나였어.
....
당시는 역병이 많이 유행해서 젊은 사람들도 많이 죽었단다.
1차 십자군의 주역인 탄크레디도 1112년 전투길에서 서른여섯의 나이에 역병으로 죽었어.
예루살렘의 왕 보두앵은 18년동안 예루살렘의 왕의 자리에 있었는데,
그러면서 그는 왕권 강화에 힘썼어.
그리고 그는 가톨릭 뿐만 아니라, 그리스정교, 이슬람교도 인정을 했어.
그리고 지중해 인근 해양 도시도 포섭하여 해외 무역을 통해 경제활동도 활발히 했어.
그렇게 십자군 군가는 예루살렘 중심의 연방국가로 틀을 잡아갔단다.
그런 예루살렘 왕인 보두생이 죽으면서,
1차 십자군 주역들이 모두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단다.
보두앵이 죽고, 에데사를 지키던 '사촌' 보두앵(보두앵 2세)가 예루살렘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단다.
....
여기까지가 십자군 1권에 관한 이야기란다.
책제목 : 십자군 이야기 1
지은이 : 시오노 나나미
옮긴이 : 송태욱
펴낸곳 : 문학동네
페이지 : 345 page
펴낸날 : 2011년 07월 07일
책정가 : 13,800원
읽은날 : 2014.10.26~2014.10.29
글쓴날 : 2014.11.0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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