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 부산.,용두산공원 초량왜관


조선통신사.

.....일본열도(日本列島)..
동북아시아에 위치한 군도
일본의 영토로 6,852개의 섬.
......................................
일본 열도는 남북으로 매우 길게 뻗어있는 탓에,
최고기온 42도, 최저기온 영하 44도로.,다양하다.
동해, 오호츠크 해, 태평양 바다에 둘러싸여있다.
열도의 태평양 쪽은 쿠릴-캄차카 해구, 일본 해구
등의 깊은 해구가 형성되어, 해구 전체가 지각 변동과
조산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또한 지구 상에
확인되는 화산 10%가 일본 열도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질학적으로 유라시아 판의 동쪽과
북아메리카 판의 남서쪽에 위치한다.
이 두 대륙판 아래로는
태평양 판과 필리핀 해 판의
2 개의 해양 판이 침강하기 때문에,
유라시아 대륙에서 분리된 호상 열도가
되었다고 추정된다.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개화기 이전까지 조선이 에도 막부에
파견한 대규모 사절단을 지칭하는 명칭.
일본의 입장에선 무로마치 시대부터
에도 시대 후기 까지 조선 통신사라고
불렀을 뿐 정확한 명칭은 통신사이다.
일본 열도에 파견된 사신에게 붙은 통신사
명칭은 고려 시대에도 존재한 것으로 보이나,
임진왜란 전 회례사(回禮使), 보빙사(報聘使),
경차관(敬差官) 등의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이전의 통신사는 명나라라는
동일한 사대국을 가진 동등 외교 관계의
국가로서 파견하는 외교 사절로, 왜구의
단속 요청, 대장경 증정 등이 주 임무였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사절들 중에도
무로마치 막부의 새 쇼군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목적 사절들이 있었다.
1510년 중종 5년 삼포왜란을 계기로
세종 이후 일본과의 사절 왕래는 끊겼으나
선조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 청으로 다시 파견.
1590년 일본 교토에 파견된 통신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조선 침공을 탐지할
목적으로 위해 파견된 중요한 특사였다.
조선은 서인의 대표인 정사 황윤길과
동인의 대표인 부사 김성일과 역시 동인
이었던 허성을 서장관으로, 정탁을 사은사로
차출하여 1590년 3월 6일 출발하였다.
정사와 부사는 일본 내에서도 대립
하여, 손발이 맞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1591년 음력 1월 28일 일본에서 귀환한
통신사 일행은 3월 조정에 상반된 보고.
서인이었던 정사 황윤길과
동인이었던 서장관 허성은
“왜적이 쳐들어 올 것이다”.
동인이었던 부사 김성일은
“침략 징조를 발견 못했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민심을 동요시킨다”는 의견.
조정에서는 그의 의견을 선택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국서에는
이미 명을 침략한다는 ‘정명가도’가 있어
조선 침략에 대한 암묵적인 대비는 있었다.
........................................................
임진왜란 후 조선은 일본과 외교 단절.
도요토미를 대신해 들어선 에도 막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쓰시마 번을 통해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요청해 왔다.
조선은 막부의 사정도 알아보고,
왜란 때 끌려간 포로쇄환을 위해
1607년(선조 40년) 강화를 맺었다.
그에 따라 1607년부터 1624년까지
3회에 걸쳐 사명당 유정을 비롯한 사절을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 이름으로 파견.
이들의 주 임무는 일본과의 강화와
그 조건 이행의 확인, 일본의 내정 탐색,
조선인 포로 및 유민 송환 등이었다.
그뒤 조·일 국교는 형식상 조선이
한 단계 높은 위치에서 진행되었다.
일본 사신의 서울 입경은 허락하지 않고
동래 왜관에서 실무를 보고 돌아가게 했다.
일본은 조선의 예조참판이나 참의에게
일왕 친서를 보내와 사신 파견요청이 관례.
일본은 60 차에 걸쳐 차왜(差倭)를 보냈으나,
조선은 1607년부터 1811년에 이르기까지 12회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해 250년간 평화관계 지속.
통신사의 정사(正使)는 보통 참의급에서 선발
일본에 가서는 재상 수상과 동격 대우를 받았다.
조·일 국교가 수립된 뒤 1636년부터 1811년까지
9회의 통신사는 에도 막부 새 쇼군 취임 때마다
그 권위를 국제적으로 보장받기를 원하는 막부의
요청으로 취임축하 형식적 임무로 삼아 파견되었다.
그 외에 그 당시 정치·외교 현안에 관련된 협상
조선 후기의 통신사는 전기와 달리 조선과 일본이
함께 청나라라는 신흥 대륙 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서로 독립국 인정 및 우호관계 유지 의미를 가졌다.
대략 4~5백 명의 통신사 일행을 맞이하는 데
1,400척 배와 1만명 인원이 일본 측에서 동원되고
접대비는 한 번(藩)의 1년 경비를 소비할 정도로 성대.
조선후기 통신사는 처음에 양국 평화유지 수단
평화가 오래 지속되어 그 역할이 사라지는 대신
문화적으로 선진문물 전달 창구로서 역할이 강화.
통신사 행렬이 한양에서 에도까지
왕복하는데 6개월에서 1년 쯤 소요.
배로 부산에서 오사카
다음에는 육로로 갔다.
조선 통신사가 일본에 남긴 유산으로는
당인 춤, 조선 가마, 필담창화 시문(詩文)
일본으로부터 고구마, 고추,
토마토, 구리, 접부채, 양산, 벼루,
미농지(美濃紙) 등이 조선에 전래.
통신사는 국왕의 외교문서
서계(書啓)를 휴대하고 인삼,
호피, 모시, 삼베, 붓, 먹, 은장도,
청심원 등을 예물로 가지고 갔다.
일본 전 국민적인 축제 분위기 속에서
통신사를 맞이하고, 향응을 베풀었으며,
통신사의 숙소에서 수행원으로부터 글이나
글씨를 받기 위해 몰려든 군중으로 인산인해.
1636년부터는 막부의 요청에 의해
마상재(馬上才)로 불리는 2명의 광대를
데리고가서 쇼군 앞에서 곡예를 연출했다.
그 인기가 높아 곡마 묘기
통신사의 행진을 자개로 새긴
도장주머니가 귀족 사이에 유행.
일본의 화가들은 다투어
통신사 일행의 활동을 대형 병풍,
판화, 두루마리 그림 등으로 그렸는데
수많은 작품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으며,
통신사가 준 사소한 선물을 귀중하게 간직해
지금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것이 적지 않다.
통신사가 한 번 다녀오면
일본 내에 조선 붐이 일고,
일본의 유행이 바뀔 정도로
일본 문화발전에 영향을 끼쳤다.
일본인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같은 지식인은 통신사에 대한 환대가
중국 사신보다도 높은 데 불만을 품고
이를 시정할 것을 막부에 요청하였다.
일본에서 18세기 후반 이후
일본의 국수정신 앙양을 위해
《일본서기(日本書紀)》 연구
국학(國學) 운동이 일어난 것을
일본 지식인의 조선 붐에 대한
견제심리로 보는 시각도 있다.
1711년 통신사 정사로 일본에 간 조태억은
당시 일본 최고 유학자 아라이 하쿠세키와 필담
동서 양양의 지식에 해박했던 아라이의 학문과
세계관이 조선통신사에 크게 인상적이었다 한다.
통신사 수행원들 기록에 따르면,
일본 발전상에 대한 찬사가 많다.
그리하여 이러한 일본의 발전상은
조선의 학문계에도 영향을 끼쳤고,
북학파 박제가는 일본을 예로 들어
해외무역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학문적으로도 일본의 유학 사조인
고학(古學)의 연구성과가 조선에 들어와
정약용 등 실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1811년 마지막 파견 통신사는
양국의 재정이 불안하여 대마도에서
역지통신(易地通信)으로 거행되었으며,
그 이후의 통신사 파견은 경제적인 부담에
점점 노골화되는 서구 열강의 문호 개방 요구로
통신사를 파견하거나 영접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후 일본에서는 국학운동이
해방론(海防論)으로 발전하고,
19세기 중엽 메이지 유신 등으로
인하여 일본이 개화하고 난 뒤에는
조선을 침략하자는 정한론이 대두.
그 연장선상에서
1876년 운요호 사건.
...........................
.



고조선과는 국경 이웃이었던.,진나라


진 시황제 재위 당시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부산 영도를 방문하였다는
제나라 방사(坊舍).,서불(徐巿)
..................서불.....................
서불(徐市)은 중국 제나라 출신으로,
도교의 방사(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로
활동하다가 진나라로 갔는데 기원전 219년부터
기원전 210년 사이에 진시황(秦始皇)의 명을 받아
5,000명의 사람과 3,000명의 동남동녀(童男童女)를
60척의 배에 나눠 싣고 불로초(不老草)를 구하러
삼신산(三神山)을 찾아 떠났다고 한다.
서불은 우리나라 남해안으로 와서
부산 영도에 들렀다가 남해를 거쳐
제주도로 갔다고 하는데 이런 전설을
뒷받침하듯이 제주도 서귀포, 남해 금산
등에 徐巿過此 라고 새겨진 바위들이 있다.
'서불이 다녀갔다'
뜻말인 '서불과차'.
불은 해신과 싸운다며 병사를 모집,
해상에 넓게 펼쳐진 토지를 발견하여
그땅의 왕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도교에서
신성시하는
삼신산(三神山)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
영도에 있는 봉래산은 절영진 첨사
임익준(任翊準)이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옛부터 부산 지역에
불로초에 대한 전설이 내려온다.
.
우리나라에 도교 유입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삼한 시대의 유물 가운데
서수(瑞獸 : 기린, 상서로운 동물)가
새겨진 한경(漢鏡)[중국 거울]이 있고,
삼국 시대 고분 벽화에 사신도(四神圖)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보다 훨씬 전에 소개된듯.
청동기시대 후기부터 중국 및 만주 지역의
주민과 문화가 바닷길을 통해 부산에 유입.
이러한 사실은 구서동 유적 등이 대변해준다.
일본의 경우 서불이 다녀갔다는
20여 지역에서 서불을 기리고 있으며,
서불이 문물을 전하고, 동남동녀 3,000명이
일본인의 조상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1990년대에 중국 강소성 연운항시
유현 금산향 서복촌에서 서불과 관련된
유물이 발견되면서 실존인물로 확인되었다.
이에 국제서복학회는
부산을 서불의 가장 중요한
방문지로 인정하고 있기도 하다.
.........................................
시황제 29년(BC218년) 서불은
진시황에게 큰 꾸중을 들었으나
바다에서 큰 상어가 나타 났을 때,
이를 퇴치할 수 있는 연발 궁수의 명수
20명을 더 데리고 봉래산(금강산)으로
향하여 낭야 부근의 람산두(嵐山頭) 또는
연운항(連雲港)에서 힘차게 출발하였다.
앞으로 제2차 항해 항로는
경남 거제도 해금강을 거쳐
봉래산인 금강산, 여기에서도
불로초를 찾지 못한 서불은 중대한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여기에 두가지 설이 있다.
한반도 남동부해안에 상륙,
진한을 세웠다는 기록이.,첫째
일본으로 건너가 나라를 세우고
그곳에 무덤까지 있다는 설이.,둘째.
..................
...................
부산 남구 문현4동은
보만강(寶滿江)하구에
위치한 아름다운 동리였다.
보만강은 동천이 범천과
나누었을 때.,'동천' 이름
마을 앞 언덕 아래
백사청송(白沙靑松)의
부산만이 한눈에 들어왔다.
문현4동의 배정고등학교 주변 강선대는
신선들이 내려와 놀던 전설이 깃든 강선대.
중국 전국시대가 끝나고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아 동남동녀 3천 명을 딸려 보낸 술사
서복(徐福)이 당시 들렀던 곳이 문현동 강선대였다.
그 서복의 불로초 행차를 기록한 『徐市過此』
(서불과차, 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는 뜻) 비석이
옛날 강선대에 있었는데 해방 후 혼란기에 사라졌다
서복은
산둥반도 출발
제주도, 남해,
부산 강선대 거쳐
일본으로 갔다.
일본에는 서복이 나타났던
20여 곳마다 서복을 기린다.
서복이 문물을 전하고 동남동녀 3천 명이
일본인의 조상이었다고 신앙처럼 믿고 있다.
서복이 실재한 인물이었음을 20여 년 전
중국 장쑤성 연운항시 유현 금신향 서복촌에서
서복관련 자료가 발견되면서 확인되었다.
국제 서복학회는 부산을 서복의
가장 중요한 방문지로 인정한다.
제주도가 최근 서귀포에 서복전시관을 세웠고
남해군도 2006년 서복세미나를 남해에서 열었다.
서복은 중국인과 일본인 모두 관심갖는 문화컨텐츠.
서복의 중요 방문지인 부산에서
서복전시관과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는 것이 서복학회 주장.
...................
...................
영도 봉래산은 서불이
불로초를 찾던 곳이자
신선들이 모여산다는 곳.
봉황이 날아드는
형상의 산.,봉래산
...............영도 봉래산(395m)
금련산맥의 남서부 말단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서 부산광역시를 한눈에 볼 수 있고,
수평선을 바라보면 대마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봉래산을 중심으로 최남단 해안절벽 태종대.
부산의 상징 오륙도와 일본의 대마도 전망대
유람선에서 등대와 자살 바위, 신선 바위, 망부석,
아치섬, 해안 절벽, 해송 숲 등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영도대교는 1934년 개통
1966년 다리가 들리는 도개 중단
옛 명성을 찾기 위해 최근 도개 기능을
되살리기 위한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봉래산 주변에는 신석기시대 동삼동 패총이 있다.
또한 봉래산은 부산에서 곤충이 가장 많이 서식한다.
고려집게벌레, 늦반딧불이 등 희귀종 발견.,학계의 관심.
주변에는 해사고등학교, 한국해양대학교,
해양경찰서, 국제 크루즈 터미널, 조선소,
국립해양박물관 바다와 관련된 기관이 많다.
..........................................................
봉래산 산제당과 아씨당」은
신돈(辛旽)[?~1371]의 모함으로
절영도 유배 최영(崔瑩)[1316~1388]
장군의 첩이었던 선녀 때문에 말이 병들어
죽어 버리는 일이 발생하자 정발[1553~1592]이
조정에 아뢰고, 동래 부사 송상현[1551~1592]이
선녀의 혼을 위로하고자 산제당과 아씨당을 짓고
해마다 제를 올렸다는 산제당과 아씨당의 유래담이자,
제당 설립과 기원을 밝히는 당신(堂神).,전설의 고향.
신라 시대부터 절영도 국마장(國馬場)과
관련된 전설이 깃든 산제당과 아씨당은 원래
영도초등학교 부지 안에 있었던 것을 1915년에
영도 봉래산 중턱[신선동 2가 141번지]으로 이전
산제당과 아씨당에서는 해마다 두 차례
[음력 1월 15일, 9월 15일] 당제를 모신다.
.....봉래산 산제당 아씨당 전설....
영도(影島)는 조선시대 절영도 국마장.
그런데, 영도에서 말을 실어 나갈 때에
서쪽으로 끌고 나가면 까닭도 없이 병사.
그러던 차에 한 선녀가 2 노복을 데리고
절영도로 들어간후 나오는 것을 본 사람이
없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때 무관 '정발'이 부산진 첨사로 새로 부임.
그는 군마가 병사하는 이유가 선녀 탓이라 생각.
그러던 어느날, 정발의 꿈에 한 선녀가 나타났다.
그 선녀는 자신은 천상에서 쫓겨나
탐라국 여왕이 되었다가 최영 장군이
탐라 점령때 그의 첩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최영 장군이 탐라를 떠난 뒤
신돈의 모함으로 절영도에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지만 끝내 만나지 못하고
절영도에서 한많은 귀신이 되었으니 자신을 위해
봉래산에 사당을 짓고 혼을 위로해 달라고 했단다.
정발은 그 꿈이야기를 조정에 아뢰고,
조정에서 동래 부사 송상현에게 명하여
산제당, 아씨당을 짓고 해마다 봄가을 제사.
그후로 군마가 폐사하는
일이 사라졌다고 전한다.
..................................
「봉래산 산제당과 아씨당」
모티프.,‘원귀 신원(寃鬼伸寃)’
억울하게 죽은 귀신의 원한을 풀어 준다는
원귀 신원 이야기는 전국적으로 널리 분포.
특히 「봉래산 산제당과 아씨당」은 최영,
신돈, 정발, 송상현 등의 실존 인물이 등장
'영도 국마장 역사적 배경' 흥미로운 스토리
또한 제주도민이 영도로 이주한
역사적 사실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전설 역사성의 한 일면을 볼 수 있다.

