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三國遺事로 본 ‘東夷=韓族’의 始祖祖上, 황제(黃帝)
三國遺事(一然, 1,281年), ‘기이(奇異)’ 편의 재해석(再解釋)은, 필연(必然)
2,026년 01월 06일
○ 「2,026年, 병오년(丙午年), ‘새해’들어 ‘첫 번째 게재(揭載) 글’【문무(文武)의 조선사(朝鮮史) 해설(解說)】로 과연(果然)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지만 : 크게 염려(念慮)는 하지 않는다.
「우리의 조상(祖上)은 단군(檀君)【壇君】이시며, 우리는 단군(檀君)【壇君】의 자손(子孫)이다」라는 것은, 일반화(一般化)된 역사상식(歷史常識)이지만 : 그나마 이것도 “아니다”라고 하면서 ‘신화(神話) 또는 전설(傳說)’로 치부(恥部)하는 무리 또한 많다. 특히 기독교(基督敎) 종파(宗派)는, 더더욱 그렇다.
《조선(朝鮮)【고조선(古朝鮮)】은, “무진【戊辰, 기원전(紀元前, BC) 2,333年】년(年)”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나라를 창건(創建)하였는데, ‘단군(檀君)은 곧 환인(桓因)의 손자(孫子)’이며, 신시천왕(神市天王) 환웅(桓雄)의 아들【서자(庶子)】이다. ‘단군(檀君)’은, “태백산(太白山)에서 태어났다.”【“‘박달나무(檀) 아래에서 태어났다’라고 하여‘단군(檀君)’이다”라고 하는데, 혹자(或者)는 “당시(當時)의 사회(社會)를 보면 : 제사장(祭司長)을 뜻한 단군(壇君)이어야 맞는 말”이라고 주장(主張)하기도 한다.】라고 하면서도 : 그 “태백산(太白山)”이 어디에 있는 “태백산(太白山)”인지 조차 설왕설래(說往說來)하는 것을 보면 코미디가 따로 없다.》
도대체 「그 태백산(太白山)은 어디에 있는, 어떤 산(山)을 말하는 건가? 아는 사람이 없다.」 또 기록(記錄)에서는 그냥 「‘태백산(太白山)’이 아니라 ‘삼위태백(三危太白)’」이라고 하였는데, 이를 “삼위산(三危山)과 백두산(白頭山)을 말한다”라고 하는데,
「“삼위산(三危山)은, 중원대륙(中原大陸)의 감숙성(甘肅省) 서(西)쪽에 있는 산(山)”이고, “백두산(白頭山)은, 10,000리(里) 떨어진 반도(半島) 백두산(白頭山)”이라는 건가?」도대체 이게 무슨 이야긴가? 단군(檀君)은 축지법(縮地法)의 대가(大家)였다는 것인가?
➥ 「삼위태백(三危太伯)」이란 : “두 개(個)의 산(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 봉우리를 가진 태백산(太白山)을 말하는 것으로는 생각지 못하는 것일까?』 머리를 좀 굴려보자. “반도조선(半島朝鮮)”이란 한계(限界)를 가지고 있는 머리는 절대로 사고(思考)할 수 없다.
『危』 : ‘위태로 울 위(危)’【‘불안(不安)하다 또는 위태롭다’라는 것에서 파생(派生)된 자(字)이다.】자(字)라는 것을 생각하면 어떨까? 「삐쭉삐쭉 솟아있는 3개(個)의 봉우리로 만들어진 거봉(巨峯)의 산(山), 바로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이 될 것이다」
이런 형태(形態)를 가진 산(山)은, 단 하나밖에 없는「백두산(白頭山)이요, 장백산(長白山)이 될 것임은 확실(確實)하다. “반도(半島) 백두산(白頭山)과 10,000리(里) 떨어져 있는 감숙성(甘肅省) 삼위산(三危山)에서 무엇을 했다는 것일까? 그 두 곳에서 동시(同時)에 영상촬영(映像撮影) 후(後), 전세계(全世界)로 송출(送出)했다는 건가?” 도대체 뭔가?
➥ ‘그러니 신화(神話)다’. ‘아니다. 전설(傳說)이다’, ‘아니다. 꾸며진 헛소리다’라면서 폄하(貶下)하고, 비하(卑下)하며, 비웃는 것이다. 이렇게 당하고 싶은가?
「반도(半島)의 백두산(白頭山)이라든지 또는 묘향산(妙香山) 또는 태백산(太白山) 또는 구월산(九月山) 등등(等等) 떠들썩, 각자(各自) 처 해진 위치(位置)에 따라서 이곳저곳 호들갑을 떨지만… …모두가 그저 헛소리에 불과(不過)할 뿐이다.」
이러한 행태(行態)를 보면서 : 「“반도조선(半島朝鮮)이라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은,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라는 것을 전문가(專門家)가 아니더라도 금방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설왕설래(說往說來)하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을 믿을 수 있을까? 정말 신뢰(信賴)할 수 있을까? 한때 ‘기독교(基督敎) 일부(一部) 종파(宗派)’에서는 ‘단군(檀君)’을 모신 사당(祠堂)? 흉상(胸像)? 을 파괴(破壞)하는 바람에 사회문제(社會問題)가 되기도 했다.
◈ 그렇다면 정말 「“동이(東夷), 구이(九夷), 한(韓)”은, 단군(檀君)의 자손(子孫)인가? 아니면 또 “다른 시조(始祖) 조상(祖上)”이 있음에도 외면(外面)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필자(筆者)’는 ‘옛 고전(古典) 기록(記錄)을 전제(前提)’로 의문(疑問)을 제기(提起)한다.
◈ 곧, 『단군(檀君)의 자손(子孫)은 맞되, ‘단군(檀君)=요(堯)’의 자손(子孫)이며, 그 선조(先祖)는 염제(炎帝)와의 대규모(大規模) 전쟁(戰爭)에서 승리(勝利)하고 패권(霸權)을 차지한 주류(主流) “황제(黃帝)”의 직계(直系) 자손(子孫)이다.』라는 주장(主張)을 제기(提起)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主張)에 대해 혹자(或者)는 또 반론(反論)을 제기(提起)할 것이 틀림없다. 문제(問題)는, 기록(記錄)【사서(史書)의 기록(記錄)】을 갖고 논(論)하자는 것이다.
➥ 필자(筆者)가 우선(于先) 말하고 싶은 것은 : 「오늘날의 중국(中國)에서도, 중국어 위키백과인 “維基百科 自由的百科全書”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염제(炎帝)는 한족(漢族), 강족(羌族), 경족(京族), 묘족(苗族), 글란(契丹) 등 각 민족(民族) 모두 염제(炎帝)가 선조(先祖)이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維基百科 自由的百科全書’ : 「炎帝,姜姓,連山氏(烈山氏). 魁隗氏,因善火耕而號神農氏,因以火德王,故稱炎帝、赤帝,是中國古代漢族傳說中上古時代的天下共主,年代早於黃帝,炎帝部落從少典氏及有蟜氏派生出來。炎帝的傳說與五德終始說及圖讖相關。現今包括漢族、羌族、京族、苗族、契丹等各民族皆以炎帝為先祖」】
여기서 문제(問題)는, 『염제(炎帝)는 황제(黃帝)와의 전쟁(戰爭)에서 패(敗)한 후(後), 비주류(比主流)로 전락(轉落)하고, 치우(蚩尤)는 살해(殺害)되었다」라고 전(傳)해진다.
➥ 〈승자(勝者)가 된 “황제(黃帝)”는 주류(主流)가 되어 제위(帝位)에 오르고, 그의 자손(子孫)들은 제위(帝位)를 이어받았는데,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 요(堯), 설(契)… …등으로 이어지는데, 이 모두는 “동방(東方)의 왕조(王朝), 동이(東夷)의 왕조(王朝)”였다는 사실(史實)이 기록(記錄)되어 있기 때문이며,
➊ 「신라(新羅)의 금씨(金氏), 고구려(高句驪=百濟)의 고씨(高氏)의 시조(始祖) 조상(祖上)이 바로 “황제(黃帝)의 직계(直系)인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와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라고 했기 때문이고」
➋ 「순(瞬)임금, 백익(伯益), 설(契) 등은 “동방왕조(東方王朝), 동이왕조(東夷王朝)”라고 했기 때문에 이들의 “직계(直系) 선조(先祖) 바로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황제(黃帝)”이기 때문이다」
◈ 「‘황제(黃帝)가 한족(漢族)의 시조(始祖) 조상(祖上)’이라는 말은, 헛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즉(卽), 「‘한족(漢族)의 나라(國家)’라고 ‘자칭(自稱)하는 오늘날의 중국(中國) 스스로 “염제(炎帝)를 선조(先祖)”」라고 말하고 있다. 【‘維基百科 自由的百科全書’ : 「炎帝,姜姓,連山氏(烈山氏). 魁隗氏,因善火耕而號神農氏,因以火德王,故稱炎帝、赤帝,是中國古代漢族傳說中上古時代的天下共主,年代早於黃帝,炎帝部落從少典氏及有蟜氏派生出來。炎帝的傳說與五德終始說及圖讖相關。現今包括 “漢族、羌族、京族、苗族、契丹” 等各民族皆以炎帝為先祖」】 물론(勿論), 그러면서도 「‘황제(黃帝)도 조상(祖上)’이라고 호들갑을 떨지만, 그건 오히려 설득력(說得力)을 떨어뜨리고 있다」
왜냐하면 : 「황제(黃帝)의 직계(直系)인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와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가 바로 “신라(新羅), 고구려(高句驪=百濟)”의 선조(先祖)』라고 했기 때문이다.
➥ 시기적(時期的)으로 보았을 때, 「‘요(堯)’임금과 ‘단군(檀君)’임금은 겹치는 인물(人物)로 동일인(同一人) 곧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후대(後代)의 목적(目的)을 가진 실증사학(자實證史學者)들에 의해, 한 사람이 두 사람으로 나누어졌으며, 단군(檀君)은, 신화(神華), 전설(傳說)로 치부(恥部)되기에 이른 것이다. 【‘5,000’년(年)이라는 장구(長久)한 세월(歲月) 속에 ‘25’년(年)이라는 숫자는 무의미(無意味)한 것이다】
“문제(問題) 제기(提起)의 이유(理由)”를 말한 것이다. 이제부터 본론(本論)으로 들어가 함께 논(論)해 보기로 하자.
---------------------------------------------------------------------
「동국(東國)」 은, 「동방(東方)의 나라(國家)」 란 뜻이다.
○ 『동국(東國)』은, 「동방(東方)의 나라(國家)」란 의미(意味 : 뜻)다. 이럴 때 언뜻 떠오르는 것은,
㈠ 「‘반도(半島) 땅’을 “동방(東方)”이라고 하면서 “동국(東國) 곧 우리나라”【옛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총칭(總稱)한다.】를 칭(稱)한다」라고 했을 때,
㈡ 「‘중원대륙(中原大陸)의 땅’은, 곧 “서방(西方)”이고, “서국(西國) 곧 중국(中國)”이다.」라는 건가?
㈢ 그럼 「중아(中亞)【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땅은, 무엇이고, 하늘(天)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柱) “천주(天柱)”가 땅(地)의 중심(中心)인 곤륜(崑崙)에 있다」라고 하면서 「고로 이곳을 중심(中心)으로 동(東)쪽은 동방(東方)이요, 서(西)쪽은 서방(西方)이라고 불렀다」라는 옛 성현(聖賢)들의 말씀은,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의 말대로라면 : 「모두 헛소리꾼이었다」라는 뜻이 된다.
○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의 역사해설(歷史解說)에 의하면 :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이 그릇된 것인지를 구분(區分)할 수 없고, 사료(史料)를 맘대로 취사선택(取捨選擇)하는 등 뒤죽박죽의 황당무계(荒唐無稽)함을 감출 수 없다.」
특히 「반만년(半萬年) 유구(悠久)한 역사(歷史)를 자랑한다」라고 말하면서도, 「반만년(半萬年), 그 오랜 세월(歲月)을 살아왔던 그 땅(地)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해 헛소리를 지껄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즉(卽), 「“반도(半島) 땅과 그 북방(北方) 일부(一部) 땅”에 대해서는 “그 땅의 모든 것”에 대해 ”미상(未詳), 추정(推定), 추측(推測)“이란 말은, 존재(存在)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나 동국(東國)의 지리지(地理志), 연행일기(燕行日記 : 燕行記) 또는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많은 사대부(士大夫)의 문집(文集), 기타(其他)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등등(等等)에서 말하고 있는 『동이(東夷), 구이(九夷), 구한(九韓), 조선(朝鮮), 한국(韓國 : 馯 : 三韓), 구려(駒驪), 부여(夫余), 맥(貊), 예(穢 : 濊), 옥저(沃沮)』 등등(等等)의 나라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 모두는 『“동방(東方) 땅”에 있었고, 또한 “동국(東國)”에 포함(包含)되는 국가(國家)들이다.』 이를 대략적(大略的)으로 나누어보면 :
㈠ 「동이(東夷)는 구이(九夷)로 분화(分化)되고, 또 구한(九韓)」이라고도 하는데, 「“신라(新羅)” 때의 “구한(九韓)”은 : 동방(東方) 곧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중원대륙(中原大陸)’의 모든 국가(國家)를 칭(稱)했다.」 이 모두가 ‘동방(東方) 곧 우리나라였다’라는 뜻이다.
㈡ 「구려(駒驪), 부여(夫余), 맥(貊), 예(穢:濊), 옥저(沃沮)」 등이 있었으며,
㈢ 「조선(朝鮮)」이 있었으며,
㈣ 「한(馯:韓)」은, 또 삼한(三韓)이 된다.
➥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를 공부(工夫)하고, 연구(硏究)하면서 가장 애로사항이 바로 위의 “㈠+㈡+㈢+㈣”를 구분(區分), 구별(區別)하는 것이다. 이 모두는 『‘동방(東方)에 있었던 나라(國家)’들이고, 곧 ‘동이(東夷)의 나라(國家)’들이며, 곧 ‘구한(九韓)의 나라(國家)’들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동방(東方)』이란 : “지중해(地中海)+흑해(黑海)+오랍산맥(烏拉山脈 : 우랄산맥(Ural, 山脈)”을 기점(基點)으로, 그 ‘동(東)’쪽 땅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방(東方)”이 되는 것이고, 당연(當然)히 ‘기점(基點)의 서(西)쪽 땅’은, 『서방(西方)』이 된다. 이것은 ‘자연(自然)의 이치(理致)’이기 때문에 「인위적(人爲的) 부정(否定)한다는 것은, 곧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 「‘동방(東方)’을 ‘실증사학(實證史學)’을 빌미로 『반도(半島 : 韓半島)를 칭(稱)한다』라고 하는 정신(精神) 나가버린 ‘식민사학(植民史學)의 논리(論理)’는, 21세기(世紀) 오늘날엔 “폐기처분(廢棄處分)되어 소각장(燒却場)으로 직행(直行)해야 할 쓰레기”일 뿐이다.」
○ 「동방왕조(東方王朝)」란 : 곧 「동이왕조(東夷王朝)를, 구한왕조(九韓王朝)를, 조선왕조(朝鮮王朝)를 말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 역사적(歷史的)으로 「동이왕조(東夷王朝)의, 구한왕조(九韓王朝)의, 조선왕조(朝鮮王朝)의」「시조조상(始祖祖上)은 “어떤 분이실까?”』라는 당연(當然)한 물음이 나올 것임은 너무도 당연(當然)스러운 순리(順理)이며, 합리적(合理的)인 물음일 것이다.
◈ 그래서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奇異)” 편(篇)을 대상(對象)으로 한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고려(高麗) 승려(僧侶) 일연(一然)」에 의해, 충렬왕(忠烈王) 7年【AD 1,281年】에 편찬(編纂)되었다」〉라고 전해지고 있지만 :
《‘삼국유사(三國遺事) 원판(原版)’은, 현재(現在)까지 발견(發見)되지 않았고, 여러 부본(副本)만이 전해지고 있다고 하니. 「원판(原版)과 같은 것인지조차 판별(判別)하지 못하며, 안정복(安鼎福)이 가필(加筆)한 “수택본”이라는 “삼국유사(三國遺事) 부본(副本)”은, 일제(日帝) 때 ‘이마니시(今西龍)’가 1,916년부터 소장(所藏)하였는데, 일본(日本)의 천리대학(天理大學) 도서관의 ‘귀중본’으로 소장되어 있다」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여러 설명(說明)을 종합(綜合)해 보면 : 「삼국유사(三國遺事) 원판(原版) 또는 원본(原本)은 전(傳)해오는 것이 없다」라는 것이고, 「시대(時代)에 따라 이 사람, 저 사람이 가필(加筆)했다거나 일제(日帝) 때에 일인(日人)들에 의해 수집(收集)되어 보관(保管) 중인 것이 있다」라는 것인데… …“지금 우리가 원전(原典)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가필본(加筆本)”이라는 것이다.
➥ : 《위에 등장(登場)하는「금서룡【今西龍 : 이마니시 류】」은 : 『대표적(代表的)인 식민사학(植民史學)의 거두(巨頭)이자 반도(半島) 식민사학계(植民史學界)의 ‘아비(父)’와 같은 존재(存在)요, 우상(偶像)일 것이다.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을 ‘찬란(燦爛)하게 꽃 피도록 만들어 놓은 장본인(張本人)’이라고 해도 결코 과장(誇張)된 표현(表現)이 아닐 것이다.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 및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의 대부(代父)다.』라고 해도 결코 과장(誇張) 된 표현(表現)이 아니다.》
➤ : 《이마니시 류【今西龍 : 금서룡 : 1,875 ~ 1,932】는, 기후현(岐阜縣) 출신으로, 일본의 사학자이다. 이병도의 직장(조선사편수회) 상사이기도 하다. 1903년 도쿄 제국 대학을 졸업한 후 1906년부터 경주 등에서 고고학 조사를 하였다. 1913년 9월 조선총독부의 고적 조사 때 평안남도 룡강군에서 세키노 다다시와 함께 점제현신사비(秥蟬縣神祠碑)를 발견하였다. 같은 해 교토제국대학의 강사가 되었고, 1916년에는 조교수가 되었다. 북경 유학 후 1926년에는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과 교토제국대학의 겸임교수가 되었다. 1925년부터 1932년까지 ‘조선총독부 조선사 편수회의 회원’이었고, 일본의 덴리 대학(天理大學)에는 금서룡문고(今西龍文庫)가 있다. 저서(著書) : 《檀君考》, 1929년 /《滿洲語のはなし》, 1931년 /《新羅史研究》, 近沢書店, 1933년 / 《百済史研究》, 近沢書店, 1934년 / 《朝鮮史の栞》, 近沢書店, 1935년 /《朝鮮古史の研究》, 近沢書店, 1937년 /《高麗史硏究》, 近澤書店, 1944년 등이 있다고 한다. [인용(引用) 출처(出處) : 한국어 위키백과]》
◈ 위의 이마니시 류【今西龍 : 금서룡 : 1,875 ~ 1,932年】를 보듯이 【이것은 빙산(氷山)의 일각(一角)으로 하나의 ‘예(例)’에 불과(不過)한 것이다.】「우리 선조(先祖)들의 역사서(歷史書)와 같은 기록물(記錄物)들은 일제(日帝) 강점(强占) 때에 맞춰 대대적(大大的)으로 수거(收去)되어, 파괴(破壞)되고, 가필(加筆)되고, 수정(修訂)되어 : 왜곡(歪曲), 조작(造作)으로 얼룩져 다시 편찬(編纂)되었다. 이들이 조선국(朝鮮國)을 위한, 조선인(朝鮮人), 조선(朝鮮) 민족(民族)을 위한 역사서(歷史書)를 만들어 놓은 것일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말이다. 일제(日帝)와 그 하수인(下手人)들은 ‘조선사(朝鮮史)를 이용(利用)’해 반도(半島) 땅을 자국(自國)의 제2의 영토(領土)로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한 것이다.」
즉(卽), 「‘조선족(朝鮮族)=한족(韓族)’은, 90%의 높은 문맹(文盲)에, 무지몽매(無知蒙昧)한 민족(民族)으로, “가난에 찌든 노비(奴婢), 천인(賤人) 출신(出身)”들이 대부분(大部分)을 차지하며, “5% 미만(未滿)의 관료(官僚)와 양반(兩班)들은 착취(搾取), 매관매직(賣官賣職), 부정부패(不正腐敗)”에 앞장서서 스스로 그 땅을 통치(統治)할 수 없는 종족(種族)이자 민족(民族)으로 천황(天皇)의 교화(敎化)가 필요(必要)하다」라는 것을 전제(前提)하였고, 「미합중국(美合衆國)과 극비회담(極備會談)을 통(通)해 반도(半島)를 할양(割讓)받아, 점령(占領), 통치(統治)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반도(半島) 땅의 성씨(姓氏) 분포(分包)’를 보면 알 수 있는데 : 『반도인(半島人)의 60∼70% 정도(程度)를 차지하고 있는, “주요(主要) 성씨(姓氏)들의 집중분포도(集中分布圖)”를 보면 : 곧 “19세기(世紀) 혼란(混亂)스러웠던 때와 20세기(世紀) 초(初) 일제(日帝)에 의한 호적시행(戶籍施行) 시기(時期)”, 이때 대부분(大部分)이 만들어진 것이다. 곧 ‘5% 미만(未滿)의 양반가(兩班家)’와 ‘중인(中人) 2∼3%’를 뺀 대부분(大部分) 백성(百姓)들은 제대로 된 성씨(姓氏)가 없었다』라는 뜻이다.