1952년 영도섬 해녀

![[부산 영도] 태종대 겨울 스케치](https://t1.daumcdn.net/cfile/blog/1324D5334D381FA002)
영도 태종대

영도 해안로

영도 봉래산.



소매물도
소매물도는 바닷물이 빠지는 시간과
육지로 나가는 배 시간을 잘 맞추면
별 어려움 없이 여행을 즐길 수 있다.
그런데 소매물도에 가면
꼭 봐야할 비경.,글씽이굴.
.
서복이 불로초를 찾기 위해
내한했다가 글씽이굴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반하여 徐市過次
(서복과차 : 이곳에 다녀간다)라고
써놓고 갔는데 그 후에 ‘글이 써진 곳’
‘글쓴데’ ‘글씽대’ 글씽이굴로 불린 것.
기원전 219년 서복이 다녀간 글씽이굴은
파도가 빚은 신비로운 해식동굴 그 자체.
서복은 불로초를 캐길 원했겠으나 결국
찾지 못해 제나라로 돌아가지 못했단다.
불로초를 찾아 떠난 그는
중국의 6개 나라를 통일한
진시황의 총애를 받던 신하.
이 같은 서불설화는 신숙주의 해동제국기,
이이의 성호사설, 남해․통영․거제도․서귀포
지역의 문헌 등 해녀들 노래 속에서도 구전.
우리나라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굴
거제시 갈곶, 함양군 서암동, 서귀포
장방폭포, 금당포 등에 흔적들이 있다.
서불에 대한 전설은
완전한 허구가 아니라
고대 중국과 부산 지역의
문화적 교류의 한 단면이다.
......진(秦, BC 221~ BC 206)......
진시황에 의해 전국 시대를 통일한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국가이다.
전신은 지금 산시성 지역에 있던 진 백작국,
그 국호는 초기 중심지인 진(秦) 땅에서 비롯.
국력은 기원전 4세기 쯤 전국 시대 때 상앙이
행한 법가에 따른 개혁에 의해 급속도로 강성.
기원전 3세기 중후반에 진나라는 국력이 약했던
주나라 시작으로 전국 칠웅을 정복 후, 중국 통일.
진나라의 지배기간 동안, 진은 무역을 증가시켰고,
토지 지주제를 폐지해 농업 발전, 치안을 강화했다.
이로서 중앙집권제도를 강화해
중앙정부가 국민들을 직접 통치.
만리장성과 같은 대형 공사들을
시행할 수 있게 된 토대가 되었다.
진제국은 화폐, 도량형 통일
등 많은 개혁을 이루어 냈다.
군사력의 발전, 전술이나 무기,
운송체계 등이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예전 나라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분서갱유와 같은 일도 벌였다.
진 군사력은 비록 강성했지만,
진나라 역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사망한 뒤
그의 아들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신하들은 권력을 휘두르려 했으므로
신하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권력다툼.
결국 신하들과 진 황제 모두
사망하는 결과에 이르렀던 것.
몇년 후 국민들에 의해
혁명이 일어나 멸망했다.
국가의 짧은 지속시간에도 불구하고,
진은 중국 전체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또한 중국의 유럽식 이름인 China 역시
진(秦 : Chin)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


.......한(漢, BC 206 ~ 220)......
진 이후의 중국의 통일 왕조로써
후에 삼국으로 갈라졌다(220 ~ 280).
한 왕조는 고조 유방(劉邦)에 의해 건국.
한나라는 섭정 왕망이 세운
신에 의해 잠시 맥이 끊겼으나
중국 역사 상 가장 강대했던 나라.
서한(전한, 기원전 206년 ~ 9년)
동한(후한, 25년 ~ 220년)으로 나뉜다.
400년간 존속, 오늘날 중국의 92%를 차지.
한족 역시 이 왕조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한나라는 중앙정부 직접통치 군과
몇 개의 제후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제후국들은 서서히
오초칠국의 난에 의해
그들의 자치권을 잃었다.
기원전 200년에 유라시아 초원지대
동쪽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흉노족.
한나라와 싸워 승리해 전쟁보상금 지불.
명목상 공주가 예물을 가지고
흉노 선우와 결혼하는 형태의
동맹조약을 흉노와 맺었던 한.
그러나 조약을 맺었음에도 불구
흉노족은 한나라 국경을 계속 침입
무제 (재위: BC 141년 ~ BC 87년)는
전방위로 흉노를 압박하며 전쟁을 시작.
30년전쟁으로 흉노는 크게 패하여 급속히 피폐.
한무제가 대외원정을 위해 개정한 법안을 악용.
대토지를 소유하기 시작한 호족들에 의해 한나라는
땅을 잃고 가난에 시달리는 백성들이 점점 늘어났다.
이 전쟁으로 인해 흉노족은
외몽골 북쪽으로 밀려났다.
그후에 흉노는 내부분열로
남흉노와 북흉노로 갈라졌다.
흉노 지배하 선비족과 오환족이
독립하여 남흉노와 함께 한나라에
책봉을 받고 조공하는 위치가 되었다.
89년 한나라가 남흉노와
선비족의 병력을 이끌고
북흉노를 공격 멸망시켰다
(후일에 위나라의 관구검 역시
오환족과 선비족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하기도 했다).
92년 이후, 환관들의 정치개입이 심해졌고,
외척 세력과 황태후와의 권력 다툼 등으로
결국 한나라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또한 제국은 황건의 난과
오두미도의 난 등을 선동한
도교에 의해 위협받게 되었다.
후한 영제 (재위 168년 - 189년) 사후
환관들은 군인들에 의해 학살을 당하고
귀족들과 장군들이 제국을 나누어 가졌다.
위왕 조비가 후한 헌제의
황위를 빼앗아 한나라 멸망.
한나라는 경제적으로 큰 발전을 한 시대
주나라때 처음 화폐제도가 크게 발전했다.
기원전 119년 중앙 정부 조폐국에 의해 발표된
화폐 제도는 당나라 때까지 유지 존속되었다.
전쟁에 쓸 비용과
새로 얻은 영토에
사람들을 정착시키려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정부는 기원전 117년
소금, 철기 산업 국영화
정부독점은 후한에 이르러 폐지
그로 인해 줄어든 수익은 개인사업가
세금을 높게 매김으로써 수입을 올렸다.
한나라 황제는
나라 권력의 중심.
황제는 정부회의 주재.
한나라는 무제 치세기간부터
유교를 교육과 정치에 도입했고,
동중서와 같은 유학자들을 등용.
향거리 선제를 실시했으며 이런 정책은
1911년 청나라 멸망 때까지 계속 되었다.
한나라 시대에 과학과 기술 역시 큰 발전.
종이제작, 선박 키, 음수 등이 만들어졌다.
한나라 인구는 5천 5백만에 달했으며
농업, 수공업, 상업 등의 비약적인 발전
기원전 111년 베트남 남비엣을 정복하였다.
..........................................................



경남 사천시ㆍ남해군ㆍ하동군 사이에 있는.,진주만.
일명 사천만은 큰 익곡만으로., 남북의 길이 약 18㎞,
동서 길이 약 15㎞, 평균수심 3.6m이며 만구는 삼천포.
'경남 도청소재지' 진주를 품은.,진주만.
'사천만'이란 지반의 침강이나 해수면의 상승으로
육지에 바닷물이 침입하여 생긴 해안 골짜기란 뜻말.
중국 사천성 유비가 다스린 촉나라 사천과 같은.,지명.
삼천포(三千浦)는 '물길 3000리'를 뜻하는 지명.
고려 성종때 수세미 수취를 위한 통양창을 설치.
'개성~ 통양창' 물길이 3000리라고 하여.,三千浦.
'개성~삼천포' 직선거리 400km(천리길)이지만.
물길로는 '남해안~서해안' 일대를 들르는 조운로.
그렇게 돌아 다녔던 조운로 물길 거리가 삼천포 유래.
'삼천포 ~ 남해군 창선도'
사이에 열려있는.,수로(水路)
그곳 너비는 약 0.5㎞ 정도이다.
경남 진주만 사천시.,와룡산.
지명에 얽힌 유래를 살펴보면
그곳의 중요한 역사를 알 수 있다.
.
삼국지(三國志)에
사천은 산세 험한 곳.
유비가 다스린 촉나라 영역.
촉나라 모신(謨臣).,제갈량(181~234)
자는 '공명(孔明)'이며, 별호는.,'와룡.'
사천 '와룡산' 지명과는 한자까지 같다.
촉나라 사천과
경남 진주만 사천은
산세가 험한 것이 공통점.
.


삼한 형성시기는 '한(韓)' 명칭의
사용시기와 일차적으로 관련된다.
위만(衛滿)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고조선 준왕의 세력이 한반도 중남부
(충남·전북 일대)로 밀려오면서 사용 설.
이미 그 이전부터 청동기문화
토착 세력집단 등을 지칭하는 설.
고조선 유민 남하 전부터 청동기집단
이들이 삼한의 모체가 된 것은 인정된다.
삼한으로 분립된 것은
준왕세력의 이주 이후
위만조선의 멸망에 따른
파상적인 이주민의 남하.
이 과정에서 이들이
토착집단과 결합하며
각지에서 철기문화에
기반한 새 정치세력들을
형성한데서 비롯한 듯하다.
삼한 중 으뜸·종가를 가리키는 '마'
마한이 먼저 형성되어 종주의 위치.
진한 경우는 위만조선 당시 한(마한)의
북쪽에서 중국과 직접교역을 시도했던
독자세력 진국이 해체되면서 한의 영향력
하에 '진한' 명칭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기원 전후 시기까지
삼한은 3개 그룹으로 나뉜다.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각지에서 성장해 나간
삼한 소국들이 훗날 어느 한 세력에 의해 통합.
삼한에는 각기 연맹체 맹주가 있었지만,
후대와 같이 일원적인 집권체제를 갖추고
연맹체 간 초월적인 군림 존재는 아니었다.
각각의 소국들은 자체 동력을 가지고
중국 군현이나 여러 다른 세력들과 관계
경제적·군사적 필요에 의해 맹주국과 연결.
그러나 소국들간의 분쟁에 따라
어느 한 소국이 다른 소국에 의해
통합되어 정치적· 경제적으로 복속.
3세기 전반 상황을 전하는〈삼국지〉
위지 동이전 삼한 소국들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존립하고 있었다.
삼한의 소국들은 계속 세력이
우세한 집단에 의해 군사적으로
정복당하거나 그 위협에 못 이겨
스스로 복속해 들어감으로써 결국
4세기 중반에 이르러, 마한지역은 백제
진한지역은 신라에 의해 모두 통합되었다.
변한의 경우는 통합의 구심체가
강력하지 못했던 관계로 후기까지
가야연맹체 이름으로 소국들이 잔존
6세기 중반 전 신라에 의해 개별적으로
정복당하면서 소국들은 소멸하고 말았다.

삼한 소국으로는 마한 50여 개,
진한과 변한 각 12개씩의 이름이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전한다.
소국들은 큰 경우 1만여 가(家)로부터
600~700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모.
평균 2,000~3,000가로 이루어진 소국들.
영역 상으로는 현재의
군(郡) 정도 세력범위였다.
소국에는 중심 읍락 국읍과
다수의 일반 읍락이 있었다.
국읍은 상대적으로 세력이 강하고
정치·경제·문화 주도적인 기능을 수행.
국읍과 읍락은 종래 씨족공동체 단계의
혈연에 의한 결합관계에서 벗어나 새로이
지연에 의해 형성된 결합관계를 갖고 있었다.
국읍에는 소국의 규모에 따라
신지(臣智)·험측(險側)·번예(樊濊)·
살해(殺奚)·읍차(邑借) 등으로 불리는
정치적 통솔자, 천군 제사장이 따로 있어
제정(祭政)이 분리된 구조였음을 알 수 있다.
국읍의 수장은 각 소국간의 교역을 주관
읍락에 대한 경제적·군사적 지배권을 행사.
각 소국에는 '소도' 별읍이 있어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달아
귀신을 섬겼다는 기록이 있는데
죄지은 자가 이곳으로 도피하면
잡아갈 수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재래의 공동체적 질서와
계급분화에 기반한 새 지배질서 사이의
마찰을 줄이는 역할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


낙동강 하류 및 남해안에는 철자원이 풍부
변진 소국들 중에는 철 생산과 교역을 통하여
부(富)를 축적, 읍락집단(邑落集團) 통합에 성공.
인근 지역까지 영향력을 뻗어나간 집단들이 많았다.
철기유물· 유적이 다량 출토된
김해 구야국, 동래 독로국(瀆盧國),
함안 안야국(安邪國) 등이 그러한 예.
특히 진한과 변한은 철산지로 유명하여
마한(馬韓)·낙랑군(樂浪郡)·대방군(帶方郡)·
동예(東濊)·왜(倭) 등이 모두 이곳 철을 사갔다.
철광석은 야철 과정을 거쳐 철제 도구를
용이하게 제작할 수 있는 중간 소재로 가공
물자교역 수단으로서 화폐 같이 사용되었다.
이 지역의 철기 보급 상태로 미루어
변진구야국을 중심으로 낙동강 하류의
다수 소국들 사이에도 경주·대구 중심의
세력권과 대비되는 일정한 세력권을 형성.
그러나, 3세기 후반 진(晋)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동이 제국(東夷諸國) 중
마한과 진한은 있으나 변한은 찾아볼 수 없다.
『삼국지』기록에 의하면
변진에는 12개 소국 이외에
독립된 거수(渠帥)가 있는 여러
소별읍(小別邑 : 소국 미만 집단)이
있다는 기록 역시, 당시 변진이 특정한
구심체를 정점으로 일괄적으로 파악되는
정치적인 집단체가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변진은
경상도 정치 집단들 중에서
진한 소국 연맹체에 포함되지 않고
개별적 세력으로 존속하던 정치 집단들.
변진 소국의 대부분은
독립된 가야소국으로서
5· 6세기 경까지 계속 성장.
변진인은 신체가
크고 머리를 길렀으며
의복이 깨끗하였다고 한다.
또한 폭이 넓은 세포(細布)를 짜고
법속이 특별히 엄하였으며, 왜와 인접한
일부 지역에서는 문신(文身) 풍속이 있었다.
.
근래 김해 양동리(良東里) 등에서
구야국(狗邪國) 시기의 토광목관묘,
토광목곽묘가 대량 발굴되어 이 지역
중심으로 국제교역의 흔적을 보여 준다.