일제(日帝)가 반도(半島)를 통치(統治)하면서 가장 먼저 시행(施行)한 것이 “반도(半島) 땅에 사는 양반가(兩班家)”를 세밀(細密)하게 조사(調査)한 것이다. 물론(勿論) 목적(目的)은 이들을 세뇌(洗腦)시켜 식민지(植民地) 통치(統治)에 이용(利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반도(半島) 팔도(八道) 양반가(兩班家)는 전 가구(家口)의 “3∼5”% 정도(程度)」이었는데… …「오늘날의 무슨 무슨 성씨(姓氏), 무슨 무슨 파(派)」하는 것 대부분(大部分)은, 이때 백성(百姓)들의 욕구(慾求)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반도(半島)는, 당시(當時)에 행정조직(行政組織)다운 조직(組織)이 없어, 그 힘이 제대로 발동(發動)하지 못했다는 증거(證據)요, 일제(日帝)가 반도(半島)를 점령(占領)하고 통치(統治)하는데 전력투구(全力投球)했었다는 증거(證據)다.
➤ 일제(日帝)는… …이 땅에 있었던 많은 원본(原本)은, 은밀(隱密)하게 비밀리(秘密裏)에 본토(本土)로 가져가고, 이 땅엔 “일제(日帝)”의 의도(意圖)에 맞춰 첨삭(添削)을 거친 것들을 편찬(編纂)하여 내놓은 것들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들이 바로 “일제(日帝)가 첨삭(添削) 과정(過程)【보충(補充)하거나 삭제(削除)하여 고침】을 거친 후(後), 많은 이유(理由), 명분(名分)을 빌미로 편찬(編纂)하여 유포(流布)시킨 것들이다.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 또한 이 정도(程度)는 100% 다 알고 있다. 『그저 모르는 척하고 있을 뿐이다. 왜? 반도사학(半島史學)이 답(答)할 차례다』
➤ 또 ‘일제(日帝) 강점(强占)’ 때에 맞춰 : 『‘갑자기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없었던 금석문(金石文)들이 대대적(大大的)으로 발견(發見)됐다’라고 하는데, 이건 목적(目的)을 가진 일제(日帝) 요원(要員)들에 의해 제작(製作)되어 만들어지고, 가공(加工)되어 여기저기에 세워지고를 반복(反復)했고, 이곳저곳에 구릉(丘陵)이 만들어져 릉(陵)이라고 불리며, 시중(時中)에 유포(流布)되어 소문(所聞)이 나게 되고, 구전(口傳)되게끔 만들어졌다.』
「이곳저곳의 과거(過去) 이야기, 유물유적(遺物遺蹟)들을 추적(追跡)해 보면 : 모든 것이 “일제(日帝) 강점(强占)” 때와 겹치게 된다. “그때 많은 것이 새롭게 만들어졌다”라는 이야기다. 수도(首都) 한성(漢城)과 팔도(八道)의 한자식(漢字式) 지명(地名)은, 일제(日帝)에 의해 대부분(大部分) 만들어졌다.」
필자(筆者)의 기억(記憶)을 더듬어 보면 : AD 1,950年 당시(當時)에도 지명(地名)이 바뀌는 경우가 있었고, 한 마을에도 한자식(漢字式) 지명(地名)은 없고, 한글식【토착어(土着語) 또는 언문(諺文), 한글?】이 대부분(大部分)이었다.
◈ 『반만년(半萬年), 찬란(燦爛)하게 번영(繁榮)했다는 삼천리(三千里) 화려강산(華麗江山), 무궁화(無窮花) 삼천리(三千里)의 주인공(主人公)이었다는 백의(白衣)의 왕조(王朝), 이 땅에서 한자(漢字)를 사용(使用)하며 소중화(小中華)라고 칭송(稱頌)받으며, 해동성국(海東盛國)을 이루었다는 조선왕조(朝鮮王朝)【총칭(總稱)】』 땅(地)에는,
지리지(地理志)에는, “미상(未詳), 추정(推定), 추측(推測)”이란 땅이 많고,
지리지(地理志)의 토산물(土産物)은, ‘하 심심’해서 먹물을 풀어놓은 것일게고,
무궁화(無窮花) 삼천리(三千里)는 : 주인(主人 : 無窮花)은 없고, 일제(日帝)는 심고,
반만년(半萬年) 이어져 온 왕조(王朝)의 상징(象徵)인 왕릉(王陵)은 전무(全無)하고,
반만년(半萬年) 이어져 온 각국(各國)의 도성(都城)은 흔적(痕迹)조차 없고,
반만년(半萬年)을 말하면 며칠 밤을 꼬박 새워도 마르지 않을 이야기가 있으니, 「‘반만년(半萬年) 찬란(燦爛)했다’라는 왕조(王朝)는 어디에 있었다는 것이냐?」
‘반도인(半島人)’들은 모조리 “문맹(文盲)”이었다는 이야긴가? 그럼 “한자(漢字)”로 기록해 놓은 저 수많은 문집(文集), 왕조실록(王朝實錄), 사서(史書) 등은 우주인(宇宙人)이 만들어 놓은 것일까? “반도사학(半島史學)은 무엇 하나 제대로 설명(說明)하는 것이 없다.” 하는 짓이라고는 “발끈”하며 성명(聲明)을 내는 일 밖에 무엇이 있겠는가?” 필자(筆者)가 볼 때는“발끈“ 할 자격(資格)조차 없을 것 같다.
➥ 「필자(筆者)」가 항상(恒常) 말하는 것은 : 〈남의 손에 의하며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다른 나라 사람의 손에 의해, 다른 종족(種族)에 의해, 이해타산(利害打算)이 걸려 있는 적대적(敵對的) 이웃 나라 사람이 아닌 : 「우리의 손으로, 우리를 위한, 우리들의 역사(歷史)를 후세(後世)에 남겨 주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奇異)’ 편(篇)은, 절대적(絶對的)으로 새롭게, 새로운 해석(解釋)이 필요(必要)한 것이다. 그 이유(理由)를 논리적(論理的)으로 파헤쳐 보기로 하자.
---------------------------------------------------------------------
○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편(篇)은, 마땅히 재해석(再解釋)되고, 재해설(再解說)이 되어야 한다고 강력(强力)하게 주장(主張)하는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1권 기이(紀異) 제1」
○ 《紀異第二 : 叙曰. 大抵古之聖人. 方其禮樂興邦. 仁義設敎. : 서문(叙)에서 이르기를 : 대체로 옛날의 성인(聖人)은, 예절과 낙(樂)을 가지고 나라를 세웠고, 인의(仁義)로 백성(百姓)들을 가르쳤다. 則怪力亂神, 在所不. 語然而帝王之將興也. 膺符命, 受圖籙, 必有以異於人者. : 곧 괴력난신(怪力亂神)【‘괴이(怪異)와 용력(勇力)과 패란(悖亂)과 귀신(鬼神)에 관한 일’이라는 뜻으로, 이성적(理性的)으로 설명(說明)하기 어려운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존재(存在)나 현상(現象)을 이르는 말이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왕(帝王)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부명(符命)【하늘이 제왕(帝王)이 될 만한 사람에게 내리는 상서(祥瑞)로운 징조(徵兆)】을 얻고, 도록(圖籙)【앞날의 길흉(吉凶)을 예언(豫言)하는 술법(術法) 또는 그런 내용(內容)을 적은 책(冊)】을 받았다. 반드시 보통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然後能乘大變, 握大器, 成大業也. : 그런 뒤에라야 큰 변화(大變)의 틈을 타서, 대기(大器)를 잡아 대업을 이룩할 수가 있었다. 故河出圖, 洛出書, 而聖人作. : 고로 하수(河水)에서 그림이 나왔고, 낙수(洛水)에서 글자(書)가 나와서, 이로써 성인(聖人)이 일어났다. 以至虹繞神母而誕羲, 龍感女登而生炎. : 무지개가 신모(神母)의 몸을 두르더니 복희(伏羲)를 낳았고, 용(龍)이 여등(女登)에게 감응(感應)하더니 염제(炎帝)가 태어났다. 皇娥遊窮桑之野. 有神童自稱白帝子, 交通而生小昊. : 황아(皇娥)가 궁상(窮桑)의 들에서 노니는데, 자칭 백제(白帝)의 아들이라고 하는 신동(神童)이 와서, 교통(交通)하여 소호(少昊)가 태어났다. 簡狄呑卵而生契. 姜嫄履跡而生弃(棄). : 간적(簡狄)이 알[卵]을 삼키니 설[契]이 태어났고, 강원(姜嫄)은 족적(足跡)을 밟고서 기(充)가 태어났다. 胎孕十四月而生堯. 龍交大澤而生沛公. 自此而降. 豈可殫記. : 태잉(胎孕:孕胎)하여 14개월에 요(堯)가 태어났고, 패공(沛公)의 어머니는 큰 연못에서 용(龍)과 교접(交接)해 패공(沛公)이 태어났다. 이 뒤로도 이런 일이 많지만, 다 기록할 수가 없다. 然則三國之始祖. 皆發乎神異. 何足怪哉. 此神異之所以漸諸篇也. 意在斯焉. : 이렇게 볼 때 삼국(三國)의 시조가, 모두 신이(神異)스러운 데서 나왔다고 하는 것이, 어찌 괴이(怪異)하겠는가. 이 기이 편을 이 책의 첫머리에 싣는 것은, 그 뜻이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
➥➥➥ 위의 ‘원전(原典) 원문(原文)’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內容)은, 곧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 및 그 주석(註釋)을 그대로 인용(引用)하고 있다.」 이를 어떻게 설명(說明)하고, 삼국유사(三國遺事) 저자(著者)가 후세(後世)들에게 바라는 진정(眞正)한 의미(意味)는 무엇이었을까? 사실(事實)은, 이게 가장 중요(重要)한 핵심(核心) “Point”일 것이다.
「13세기(世紀)를 살다 가신 “승려(僧侶) 일연(一然)”은,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와 그 주석(註釋)”을 그대로 인용(引用)한 뜻 또는 목적(目的)이 무엇이었을까?」
또 예(例)를 들면 〈國 語 云 「 少 典 娶 有 蟜 氏 女, 生 黃 帝, 炎 帝」: 국어(國語)에서 이르기를 : 소전(少典)이 교씨(蟜氏) 녀(女)에게 장가를 들어, 황제(黃帝)와 염제(炎帝)가 태어났다〉라고 하였는데, 이를 교묘(巧妙)하게 위장(僞裝)하고, 신비(神祕)롭게 만들어 「용(龍)에 감응(感應)하여 염제(炎帝)를 낳았다」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
또 「황제(黃帝)는 유웅국군(有熊國君)으로 소전국군(少典國君)의 차자(次子)로, 어머니는 교씨녀(蟜氏女)이니, 교씨녀(蟜氏女)는 소전(少典)의 아내(妻)다. 황제(黃帝)의 호(號)는 유웅씨(有熊氏)인데, 또 이르기를 진운씨(縉雲氏), 또 이르기를 제홍씨(帝鴻氏), 또 제헌씨(帝軒氏)」라고 하였는데, 「유웅(有熊)이 뭔가? 바로 곰(熊)이란 뜻이다.」
◈ 「환웅(桓雄)이 ‘곰(熊)’을 여인(女人)으로 환생(還生)케 하고는, 스스로 취(取)하니, ‘단군왕검(檀君王儉)=단군왕검(壇君王儉)’이 태어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런 이야기는 누군가가 각색(脚色)한 것이 분명(分明)하다.
『‘금수(禽獸)를 인간(人間)으로 환생(還生)케 할 정도(程度)의 능력(能力)의 인물(人物)이 호랑이(虎)가 환생(還生)에 실패(失敗)하고, 곰(熊)만이 환생(幻生)할 것이다’라는 정도(程度)도 몰랐다? 또 웅녀(熊女)는 혼인(婚姻)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旣定事實)이며, 이에 스스로 취(取)하니, 아비(父)가 딸(女息)을 취(取)한 것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 거냐?』 이건 누군가가 각색(脚色)한 것이 분명(分明)하다는 것이다. “묻고 싶다”
〈「유웅(有熊)의 곰국(熊國)」과 「단군(檀君) 모(母)인 곰(熊)」은, 똑같은 ‘곰(熊)’을 모태(母胎)로, 그 대상(對象)으로 만들어졌다〉이게 그저 우연(偶然)의 일치(一致)로 치부(置簿)하기에는 ‘너무 많은 우연(偶然)의 일치(一致) 건(件)’이 벌어지는 것이다.
〈正義輿地志云 :「涿鹿本名彭城, 黃帝初都, 遷有熊也」 案:黃帝有熊國君, 乃少典國君之次子, 號曰有熊氏, 又曰縉雲氏, 又曰帝鴻氏, 亦曰帝軒氏。母曰附寶, 之祁野, 見大電繞北斗樞星, 感而懷孕, 二十四月而生黃帝於壽丘。壽丘在魯東門之北, 今在兗州曲阜縣東北六里。生日角龍顏, 有景雲之瑞, 以土德王, 故曰黃帝。封泰山, 禪亭亭。亭亭在牟陰。集解譙周曰:「有熊國君, 少典之子也」 皇甫謐曰 :「有熊, 今河南新鄭是也」 索隱少典者, 諸侯國號, 非人名也。又案:國語云「少典娶有蟜氏女, 生黃帝, 炎帝」〉
---------------------------------------------------------------------
(1) 〈以至虹繞神母而誕羲, 龍感女登而生炎 : 무지개가 신모(神母)의 몸을 두르니 복희(伏羲)를 낳았고, 용(龍)이 여등(女登)에게 감응(感應)하니 염제(炎帝)가 태어났다〉라고 하였는데
➨ 伏羲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又稱宓羲、炮犧、庖犧、包犧、羲皇、虙羲、皇羲及太昊等)是中國傳說時代的人物,為《史記》中的三皇五帝之一。伏羲不僅在古代被視為人文始祖,其神話形象和事跡也深刻影響了後世的道教、儒家及民間信仰體系。
伏羲與女媧 : 伏羲的名字最早見於戰國時期的文獻,如《易·繫辭下傳》、《管子·封禪》、《莊子》、《楚辭》、《戰國策》等作品中,與女媧並稱則最早見於漢代《淮南子·覽冥》篇。
伏羲傳說的內容,因時代不同而異。西晉《帝王世紀》雲伏羲氏生於成紀。相傳伏羲氏教民結網、漁獵畜牧、製造八卦等,亦傳說伏羲創文字、古琴。《白虎通義》云:「三皇者何謂也,伏羲、女媧、神農是也。」把伏羲推到三皇的地位。據傳伏羲與女媧為兄妹,「伏羲鱗身,女媧蛇軀」,兩人結為夫婦,因而被後人稱之為龍祖。
東漢《潛夫論》記載,赤帝魁隗氏,號神農氏,被稱為炎帝,取代伏羲氏成為天下共主[17]。司馬貞指出伏羲與女媧為華胥氏所生,在燧人氏之後為王。
伏羲氏自古以來被奉為華夏族群的人文始祖;同時在神話中,也被認為是所有人類的祖先,伏羲氏是三皇之一,徙治陳倉,定都於陳宛丘(今河南淮陽),以「龍」為圖騰,風姓是中國傳說時代「伏羲」的姓。
《欽定古今圖書集成》引《鳧山人祖廟碑記》(金·田肇)記載:「混沌肇分,天地開闢。有民人則有君長,自盤古而來,遐哉邈乎。其詳不可得聞。太古既遠,三皇迭興。為皇初之首者,伏羲也。 按《帝王世紀》:伏羲,風姓,有大聖德,繼天而王,位正東方,象日之明,以木德而治天下。仰以觀乎天文,俯以察乎地理。近取諸身,遠取諸物,始畫八卦,以通神明之德,以類萬物之情。」
《天皇至道太清玉冊》(明·朱權)記載:「天皇,即大昊伏羲氏,以木德王也,以元始之玄炁化生者也。紀號曰東華至真蒼天上帝,仰觀俯察,得龍馬負圖而畫卦命象,始制書契以開萬有。」
… 「국어(國語)」에서 이르기를 : 「소전씨(少典氏)가 교씨녀(蟜氏女)에게 장가를 드니, 황제(黃帝)와 염제(炎帝)가 태어났다 : 國語云 : 少典娶有蟜氏女, 生黃帝, 炎帝」라고 하였다.
➨➨➨ 〈炎帝,姜姓,連山氏(烈山氏). 魁隗氏,因善火耕而號神農氏,因以火德王,故稱炎帝、赤帝,是中國古代漢族傳說中上古時代的天下共主,年代早於黃帝,炎帝部落從少典氏及有蟜氏派生出來。炎帝的傳說與五德終始說及圖讖相關。現今包括漢族、羌族、京族、苗族、契丹等各民族皆以炎帝為先祖。〉
… 「염제(炎帝)는 적제(赤帝)」라고도 하는데… … ◈ 「오늘날의 한족(漢族), 강족(羌族), 경족(京族), 묘족(苗族), 글란(契丹) 등(等)의 각 민족(民族)이 “염제(炎帝)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➊ 중요(重要)한 첫 번째의 것은 : 「염제(炎帝)는 황제(黃帝)와의 전쟁(戰爭)에서 패(敗)하여 소멸(消滅)되었다」라는 것이니, 「자칭(自稱) 한족(漢族), 강족(羌族), 경족(京族), 묘족(苗族), 글란(契丹) 민족(民族)들의 시조(始祖)로 하는 염제(炎帝)는, 소멸(消滅)되어 음지(陰地)에서 숨죽이고 살았다」라는 것이다.
➋ 두 번째의 것은 : 「염제(炎帝)와의 전쟁(戰爭)에서 승리(勝利)한 “황제(黃帝)”는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와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 직계(直系)로 이어지는데, 바로 신라(新羅) 및 고구려(高駒驪: 百濟)의 시조(始祖)이다. 이는 ‘동이(東夷)=구이(九夷)=한(韓)’의 시조(始祖)가 되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양지(陽地)인 동방(東方)에서 살았다.」
이런 결과(結果)로 보아도 :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주인공(主人公)은 “동이(東夷)였고, 구이(九夷)였으며, 구한(九韓)이었으며, 한(韓)이었다”」라는 뜻이 된다.
➥➥➥ 「한족(漢族), 강족(羌族), 경족(京族)【越族】, 묘족(苗族), 글란족(契丹族)」등은 모두 소수민족(少數民族)으로, 현재(現在)의 중국(中國)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에서도, 그들 스스로 “염제(炎帝)가 자신(自身)들의 선조(先祖)”라고 주장(主張)하고 있다.
위의 글 “➊”에서 보듯이, 이러한 이들이 『“감히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주인공(主人公)이 될 수 있었겠는가?”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반도사학(半島史學)은, 이제 스스로 문(門)을 닫아야 할 때다” 더해서 무엇에 쓸모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 「조선왕조(朝鮮王朝)에 반기(叛起)를 든… …20세기(世紀) 서세(西勢)와 일제(日帝)에 지원(支援)과 호응(呼應)을 얻은, 조선왕조(朝鮮王朝)에 반기(叛起)를 든… …소수(小數)의 정치인(政治人)들에 의해 정치적(政治的) 구호(口號)로 만들어져, 그 싸움에서 승리(勝利)한 결과(結果)에 따라, 강제적(强制的)으로 한족(漢族)이 되어버린 것이다.」이건 지금도 진행(進行) 중이며, 팩트[Fact]이자,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➌ 「황제(皇帝)는 희수(姬水) 가에서 살았기 때문에 “희(姬)”성(姓)을 갖게 되었고」. 「염제(炎帝)는 강수(姜水) 가에서 살았기 때문에 “강(姜)”성(姓)을 갖게 된 것이다.」 이는 같은 부족(部族)이 아니었다는 라는 뜻이라고 주석(註釋)에서 밝히고 있다.
〈據《國語》所載黃帝與炎帝的傳說,古代少典氏與有蟜氏通婚,生下黃帝與炎帝兄弟二人, 分別居住在姬水與姜水兩地,因此,黃帝為姬姓,炎帝為姜姓,成為不同部族。韋昭註,將黃帝、炎帝「二帝用師以相濟也」解釋為消滅,代表黃帝與炎帝之間發生戰爭, 黃帝消滅炎帝。《呂氏春秋》記載黃帝與炎帝之間曾發生戰爭。〉
「예나 지금이나 권력(權力) 앞에서는 부모자식(父母子息)도, 형제자매(兄弟姉妹)도, 벗도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형제(兄弟)간인 황제헌원(黃帝軒轅)과 염제(炎帝) 사이에 전쟁(戰爭)이 벌어졌고, ‘염제(炎帝)는 소멸(消滅)되었다’라고 후대(後代)의 사가(史家)들은 말하고 있다.
---------------------------------------------------------------------
(2) 〈皇娥遊窮桑之野. 有神童自稱白帝子, 交通而生小昊 : 황아(皇娥)가 궁상(窮桑)의 들에서 노니는데, 자칭 백제(白帝)의 아들이라고 하는 신동(神童)이 와서, 교통(交通)하여 소호(少昊)가 태어났다〉
索 隱 案:黃 帝 立 四 妃, 象 后 妃 四 星。皇 甫 謐 云:➊ 「元 妃 西 陵 氏 女, 曰 累 祖, 生 昌 意。➋ 次 妃 方 雷 氏 女, 曰 女 節, 生 青 陽。 ➌ 次 妃 彤 魚 氏 女, 生 夷 鼓, 一 名 蒼 林。➍ 次 妃 嫫 母, 班 在 三 人 之 下」
案:國 語 夷 鼓, 蒼 林 是 二 人。又 案:漢 書 古 今 人 表 彤 魚 氏 生 夷 鼓, 嫫 母 生 蒼 林, 不 得 如 謐 所 說。太 史 公 乃 據 大 戴 禮, 以 累 祖 生 昌 意 及 玄 囂, 玄 囂 即 青 陽 也。 皇 甫 謐 以 青 陽 為 少 昊, 乃 方 雷 氏 所 生, 是 其 所 見 異 也。
〔五〕索隱玄囂, 帝嚳之祖. 案:皇甫謐及宋衷皆云玄囂, 青陽即少昊也。
➥ 「색은(索隱) 이르기를 : 현효(玄囂)는, 제곡(帝嚳)의 할아비(祖)다. 황보밀(皇甫謐)과 송충(宋衷) 모두 이르기를 : 청양(靑陽)은 곧, 소호(少昊)이다」라고 하였는데… …“현효(玄囂)=청양(靑陽)=소호(少昊)”는, 곧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를 말하는 것이다.