국제교역 흔적 대표적 발굴 유물들은
한경(漢鏡), 중국제 철제 솥, 유리 구슬,
수정 목걸이, 일본산 동모(銅矛) 등이다.
.......부산광역시......
신석기시대 유적으로는
영도구 동삼동·영선동·조도,
서구 암남동· 다대동, 북구 금곡동
해안과 강변에 위치한.,조개더미 유적들
석기·빗살무늬토기 등 생활용구
먹고 버린 조개·동물뼈들이 포함
이 지방 선주민 어로생활 흔적들.
.
청동기시대 유적은 선주민과 달리
내륙의 평지나 구릉지대에서 발견.
그 흔적들은 부산 시내 전역에 있고
특히, 동래 지구에 집중되어 발견된다.
이미 원시 농경생활을 알게 된 그들.
사회, 문화는 급속히 발달해 삼한시대
유력한 부족국가들을 형성했던 것 같다.
변진 독로국(弁辰瀆盧國)은
동래지방에 있었던 고대국가.
이 나라는 김해 가야연맹체와도
밀접한 관계유지로 부강하게 성장.
동래 복천동고분군과
연산동고분군의 규모와
부장품 내용이 그것을 증명.
그러나 이 지방은 지리적 여건으로
신라 세력에 일찍부터 흡수되었던듯.
탈해이사금(57∼79) 시대
거도(居道)가 계략으로서
우시산국(지금의 울산)과
거칠산국(居漆山國: 동래)을
쳐서 빼앗았다는 기록의 연대.
이를 그대로 믿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이 지역이 일찍부터
신라의 수중에 들어간
사실을을 암시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동래는 옛 장산국(萇山國) 또는
내산국(萊山國)인데 신라가 이를
점령 거칠산군(居漆山郡)을 두었다.
757년(경덕왕 16)에
동래군으로 개칭하고
동평현, 기장현을.,영현
본래 동평현은 대증현(大甑縣)이고
기장현은 갑화량곡현(甲火良谷縣)인데
경덕왕 때 개칭한 것이며, 기장현은 뒤에
양주(良州: 지금의 양산)로 이속 되었다.
835년(흥덕왕 10) 범어사가 창건되었다.
.
1018년(현종 9)동래현이
울주의 영현이 되었다가
뒤에 현령을 두어 분립했다.
동래현의 영현인 동평현은
양주(梁州)의 영현으로 이속.
고려 전기에는 동래 본관
동래정씨 일족이 중앙정계에
진출함으로써 호족세력을 형성.
동래의 온천도 유명하여
많은 문인들이 이곳을 방문
고려 후기에는 남해안 중심으로
발호 왜구침략을 방비하기 위해
경상도도순문사 박위에 의해서
동래읍성이 축조되었다.
1397년(태조 6)동래에 진을 설치.
병마사가 판현사(判縣事)를 겸했다.
고려 말부터 창궐하던 왜구가 1396년
동래현·동평현·기장현을 침범하였다.
1423년(세종 5)
부산포를 개항해
왜관을 설치했다.
1428년 동평현이
동래현으로 복귀.
『세종실록지리지』
세종 때 동래현 호구
290호 2,416인이며,
동평현은 108호 627인.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으로
왜관폐쇄 후에 1512년 다시 개관.
1547년(명종 2)동래현이 도호부 승격
1592년(선조 25)울산 개운포(開雲浦)
경상좌수사영을 수영(水營)으로 이전.
조선중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산첨사 정발은 부산진성을,
동래부사 송상현과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는 동래성을,
다대포첨사 윤흥신(尹興信)은
다대포성을 사수하다가 순국.
이 싸움에서 많은 군·민이
성과 운명을 같이했으며,
이 지방 주민들은 스스로
의병으로 단합해 많은
전공을 세워 난이 끝난 뒤
선무원종공신의 칭호와 은전을
받은 사람만도 66인이나 되었다.
1605년 동래부사 윤훤
송상현을 모시기 위해
송공사(宋公祠)를 세웠다가
1624년(인조 2) 충렬사(忠烈祠)로
사액되면서 임진왜란 때 이 지방에서
순국한 모든 충신·열사를 합사하게 되었다.
당시의 공방전을 사실적으로 그린
「동래부순절도」와 「부산진순절도」
동래 안락서원(安樂書院)에 전해왔다.
임진왜란 때 동래성이 함락된 뒤
현으로 강등 1599년 도호부 승격.
1607년 두모포에 왜관이 다시 설치.
1655년(효종 6)동래부에
독진(獨鎭)이 설치되었다.
1690년(숙종 16) 부사가 방어사를
겸했다가 2년 뒤에 방어사가 폐지했고.
1678년 왜관을 초량(용두산)으로 옮겼다.
1763년(영조 39) 통신사로
일본에 간 조엄(趙曮)이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와 동래부사 강필리.
그 재배에 성공함으로써 전국에 퍼졌다.
『동래부읍지』에 의하면
1759년의 동래부 호구수는
6657호 2만 5753인이었다.
1876년(고종 13)
병자수호조약에 따라
부산포가 개항장이 되었다.
1877년부산에 조계(租界)가 설치되고
일본·청국·영국의 영사관이 설치되었다.
1883년 개항에 따른
항만관리·외교사무를
담당하는 감리를 두어
동래부사가 이를 겸임.
부산해관(釜山海關)
부산세관을 설치했다.
1890년 동래감리서
(東萊監理署)를 설치.
1895년 지방관제 개정으로
동래부는 경상남도에 소속.
1903년 군으로 강등했다가
1906년 다시 부로 승격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부산시 동래군이 되었다.
1906년 일본영사관이 폐지
이사청(理事廳)이 개설되었다.
1908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었다.
옛 부산역 일대의 매축 공사가 준공.
1909년 부산~ 시모노세키
사이에 연락선이 취항하였다.
1914년 동래부가 부산부로 개편.
1915년에 부산진과
동래 온천장 사이에
전차가 개통되었으며,
이듬해 시내 전차도 개통.
1919년 3월 11일
동래고등보통학교·
부산상업학교·부산진여학교
학생들이 사전계획에 따라 만세시위
많은 시민들이 호응해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3·1운동 후 안희제는 동지를 규합해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해, 국내외
연락을 담당하고 독립운동자금을 조달.
한편 그는 신문사를 경영해 언론으로
투쟁하는 등 일생을 광복운동에 헌신.
1920년 의열단원 박재혁.
부산경찰서 폭파, 옥중 단식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한흥교(韓興敎)·윤현진(尹顯振) 등
해외로 나가 일생 동안을 광복운동
.
1925년 경남 도청을
진주에서 부산 이전
1934년 영도대교 준공
1936년 동래군 서면과
사하면 암남리를 편입하고,
1942년동래읍·남면·사하면을
편입해 시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8월 18일부터
1953년 8월 15일까지
임시수도로 반격의 기지
피난민이 몰려들어
인구가 급증하였다.
유엔군 전사자가 늘어나자
1951년 유엔묘지 대연동 조성
1955년 인구가 100만 명을 넘어
1957년 6개 구청을 신설하였다.
1960년 3·15부정선거 규탄시위가
연일 일어나 각 지방으로 퍼져나갔다.
1963년 정부직할시로 승격하면서 동래군
구포읍·사상면·북면 및 기장면 송정리를 편입.
1970년 경부고속도로,
1973년 남해고속도로 개통
1976년 김해국제공항을 개설.
1978년에 김해군 대저읍·
명지면과 가락면 일부 편입.
1983년 경남도청이 창원시로 이전
같은 해 낙동강 하구언공사가 시작.
1987년 지하철 제2단계 구간이 개통.
1989년 김해군 가락면과 녹산면이,
의창군 천가면이 각각 편입되었다.
1995, 1. 1 직할시에서 광역시로 변경
3, 1 연제구·수영구·사상구 기장군 설치
...................................................





조선시대 부산 지도





2017.2.1 부산.,영도 태종대

주전자섬이 바라보이는.,태종대.
.............태종대............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이
삼국통일 위업을 이룩한 후,
전국을 순회하던 중 이 곳의
웅장한 해안절경에 심취하여,
활을 쏘며 즐겼던 곳이라고 하여
태종대(太宗臺) 지명이 유래되었다.
영도해안 최남단
태종대(최고봉250m)
중턱에는 폭7m
순환 관광도로가
4.3km에 걸쳐 있으며,
오륙도, 대마도가 보이며
기암절벽 등이 해금강 같다.
유람선을 타면.,
등대와 자살바위,
신선바위, 망부석,
아치섬, 태종대의
해안절벽, 해송 숲 등
천혜 절경들이 펼쳐진다.
태종대가 숨기고 있는
진면목에 감탄하게 된다.
.................................
![[부산/사하구]축복의 빛 쏟아지는 태종대 가는 길 - 절영해안산책로](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mblogthumb4.phinf.naver.net%2F20160112_90%2Fkoreatrails_1452599611240l65af_JPEG%2F7.JPG%3Ftype%3Dw2)
김춘추(金春秋, 604~661)는 왕이었지만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라 불리지 않고
일반인 이름인 ‘김춘추’라 불린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두 가지.
김춘추는 왕손이었지만
왕자가 아니면서 왕위에 올랐다.
또 성골제도를 뛰어넘어 진골로서
왕위에 올랐던 최초의 신라 왕이었다.
김춘추 할아버지는 진지왕이다.
즉위 3년 만에 정치를 그르쳤다는
죄목으로 쫓겨나 곧 죽었던.,진지왕.
그 뒤를 이은 진평왕은 그의 외할아버지이자
종백부(아버지와 사촌 사이가 되는 큰아버지).
김춘추는 이처럼 왕손의 혈통을 받았지만
할아버지 때문에 귀족 대우를 받는 처지였다.
그러나 김춘추는 신성하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행동거지가 신중했으며, 왕족의 풍채까지 갖췄다.
김춘추는 성장하면서
왕실과 귀족 사회에서
두루 인정을 받기 시작.
어릴 적부터 큰 뜻을 품고
왕위를 넘보면서 삼국통일을
이룩할 야망도 키워 나갔으며
진골의 신분으로 이런 당찬 꿈을
키은데는 당시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
신라는 한반도 후미진 동남쪽 작은 나라
고구려, 백제, 일본의 압박을 받아 오다가
6세기 중엽에 이르러 가야를 통합하게 된다.
이 여세를 몰아 국경을 한강 유역까지 넓히자
고구려, 백제, 일본의 큰 반감을 사게 되었던 것.
당시 중국에는
수나라와 당나라가 연달아
중원통일을 이룩하고 있었는데,
신라는 수로로 당과 통하고 있었다.
김춘추의 소년시절 때
고구려와 백제는 끊임없이
신라를 위협했고, 신라는 내정을
다지면서 고구려 백제와 맞서야 했다.
이런 환경에서 큰 뜻을 품게 되었는데
혼자 역량만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함께할 동지가 필요했는데 이때 경주에
그와 뜻을 같이할 인물이 있었으니 김유신.
김유신은 가야의 왕손이지만
폐쇄적인 신라 귀족사회에서
그의 출세는 한정되어 있었다.
김유신은 용화향도(龍華香徒, 화랑도 집단)를 이끌며
심신수양하고 젊은이들을 훈련시켜 세력을 키워 나갔다.
김유신 쪽에서 먼저 김춘추를 주의 깊게 보았다.
정월 어느 날, 김유신은 김춘추를 집에 초대했다.
두 사람은 마당에서 제기차기 하며 즐겁게 놀던 중
김유신이 제기놀이에 열중한 김춘추 옆으로 다가가
일부러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고 이어 김춘추에게
자기 집 안으로 들어가 떨어진 옷고름을 달자고 했다.
김유신은 첫째 여동생 아해에게 이 일을 시켰는데
아해가 부끄러워하며 사양하자, 둘째 여동생 아기
( 문희)가 나서서 옷고름을 달아 주어 이 일을 계기로
'김춘추와 문희' 둘 사이에 사랑이 싹터 아기가 생겼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유신은
“부모의 허락도 없이 임신했다”며
동생을 크게 꾸짖고, 온 서울에 여동생
아기를 불태워 죽인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리고 김유신은 선덕여왕이
남산에 놀러가는 날을 택해서
마당에 불을 지펴 연기를 냈다.
선덕왕은 이 연기의 사연을 옆에 있던
김춘추에게 듣고 그에게 구해 주도록 했다.
두 사람은 왕의 허락을 얻어 정식 혼인을 했다.
그런데 이 일화에는 몇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김유신은 8살 아래인 김춘추를 꾀어 매부로 삼아
첫째 신분상 혼인할 수 없는 관계를 합법적으로 해결.
둘째, 꿈에서 첫 여동생이 산에 올라
온 서울에 가득 차게 오줌을 누었는데,
꿈을 동생에게 팔아 문희가 왕후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조작해서 이 혼인에 정당성을 세웠다.
만약 그들이 평소에
권모술수나 부렸더라면
잔꾀로 치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김춘추와 김유신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었고,
이 관계는 신라 역사를 크게 바꿔 놓은 사건
두 사람은 힘을 합쳐 두 가지 목표를 향해 나갔다.
김유신은 무장으로서 고구려군과
백제군의 침입을 막느라 동분서주.
그는 동쪽과 북쪽에서 계속 이어지는
적군의 침입에 맞서 대항하고 때로는
국경넘어 과감하게 쳐들어가기도 했다.
진덕왕 재위시 반역세력을 토벌했기에
그의 신임과 명망은 날이 갈수록 치솟아
전군을 통솔하는 대총관(大摠管)을 맡았다.
김유신은 20년 동안 실패를 모르는 장수였다.
이에 반해 김춘추는 외교 전문가였다.
그의 발길은 이웃 나라로 움직여 다녔다.
백제 침입을 막기 위해 고구려 원병을 요청.
그것이 뜻대로 안되자 일본에 도움을 청했다.
백제에는 밀정을 보내 정보를 빼내고,
그곳 지배층에 이간을 붙여 그는 마침내
배를 타고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들어갔다.
아들 김법민(金法敏)을 동행
당나라에까지 들어간 김춘추는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백제 정벌군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성공적으로 받아냈다.
마침내 백제 정벌을 위한
나당연합군을 결성시킨 것.
나당연합군의 결실은 두 나라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이긴 하지만,
김춘추의 외교력이 빚어낸 작품이다.
그는 이 정도의 합의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당나라에 조공의 사신을 보내게 했고,
아들 김인문(金仁問)을 그곳에 머물게 하여
뒷일을 도모해 그의 명성은 신라 왕실에 울렸다.
마침내 새 기회가 왔다.
654년 진덕왕이 대를 이을
자식이 없이 운명한 것이다.
이때 국왕을 추대 또는 폐위시키는
권한을 쥔 화백회의는 힘이 없었고,
국왕직속인 상대등이 화백회의를 좌우.
처음에는 왕손 알천(閼天)에게 섭정을 맡겼으나
김유신과 알천은 뜻을 맞춰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
김춘추가 진골 신분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명망과 능력도 있었지만,
그 배경에 김유신의 힘이 있었다.
신라의 왕위에 오른 김춘추는
몇가지 획기적인 조치를 단행.
첫째, 당의 문물제도를 받아들여
신라에 율령국가의 체제를 다졌다.
이에 따라 중앙집권의 성격을 띤 통치가
원활하게 이루어졌고 국가 관료체제가 확립.
둘째, 군사제도를 정비하여 통일전쟁에 대비했다.
그리고, 김유신을 정점으로 군사 지휘체계를 세웠다.
이렇게 왕권이 강화된 조건에서
김춘추는 먼저 백제 정벌을 단행.
13만 당군이 백제의 사비성을 쳤고,
5만 신라군이 합세해 사비성을 공략.
끝내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
당은 백제에
5도독부를 두어
신라를 견제했기에
김춘추는 새로운 시련.
더욱이 고구려군은
북한산 인근까지 공격해 오고
일본군은 금강 하류까지 쳐들어왔다.
백제의 부흥군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춘추는 새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다.
당군은 백제부흥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본국에 증원군 요청, 신라에 구원을 요구했다.
김춘추는 당군의 침략의도를 간파
그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주면서
백제부흥군 항전유도, 당군 약화를 시도.
신라군은 백제부흥군과 전투를 벌일 때
소극적으로 대응 인명의 손실을 적게 내고
작전상 무기를 빼앗기는 전략으로 대응했다.
이런 신라의 양면전술은
백제유민 포섭에도 사용한다.
백제 벼슬아치들에게 지난날 자리를
인정해 주고 생활도 안정시켜 주었던 것.
이런 전술은 김춘추 사후에도 계속 이어졌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에도 무마수단으로 사용.
그러나 김춘추는 백제를 멸망시킨지 꼭 1년 만에
운명해 그의 손으로 완전한 통일을 이룩하지 못했다.
김춘추 그의 나이 59세.
그가 죽고 난 뒤 신라는 진골이
왕위에 오르는 세습군주제로 바뀌었다.
따라서 그는 후대 신라왕의 중조(中祖)가 되었고
통일신라의 기초를 다진 영웅으로 추앙을 받았다.
삼국통일은 그의 아들 문무왕과 김유신이 이룩했다.
그러나 이 통일에는 역사적 평가가 따른다.
외세를 끌어들여 통일을 이룩한 반토막 통일.
따라서, 고구려 옛 영역까지 확보하지 못했다.
,
고구려 뒤를 이어 일어난 발해와
통일신라는 우호관계를 유지 못하고
통일신라와 발해는 갈등관계를 빚었다.
이런 평가는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결과론.
김춘추 때문에 빚어진 결과는 아닐 것.
뒷날 신라는 당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처절한 투쟁을 벌였고 그러한 과정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은 서로 협력했고,
신라는 이를 주도해 당 세력을 몰아냈다.
그러나 후대들은 한반도 39도선에서 안존.
당나라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에 놀아나
북쪽 발해와 경쟁하며 남북조 관계를 유지했다.
김춘추는 분명히 통일의 기초를 다진 영웅
민족 분단을 겪고 있는 오늘날, 남북을 통일시킬
미래의 주역들은 김춘추 외교력을 되새겨 봐야 할 것.

................. 태종무열왕비............................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릉 앞에 세워진 돌비.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비들은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받침돌은 거북 모양을 하고, 머릿돌에는 이무기의 모습
태종무열왕릉비는 이러한 양식이 나타난 최초의 본보기.
...........................................................................

태종대


^ 자살바위 밑., 갯바위 낚시터.
필자는
이곳에서
갯바위 낚시
경험이 있다.
부산지점 파견 직장생활.
1980년 봄으로.,기억된다.
부산지점 발령난지 몇달 후.
영도에서 출발하는 낚시배.
인근 갯바위를 두루 돌면서
포인트마다 손님을 내려준다.
이곳 갯바위가
마지막 반환점이라
마지막으로 하선했다.
10/20평 남짓 규모
명당 갯바위 낚시터.
가장자리 10평 쯤 공간은
바다물이 넘실거리는 낚시터.
갯바위 중간에는 10평쯤 마당바위.
이곳에서 올려다보는
태종대 자살바위는 절경.
마치, 신선이 된 느낌이었다.
낚시하며
주위 풍광을
바라봐도 좋고
마당바위에 누워서
태종대를 올려다봐도
'자살바위' 경관이 환상.
한참 갯바위 낚시
삼매경에 빠졌을 무렵
갯바위가 바닷물 속으로
조금씩 잠겨들기 시작했다.
썰물에 들어와
밀물에 나가는
갯바위 낚시터.
그 사실조차 망각한채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신선놀음에 빠져 있었던 것.
함께 동행한 일행이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
"오륙도(五六島)가 왜
오륙도 인줄 혹시 알아?"
"갑자기 그건
왜 물어봐?"
"섬 하나가
둘로 갈라져
물속에 잠기지.
썰물에는 다섯 섬
밀물에는 여섯 섬."
"그럼 여기도 잠겨?"
"아마 그렇게 될껄?"
그는 우비 한벌을 꺼내
아래 위로 중무장 한후에
갯바위 정상에 자리 잡았다.
"왜 불편한 그곳에 앉아?"
"조금 더 있으면 알게 돼."
'썰물에는 20~30명이
둘러앉을 만큼 넓지만
밀물 끝에는 두 세명이
서있기도 비좁은 갯바위.'
그 사실을 깨닫게 될 무렵에
나는 초조함을 참을 수 없었다.
파도에 온몸이 이미 젖었기 때문.
"낚시배는 언제 와?"
"곧 올때가 되었는데,,"
"만약 늦게 온다면..?"
"내 자리 만 남겠지."
"만약 혹시 오지 않는다면.,?"
"갯바위가 물속으로 잠기겠지."
큰 파도가 한번 지나칠 때마다
갯바위 밖으로 튕겨나갈듯 했다.
큰 파도는 피할 곳조차 없는 낚시터.
"헤엄쳐서
탈출하면
어떨까?"
"자신 있으면 해보던지.
태평양으로 떠내려 갈 수도.,"
태종대 자살바위에 연신 부딪치며
되돌아오며 갯바위를 맴도는 큰 파도.
마치, 저승사자가 오라는 손짓 같았다.
"더 이상 못 참겠어.
헤엄쳐서 탈출하지?"
"설령, 자살바위 해안에 당도해도
파도에 휘말리면 온몸이 찢어질껄?
난 난 여기서 낚시배를 기다릴꺼야.".
"파도가 심해 오지 않는다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문제."
"나 혼자 탈출을 해도 돼?"
"마음대로.,난 말리지 않아."
그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면
태종대 자살바위 절벽에 부딪쳐
몸이 산산조각 찢어질 것만 같았다.
한강을 건널 수영 실력이지만
불과 40~50m 자살바위 밑까지
파도 속에서 건널 마음이 사라졌다.
"달리, 방법이 없을까?"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큰파도가 일으키는 안개 물보라에
속옷까지 흠뻑 젖은채 추위에 떨다가
돌아온 낚시배에 탈 때까지 지옥 같았다.
"추우면 내
우비를 입어"
"정말 ,고마워."
"천만에 말씀"
그때서야 나는
부산 토박이들의
신고식 장난기에
휘말린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1976 ~1983년 직장생활.
'1980~1981' 만 2년 동안
부산 지점에서 근무했기에
부산 명소는 두루 쏘다녔다.

부산지점 사무실 내에서
앉아 근무하는 시간보다는
하청공장 50여 거래처를 순회
품질검사 시간이 훨씬 더 많았다.
그래서, 부산은
이 구석 저 구석까지
구경다닐 기회가 많았다.
그래서, 거래처 지인들과도
바다낚시를 어울려 쏘다녔다.
가까이로는 주전자섬, 오륙도,
멀리는 고흥반도 소록도 앞바다.
1박2일 원정도
마다하지 않았다.
부산에서 갯바위 낚시는
누구나 즐기는.,대중적인 취미.
출퇴근 길에도 즐기는 사람이 많다.
릴낚시 하나 갖고 다니면
어디서든 갯바위 낚시 가능.
특히, 영도는 바다낚시의 천국.

태종대 아래로 내려가는 길

,절영도(絶影島) 태종대.,해변

태종대 자살바위 아래.,해녀촌

영도에서 바라본.,오륙도.

영도 해양대학
예전에 이곳은
밀수꾼들의 천국.