「➨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는, 신라(新羅)의 시조(始祖)」였고, ➨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손자(孫子)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는, ‘고구려(高句驪: 百濟)’의 시조(始祖)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단군(檀君)”에 대한 이야기는, 목적(目的)을 가진 자(者)들에 의해 각색(脚色)된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疑問)을 제기하는 것이다.
---------------------------------------------------------------------
(3) 〈簡狄呑卵而生契 : 간적(簡狄)이 알[卵]을 삼키니 설[契]이 태어났다〉
➨ 契(?—?),子姓,名契,帝嚳之子,唐堯的異母弟,生母為簡狄,商高祖乙的祖先,也稱閼伯。商代的祖先,傳說是舜的臣子。 《史記 殷本紀》: 殷契,母曰簡狄,有娀氏之女,為帝嚳次妃。三人行浴,見玄鳥墮其卵,簡狄取吞之,因孕生契。《讀史方輿紀要》稱:「契始封商「今陝西商州」,相土遷商丘「今河南歸德府附郭縣」
◈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BC 2,436?∼BC 2,367?. 計 70年) / 출처(出處) : 역사년대표(歷史年代表) 참조(參照) 인용(引用)】의 차비(次妃)였던 간적(簡狄) 사이에서 태어난 이가 바로 「설(契)」로, 「은(殷)=상(商)나라의 ‘시조(始祖) 조상(祖上)’」인데, 「은(殷) 곧 상(商)나라는 동이(東夷) 왕조(王朝)였다」〉라고 전(傳)해지고 있는바, 바로 “고구려(高駒驪: 百濟)의 직계(直系) 조상(祖上)이었다”라는 것이 된다.
아들(子)인 “설(契)”이 동이(東夷)였다면 : 「그 후손(後孫) 역시 동이(東夷)였다」라는 것이고, 「선대(先代)인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황제(黃帝) 헌원(軒轅)…복희(伏羲)…여와(女媧) 등 역시(亦是) 동이(東夷)이다.」라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다. 종족(種族) 또는 혈통적(血統的)으로 봐도 이건 자연(自然)의 이치(理致)다.
「고죽국(孤竹國)」은, 「고려(高麗)【구려(句驪)=고구려(高句驪)】인데, 이들은 ‘은(殷)=상(商)’ 왕조(王朝)와 동성(同姓)으로 이어져 왔다【唐書, 裵矩傳】」라고 하니… …바로 고구려(高駒驪)의 직계조상(直系祖上)은, 설(契)로 이어지고, 설(契)의 아버지(父)인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로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도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의 후손(後孫)이기 때문에, 성(姓)을 고씨(高氏)라고 했다 : 高句麗亦以高辛氏之後, 姓高氏【見晋書載記】」라는 기록(記錄)을 남긴 것이다.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가 동이(東夷)였으므로 “설(契)” 역시(亦是) 아버지(父)의 종족(種族)이자, 혈족(血族)이었음을 당연(當然)한 이치(理致)다.
➥➥➥ 「또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의 아버지(父) 역시(亦是) 동이(東夷)요, 조부(祖父) 역시(亦是) 동이(東夷)였다는 것은 당연(當然)한 자연(自然)의 이치(理致)라 할 수 있다.」
➨ 결국(結局) 「황제(黃帝)니, 염제(炎帝)니, 복희(伏羲)니 하는 모든 역사(歷史)의 시조(始祖)라고 하는 삼황오제(三皇五帝) 모두가 동이(東夷)였고, 동이(東夷)의 역사(歷史)였다」라는 것이다.
이건 혈통적(血統的)으로, 종족(種族)으로 숨길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숨기고자 신화(神話), 전설(傳說), 설화(說話) 온갖 해괴망측(駭怪罔測)하고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이야기들로 만들어 놓은 것은, 바로 근대(近代)의 사학자(史學者)들이다.
---------------------------------------------------------------------
(4) 〈姜嫄履跡而生弃(棄) : 강원(姜嫄)은 족적(足跡)을 밟고서 기(充)가 태어났다.〉
➨ 姜嫄(?—?),中國上古人物,有邰氏,后稷的母親。根據《史記·五帝本紀》記載,姜嫄是帝嚳高辛氏的正妃(次妃是簡狄,第三妃是慶都,四妃是常宜)。傳說她是踩到上帝的腳印後,懷孕生下后稷。后稷是帝嚳之子,周朝的父系祖先[1]。《詩經·大雅·生民》的開端說:「厥初生民,時維姜嫄。生民如何,克禋克祀,以弗無子。履帝武敏歆,攸介攸止,載震載夙,載生載育,時維后稷。」《詩經·魯頌·閟宮》說:「赫赫姜嫄,其德不回,上帝是依。」其死後葬在陝西武功姜嫄墓(俗稱娘娘墳)。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의 아들이 주(周)나라 왕조(王朝) 직손(直孫)이다.」라고 하였다. 「고구려(高駒驪)는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의 후손(後孫)이라서 성(姓)을 고씨(高氏)로 했다」라고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전하고 있다. 이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바로 혈족(血族), 혈통(血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한족(漢族)? 어디에, 어느 곳에, 한족(漢族)의 혈족(血族), 혈통(血統)으로 이어졌다는 기록(記錄)이 있나? 눈을 씻고 또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저 말로만, 해설서(解說書) 또는 근세(近世)의 학자(學者)들에 의한 “주석(註釋)”에서 등장(登場)하는 것이 “한족(漢族)의 선대(先代) 조상(祖上)이다”라는 글귀뿐이다.
西漢·劉向《列女傳·母儀·棄母姜嫄》:姜嫄以為異,乃收以歸。因命曰棄。姜嫄之性,清靜專一,好種稼穡。及棄長,而教之種樹桑麻。棄之性明而仁,能育其教,卒致其名。堯使棄居稷官,更國邰地,遂封棄於邰,號曰后稷。及堯崩,舜即位,乃命之曰:「棄!黎民阻飢,汝居稷,播時百穀。」其後世世居稷,至周文武而興為天子。君子謂姜嫄靜而有化。《詩》云:「赫赫姜嫄,其德不回,上帝是依。」又曰:「思文后稷,克配彼天,立我烝民。」此之謂也。
---------------------------------------------------------------------
(5) 〈胎孕十四月而生堯 : 태잉(胎孕:孕胎)하여 14개월에 요(堯)가 태어났다〉
「堯」,祁姓,名放勳,中國神話中五帝之一,傳說出生於三阿之南[1]。道教中為天官大帝,三官大帝之一,誕日為上元節。按《呂氏春秋》[2],陶唐氏部落以舞蹈聞名於世,後來帝堯登基後又改變前人的音樂以配合舞蹈。
《史記·五帝本紀》記載:帝嚳有兩個兒子──摯和放勳(即堯);帝嚳死後,以其年齡最大的兒子摯繼承帝位,為帝摯。堯好學而能幹,十三歲時就受命輔佐帝摯。帝摯才幹平庸,未能妥善管理國家。而堯仁慈愛民,明於察人,治理有方,盛德聞名天下。於是各部族首領紛紛背離帝摯,而歸附於堯。帝摯也自覺不如堯之聖明,終於在繼位九年以後,將帝位禪讓於堯。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지(摯)와 방훈(放勳)인데, 방훈(放勳)이 곧 “요(堯)”임금이다.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가 죽은 뒤에 “지(摯)”가 계승(繼承)했는데 바로 제지(帝摯)이다. 그러나 재위(在位) 9년(年) 이후(以後)에 “요(堯)”에게 선양(禪讓)하였다」라고 전(傳)해진다.
堯踐帝位時僅二十三歲,以平陽[今山西臨汾市境]為都城,以火德為帝,人稱赤帝。他性格仁慈,十分聰明,年輕有為,當上天下共主,也不因而驕橫傲慢。他勤於政事,未敢休息。禮儀簡單,生活儉樸,絕不浪費百姓的一分一毫。例如他只吃用陶簋盛的粗飯淡湯,只求能飽。
「요(堯)는 23세(歲)에 평양(平陽) 도성(都城)에서 제위(帝位)에 올랐다」라고 하였는데, ‘평양(平陽)에 도성(都城)이 있었다’라는 것이다.
帝堯與四岳討論繼承人問題。帝堯說:「四岳,我在位已經七十年了,您幾位中間有誰能承天命、繼帝位呢?」 帝堯說:「那就讓他試試吧!」於是帝堯將兩個女兒娥皇、女英嫁給舜,來觀察他的德性。舜讓二妃回媯汭(河名,今山西)家中,去侍奉公婆,盡行婦道。帝堯很滿意,又讓九個兒子跟隨舜,來觀察他處理社會事務的能力。最後,舜接受了堯的禪讓,登上共主之位。
竹書紀年與法家記載 / 堯 : 《竹書紀年》中記載,舜將堯放逐到平陽囚禁,先立丹朱為帝,後奪取帝位。
關於舜脅迫堯父子讓位,在古代並非只有《竹書紀年》孤證,戰國時期的荀子、韓非子亦先後有類似說法。《荀子·正論》:「夫曰堯舜禪讓,是虛言也,是淺者之傳,是陋者之說也。」而《韓非子·說疑》:「舜逼堯,禹逼舜,湯放桀,武王伐紂,此四人者,人臣弒其君者也。」;而成書時代約略同期的《山海經·海內南經》「蒼梧之山,帝舜葬於陽,帝丹朱葬於陰」文中更稱呼丹朱為帝,間接否定了堯直接禪位予舜的觀點。因此後來的《汲冢瑣語》依據《竹書紀年》,而對此提出了疑問:「舜放堯於陽,而書云某地有城,以囚堯為號,識者憑斯異說,頗以禪受為疑。」,從現實面來說,即使從《孟子·萬章上》:「丹朱之不肖,舜之子亦不肖。」文中推測堯會認為丹朱不肖而有讓國的個人想法,但仍須面對整個家族利益集團的反對,因為在空間資源有限的情況下,這個舉動會涉及到急遽的權利與資源重分配,必然產生新舊團體間的紛爭。也因此即使是舜受禪觀點,亦有三苗不服,舜於是發動戰爭解決的記載。無論如何,在西漢後獨尊儒術、採納單一史觀的發展下,有關舜逼堯讓位的說法逐漸隱沒,而不為人所重視。
《史通·疑古》引《汲冢瑣語》文:「昔堯德衰,為舜所囚也。」 後世亦有人懷疑堯舜並非禪讓:曹丕篡漢之後,感嘆道:「舜禹之事,吾知之矣。」唐朝詩人李白在《遠別離》寫到:「堯幽囚,舜野死。」,懷疑堯舜禪讓的說法。
堯讓位後,繼續關注國事,經常巡視天下,做了許多利國利民的事。禪位二十八年以後,堯以一百一十八歲高齡逝世[8],安葬於濟陰成陽(今山東省菏澤市牡丹區胡集鄉)。百姓們聽到堯逝世的消息,無不悲痛萬分,如喪父母。在此後的三年中,人們自動停止了各種娛樂活動,以表達對堯的哀思。三年喪期結束,舜提出讓位給丹朱,自己避居於南河以南的荒野。人們都不服丹朱的號令,還是向舜朝覲,百姓照樣謳歌舜的盛德。舜說:「這是天意啊!」於是重新回到國都,再一次登上共主之位。
「‘요(堯)’임금은 두 딸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순(舜)”에게 시집을 보냈다」라고 하였으며, 「최후(最後)에는 결국(結局) “순(舜)”에게 선양(禪讓)했다.」 라고 하였는데,
다른 설(說)에서는 : 「“순(舜)”이 “요(堯) 부자(父子)를 선양(禪讓)하도록 협박(脅迫)했다」라고 전(傳)해진다고 하였다.