해양대학 영도해벽


조선후기 부산에 '대마도인 거주지' 왜관(倭館)이 있었다.
조선은 외교와 무역을 위하여 대마도인에게 거주지를 마련.
조선후기 왜관은 500명이 넘는 대마도인이 거주한 작은 마을.
1678년(숙종 4) 4월 두모포 왜관에서
초량 왜관으로 이사갈 때는., 총 489명.
왜관의 서관(西館)에 거주하는
대마도인들은 단기간 머물렀지만,
동관에는 왜관 내 주요 업무담당 실무자와
상인, 그들 생활의 편의를 돕는 사람들이 거주.
그러나 누구나가 왜관으로 와서 머무를 수는 없었다.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대마도에서 처자식을 데리고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이 많았는데,
이들은 정해진 기한을 넘기거나 불법적으로
왜관 주변에서 살고 있었기에 늘 문제가 되었다.
몇 차례의 송환 절차도 있었지만
장기 불법 체류는 근절하지 못했다.
임진왜란 이후로는 그들을 볼 수 없었다.
왜관이 다시 설치되면서 왜관에 거주하려면
대마도주 허가 사항이고 가족동반 거주는 금지.
하여, 왜관은 대마도인 남자 성인 만의 거주공간.
이러한 거주 제한은 골칫거리 불법체류를 막는 방안.
왜관 업무를 마치면 가족이 있는 대마도로 돌아갈 때문.
낯선 타국에서 대마도인 남자 성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646년(인조 24) 두모포 왜관이 대대적으로 수리할때,
대마도는 조선 측에 일본인 목수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조선에서는 일본식 자재, 일본기술 건물로 재건축을 용인.
이 수리로 다다미[疊],
후스마[襖], 쇼지[障子]
등 일본식 건축물 왜관 등장.
1783년(정조 7) '부산사람' 변박(卞璞) 그림.,왜관도(倭館圖).
다다미 파는 다다미 가게로 보아 왜관 내 건물에 다다미가 깔린
집들이 왜관 일본인들이 보통 거주하는 공간으로 세워진 모양이다.
조선의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목욕탕도 등장.
습도 높은 일본에서는 일찌기 목욕 문화가 발달.
왜관 집집마다 목욕탕이 한두개씩 설치되어 있었다.
목욕탕은 물을 끓이는 시설 때문에 불을 사용했다.
그래서, 본채에서 떨어진 곳에 짓는 경우가 많았다.
초량왜관은 조선인 기술자에게 목욕탕 건축을 요구.
조선인 기술자는 "목욕탕 같은 것은 지어본 적 없다."
그때마다 일본인 측에서는 "목욕탕은 꼭 지어 달라."
하여, 초량왜관에도 역시 목욕탕을 짓게 되었다 한다.
두모포에서 시작된
일본식 건축 양식은
초량 왜관에도 계승.
초량 왜관에는 두모포 왜관 때보다
훨씬 많은 일본식 건물들이 생겨나면서
왜관의 외형은 일본인 마을을 닮아 갔다.
그래서, 부산에 놀러온 조선의 외지 사람들은
이국(異國) 왜관을 구경삼아 가보기도 하였다.
초량왜관 일본인들은 동관의 수문(守門) 앞에서
매일 서는 아침 시장[朝市]에서 식재료를 구입했다.
일본인이 일용하는 생선, 채소, 과일, 쌀 기타 잡물 등.
조선 상인들은 왜관 수문 앞에 아침시장을 열어
초량왜관 일본인의 생활편의를 도모하도록 하였다.
조선인이 왜관으로 생필품을 팔러오는 경우가 많았다.
초량왜관 일본인들이 워낙 오리고기를 좋아해
겨울철 동지까지는 김해에서 오리를 잡아서 팔고
동지 이후에는 가덕도에서 잡은 대구 청어를 팔았다.
초량왜관 일본인들은 남자 성인들만 거주해
조선인 여자에 관심많은 것이 문제시 되었다.
왜관 일본인들이 시장에 나와서 물건을 살 때
젊은 조선인 여자가 파는 물건에만 몰려들었다.
조선인 남자상인이 파는 물건에는 관심이 없었다.
젊은 여자가 파는 물건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값을 두배를 치루며 거래했다.
그래서, 남자나 나이든 여자 상인은 줄고
아침시장에는 젊은 조선여자 상인이 늘었다.
심지어 “어물과 채소를 파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딸을 파는 것”이라 조롱받기도 했다.
아침시장은 조선인 젊은 여자와 일본인 남자의
매춘 , 교간(交奸) 사건의 온상으로 주목되었다.
식재료는 왜관 일본인에게 선물로 건네줬다.
조선관리들은 명절 및 특별한 날.,식재료 선물.
1729년 조선관리로부터 추석과 세밑에 받은 선물 중
식료품과 관련된 것을 보면 찹쌀, 흰쌀, 팥, 잣, 호도,
밤, 외, 곶감, 대추, 녹두가루, 꿀, 황소 고기, 쇠고기,
오리, 산 닭, 말린 꿩고기, 산 꿩, 문어, 대구어, 가자미,
청어, 붕어, 홍합, 해삼, 소주, 청주, 황주, 얼음, 기름,
흰떡, 오층 떡, 흰 사탕이 있다. 곡물부터 육류, 생선,
과일 등 매우 다양한 음식 재료가 왜관으로 들어갔다.
초량왜관에는 여성이 없어 아침시장에서 구입한
식재료를 가지고 거주하는 당사자가 요리 하였다.
관수(館守)[왜관 일본인의 총 관리자]나
재판처럼 신분높은 자는 전임 요리사 고용.
대마도의 요리사는 활잡이와 신분이 같았다.
요리사는 교토나 오사카 근방에서 고용 또는
대마도 요리사를 교토로 요리수업도 보냈다.
왜관에서는 수시로 조선인과의 연회가 열렸고,
관수나 재판이 고용한 요리사는 일본 정통 요리인
혼젠 요리[本膳料理]를 만들어 내는 프로 요리사들.
왜관 밖에 아침 시장이 매일 서지만,
왜관 안에도 식재료 가게들이 있었다.
1705년(숙종 31) 두부장수 12명이 왜관 내에 거주.
그들은 곤약도 판매했고, 부드러운 두부는 주로 판매
일본인들은 조선두부가 단단해 부드러운 두부를 먹었다.
그외 왜관 안에는 면을 파는 ‘면가(麵家)’,
사탕을 파는 ‘당가(糖家)’와 떡집도 있었다.
또한 왜관에 매일 들어가 일본인을 상대로
떡과 엿 장사를 하는 조선인 아이들도 있었다.
왜관 일본인 식사때
국 하나에 찬 세 가지.
술 세 종류 이상은 금지.
왜관 일본인은 이 검약령을 지켜야 하지만
조선인과 만찬자리에는 예외규정이 주어졌다.
조선인 향응요리는 성대하게 차려지도록 하였다.
1671년(현종 12)
왜관에 붙인 지침서
'어벽서공(御壁書控)'.
'조선인 초대만찬은 각별할 것.
일본인끼리 하는 잔치 요리에는
1즙 3채, 술 3색 이상은 절대 금지'
즉, 조선인이 참석하는 모임,
연회는 검약령에서 예외였다.
왜관의 관수와 재판의 요리사들은
온갖 솜씨를 뽐내어 혼젠요리를 대접.
왜관에 업무차 드나들던 조선 관리들은
왜관에서 일본요리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조선 관리들은 일본의 아귀 요리, 스키야키를 선호.
스키야키는 조선인 접대 향응요리에 빠지지 않고 등장.
삼나무 상자에 일본된장을 풀고 생선, 온갖 해산물과 채소.
스키야키 한 번에 사용되는 재료는 9~12종류였다.
일본 국내에서 3~4종류가 들어가는 데 비해 3~4배.
풍성한 재료를 사용한 왜관식 스키야키는
일본 요리가 조선 식문화를 만나 변형한 것.
일본 요리는 적은 양으로 다양한 종류를 아름답게 장식.
반면, 조선 요리는 한그릇에 풍성하게 많은 양을 담는다.
스키야키가 조선인 사이에서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가 하면
19세기 김해지역에서는 부호들을 상대 스키야키 가게가 등장.
왜관의 본격적인 향응 요리는 전형적인 일본요리 잔칫상.
혼젠[本膳], 니노젠[二の膳], 히키데[引て], 고단[後段].
혼젠은 주 요리로 밥·국·생선회·일본식 김치·조림이 나오고,
니노젠은 국 두가지와 반찬 다섯가지를 곁들인 향응요리다.
히키데는 한쪽에 따로 마련한 상에 요리를 올려놓고
음식을 나르는 사람이 손님에게 권하며 돌리는 요리.
고단은 후식으로 일본식 떡국, 수제비, 우동., 면 종류.
화려하게 차려진 향응 요리는
조선인에게 싱거운 음식이었지만,
일본과자는 조선인들이 칭찬을 거듭.
일본과자는 구즈마키[葛卷]·시키사토[敷砂糖]·
양갱·다식[大落雁]·오화당(五花糖)·얼음사탕 등
건과자, 증과자(蒸菓子), 사탕과자류, 과실류 등.
일본과자는 남방에서 나는 사탕 중에서
가장 품질이 뛰어난 백사탕을 사용하였다.
엿에 익숙한 조선에서 일본과자는 호평받았다.
.
1736년(영조 12) 2월 2일의 한 연회에서
조선이 차린 향응 요리는 모두 15접시였다.
대구나 상어 말린 것을 수북이 쌓고 그 위에
꿩·소·가자미의 살 말린 것을 놓고 말린 문어와
전복을 꽃처럼 장식. 돼지고기 편육, 돼지곱창 등
육류와 삶은 달걀, 전복, 해삼, 메밀국수, 김치, 식초,
톳나물 등의 요리와 유과, 강정, 호두, 잣, 대추, 감, 생밤.
당시 대마도인들은 육류를 먹지 않았다.
멧돼지나 사슴고기를 먹는 이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대마도인들은 짐승의 고기는 기피.
왜관 안에는 ‘신주가(新酒家)’,
‘구주가(舊酒家)’.,여러 술집들.
‘소주가(燒酒家)’ 술집도 있었다.
별다른 여흥거리가 없었던 왜관에서는 술판이 잦았다.
술판이 잦다보니 과음하는 소동과 건강 문제도 일어났다.
초량왜관 대마도인들은 조선 술이 입에 맞지 않았던 모양.
'일본어 학습서' 인어대방(隣語大方)에는
그당시 조선 술과 관련된 회화가 남아 있다.
“우리나라[일본]의 술과 귀국[조선]의 술은
특성이 다릅니다만, 우리나라의 술은 귀국의
소주처럼 독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양을]
드시더라도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인어대방
당시 양국 술의 도수가 많이 차이 났던 모양이다.
연회에 온 조선인들이 술에 취할까봐 염려하는 것을
일본인이 양국 술의 차이를 말하면서 달래는 장면이다.
오다 이쿠고로 著 『통역수작(通譯酬酌)』
그의 아들인 오다 간사쿠[小田管作]가 쓴
『상서기문습유(象胥紀聞拾遺)』기록을 보면
“탁주를 마시면 허리에 좋지 않아
잘 걷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조선인은]
일상적으로 독한 것을 즐긴다고 한다”라며
조선의 술이 일본인에게 독하다고 알려져있다.
조선 술은 밀을 거칠게 갈아
물로 반죽한 다음 발효시킨
떡누룩을 사용한다.
일본의 대표 술인 청주는
찹쌀과 멥쌀을 재료로 한다.
여기에 다른 부재료를 추가하여 술을 담근다.
또 조선 남부 지방에서는 막걸리를 즐겨하였다.
이렇게 술맛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왜관 안에는
그들 입맛을 충족시키는 술집들이 들어선 것이다.
대마도는 대일 외교와 무역 업무를 보는 관원 외에도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 왜관 내 소용 물건을 공급하는
상인들에게도 왜관으로 가는 도항증을 발급하였다.
도항증을 청부찰(請負札)이라고 한다.
왜관 내 술 가게와 누룩 가게가 있다.
주옥찰(酒屋札)은 3~4장이 발행되었다.
이들 가게에서는 조선 쌀을 원료로 하여
왜관 내에서 일본술을 주조하여 판매했다.
누룩가게는 조선콩으로 일본된장 간장 제조.
초량왜관에서 생산된 술은
왜관 내 일본인들이 소비하기에는
맛이 괜찮았지만 조선 손님을 접대하는
고급술은 아니라서 향응 술은 본토에서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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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량왜관 내 일본인 생활은 본토와 차이가 없었다.
무사 신분의 대마도인이 왜관 업무를 위해 파견되어
옷에 칼을 차고 돌아다니는 모습도 익숙한 광경이었다.
즉, 대마도 내에는 일본 내와 동일하게
귀천의 차별 없이 무명옷을 입도록 법령.
초량왜관에는
조선인과의 만남을
염두에 두고서 별도로
복식 규제를 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마마와리[馬廻, 말 탄 장수의 주위 사람].
오고쇼[大小姓, 심부름꾼]는 상·하의에 용문을 사용하며,
가타기누[肩衣, 소매없는 무사예복]에 모지리(남자용 외투)
여름에는 얇은 견직물, 하오리[羽織 무사의 예장용 복식].
얇은 견직물을 착용하라는 식인데, 비단의 종류까지 지정.
“왜관은 매일 조선인들이 들어오는 곳이며,
업무의 성격에 따라서는 도중에 역관이나
상인들과 마주칠 일이 생기는데, 그럴 때
옷차림이 볼품없으면 몹시 어색해지게 된다.
그러니 왜관 안을 거닐 때에는 격에 맞게
가벼운 견직물이나 명주를 착용한다” - 규정.
항상 비단옷을 입고 다녀서 조선인을
마주치더라도 옷맵시가 나도록 하였다.
향응은 만날 때만 풍성하게 대접하면 되지만,
옷차림은 왜관 안에 언제나 조선인이 있으므로
언제 마주칠지 몰라 매일 주의를 기울여야 해 불편.
왜관 대마도인 옷차림 격식은 여름에 매우 괴로운 것.
더위가 기승을 부리면 왜관의 일본인들이
술에 취해 옷을 벗고 훈도시[褌, 속옷] 차림.
관수는 이 때문에 골치를 앓았다.
제발 훈도시 차림으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훈계해도 잘 고쳐지지 않았다.
..................
..................
1683년(숙종 9) 약조 제찰비(約條制札碑)에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꼭 지켜야 할 5가지 조항.
제1조항은 “크고 작은 일에 상관없이 왜관 경계 밖으로
뛰쳐나와 함부로 침범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왜관 담장 밖에는
잡인을 접근을 금지하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고, 이 경계를 넘어
몰래 왜관에 들어가는 조선인, 왜관을 빠져나가는 일본인 모두 사형.
그만큼 조선은 왜관을 엄격히 관리하고자 했는데,
이를 어기는 사람이 많아 비석에 새겨 넣은 것이다.
초량 왜관은 약 33만 578.51㎡[10만 평]로
500여 일본인이 살기에 넓은득 생각되지만,
중앙에 용두산, 서관은 대마도 사절단 숙소.
그래서, 동관의 일본인 인구 밀도가 높았다.
한정된 공간 내에서 생활하는 것에
갑갑증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 몇년 조선에서 살다 보면
왜관 바깥구경도 하고 싶었다.
갑갑한 마음에 안되는 줄 알면서도
왜관을 벗어나 바닷가에도 잠시 외출.
왜관 인근 고찰(古刹) 절 구경도 나갔다.
또 동래부와 협상이 잘 이루어지지 않거나
외교, 무역마찰 때 항의표시로 단체로 외출.
조선 조정에서 보면 ‘불법’이었고, 난출(闌出).
왜관 일본인들은 왜관 밖으로 나가 등산을 즐겼다.
왜관 일본인들은 봄가을에는 구덕산 등산을 즐겼다.
산을 타고 멀리 나아가서 단풍을 즐기면서 기분 전환.
오가와 지로우에몽[小川次郞右衛門]은
1806년(순조 6) 일 특송사(特送使) 정관으로
조선에 와서 8개월을 체재하면서 왜관의 풍경을
기록한『우진토상(愚塵吐想)』이란 책에 남겼다.
오가와 지로우에몽은 구덕산을 올라 낙동강을 보고
금정산에서 동래부를 보고 와서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왜관일본인들은 동평현
[현 부산진구 당감동 일대]에
소재한 선암사에 몇차례 다녀갔다.
왜관 안에도 동향사(東向寺)란 절이 있어
신사(神社)와 더불어 일본인의 신앙 장소.
조선 불교에 관심이 많아 멀지 않은
오래된 사찰인 선암사에 갔던 것이다.
1665년(현종 5) 선암사 법당 모습을 기록.
1675년(숙종 1) 일본인 6명이 또 선암사에 가서
예불을 드리고 온 일이 있어 관련자가 처벌받았다.
1697년(숙종 23) 8월 많은 인원이 선암사를 찾았다.
왜관 일본인 18명이 구초량을 거쳐 선암사
다시 94명이 구덕산을 경유하여 선암사 외출.
또 26명이 선암사에 가서 얼마간 머물다 돌아왔다.
당시 일본인들은 울릉도를 둘러싼 영토 문제,
이와 관련한 서계 개찬 문제와 공작미(公作米)
문제 등 여러 현안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였고,
재판 차왜 등이 주도하여 집단적 난출을 시도.
그중 일부가 왜관을 벗어나서 선암사로 간 것.
선암사에서는 김해평야가 훤히 바라보이기 때문에
부산 지역을 두루 살피기 위해 선암사를 자주 찾았다.
일본인이 시간이 나면,
조선에서 꼭 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온천욕이었다.
동래온천은 조선 전기부터
일본인 사이에서 유명하였다.
세종실록에서는 제포[내이포]에 정박한
일본인이 서울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모두 동래 온천에서 목욕하는 까닭에 다시
내이포로 가기 위해 길을 돌아가 이 때문에
사람과 말이 모두 피곤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1438년(세종 20) 이후로는
제포에 정박하는 일본인은 영산 온천
[창녕]을 이용하게 하고, 부산포에 정박하는
일본인은 동래 온천을 이용하도록 하였다.
온천욕 하는 일본인들이 늘자
해당 지역의 만호(萬戶)에게
일본인 병의 경중을 따졌다.
병이 중한 자는 5일간 머무르게 하고,
병이 경미한 자는 3일간 머무르게 했다.
단종 때에는 광평 대군[세종의 아들]의 부인이
동래온천에 여러달 목욕한다고 머문 일이 있었다.
왕자의 부인이 목욕하는 통에 일본인은 밖에서 대기.
온천욕 하고 싶어 기다리고,
왜관으로 돌아가지도 않아서
동래 체류 일본인이 많았을 정도.
그만큼 일본인 사이에 동래온천은 소문났다.
조선후기에 온천에 가려면 허가받아야 했다.
왜관 경계 넘어 조선인 마을을 경유하기 때문.
하지만 병과 갑갑함을 핑계 삼아
허락받지 않고 가는 일이 있었다.
1671년에 차왜 평성태(平成太) 등
50명이 무단으로 동래 온천에 갔다.
차왜 응접 일을 맡은 접위관 신후재(申厚載)와
동래 부사 정석(鄭晳)이 역관을 시켜 말렸지만,
병을 치료한다면서 행패를 부렸고 그 이듬해에는
차왜 일행이 온천은 물론이고 동래 향교, 냇가, 야외
등 왜관을 벗어나 마음대로 부산 지역을 돌아다녔다.
역관 등이 말렸지만 칼을 휘둘렀다.
이들은 온천을 마치고 언덕에 올라가
낙동강과 감동창(甘同倉)을 살펴보았다.
온천행 핑계로 부산을 마음껏 헤집고
부산 인근을 조망하고 돌아간 것이다.
조선인들은 왜관을 나와 멋대로 다니는
일본인들의 행패를 막으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일본인에게 맞는 일까지 생겼다.
왜관 일본인이 왜관 밖을 나가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매[鷹] 때문.
매는 일본 최고위 막부장군에게 보내는 선물.
매가 왜관에 들어오면 응방(鷹房)에서 보관하였다.
그래서 왜관의 서쪽으로 펼쳐진 벌판에서는
대마도로 가기 전 잠시 관리하고 있던 매의 먹이
메추리 사냥을 위해 왜관 서쪽 밖 출입을 하였던 것.
메추리사냥을 핑계로 왜관을 벗어나는 경우도 있었다.
1875년(고종 12) 일본인 격군(格軍)[노 젓는 사람]
7명이 무단으로 왜관을 벗어나 메추리 사냥을 하려고
왜관 인근 사하면 구초량에 난입해 마을 사람들과 충돌.
격군들은 칼을 빼어들어 위협하며 대치
이튿날 일본인 70명이 마을로 와 무기위협
집을 뒤지자 마을 사람들이 달래어 돌려보냈다.
이틀간 봉변당한 마을사람들이 관수에게 따졌으나
관수는 뱃사공이 해군성(海軍省) 소속이기 때문에
외무성 소속인 자신이 통제할 수 없다고 책임 회피.
이처럼 근대 개항 직전까지 메추리 사냥은 계속되었고,
이를 기회삼아 왜관 바깥구경에 나서는 일본인이 있었다.
왜관 내 일본인이 허락을 받고
왜관 밖을 나서는 경우도 있었다.
조상의 제사를 지내야 하는 때이다.
왜관에서 사망한 자는
대마도로 시신을 옮기거나
초량왜관 뒷산에 묻기도 하였다.
두모포 왜관의 뒷산에는
1612년(광해군 4) 왜관에 온
격군이 죽어 묻힌 무덤이 많았다.
그곳에는 왜총비(倭塚碑)도 있었다.
두모포 왜관이 초량으로 옮겨가자 성묘를 가려면
왜관 문을 나설 수밖에 없었으나 경계를 벗어나는
일이라 동래부의 허락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초량 왜관에 체류하는 왜인들은
조선에 묻힌 조상산소 참배를 요구.
이에 1683년 동래 부사 소두산(蘇斗山)은
조정에 장계를 올려 이들 사연을 전하였다.
그래서 봄가을 사일(社日)[춘분 및 추분에서
가장 가까운 무일(戊日)]과 백중일에 허락되었다.
19세기 초엽까지만 해도
두모포 왜관 뒷산묘소 24,
다른 곳에 3개가 더 있었다.
그 이전에는 더 많은 무덤이 있었을 것이다.
초량 왜관에서 사망한 일본인은 왜관 남쪽문
수문(水門)을 통해 대마도로 보내졌는데, 왜관
북쪽에 있는 복병산(伏兵山)에 묻히기도 하였다.
이처럼 왜관 밖으로 나가고자 하였던
왜관 내 일본인은 등산, 선암사 나들이,
온천 나들이, 사냥 등으로 나타나지만
이러한 행동은 왜관과의 경계를 엄중히
하려는 조선과의 마찰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의 돌발적인 왜관 벗어나기가
왜관 내 생활의 갑갑함에서 비롯된
것도 있었겠지만, 양국의 현안에 대한
거센 요구에서 비롯되는 것이 많았기 때문.
조선은 더욱 그들의
왜관 벗어나기에 민감.
500여 명에 달하는 일본인을 관리하던 동래부.
왜관경계를 철저히 하는 것이 최선책 관리 방법.
초량왜관에는 다양한 신분의 일본인이 머물다 갔다.
조선인을 만나 조선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선구경 목적으로 오는 자도 있었다.
또 늘 조선인을 만나는 왜관 안에서 살기 때문에
옷맵시를 갖추는 것은 물론 공손한 태도를 취하라는
지시도 자주 받았지만 그들 고유문화를 견지하는 동시에
조선의 맛과 멋을 수용하면서 타국을 이해해 나갔을 것이다.
조선후기
부산에는
왜관이 3곳.
절영도 왜관·
두모포 왜관·
초량 왜관
이들 가운데 초량 왜관은 가장 오랜 기간 존속하였다.
약 200년간 조선과 일본 간 외교와 무역이 이루어진 곳.
왜관은 양국의 文人이나 지식인이 필담(筆談)을 나누고
창화(唱和)를 하고, 미술품 왕래 등 문화가 교류되는 곳.
양국 사람들이 만날 때면 왜관에서는 일본 향응 음식으로,
조선은 연향음식을 내놓아 양국 간 음식문화도 교류되었다.
...............................절영도 왜관.................................
부산 절영도 왜관(絶影島倭館)은 1601년(선조 34)경 설치되어
1607년(선조 40) 두모포로 왜관이 이전될 때까지 일본사절 숙소.
조일무역 장소로 임진왜란 후 일본이 먼저 사절을 파견하며 시작.
1600년(선조 33) 8월 일본과의 무역을 재개하자는
의견이 조선 조정에서도 개진되어 절영도 왜관에서
1603년(선조 36) 승인되어 개시(開市: 조일 상인무역)
1607년 두모포 왜관이 조성되면서부터 왜관 기능을 상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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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다리


부산 자갈치시장







부관 연락선




'1890~1930'년대 부산


윤심덕(1897-1926. 성악가 배우).,사(死)의 찬가
대형 오페라가수를 꿈꾸었던 그녀는
생계유지를 위해 대중가요를 불렀다.
그녀가 꿈꾸던 예술 조국을 만들기에는
유교적인 인습이 그녀를 못 견디게 하였다.
.
특히, 유부남 김우진과 사랑은
진보적인 도덕관을 지닌 그녀를
궁지로 몰아 1926년 여동생 성진(聖眞)
유학길 배웅을 위하여 일본으로 간 그녀.
.
닛토(日東)레코드회사에서 24곡을 취입한 뒤
먼저 와 있던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서 정사했다.
그녀가 남긴 ‘사의 찬미’는 오늘까지 널리 불리운다.
..........................
'死의 讚美' (1926년)
...........................
황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건 허무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도다 .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찾는 것 허무.
허영에 빠져 날 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에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부관 연락선(釜關連絡船)...............
일제강점기에 부산(釜山)과 일본 시모노세키[下關]
사이의 여객과 화물을 정기적으로 실어나르던 연락선.
보통 관부연락선으로 불렸는데 일제는 1890년대부터
만주 침략을 위해 한반도에 남북종관철도 부설 구체화.
러일전쟁 승리 후 일제는 한국에 1,000㎞ 정도에 이르는
철도망을 완공시켜 병참과 상품수송의 간선으로 이용했다.
또 대한해협(大韓海峽)과 쓰시마 해협[對馬海峽]을 잇는
연락선을 취항시켜 한국의 전지역을 일본 전역과 연결하여
한국· 만주 지역의 침략·수탈 '대일본의 동맥'을 만들고자 했다.
그리하여 1904년 9월 11일 국책회사인
산요기선주식회사[山陽氣船株式會社]가
1,680t 이키마루[壹岐丸] 취항을 시작으로
연락선이 정기적으로 '부산~시모노세키' 왕복.
3·1운동 직후 1919년 4월 일제는
조선인 '여행 취체에 관한 규정' 반포
한국인의 도항(渡航)을 제한하였으나,
일본인 자본가들의 저임노동력 요구에 따라
1922년부터 한국인 자유도항제도로 바꾸었다.
1925년 일제는 만성적 공황 탓에
다시 도항 억제정책을 시행했으나,
만주침략이 본격화 된 이후 '일본
산요철도-대한해협-경부·경의 철도
-안봉·만주 철도'의 연락운수체제가
각광받으면서 1935년부터 7,000t급의
곤고마루[金剛丸]·고안마루[興安丸]
등이 취항 연인원 32만 명을 운송했다.
1939년부터 국민징용령·조선징용령 시행,
30만 한국인이 부관연락선을 타고 홋카이도
[北海道]·규슈[九州] 등의 탄광으로 끌려갔다.
이후 태평양전쟁 중이던 1945년 3월
미군 비행기 폭격으로 연락선 운항 중단.
한일간 여객선 운항은 해방후 국교 수립 때까지 없다가
1964년 1월 아리랑호가 첫 취항한 데 이어 1970년 6월 17일
5,000t급인 부관 페리호가 2일에 1번씩 현재까지 오가고 있다.
..................................................................................

'부관 페리 ~ 규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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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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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후쿠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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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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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부산 도심 여행] ] '부관연락선' 현장을 찾아서](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db.kookje.co.kr%2Fnews2000%2Fphoto%2F2015%2F0102%2FL20150102.22022185051i1.jpg)
'부관 연락선'., 현장을 찾아서

부관 연락선에서 바라보이는.,오륙도.

오늘날.,부관 연락선

개항기.,부관연락선




부산항 제1잔교 & 부관연락선

오륙도 돌아가는., 부관연락선

부산광역시(釜山廣域市)
인구 355만 7716명(2015년)
|
면적 : 765.82㎢ 15구 1군 3읍 2면 205행정동(187법정동) 166행정리(62법정리) |
---|
..........................부산(釜山)의 역사..........................
신석기시대 영도구 동삼동·영선동·조도, 서구 암남동·다대동,
북구 금곡동 등의 해안과 강변에 위치한 조개더미들이 있다.
여기에는 석기·빗살무늬토기, 생활용구, 조개· 동물뼈들 포함.
이 지방의 선주민이 주로 어로생활을 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 유적은 내륙의 평지나 구릉지대에서 발견된다.
그 분포는 부산시내 전역에 퍼져 있고 특히 동래지구에 집중.
원시적인 농경생활을 알게 된 삼한시대 유력한 부족국가 형성.
변진 독로국(弁辰瀆盧國)은 동래지방에 있었던 나라.
이 나라는 김해지방 가야연맹체와도 밀접한 관계 유지.
동래 복천동고분군, 연산동고분군 규모와 부장품 유물들.
그러나 이 지방은 지리적 여건으로
신라의 세력에 일찍 흡수된 것 같다.
『삼국사기』「열전」에 탈해이사금대(57∼79)에
거도(居道)가 계략으로 우시산국(지금의 울산)과
거칠산국(居漆山國: 지금의 동래)을 쳐서 빼앗았다는
기록의 연대를 그대로 믿기 어렵다 하더라도 이 지역이
일찍이 신라의 수중에 들어간 것을 암시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동래는
옛 장산국(萇山國) 또는 내산국(萊山國)인데
신라가 빼앗아 거칠산군(居漆山郡)을 두었다가
757년(경덕왕 16) 동래군으로 개칭하고 동평현(東平縣)과
기장현(機張縣)을 영현으로 했다고 한다. 본래 동평현은
대증현(大甑縣)이고 기장현은 갑화량곡현(甲火良谷縣)인데
경덕왕 때 개칭, 기장현은 뒤에 양주(良州: 지금의 양산)로 이속.
835년(흥덕왕 10)에 범어사가 창건.
1018년(현종 9)동래현이
울주의 영현이 되었다가
뒤에 현령을 두어 분립했다.
동래현 영현인 동평현은 양주(梁州)의 영현으로 이속되었다.
고려 전기 동래를 본관으로 한 동래정씨 일족이 중앙정계 진출.
동래의 온천도 유명하여 많은 문인들이 이곳을 방문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남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발호하는
왜구의 침략을 방비하기 위해 경상도도순문사
박위에 의해 동래읍성이 축조되었다.
1397년(태조 6)동래에 진을 설치해
병마사가 판현사(判縣事)를 겸했다.
고려 말부터 창궐하던 왜구가
1396년 동래현·동평현·기장현 침범.
1423년(세종 5) 부산포개항., 왜관 설치.
1428년동평현이 동래현 소속으로 복귀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세종 때 동래현의
호구수는 290호 2,416인이며, 동평현은 108호 627인.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으로
왜관을 폐쇄했다가
1512년 다시 개관.
1547년(명종 2)동래현이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592년(선조 25)울산 개운포(開雲浦)에 있던
경상좌수사영을 수영(水營)으로 옮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산첨사 정발(鄭撥)은 부산진성을,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과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는 동래성을,
다대포첨사 윤흥신(尹興信)은 다대포성을 사수하다가 장렬하게 순국.
많은 군·민이 성과 운명을 같이 했으며,
또 이 지방 주민들은 스스로 의병으로 단합해
적을 무찌르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워 난이 끝난 뒤
선무원종공신의 칭호와 은전을 받은 사람만도 66인.
.
1605년 동래부사 윤훤(尹暄)이 송상현을 모시기 위해
송공사(宋公祠)를 세웠다가 1624년(인조 2) 충렬사(忠烈祠)로
사액되면서 임진왜란 때 이 지방에서 순국한 모든 충신·열사를 합사.
당시의 공방전을 사실적으로 그린 「동래부순절도」와
<부산진순절도>가 동래 안락서원(安樂書院)에 전해왔다.
임진왜란 때
동래성이 함락된 뒤
현으로 강등되고, 1599년
다시 도호부로 승격하였다.
1607년두모포(豆毛浦)에 왜관이 다시 설치되었다.
1655년(효종 6)동래부에 독진(獨鎭)이 설치되었다.
1690년(숙종 16) 부사가 방어사를 겸했다가
2년 뒤에 방어사가 폐지되었다.
1678년 왜관을 초량(草梁: 지금의 용두산 일대)으로 옮겼다.
1763년(영조 39) 통신사로 일본에 간 조엄(趙曮)이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와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가 그 재배에 성공.
'동래부읍지'에 의하면 1759년의 동래부 호구수는 6657호 2만 5753인.
1876년(고종 13)
병자수호조약 체결.
부산포가 개항장이 되었다.
1877년 부산에 조계(租界)가 설치되고,
일본·청국·영국의 영사관이 설치되었다.
1883년 개항에 따른 항만관리·외교사무를
담당하기 위한 감리를 두어 동래부사가 겸임.
부산해관(釜山海關, 부산세관)을 설치하였다.
1890년 동래감리서(東萊監理署)를 설치하였다.
1895년 지방관제 개정, 동래부는 경상남도 소속.
1903년 군으로 강등했다가 1906년 다시 부로 승격.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시에 동래군이 되었다.
1906년 일본영사관이 폐지되고
이사청(理事廳)이 개설되었다.
1908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었으며,
옛 부산역 일대의 매축 공사가 준공.
1909년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下關)
사이에 연락선이 취항하였다.
1914년에 동래부가 부산부로 개편.
1915년에 부산진과 동래 온천장 사이에
전차개통, 이듬 해 시내 전차도 개통되었다.
1919년 3월 11일 동래고등보통학교·부산상업학교·
부산진여학교의 학생들이 사전계획에 따라 만세시위.
많은 시민들이 호응해 격렬한 시위가 연일 벌어졌다.
3·1운동 후 안희제(安熙濟)는
동지를 규합해 백산상회(白山商會) 설립.
국내외 연락담당.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였다.
한편 그는 신문사를 경영해 언론으로써
투쟁하는 등 일생을 광복운동에 헌신하였다.
1920년 의열단원 박재혁(朴載爀)은
부산경찰서를 폭파하고 옥중에서
단식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흥교(韓興敎)·윤현진(尹顯振)
등 해외로 나가 광복운동에
일생을 바친 사람도 적지 않다.
1925년 경상남도 도청을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겼으며,
1934년 영도대교가 준공되었다.
1936년동래군 서면과 사하면 암남리를 편입하고,
1942년동래읍·남면·사하면을 편입, 시역을 크게 확장.
6·25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8월 18일부터
1953년 8월 15일까지
임시수도 반격의 기지.
피난민이 몰려들어 인구가 급증하였다.
1951년 유엔묘지가 대연동에 조성되었다.
1955년 인구가 100만 명을 넘어
1957년에 구제가 실시되면서
6개 구청을 신설하였다.
1960년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연일 일어나 인근 각 지방으로 퍼져나갔다.
1963년 정부직할시로 승격하면서
동래군 구포읍·사상면·북면 및
기장면 송정리를 편입하였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
1973년 남해고속도로 개통.
1976년 김해국제공항을 개설.
1978년김해군 대저읍·명지면과
가락면 일부를 편입하였다.
1983년경상남도 도청이 창원시로 옮겨갔다.
같은 해 낙동강 하구언공사가 시작되었다.
1987년 지하철 제2단계 구간이 개통되었다.
1989년김해군의 가락면과 녹산면이,
의창군 천가면이 각각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직할시에서 광역시로 변경,
3월 1일 연제구·수영구·사상구와 기장군 설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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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 부산 용두산공원.,초량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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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 왜관이 언제 처음 설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고려시대 김해에 일본 사절이 머무는 객관(客館)이 있었다.
'부산 강서구 녹산동' 객관은 왜관 기능을 일부 담당했던듯.
........................삼포 왜관(三浦倭館).......................
조선 시대 1407년(태종 7)에 동래 부산포(범일동, 좌천동)
웅천 제포(내이포 : 창원 진해구 제덕동 일대)에 왜관 설치)
1426년(세종 8) 울산 염포(울산 북구 염포동) 왜관 추가 설치.
..................................................................................
서울에는 상경한 일본 사절이
머무는 왜관.,동평관(東平館).
.........동평관(東平館)......
남산 북쪽기슭 남부 낙선방
(지금의 인사동)에 있었으며
1407년(태종 7)에 설치되었다.
1434년(세종 16) 일본사신들의 금수품 밀매행위 때문에
담을 높이 쌓고 문단속을 엄히 했으며, 허조(許稠)의 건의로
명나라 금릉의 회동관 부속객관을 모방하여 신관 2개를 지었다.
1438년에는 영접도감의 예에 따라 감호관을 두었고,
동·서평관을 동평관 1·2개소로 개칭, 5품아문으로 정했다.
1444년 영접도감 예에 따라
감호관이 후임자에게 사무를
인계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창고를 설치해 그릇과 미곡을 저장하고
일본 사신과 객인을 접대했고 공청무역 외에는
관문 밖 무역을 금했고 출입도 엄격하게 관리했다.
그러나 담넘어 민가에 들어가
행패를 부리는 자가 늘어나서
의금부에서 체포한 적도 있었다.
임진왜란 때 불타 폐지되었고
조선시대 왜관동이라고 불렀다.
..........................................
신숙주 편찬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추가로 들어간
제포, 부산포, 염포지도에, 왜관표시 및 일본인 마을이 그려있다.
삼포에는 항거왜인(恒居倭人) 마을 왜리(倭里), 왜락(倭落)이 있었다.
항거 왜인의 집을 왜가, 왜막(倭幕)이라고 불렀다.
왜관은 일본사절이 머무는 객관, 양국 상인이 교류하는 상관(商館),
포구의 일본인을 총괄하는 우두머리가 근무하는 공관(公館) 등 다양한 공적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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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은 일본 배가 도착하는 포구, 일본 사절을 접대하는 곳,
무역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관사, 창고, 취사 시설 등이 갖춰졌다.
1494년(성종 25)의자료를 보면 항거왜인은 제포가 80.5%로 절대 다수.
부산포가 14.6%, 염포가 4.9%로 삼포 가운데 제포가 가장 비중이 큰 항구.
조선 전기에는 왜관과 왜리가 분리된 이원적 공간이었고
조선 후기에는 왜관과 왜리가 합쳐진 일원적 공간이었다.
삼포 왜관은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다가,
1547년(명종 2)부터 부산포 왜관 만 존재.
그러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부산포 왜관마저 폐지되었다.
임진왜란 후 국교회복 과정에서 왜관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우선 부산 영도에 간이왜관을 지어 일본사절이 묵도록 하였다.
두모포(豆毛浦) 왜관은 지금 영도구 대평동 2가 일대에 있었다.
국교 재개 분위기가 조성되자 정식 왜관을 건립하는 것이 필요.
1607년(선조 40) 동구 수정동 동구청 일대에.,두모포 왜관을 설치.
.
왜관의 동문 밖에는 좌자천[자천]이 흐르고 있었다.
육지 삼면에 담장, 앞바다에는 수책(水柵)이 세워졌다.
약 1만 평 중앙에 일본사절을 접대하는 연`향대청(宴享大廳).
그 좌우에 서관과 동관이 자리했다.
연향대청은 곧 왜관 밖으로 옮겨졌다.
초가집이 많아 불이 났을 때 피해가 컸다.
두모포 왜관 왜관도가 남아 있지 않아
왜관의 구체적인 경관을 알 수는 없다.
서울 동평관이 폐쇄되고 일본 사절이 상경할 수 없으므로,
부산에 있는 객사에서 일본 사절은 조선 국왕에게 숙배(肅拜)
그로부터, 부산 왜관의 외교적 기능이 그만큼 강화된 것이다.
두모포 왜관은 1678년(숙종 4) 초량으로 이전될 때까지 70년간 존속
조선후기 외교·무역 규정과 왜관 운영방침이 두모포 왜관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대지가 좁고 선창 수심이 얕으며,
남풍을 정면으로 받아 배가 정박하기 부적당.
1640년(인조 18)~1672년(현종 13) 8차례 이관 교섭.
.
1671년 이관 교섭을 위해 파견된
쓰에효고[津江兵庫]가 갑자기 사망.
이를 계기로 논의가 급진전되었다.
다대포·절영도·초량 등이
새 왜관 터로 물망에 올랐다.
.
일본 측이 선창의 위치가 좋은 초량을 선택함으로써
초량왜관 시대가 열렸고 새로 옮기는 초량 왜관을 신관,
두모포 왜관을 고관 또는 구관이라 불렀으며 고관이라는
"高官" 지명은 부산에서 오늘날까지 전해져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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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량 왜관 신축 공사는 1675년(숙종 1)에 착공되었다.
목재·못·기와 건축자재는 조선에서, 동관·서관 삼대청 건물 등
일본식 세공이 필요한 자재는 쓰시마 섬[對馬島]에서 조달되었다.
양국의 막대한 인력과 물자가 투자된
합작품인 왜관은.,1678년 4월에 완공.
4월 14일 관수를 비롯한 454명의 일본인이 신관으로 들어갔다.
초량 왜관은 약 33만㎡[10만 평] 규모로 두모포 왜관의 10배 정도.
일본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이나 중국인 거주지보다 훨씬 큰 규모.
왜관의 중앙인 용두산 기슭에는 왜관을 총괄하는
관수 관저 관수가(館守家).관수옥(館守屋)가 있었다.
관 내 단일 건물로는 가장 큰 규모였다.
용두산을 중심으로 동관과 서관으로 구분.
동관은 왜관에 상주하며 외교·무역 담당
행정, 생활, 무역 공간적 성격이 강하다.
외교 교섭을 담당하는 재판의 재판가,
개시 무역을 하는 개시 대청, 조선 무역을 담당한
대관의 대관가(代官家), 동향사(東向寺) 등 크고 작은 건물.
서관에는 동대청·중대청·서대청
일본에서 온 사절이 머물렀던 곳이었다.
왜관 건물은 대체로 조선 측에서 지어 주었다.
건물이 낡거나 훼손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주거 공간과 각종 상점, 절 등은 일본인이 지었다.
배를 대는 항구에는 출입하는 배를 관할하던 빈번소(濱番所),
쌀 창고를 비롯한 창고들이 열 지어 있었다. 왜관의 건물은
약 2m 높이의 긴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처음에는 토담을 쌓았는데,
1709년(숙종 35) 동래 부사
권이진 때 돌담으로 바뀌었다.
왜관 문을 나서면 왜관 주위로 여섯 개의 복병소(伏兵所)가 있었다.
처음에는 세 곳만 있었으나, 1739년(영조 15) 여섯 곳으로 늘어났다.
일본인과 조선인이 불법으로 왜관을 출입하는 것을 막는 기능을 하였다.
1709년에는 초량 왜관 설문이 세워졌다.
문 안에 있던 조선인 마을인 초량촌이
문밖으로 옮겨져 신초량촌이 생겼다.
초량 왜관 설문은 조선인 사회와
일본인 사회를 구분 짓는 경계였다.
왜관 담장 밖에 일본 사신을 접대하는
조선 측 건물인 '연향대청'이 있었다.
그리고 왜관의 산 너머 설문과의 사이에는
조선인 역관들이 거주하는 성신당(誠信堂),
빈일헌(賓日軒) 등의 건물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이곳을 임소(任所),
사카노시타[坂ノ下]라고 불렀다.
그 위쪽에 일본사절이 조선왕에게
숙배를 드리는 초량 객사가 있었다.
왜관에는 400∼500명 쓰시마
섬에서 온 성인 남자가 살았고,
그들은 가족을 동반할 수 없었다.
왜관은 통행 범위가 제한되어 있고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어 장기간
상주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성인 남자만 있기 때문에 매매춘의 폐단이 나타났다.
일본인 남성과 조선 여성 사이에 매매춘이 일어났는데,
이를 교간(交奸) 사건이라고 하였다. 교간이 적발되면
조선인은 왜관 밖에서 효시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일본인은 쓰시마 섬으로 소환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조선에서는 조선인과 같은 처벌을 요구하였지만
잘 이행되지 않다가 1711년에 범간 조약 체결로 시행.
왜관의 일본인은 쌀·채소·생선
등 식료품은 수문(守門) 밖에서
매일 열리는 아침 시장[朝市]에서 구입
일본인 입맛에 맞지 않거나
조선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은
쓰시마 섬에서 직접 조달하였다.
왜관 안에는 떡집이나 도자기 만드는 요(窯)도 있었다.
연향대청·개시 대청 등 주된 공공건물은 조선 측이 건립.
일본인 주거공간이나 상점으로 지은 것은 대개 일본식 건물.
조선식 온돌은 없고 다다미가 깔렸으며
일본식 미닫이문과 툇마루가 갖춰진 건물.
종교 생활을 위해 동향사라는 절과
용두산에 용두산 신사(神社)가 있었다.
조선과 쓰시마는 왜관에 머무는 일본인을 위해
많은 편의제공, 왜관 밖 출입은 엄격히 통제했다.
일본 사절이 왔을 때, 초량 객사에서 조선왕에게 숙배 때,
연향대청 잔치 때,공식 업무로 조선역관을 만날 때 출입 가.
봄가을 명절 때 두모포 왜관 뒷산에 성묘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공식 허락 없이 함부로 왜관 밖으로
나오는 것을 난출(闌出)이라고 하였다.
.
683년에 세워진 약조 제찰비
(約條制札碑)에 규정된 것처럼
난출은 이유를 불문하고.,사형.
그러나 왜관의 경계를 멀리 벗어나 자유롭게 등산을 하거나
부산의 모습을 시로 읊으면서 풍류를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오가와 지로우에몽[小川次郞右衛門]이 지은
'우진토상(愚塵吐想)' 책에는 1806년(순조 6)
고왜관에 성묘 갔다가 산에서 본 고왜관의
주변 모습을 묘사한 시가 수록되어 있다.
왜관 안에는 쌀이나 값비싼 수출품과
수입품을 보관하는 창고가 많이 있었다.
이 보물 창고를 노리는 도난 사건이 밤에 많이 일어났다.
왜관의 야간 순찰은 요코메, 메스케 등 하급 관리가 담당.
1688년(숙종 14) 사설 야경단을 만들어 밤마다 순찰 돌았다.
이 무렵 곤도 야헤에[近藤弥兵衛]라는 사람이
휴대용 지갑에 은을 도둑맞는 사건이 일어났다.
조사 과정에서 지갑에 동전, 족집게, 머리끈, 족자, 붓,
종이, 벼루, 책 등 20여 종이 들어 있는 것이 밝혀졌다.
이런 물품은 왜관 주민의 일상생활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왜관이 부산에 있으면서
일본 문화가 왜관을 통해 부산,
김해 등 주변 지역으로 퍼져갔다.
이처럼 왜관은 한일 양국의 외교, 무역,
문화 교류의 중요한 통로 구실을 하였다.