【위의 원문(原文) 모두를 설명(說明)할 수 없는 관계(關係)로, 해당부분(該當部分)만을 발췌(拔萃), 설명(說明)하는 것이니 양해(諒解) 바랍니다】
◈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 기록(記錄)된 모두가 한족(漢族)이 아닌 동방족(東方族), 동방왕조(東方王朝)인 동이왕조(東夷王朝)의 것」이라고 그들 스스로 말해주고 있다. 「곧 그 모두가 동이(東夷)의 역사(歷史) 및 그 주인공(主人公)들의 이야기다.」
➤ 「물가를 따라 살아왔다」라는 이름조차 제대로 전(傳)해지지 않는 소수종족(少數種族)인 “한족(漢族)”이라는 이름은, 1,900년대(年代)부터 특정부류(特定部類)의 정치적(政治的) 구호(口號)로 이용(利用)되고, 국가통치수단(國家統治手段)으로 이용(利用)되어, 작금(昨今)에 이르고 있다.
◈ 참고(參考)하면 : 《산해경(山海經) 해외동경(海外東經) : 주석(註釋)을 보면 : 『舜 與 伯 益 蓋 皆 東 方 殷 民 族 傳 說 中 之 祖 宗 神, 亦 即 詩 玄 鳥 所 謂 「天 命 玄 鳥, 降 而 生 商」 之 玄 鳥, 即 燕 子 之 化 身。: 순(舜)임금과 함께 백익(伯益)】모두 동방(東方)의 ‘은(殷) 민족(民族)’의 전설의 조종(祖宗)【시조(始祖)가 되는 조상(祖上)】신(神)이다. 또한 즉(卽) 시(詩)의 현조(玄鳥)는 소위(所謂), 「천명【하늘(天)의 명(命)】을 받은 현조(玄鳥)가 강림(降臨)하여 상(商)을 태어나게 한 것이다」의 현조(玄鳥)는 연자(燕子)의 화신(化身)이다.』》라고 하였다.
산해경(山海經)을 주석(註釋)한 옛 학자(學者)들이 오늘날 21세기(世紀)의 역사왜곡(歷史歪曲)과 역사조작(歷史造作)을 미리 알고 있었을까? 명쾌(明快)한, 명명백백(明明白白)한 답을 주고 있으니 말이다.
옛 「‘은(殷)=상(商)’ 민족(民族)」을, 「동방(東方) ‘은(殷)=상(商)’ 민족(民族)」이라고 하였다. 이는 곧 「동방왕조(東方王朝)는 곧 ‘은(殷)=상(商)’왕조(王朝)이다」라는 뜻이다.
이는 「은(殷) 왕조(王朝) 이전(以前)의 고대왕조(古代王朝) 역시(亦是) 동방(東方)의 왕조(王朝)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 여기서 가장 문제(問題)가 되는 무리가 있다. 바로 「“반도(半島) 땅에서 암약(暗躍)하고 있는 매국사학자(賣國史學者)들인 친일제국주의자(親日帝國主義者)들이다.」
「동방(東方)」하면 「반도(半島)」라고 하면서 「옛 조선(朝鮮)은, 동방(東方) 땅인 반도(半島)에 있었다」라고 역설(力說)하는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들이다. 이들의 논리(論理)대로라면 :
➥ 「‘은(殷)=상(商)’ 민족(民族)=은왕조(殷王朝)」 곧, 「동방(東方) ‘은(殷)=상(商)’ 민족(民族)=은왕조(殷王朝)」가 『“발해(渤海)의 동(東)쪽, 해동(海東) 땅인 동방(東方)의 왕조(王朝)였다”』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정신(精神)이 나간 “0”들이다.
「문제(問題) 제기(提起)」
○ 아래의 ‘문제(問題) 제기(提起)’는 ‘필자(筆者)의 사견(私見)’이기는 하지만 그 내용(內容)은 사서에서 말하는 내용(內容)을 중심(中心)으로 한 것이다.
➊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는, 「한족(漢族)”의 것이 아닌, “한족(韓族)인 조선족(朝鮮族)의 것”이다.」라는 것이다.
“자칭(自稱) 한족(漢族)의 시조(始祖)는 염제(炎帝)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황제(黃帝)”는 어떤 종족(種族), 부족(部族)의 시조(始祖)일까? 바로 「한민족(韓民族)인 조선족(朝鮮族)의 시조(始祖) 조상(祖上)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들은 모두 황제(黃帝)의 직계(直系) 자손(子孫)들이며, 친족(親族)이다.
이런 『황제(黃帝)의 직계(直系) 자손(子孫)인 :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는, 한민족(韓民族) 선대(先代) 나라인 “고구려(高駒驪), 백제(百濟), 신라(新羅)의 조상(祖上)이다.”』라고 사서(史書)는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염제(炎帝)”는 황제(黃帝)와는 형제(兄弟)간이지만 : 「황제(黃帝)는 “희수(姬水)” 가에 살았기 때문에 “희성(姬姓)”이 되어, 동방(東方)에 자리를 잡았고」, 「염제(炎帝)는 강수(姜水) 가에서 살아 강성(姜姓)이 되어 서방(西方) 땅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라고 전해지는데,【‘황제(黃帝)와 염제(炎帝)는 형제(兄弟)가 아닌 서로 다른 부족(部族)이었다’라는 이설(異說)도 있다.】
◈ 염제(炎帝) : 이후(以後) 서로 다른 부족(部族)이 되어, 결국(結局) 패권(霸權)을 다투게 되며, 그 결말(結末)은, ‘염제(炎帝)와 치우(蚩尤)’는 대패(大敗)로 막을 내려 이들 부족(部族)은 비주류(非主流)로 전락(轉落)하여 변방(邊方)을 떠돌게 되는 비운(悲運)을 맞게 되고, 소수민족(少數民族)으로 이어지게 된다.
◈ 황제(黃帝) : ‘염제(炎帝)와 치우(蚩尤)’와의 전쟁(戰爭)에서 승리(勝利)한 후, 패권(霸權)을 잡아 제왕(帝王)이 되어 통치(統治)하게 된다. 봉건왕조(封建王朝)의 세습(世襲)으로 인하여 이어지는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 등(等)은, 이어서 제왕(帝王)으로 등극(登極)하고, 이들의 직계(直系)들은 이어지는 제왕(帝王)으로 등극(登極)하게 되는데…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의 자손(子孫)이 “동방왕조(東方王朝), 동이왕조(東夷王朝)인 ‘은(殷) 왕조(王朝)’이다」 이건 이미 다 밝혀진 내용(內容)이다.
「은(殷) 왕실(王室)이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 후손(後孫)」인데, ‘동방족(東方族)=동이족(東夷族)’이었다면, 「은(殷) 왕실(王室)의 조상(祖上) 또한 ‘동방족(東方族)=동이족(東夷族)’」이었음은, 자연(自然)의 이치(理致)다. 이런 자연(自然)의 이치(理致)를 역천명(逆天命)【‘하늘의 뜻’을 ‘거역(拒逆)’함을 이르는 말】할 수 있을까?
이렇게 ”자연(自然)의 이치(理致)에 역천명(逆天命)하고 있는 자들이 바로 한반도(韓半島)의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 논자(論者)들이다. 이런 역천명(逆天命) 무리들은, 천명(天命)에 의해 수명(壽命)을 다하고 소멸(消滅)당하게 될 것이다.
➋ 「황제(黃帝)와의 전쟁(戰爭)에셔 패배한 염제(炎帝)와 그 후손(後孫)들은 숨죽이며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사는 비주류(比主流)가 되어 소수민족(少數民族)으로 전락(轉落)하게 되는 것이다. 한족(漢族) 스스로 염제(炎帝)를 조상(祖上) 시조(始祖)라고 말하고 있다.
「자칭(自稱) 한족(漢族), 강족(羌族), 경족(京族), 묘족(苗族), 글란(契丹) 민족(民族)들의 시조(始祖)로 하는 염제(炎帝)는, 소멸(消滅)되어 음지(陰地)에서 숨죽이고 살았다」
작금(昨今)의 한족(漢族)은, 「20세기(世紀) 초(初) 격변(激變)의 시대(時代)에 정치적(政治的) 구호(口號)로 탄생(誕生), 확대(擴大)되어 한족(漢族) 편입(編入)을 강제(强制)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➌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疑問)은 : 《“치우(蚩尤)”와 관계(關係)되는 것이다. 「우리 고대사(古代史)에서는 치우(蚩尤)의 후손(後孫), 묘예(苗裔)라고 주장(主張)하는 분들이 있다.」 만약(萬若) 「염제(炎帝)와 치우(蚩尤)가 한민족(韓民族)의 조상(祖上) 시조(始祖)라고 한다면 : 한족(漢族), 강족(羌族), 경족(京族), 묘족(苗族), 글란(契丹) 민족(民族)과 똑같은 조상(祖上)을 모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 「“순(舜)임금과 은(殷) 왕조(王朝) 및 그 선대(先代)인 황제(黃帝),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 요(堯)”」 등(等)의 후손(後孫)들은 바로 「‘동방(東方)=동이(東夷) 왕조(王朝)’를 이루고 있었던 ‘주류(主流) 세력(勢力)’이었다.」라는 것이다.
◈ 〈「치우(蚩尤)」가 「동이(東夷) 시조(始祖) 조상(祖上)」이라는 주장(主張)에 대해서 동의(同意)할 수 없다.〉
또 「단군(檀君)」은 뭐냐? 하는 것이다.