1876년 부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개항장이 되었다.
일본은 초량왜관에 일본 전관 거류지(日本專管居留地) 마련
중세의 왜관 자리가 근대의 일본 전관 거류지가 된 것이다.
왜관의 관수 자리에 일본 영사관이 자리하였다.
명분과 실리의 틈새 속에서 200년 동안 존속한
초량 왜관 자리는 개항후, 번화한 시가지로 변모.
일본인의 의해, 일본인을 위해 발전되어 간
식민지형 근대도시 부산의 첫 단추가 끼워진 것.
.
오늘날 부산은 전통적인 중심지인 동래를 기반으로
발달한 도시가 아니라, 동래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포구인
부산포 중심으로 발달. 그 이유는 그곳에 왜관이 있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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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펌] 117년전 '초량왜관'](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busanilbo.com%2Fcartoon%2Fpds%2F0010012004080405005.jpg)
1900년 초량왜관




일제강점기.,부산 신사.





초량왜관
자갈치시장

부산.,국제(깡통)시장

부산 용두산공원 올라가는 마지막 계단 입구에.,표지석.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이 표지석은 뜬금없다는 느낌이 든다.
이 표지석에는 용두산공원과의 관련성을 알기 힘든., '초량왜관.'
초량왜관과 용두산공원은 무슨 관계가 있었을까?
'용두산공원과 주변은 조선후기 초량왜관이 있었던 곳.'
'초량왜관'이란 이름 자체가 대부분의 방문객들에게 생소.
그 주변에는 짐작해볼만한 초량왜관 흔적이 거의 없기 때문.
변박의 초량왜관도
초량왜관은 옛 그림과 기록을 통해서만 만나볼 수 있다.
그중 조선 후기 화가 변박이 그린 초량왜관도(1783년 작품).
그의 그림을 보면 초량왜관의 위치와 규모를 잘 알 수 있다.
장방형 담으로 둘러싸인 지역이 초량왜관.
초량왜관도 중앙에 그려져있는 산이 용두산.
용두산은 초량왜관을 둘로 갈랐는데
동남쪽에 있는 동관, 서쪽에 있는 서관.
초량왜관 부지는 10만평 정도로 추정된다.
1675년부터 1678년까지 3년에 걸쳐
125만명 인원이 투입되어 만들어졌다.

1903년 부산지도
1903년 부산 지도를 보면 초량왜관을 좀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다.
지도 중심의 산이 용두산, 오른쪽 맨아래 부분이 현재 롯데백화점.
오른쪽 위 바다 부분 점선은 당시 매립계획지역인데 모두 매립된 상태.
변박의 그림에 있는 방파제가
1903년 지도에 그대로 남아있다.
선창의 방파제와 용두산을 기준으로
두 그림을 맞춰보면 초량왜관의 위치를
오늘날에도 지도상에서 짐작해 볼 수 있다.

초량왜관이 자주 소개되는 기록으로는 변례집요가 있다.
1598년(선조)~1841년(헌종) 한일 외교관계를 기록한 책.
임진왜란 이후부터 일본을 믿지 못한 조선 조정은
일본사신, 무역상인을 부산 이상 못올라오게 하였다.
그래서 당시 대일 외교와 무역은 부산에서만 이뤄졌다.
바로 그 때의 대일관계를 기록한 변례집요
그래서 초량왜관의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부산은 작은 어촌에 지나지 않았다고들 말한다.
개항 후 항구로 발전하면서 동래까지 잡아먹어 커졌다는 것.
그러나, 이것은 조선시대의 부산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아니다.
부산에서 초량왜관을 삭제한 역사이다.
초량왜관에 거주한 일본인만 500명 이상.
그들을 상대하는 조선 측의 관리와 상인들과
초량왜관 경제권 내의 민간인들이 또 있었다.
초량왜관은 조선의 인삼, 중국에서 들여온 생사.
일본에서 들여온 은이 교역된 동북아 중계 무역지.

'동북아 최대의 중계무역지'인 부산이
조선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그럴리는 없다. 조선시대 유명한 동래상인.
바로 부산의 왜관을 근거지로 활동한 상인들.
조선시대 동래상인들은 정치적 영향력도 발휘.
숙종 때 소론이 주도한 갑술환국에 정치자금을 대준
주요한 상인 5명 중 2명(의금부 수사기록인 '추안급국안').
동래상인이었고 이 사건으로 장희빈은 폐위되었고
정치자금을 받은 소론은 다시 정치 주도권을 갖는다.

변승업은 통신사로 일본에도 다녀왔다.
상상관 가마를 타고 있는 사람이 변승업.
부산은 조선시대 최고의 갑부도 만들었다.
초량왜관의 전신
두모포왜관 때부터
'왜학역관'이던 변승업.
변승업은 왜관의 최고 책임자인 훈도에까지 올라갔고
조선시대 초량왜관에서 획기적으로 재산을 불렸던 것.
변승업은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도 등장하는데
허생이 돈을 꾸는 장안 최고 부자가 변승업의 조부.
조부 윤영에게 집안의 치부 유래를 듣는 손자로 등장.

임진왜란 때 일본은 부산을 통해 들어왔다.
이전에도 부산은 왜구의 침략에 시달렸다.
조선은 부산을 국방상의 요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에서 본 일본의 무력은 상당했다.
일본과의 적대 정책은 비용이 많이 들고 손실도 컸다.
그러므로, 조선은 일본을 관리해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
조선은 부산에 군사적 성격의 진성이 많이 축조하였지만
왜관을 통해 교역하고 통신사도 보내며 달래는 정책도 병행.
조선시대 동래부사청 대문 동래독진대아문(東萊獨鎭大衙門).
그러한, 당시 조선의 입장과 정책이 잘 반영되어 나타나 있다.
동래가 '경주진영'에서 독립했음을 알리는 대문의 현판
'동래독진대아문'이 동래가 중요한 지역 임을 알리고 있다.
왼쪽 기둥의 진변병마절제영(鎭邊兵馬節制營)은 군사적 요충 지역.
오른쪽 기둥의 교린연향선위사(交隣宴餉宣慰司)는 일본사신 접대 관아.
조선시대 부산이 경제적은 물론 외교적으로도 요충지임을 보여주고 있다.