「요(堯)와 단군(檀君)은 동일인물(同一人物)일 수밖에 없으며, 반도조선(半島朝鮮)을 만들기 위해 요(堯)와 단군(檀君)을 분리(分離)시켜 단군(檀君)을 반도(半島)의 시조조상(始祖祖上)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라고 주장(主張)하는 것이다.
---------------------------------------------------------------------
㈥ 〈龍交大澤而生沛公 : 패공(沛公)의 어머니는 큰 연못에서 용(龍)과 교접(交接)해 패공(沛公)이 태어났다〉
漢書/卷001 / 高祖,沛豐邑中陽里人也,姓劉氏。母媼嘗息大澤之陂,夢與神遇。是時雷電晦冥,父太公往視,則見交龍於上。已而有娠,遂產高祖。 高祖為人,隆準而龍顏,美須髯,左股有七十二黑子。寬仁愛人,意豁如也。常有大度,不事家人生產作業。及壯,試吏,為泗上亭長,廷中吏無所不狎侮。好酒及色。常從王媼、武負貰酒,時飲醉臥
➨ 劉邦(前256年或前247年—前195年6月1日[2]),字季,沛豐邑中陽里(今江蘇省豐縣)人,為漢朝開國皇帝,中國歷史上第一位平民(家世)出身的皇帝。秦末漢初的軍事家、政治家,參與以楚國為首的反秦叛亂,成為諸侯之一。在楚漢戰爭中,漢王劉邦擊敗了西楚霸王項羽獲勝,統一了自秦朝滅亡後的天下,至此稱帝建立漢朝,進入西漢時期。
建立西漢之後,稱皇帝。在他過世之後,其子漢惠帝即位之際,為其建立高廟,亦在各郡國建立高祖廟以奉祠劉邦,並上尊號為漢高皇帝[10][11]。《史記》稱其為漢高祖[12],之後的著作如《漢書》、《漢紀》皆沿用高祖的稱號,成為最通行的稱呼。此外,《漢書》另稱其為漢高帝[13],《漢紀》又稱其為高祖皇帝。張晏認為,禮謚法中並沒有「高」的封號,漢朝應是以其功業最高,且作為漢之太祖,為表崇他的貢獻,故特別稱為高祖[12]。
➥ 劉邦出生年代,自古有兩種說法,依皇甫謐說法推算,出生於公元前256年[16],依顏師古《漢書集註》引用傅瓚記載,推算生於公元前247年[17]。中華人民共和國歷史學界主流支持生於公元前256年的說法,日本學者鶴間和幸支持應生於公元前247年[18]。
《史記》記載劉邦家鄉為沛豐邑中陽里,傳統上以此為他的出生地。沛豐邑,在漢朝為沛郡豐邑,在秦朝為泗水郡沛縣豐邑。豐邑古為豐國,在春秋時代為宋國領土,在戰國時代則有兩種不同記載。據秦簡記載,秦朝泗水郡原為楚國領土,沛縣與豐邑皆為泗水郡所轄,近於楚國首都壽春。鶴間和幸據此認為,豐邑原為楚國領土,劉邦家族應為楚國人,中華人民共和國學者李開元也支持這個說法[19][20]。《史記》中對劉邦家世未有詳細記載,其父親劉太公與母親劉媼皆沒有明確名字留傳,不像是貴族出身。在秦帝國時,劉邦為泗水亭長,為低階世襲文吏,非為貴族,因此鶴間和幸與佐竹靖彥等學者主張劉邦家族為普通農民出身。
據《漢紀》與《漢書》記載,沛豐邑原屬於魏國[21]。楊寬在《秦漢史》中考證豐邑原為魏國領土,劉邦家族應為魏國人。在劉向時,劉邦的家世被上追到陶唐氏堯,在夏朝時豢龍氏中的劉累為其先祖,在晉國時為范宣子家族。在魯文公時代范氏遷到秦國。在秦國滅魏時,從大梁把魏國居民遷往豐邑,劉邦祖父被封為豐公。據此記載,劉邦家族應為晉國與秦國的低階貴族[22]。中華人民共和國學者李朝陽[23]、李全華[24]、陳蘇鎮[25]、李祖德[26]等人皆主張劉邦出生於魏國首都大梁(今中華人民共和國河南省開封市),在魏國滅亡後,才隨家人遷居至沛縣。劉邦家中有兄弟四人,長兄為劉伯,次兄劉喜,劉邦為么兒。家中還有一個異母弟劉交。
○ 무엇 때문에 「승려(僧侶) 일연(一然)」은, 멀쩡하게 부모(父母) 아래 태어난 영웅(英雄)들을 설화(說話) 취급(取扱)하면서 : 「사생아(私生兒)로 만들어 놓은 것일까?」
예(例)를 들면 : 「龍交大澤而生沛公 : 패공(沛公)의 어머니는, 큰 연못에서 용(龍)과 교접(交接)해 패공(沛公)이 태어났다」라는 식(式)으로 패륜아(悖倫兒) 또는 불륜녀(不倫女)로 만들어버린 것이냐? 하는 문제(問題) 제기(提起)다.
➥ 남편(男便)이 멀쩡하게 살아 있음에도, 「연못에서 용(龍)과 교접(交接)하여 패공(沛公)이 태어났다」라고 했으니 말이다. 이런 설명(說明)을 다르게 바라보면 : 「“연못에서 노니는데, 용(龍)이 유인(誘引)하여 통정(通情)하였다”라는 태몽(胎夢)을 꾸었는데, 곧 잉태(孕胎)하였다.」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승려(僧侶) 일연(一然)」은,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의 인물(人物)들을 모조리 패륜녀(悖倫女)로 만들어 놓았는데, 「승려(僧侶) 일연(一然)」이 그렇게 기록(記錄)해 놓은 걸까? 아니면 후대(後代)의 실증사학(實證史學) 논자(論者)들의 가필(加筆)일까?
◈ 또 여기서 가장 중요(重要)한 한 가지는 : 「아들(子)이나 손자(孫子)는, ‘동이족(東夷族), 동방왕조(東方王朝)’라고 하면서 그 부(父), 또는 증조(曾祖) 또는 고조(高祖)는 화인(華人)이다.」라고 한다면 이를 신뢰(信賴)할 수 있느냐? 하는 상식적(常識的)인 물음이다.
또 한 가지 「한족(漢族)」에 관한 것인데… …오제본기(五帝本紀)를 주해(注解)한 옛 학자(學者)들은, “염제(炎帝)는 황제(黃帝)에게 패(敗)하였다”라고 하였으니 곧 임금이 되지 못하고 쫓겨났다는 것인데… …“염제(炎帝)는 한족(漢族)의 시조(始祖) 조상(祖上)이다”라고 하면서 “중국(中國)은 한족(漢族) 왕조(王朝)”라는 어처구니없는, 어불성설(語不成說) 주장(主張)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원문(原文) 또는 주해(註解), 삼국사기(三國史記)」등(等)에서 보는 바와 같이… …,
“예(例)”를 보면 :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서 이르기를 : 「新 羅 人, 自 以 小 昊 金 天 氏 之 後, 故 姓 金 氏【見新羅國子博士薛因宣撰金庾信碑,及朴居勿撰,姚克一書,三郞寺碑文】, 高 句 麗 亦 以 高 辛 氏 之 後, 姓 高 氏.【見晋書載記】」라고 하였으니,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의 주인공(主人公)」 모두는 : 「중국인(中國人)의 시조(始祖)가 아니라, 바로 ➤➤➤ “동이(東夷)=구이(九夷)=조선족(朝鮮族)=한족(韓族)의 시조(始祖)”가 될 수밖에 없다.」이건 아주 객관적(客觀的)이며, 아주 합리적(合理的)인 주장(主張)이자, 고전(古典) 기록(記錄)이 모두를 입증(立證)하고 있다.
➥➥➥ 예를 들면 : 古 本 竹 書 紀 年 輯 證, 夏 紀 : [一 二] 竹 書 紀 年 曰 :后 相 七 年, 于夷來賓.《後漢書 ‧ 東夷傳》注 /《紀 年》 曰 :(相) 七 年, (干夷來賓)。《通鑑外紀》卷二 / 案 :《通 鑑 外 紀》 作 「干 夷」 ,誤 。 《存 真》 、 《輯校》所 引《路 史 ‧ 後 紀》 卷 一 三 注, 見 本 書 附 錄 。
➨ 甲 骨 文 中 所 記 方 國 有 「 盂 方 」 (《 殷 虛 書 契 後 編 》 上 一 八 ‧ 六 ), 且 屢 見 , 郭 沫 若 同 志 云 : 「 所 謂 盂 方 者 , 可 知 乃 ➨ 殷 東 方 之 國 也 。 … … 宋 地 亦 有 名 盂 者 , 《 春 秋 ‧ 僖 二 十 一 年 》 『 宋 公 、 楚 子 、 陳 侯 、 蔡 侯 、 鄭 伯 、 曹 伯 會 于 盂 』 。 杜 注: 『 宋 地 , 襄 邑 西 北 有 盂 亭 。 』 地 在 河 南 睢 縣 。 又 《 左 傳 ‧ 哀 二 十 六 年 》 : 『 六 子 在 唐 盂 』 , 顧 棟 高 謂 與 睢 縣 之 盂 為 一 地 。 余 意 卜 辭 之 盂 方 當 即 此 附 近 之 古 國 。 」 (《 卜 辭 通 纂 》 考 釋 頁 一 二 七 ) 「 盂 方 」 當 即 「 于 夷 」 。楊 樹 達 《 積 微 居 甲 文 說 》 云 : 「 于 夷 即 卜 辭 之 盂 方 。 」( 卷 下 頁 四 四 ) 陳 逢 衡 《 竹 書 紀 年 集 證 》 卷 一 0 、 雷 學 淇 《 竹 書 紀 年 義 證 》 卷 八 皆 謂 「 于 夷 」 即 《 禹 貢 》 之 「 嵎 夷 」 。 《 禹 貢 》 戰 國 時 人 所 為 , 距 商 代 已 遠 , 且 地 在 今 山 東 蓬 萊 一 帶 濱 海 之 地 ( 顧 頡 剛 先 生 說 , 見 《 中 國 古 代 地 理 名 著 選 讀 》 頁 一 三 ), 地 望 亦 不 甚 合 。
➥➥➥ 「은(殷)나라는 동방(東方)의 나라(國)다【殷 東 方 之 國 也】 」라고 하였는데… …,
➥➥➥ 그렇다면, “고매(高邁)하시고, 존경(尊敬)하옵는 우리 반도학계(半島學界)의 원로(元老)”들에게 물어보자! 「은(殷)나라인 상(商)나라가 반도(半島) 땅에 있었습니까?」하고 말이다. 「‘반도(半島)의 식민학계(植民學界)’는, 뇌세포(腦細胞)가 퇴화(退化)되어 사고(思考)하지 못하는 학계(學界)다」라고 한다면 : 명예훼손(名譽毁損)으로 고발(告發)당할 것임은 100%라고 할 수 있다.