부산은 초량과 동래 두 도심축으로 성장한 도시.
조선시대 동래에는 전통적 삶이 꽃피우고 있었고
초량은 초량왜관을 중심으로 국제적 교류가 있었다.
초량이 있기에 동래의 영향력이 훨씬 커질 수 있었고
동래가 있기에 초량은 국제적 교류를 유지할 수 있었다.
만약, 부산의 역사에서 초량왜관을 삭제한다면
부산에서 반쪽의 역사 만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옛 조상들이 동래부 대문에 내걸었던
편액 하나를 떼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
부산이 초량왜관을 다시 기억해야하는 이유.
초량왜관
매일 조선인, 일본인 간 무역시장이 열린 초량왜관
양산, 접부채, 모기장, 일본도 등 고가의 일본산 사치품.
문화가 다른 두 민족이 한 공간에서 문화 교류도 이어졌다.
당시 불교의 영향으로 네발짐승 고기를 기피하였던 일본인.
조선의 영향을 받은 초량 일본인은 손님상에 고기를 올렸다.
일본 음식도 초량왜관 일본인을 통해 조선인들에게 전해졌다.
초량 왜관을 찾은 조선인들이 가장 즐겼던 음식은 스기야키.
삼나무 상자에 도미 전복 각종 채소와 육수를 부어 끓인 요리.
당시 조선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스기야키는 어떤 맛이었을까?
조선과 일본, 양국의 다양한 상품들이 오가던 초량왜관
그곳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것 한가지는 바로 여인이었다.
엄격한 성리학 국가였던 조선은 왜관에 여인의 출입을 금지.
하지만, 1690년, 조선인 이명원이
자신의 처와 딸, 여동생을 남장시켜
초량왜관에 들여보낸 사건이 발각된다.
이 사건에 관계된 조선인은 모두 극형을 받고,
그중 5명은 왜관 밖에서 효시 되었지만 이후에도
조선인 여인과 일본인 남성의 교간은 끊이지 않았다.
당시 동래부사 권이진은 왜관 밖 시장에 조선여자들이
채소를 팔러 나오면 왜인들이 채소가 좋건 나쁘건 몰리자
교간을 막으려 조선남자들만 초량 왜관 시장에 나오라고 설득.
동래부사 권이진의 백성들에 대한 '통제와 설득'
조선에 기녀, 유녀의 기반이 있으면서도 엄벌주의,
'왜관에 매춘부 유입을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당시 조선과 일본의 매춘에 대한 인식은 아예 달랐다.
조선여자와 성관계로 사형, 효시를 납득 못한 일본인들.
일본 또한 나가사키에 '데지마'라는 네델란드 상관을 운영.
나가사키 관료들은 데지마에 게이샤 출입을 허용.
'나가사키 항구의 인공섬' 데지마에 게이샤를 투입.
중국인이 돈쓰게 하여 무역적자를 흑자로 돌리는 묘수.
또 외국인과 게이샤들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나가사키 시설에서 키웠기 때문에 장래에 그 아이들이
서양의학을 전수받은 의사가 되거나 통역사가 될 수도 있었다.
이러한 환경에 적응한 왜인들은 조선의 조처에 납득을 못한 것.
왜관 관수는 사건이 터지면 당사자 왜인을 대마도로 도주시켰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폐쇄하였던 왜관을 조선 정부는
1607년 일본과 국교 재개 후, 절영도(영도)에 허락하였다.
절영도(영도).,왜관.
이후 왜관은 두모포로 이전되었다가
1675년 초량에 10만평의 부지에 용두산
이쪽, 저쪽에 동관과 서관으로 완공된 것.
5백 명의 왜인이 공무를 핑계로 파견 거주했는데
일본여자 입국을 허용하지 않아 발생한 교간 사건들.
쌍방을 모두 사형시킨다고 공포했던 것과 달리 실제로
왜인은 대마도로 도주하고 조선 여인 만 효시 또는 사형.
1711년(숙종 37년) 통신사까지 파견,
조선과 일본은 교간에 대한 처벌을 규정한
신묘약조(일명 '교간약조) 3항을 체결하였다.
1. 왜인이 조선여자를 강간하면 사형
2. 조선여자와 화간 또는 강간 미수는 유배
3. 왜관 내에서 교간한 자는 그 밖의 죄를 적용.
이로써 조선에서도 중개업자는 효수형이지만
교간한 조선여자는 장죄(杖罪)나 유죄(流罪)로 감형.
금녀(禁女)의 공간, 왜관에서 벌어졌던 교간사건의 전말.
1872년, 일본은 초량왜관을 무력 침탈.
그리고 4년 후, 조선 최초 강화도조약 체결
그후, 초량왜관은 2백년 역사의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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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량왜관....................
조선 후기 부산시., 중구 신창동, 중앙동,
광복동, 남포동, 대청동 일대에 있던 왜관.
초량 왜관(草梁倭館)은 조선 전기 부산포 왜관,
임진왜란 직후 설치된 절영도 왜관, 1607년(선조 40)
조성된 두모포 왜관에 이은.,조선시대 4번째 왜관이다.
조선 후기 왜관은 조선과 일본의 외교와 무역 진행.
대마도에서 온 500여 명의 성인 남성이 거주하였다.
조선전기 가족동반하던 것이 임진왜란 이후에는 금지.
초량왜관은 가운데 용두산 공원이 있었고,
'초량왜관'의 동남쪽에는.,용미산이 있었다.
용두산 넘어 북쪽에 복병산(伏兵山)이 있었다.
용미산은 일제 강점기에 깎여 평평해졌고,
그후 부산부청, 1996년까지 부산시청이 위치.
오늘날에는 롯데백화점 광복점이 들어서 있다.
용미산 북쪽으로는 선창이 있었고,
초량 왜관 담장을 따라 북쪽으로 가면
초량 왜관의 정문인 수문(守門)이 있었다.
담장 따라 북쪽으로 더 가면 담장 안쪽으로 동향사(東向寺).
동향사 끼고 돌면 오늘날 부산시 중구의 대청로가 나타나고,
이 길에 초량 왜관 북쪽 담장따라 서쪽으로 가면 광일초등학교,
그 앞에 연향대청(宴享大廳) 들어가는 연향문(宴享門)이 있었다.
이곳에서 더 서쪽에 복병산 올라가는 비탈길과 만나게 된다.
오늘날 부산광역시 중구 보수동 책방 골목 어귀 보이는 사거리.
초량왜관 담은 다시 남으로 이어져 국제시장 지나 광복로와 만난다.
광복로 따라 동쪽으로 난 담장을 따라가면 남쪽 해안이 펼쳐져 있다.
초량 왜관 남쪽 담장 중간에는 부정문(不淨門)
초량 왜관에서 사망한 일본인 시신이 나가는 문.
계속 동쪽으로 가면 초량왜관 선창과 용미산이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왜관 부지.,33만 579㎡[10만 평]
초량왜관은 용두산공원 중심으로
동관(東館), 서관(西館)으로 나뉘었다.
초량 왜관 안에 있던 건물의 명칭과 규모는
조선 측 자료와 일본 측 자료에서 차이가 난다.
동관에서 대표적인 중심 건물을 동관 삼대청(三大廳).
이라고 하고, 서관에도 서관 삼대청(三大廳)이 있었다.
동관·서관의 삼대청은 모두 조선에서 세운 조선식 건물.
동관 삼대청은 초량 왜관 안에서 제일 큰 건물인 관수왜가.
(館守倭家)· 재판왜가(裁判倭家)· 개시 대청(開市大廳)이다.
서관 삼대청은 동대청(東大廳)·
중대청(中大廳)·서대청(西大廳).
이외 서승왜가(書僧倭家)[동향사]· 통사왜가(通事倭家)·응방(鷹房)이 있었고,
공일대관왜가(公一代官倭家)·공삼대관왜가(公三代官倭家)·공대관왜가(公代官倭家)·
공하대관왜가(公下代官倭家)·공대관왜 회계청(公代官倭會計廳)[이상은 공무역 및
일본 사절의 진상품 관리 담당], 판장관왜가(判掌官倭家)·지장관왜가(知掌官倭家)·
별삼대관왜가(別三代官倭家)·별대관왜가(別代官倭家)·별대관왜 회계청(別代官倭會計廳).
그리고, 의왜가(醫倭家), 별금도왜가(別禁徒倭家),
도두금도왜가(都頭禁徒倭家), 도금도왜가(都禁徒倭家),
중금도왜가(中禁徒倭家), 소금도왜가(小禁徒倭家),
고삭 무역가(藁索貿易家), 소주가(燒酒家),
잡물 무역가(雜物貿易家), 주방(酒房),
목수왜가(木手倭家), 약재 무역가(藥材貿易家),
백당가(白糖家), 조포가(造泡家)[두부를 만드는 곳],
선격왜주인가(船格倭主人家), 병가(餠家),
점석가(簟席家)[다다미를 만드는 곳],
등매가(登每家), 공대관왜고(公代官倭庫),
별대관왜고(別代官倭庫), 송사왜고(送使倭庫),
고삭고(藁索庫), 물무고(物貿庫) 등 각종 창고들.
한편 수검청(搜檢廳), 포도막(捕盜幕) 등 치안 관련 건물들.
동관에는 무역과 일본인 생활에 필요한 공간들이 모여 있었다.
초량 왜관 밖에는 일본 사절이 오면
조선 국왕에 대해 숙배례(肅拜禮)를 하던
초량 객사(草梁客舍), 일본 사절을 위로하고
연향을 베푸는 연향대청, 역관 집무소인 성신당(誠信堂)·
빈일헌(賓日軒)·통사청(通事廳), 왜관 고위 일본인의 땔감을
지급하는 탄막(炭幕), 공무역 물품으로 수출되는 공작미(公作米)를
두는 공작미고(公作米庫)와 부창(釜倉), 1709년(숙종 35)에 세워진
초량 왜관 설문(草梁倭館設門) 등은 초량 왜관 북쪽에 있었다.
초량 왜관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조선 군인이 있는 초소[복병막(伏兵幕)]는
초량 왜관 외곽에 세 곳이 있다가 1740년(영조 16)에 여섯 곳으로 늘어났다.
초량 왜관에서의 외교는 일본 측[대마번(對馬藩)]에서 연례 송사(年例送使)나
차왜(差倭)[일본 사절]가 오면 예조 참판, 예조 참의, 동래 부사, 부산 첨사에게 주는
외교 문서를 가지고 왔다. 일본 사절은 상경(上京)이 금지되어 서울에 가서 국왕을 직접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초량 객사에서 외교 의례를 거행하였다.
그 후 연향대청에서 접대를 받고, 외교 교섭을 진행.
초량 왜관에서의 무역은 매월 3일과 8일, 월 6회에 걸쳐
개시 대청에서 이루어졌는데 양국 거래는 개시(開市)뿐 아니라
조시(朝市)도 있었다. 조시는 매일 수문 밖에서 열렸는데, 조시에 오는
상인은 왜관과 가까운 곳에 거주하는 부산진과 초량촌 사람이 많았다.
19세기에는 조시에 김해 지역 상인까지 참여하는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초량 왜관 일본인의 의생활은 ‘훈도시만 차고 밖으로 나가지 말 것’,
‘왜관은 다른 나라 사람들을 만나는 곳이니 견이나 명주를 착용할 것’,
‘남자 기모노 정장 차림’을 하도록 하는 것에서 일본식 전통 복식 차림을 하되
대마도에서보다 화려하였다. 검소하게 입는 검약령(儉約令)을 지키지 않아도 되었다.
음식은 초량 왜관의 상급 관리들은 전문 요리사가 있었겠지만,
여타의 일본인은 매일 아침 수문 밖에서 열리는 조시에서 생선·채소와
약간의 쌀을 구입하여 해 먹었다. 특히 초량 왜관 안에는 술집·떡집·두부가게
왜관 거주 일본인을 상대로 한 일본 음식점 개점.
또한 초량 왜관 안에 다다미 가게, 염색 가게 등이 있어
일본인들의 필요에 따라 일본식 건물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부산왜관은 절영도 왜관에서
1607년 두모포 왜관으로 이전되었다.
두모포 왜관은 부지가 좁고 선창의 수심이 얕으며
남풍을 정면으로 받아 배를 정박하기가 부적합했다.
두모포 왜관이 좁아 일본 사절이 묵을 공간이 부족하여
가가(假家)를 계속 늘여 나갔다. 가가 세울 곳이 없을 정도로
공간이 부족하여 건물을 쇄신하고 선창을 수리하며
왜관 담장을 물려 공간 확대를 도모하였다.
17세기 중반 이후 조선.일본 사이 무역이 크게 증가.
선창이나 무역선 안전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일본 측[대마 번]에서는
왜관 이전(移轉)을 요구하였다. 대마 번에서는
1640년(인조 18)~1673년(현종 14) 사절을 8번 파견.
제6차[1671] 사절 정사(正使) 평성태(平成太)[츠에효고(津江兵庫)]는
조선이 이관(移館)에 미온적이자 왜관을 벗어나 동래부로 향하였다.
그러고는 그해 12월 동래부에 머물다가 갑자기 사망하였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1673년 9월 이관이 결정되었다.
또한 왜관이 옮겨질 장소에 대해 일본 측은 처음에 부산진성을 주장,
조선에서 이미 군사 시설로 조성된 부산진성은 불가 대답을 주었다.
일본 측 부산진성 주장은 조선전기 왜관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1659년(효종 10) 일본 측은
웅포(熊浦), 다대포(多大浦)도 좋고
그외 다른 지역을 해도 된다는 새로운 제안.
1673년 3월 조선에서는 웅포는 반대하였지만,
다대포 지역 이관을 반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1673년 9월 부산 첨사는 일본 사절을 인솔
다대포·초량(草梁)·목장(牧場) 등 3곳을 답사.
'다대포는 왜관 두기에 좁고,
목장은 형세가 좋지 않으며,
초량은 선창은 좋으나
부지가 넓지 않다.'
세 곳의 후보지 중에는 초량이 가장 낫다고 판단한
일본 측에서 초량을 요청하였고 비변사에서도 이를 허락.
이관 논의는 타결되었다. 조선 측에서도 두모포 왜관에서
밀무역, 불법 정보 누출 등 사례가 종종 발생하자 통제 시스템을
일신하기 위해서라도 왜관을 옮길 필요성이 있었다.
왜관의 신축 공사를 마치고
1678년(숙종 4) 4월 489명의
일본인이 초량 왜관으로 이전.
왜관은 대마 도주의 임명을 받은 일본 사절,
관리와 상인 등이 거주하는 공간이었다.
왜관 일본인 중 중요한 일을 담당한 사람을
왜관 사역(四役)이라고 부르는데, 관수(館守)·
재판(裁判)·대관(代官)·동향사 승(東向寺僧)이다.
왜관 사역은 두모포 왜관 시기부터 활동하였고,
이러한 조직은 초량 왜관에서도 계속되었다.
왜관의 일본인을 통솔하고 관리하는 관수는 임기 2년으로,
왜관 업무의 주재자임과 동시에 왜관 체류 일본인을 통솔하였다.
재판은 조일 양국 간의 외교 업무나 교섭을 주관하였다.
동향사 승은 한문(漢文)을 익힌 지식인으로 외교 문서를 담당.
대관은 조일 무역의 교섭과 결제 등을 담당하였다.
대관은 일대관(一代官)·이대관(二代官)·정대관(町代官)·
별대관(別代官)·약재 대관(藥材代官) 등으로 명칭이 구분.
무역의 유형에 따라 직무가 나뉘어 있었다.
그 외 조선어를 통역하는 역관,
정기적·부정기적으로 파견되는
외교 사절 등이 있었다.
관수가 파견되면서 왜관 내 조직이 정비되고,
조일 관계의 각 분야에 업무를 담당한 일본인 관리들이
파견되었을 것이나 언제부터 파견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왜관 안에 거주하지는 않았지만 왜관 업무와 관련된 조선인이 있었다.
일본 사절 접대, 조정에 왜관의 정황 보고,
외교 교섭 진행, 대일 무역 감독 및 총괄 보고 등
왜관과 관련된 행정의 책임자인 동래 부사가 있었다.
동래부에는 서계색(書契色), 오일색(五日色),
운미 감관(運米監官), 개시 감관(開市監官) 등
대일 업무와 관련된 직역자(職役者)가 있었다.
부산 첨사는 동래 부사와 함께 일본 사절을 접대하고
왜관을 출입하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통제, 일본에서
들어오는 선박의 조사, 왜관에 지급할 물품 업무 등을 담당.
일본 사절을 접대하기 위해
별도로 파견되는 접위관(接慰官)은
5품 정도의 관리로 경접위관은 서울에서,
향접위관은 경상도 도사(都事)나
경상도 지역의 군현 수령이 파견되었다.
왜관과 인접하여 일본어 통역을 담당하는 역관은
서울에서 파견되는 훈도(訓導)와 별차(別差)가 각 1명,
부산에서 교육받은 하급 역관인 소통사(小通事)가 30여 명 있었다.
훈도와 별차 아래에
그들의 업무를 돕는 소동 30명,
사령(使令) 4명, 말을 관리하는 말지기[馬直],
땔감을 담당하는 시한(柴漢), 공문을 운반하는 발군(撥軍) 등이 있었다.
왜관 업무나 연향 때 사환(使喚)을 담당하는 관지기[館直] 30명,
예단을 담당하는 예단지기[禮單直], 다례(茶禮)나 연향 때
음식을 담당하는 숙수(熟手) 등이 있었다.
왜관 주변에 있는 복병막과
수문·설문(設門)에서 왜관 출입을
통제하는 조선 군인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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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경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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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8.28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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