곧, 「“동방(東方)”이란 바로 “중원대륙(中原大陸)의 땅을 지칭(指稱)”하는 말이다.」 이게 정답(正答)이요,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인 것이다.
➥ 그렇다면 : 「당요(唐堯)와 단군[檀君 : 壇君]」은, 같은 사람[同人]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멀쩡한 인간관계(人間關係)를 신(神)들의 이야기로 만들어 놓았다. 「승려(僧侶) 일연(一然)」은, 무엇 때문에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을 신화(神話), 설화(說話)로 만들어 놓은 것일까?
작금(昨今)의 ‘중국(中國) 당국(當國)’은, 신화(神話), 설화(說話) 등으로 취급(取扱)하면서도, 잊지 않고 있는 것은, “이 모두는 중국인(中國人)의 시조(始祖)”라고 말하고 있다.
➥ 이를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로 만들어버리면 : 「오늘날의 중원대륙(中原大陸)에 한족(漢族)은 없고, “동이(東夷)=구이(九夷)=조선족(朝鮮族)=한족(韓族)” 모두의 땅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 오늘의 주제(主題)와는 다른 이야기지만 : 위의 주석(註釋) 편(篇)을 보면 : 《雷學淇 《 竹書紀年義證 》 卷八皆謂 「于夷」 即 《禹貢》 之 「嵎夷」 : 뇌학기(雷學淇)의 죽서기년의증(竹書紀年義證) 군 8에서 모두 말하기를 「우이(于夷)」는 즉(卽) 「우공(禹貢)」의 「우이(嵎夷)」라고 하였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
《高宗詔: 左衛大將軍蘇定方, 爲神丘道行軍大摠管, 兵十三萬, 以來征, 兼以新羅王金春秋, 爲嵎夷道行軍摠管, 將其國兵, 與之合勢. : [AD 660年] : ‘신라왕(新羅王) 김춘추(金春秋)’는, ‘당황(唐皇) 고종(高宗)’의 명(命)에 의해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에 임명(任命)되어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 소정방(蘇定方)’과 13만(萬) 병력(兵力)의 백제(百濟) 침공(侵攻)을 도우라는 명령(命令)을 받았다【原文 : 三國史記, 百濟本紀)】》라고 삼국사기(三國史記) 및 정사(正史) 등 많은 사서(史書)에 기록(記錄)되어 오늘에 전(傳)해지고 있다.
➥ 우리 한번 솔직(率直)하게 말해 보자. “한반도(韓半島) 백제(百濟)” 땅이 “우이(于夷)=우이(嵎夷)”가 사는 곳인가? ‘우이(于夷)=욱이(郁夷)=우이(嵎夷)’로, 동이(東夷)로 구이(九夷)에 포함(包含)된 종족(種族)으로, 사가(史家)들은 그곳을 오늘날의 「산동성(山東省) 땅」이라고 하였지만 : 이는 왜곡(歪曲)된, 조작(造作)된 역사해설(歷史解說)이다.
「우이(于夷)=우이(嵎夷)」는, 본시(本是) 「‘전한(前漢)과 후한(後漢)’ 때에 삼보(三輔)의 하나였던 장안(長安) 서(西)쪽을 담당(擔當)했던 우부풍(右扶風) 소속(所屬)의 욱이(郁夷)」이었다.
➠ 그렇다면 ‘신라왕(新羅王) 김춘추(金春秋)’는, 한반도(韓半島) 땅 경상도(慶尙道) 경주(慶州)에서 동해안(東海岸) 포구(浦口)에서 전선(戰船)을 타고 남해(南海)를 가로질러, 다시 북(北)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산동반도(山東半島)에 상륙(上陸), 기마(騎馬)로 5∼6 천리(千里) 서(西)쪽으로 강행군(强行軍), ‘장안(長安) 서(西)쪽 우부풍(右扶風)’으로 말을 달렸다는 것인가?
➠➠ 도대체 뭔가? 「‘우이(于夷)=욱이(郁夷)=우이(嵎夷)’는 장안(長安) 서(西)쪽에 있는데,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 김춘추(金春秋)’는 반도(半島) 땅으로 왔다는 건가?」
이와 똑같은 경우(境遇)가 또 있다. 「이건 또 뭔가?」 다음 예정(豫定)된 내용이지만 : 「사서(史書) 속의 백제(百濟)는, 한반도(韓半島)에 있었다는 “백제(百濟)”와는 전혀 다른 백제(百濟)의 면모(面貌)를 그려놓았다.」
보자. ➥‘1,400여(餘) 년(年) 전(前)’의 “백제(百濟)”는 ‘북노(北虜)=위노(魏奴)’의 수차(數次)에 걸친 ‘수십만(數十萬) 기마군단(騎馬軍團)’의 침공(侵攻)에도, 매복(埋伏)으로 궤멸(潰滅)시켰다」라고 전해진다.
◈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역사(歷史)인가! 「‘북노(北虜)=위노(魏奴)’의 수십만(數十萬) 기마군단(騎馬軍團)의 침공(侵攻)을 맞아 대담(大膽)한 매복작전(埋伏作戰)을 펼쳐 수십만(數十萬) 기마군단(騎馬軍團)을 궤멸(潰滅)시켰다」라는 것은, 세계사(世界史)에서도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대전(大戰)이었음은 누구도 부인(否認)하지 못할 것이다.」
‘이순신(李舜臣) 장군(將軍)’ 같은 분이 ‘몇 명’ 있어도 비교(比較)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사건(事件)임에도… …그런데 뭔가? 「한반도(韓半島) 사학계(史學界)는, 지금(只今)까지도 모르는 척 극비(極祕)로 다루고 있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누구로부터 명령(命令)받고 움직이는 건가? “도대체 뭐냐?” 하는 것이다.
왜?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상(異狀)하지 않은가? “이순신(李舜臣) 장군(將軍)” 같은 경우(境遇)는, 국가적(國家的)으로 전(前) ‘박(朴)’ 대통령(大統領)이 직접(直接) 나서서 영웅(英雄)으로 만들었잖은가!
당연(當然)한 이야기다. 이는 곧 「수십만 기마군단(騎馬軍團)이 서해(西海)를 어떻게, 어떤 방법(方法)으로 도해(渡海)하여 백제(百濟)를 침공(侵攻)했으며, 백제(百濟)는 또 어떻게 이 ‘수십만(數十萬) 기마군단(騎馬軍團)’을 궤멸(潰滅)시켰을까?」 답(答)을 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얄팍한 역사(歷史) 지식(知識)”을 가지고는 제자(弟子)나 국민(國民)들을 이해(理解)시킬 수 있는 능력(能力)이 없는 것이다.」 왜? 백제(百濟)는 “한반도(韓半島)와는 단 일 푼의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일제(日帝) 총독부(總督府)에서도 “백제(百濟)의 망시(亡時) ‘76’ 만호(萬戶)에 대해 믿을 수 없다”라고 하였을까?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 우리 옆에 있는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원전(原典)이 아닌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만들어진 가필본(加筆本)이라고 확신(確信)하는 바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 「AD 1,145년경에 김부식(金富軾) 등이 인종(仁宗)의 명(命)을 받아 편찬한 삼국시대의 역사서 [出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삼국유사(三國遺事) : 「일연(AD 1,206~1,289)이 이 책의 저술을 위하여 사료를 수집한 것은 청년(靑年) 시절부터였고, 그 원고의 집필은 대개 70대 후반으로부터 84세로 죽기까지 주로 만년에 이루어졌다. [出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 위에서 보듯이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삼국사기(三國史記)보다 136년(年) 이상(以上) 뒤에 편찬(編纂)되었기 때문에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참고(參考)했을 가능성(可能性)이 농후(濃厚)한 것이다.
따라서 「승려(僧侶) 일연(一然)」은, 단 한 구절(句節)도 기록(記錄)하지 않고, 모두를 신화(神話)처럼, 설화(說話)처럼 만들어 놓았다. 진실(眞實)로 “일연(一然)”이 “고려(高麗)인으로 승려(僧侶)였다”라고 한다면 : 이런 기록(記錄)을 남겨 놓았을까?
○ 문제(問題)는 또 「이 나라의 사학계(史學界)의 태도(態度)」라고 할 수 있다. 일제(日帝) 식민지(植民地) 치하(治下)에서, 그들【일제(日帝) 당국(當局)】과 함께 조선사(朝鮮史)를 꾸미고 만든 자(者)들과는 절연(絶緣)하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인식(認識)하는 것이 첫 단추를 끼는 것이다.
「왜? 무엇 때문에? 옛 고전(古典) 또는 역사서(歷史書), 또는 지리지(地理志) 등(等)에 기록(記錄)된 내용(內容)」과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과 부합(附合)되지 않는 것일까」를 먼저 알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앞서야 하는 것이다.
○ 특히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은,
『곧 ‘동국(東國)이자 해동(海東)의 땅 지리지(地理志)’이며, 곧 ‘반도(半島)【조선반도(朝鮮半島)=한반도(韓半島)】땅의 지리지(地理志)이며, 고구려(高句驪)•백제(百濟)•신라(新羅)•가야(伽倻)•탐라(耽羅)’등의 지리지(地理志)이자, ‘고려(高麗) 땅의 지리지(地理志)이며, 조선(朝鮮) 땅의 지리지(地理志)다’.』
이 ‘지리지(地理志)’에 기록(記錄)되어 있는 모든 것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며, 다만 시대적(時代的)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것들이 다르게 기술(記述)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 정상(正常)일 것이다.
실제(實際), 이와 같은가? 이 땅 즉(卽), 반도(半島)【조선반도(朝鮮半島)=한반도(韓半島)】 땅에서 불가능(不可能)한 자연환경적(自然環境的) 요소(要素)【여러 가지 중요(重要)한 자연환경(自然環境) 요소(要素)들이 포함되어 있음】들이 기술(記述)되어 있다면 : 『이 땅【조선반도(朝鮮半島)=한반도(韓半島)】의 것이 “아니다”』라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제 이해(理解)를 좀 하시겠는가?
이건 21세기 오늘의 팩트(Fact)요, 사실(史實)【역사(歷史)에 실제(實際)로 있는 사실(事實)】이다.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은, 어찌해야 할까?
2026년 01월 06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 다음 편은, 예정대로 "후한서(後漢書) 왜(倭)"편입니다.
물론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왜(倭)"에 대한 옛 사서의 기록을 대상으로 설명했습니다.
'후한서 왜'편에서도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를 비교하면서, 방위, 거리, 땅 크기등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합니다.
일본사학계,
반도사학계는,
황당한 이야기로 열도의 "왜(倭)"로 만들려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심지어는 글자의 변형까지도 증거로 들이댑니다.
글자의 변형을 누가 그것을 고증하고 증명할 수 있을까요?
그저 "지"들 맘대로지요!
황당한 "왜(倭)" 이야기를... ...반도사학계는 왜, 이렇게 황당무계한 일본학자들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