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년 6월에 각라도에서 무령왕을 낳고 7월에 곤지를 따라 왜국 수도에 들어간 무령왕의 어머니가 왜국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곤지는 462년 봄 3월에 황후를 세우고 대왕으로 공립됩니다. 웅략조의 왕비 명단과 그들이 낳은 자녀들이 다음과 같습니다.
제1왕비: 황후, 귤희(초향번사희), -> 자녀 없음. 6무령왕.
제2왕비: 원비, 한원(갈성원대신의 딸), 2모대(말다, 동성왕), 3백발(청령천황), 5남제(계체천황)의 3남과 치족희 1녀
제3왕비: 차비, 치희(길비와옥의 딸), 1반성, 4성천의 2남.
제4왕비: 차차비, 동녀군(춘일화이의 딸), 춘일대낭의 1녀.
이로부터 우리는 무령왕의 어머니는 귤희였고 동성왕의 어머니는 한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세기 남제(계체천황) 이후의 왜국은 실권이 소아씨(목씨, 갈성씨)로 넘어가는데 그 이유도 알 수 있습니다. 남제왕(계체천황)의 외가가 소아씨였던 것입니다.
일본서기가 귤희 황후를 인덕의 딸이라고 하는데 나이가 안 맞는 것으로부터 생물학적 관계가 아니고, 천황이 되면 이전 천황의 계보에 입적하는 것처럼, 황후가 되면 이전 천황의 계보에 입적시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곤지는 왜국을 통치하는 동안에 사람 죽이기를 밥 먹듯이 하는 등 철권통치로 일관하는데 무령왕의 어머니인 황후 귤희에게만은 꼼짝 못합니다. 황후 귤희는 4명의 왕비들 중에 가장 젊음에도 불구하고 왜국에서 자녀가 없습니다. 이는 귤희가 실제 부인이 아니고 공립을 위하여 데려간 형식적 부인이었다는 뜻입니다.
21대 웅략을 19대 윤공의 아들로 입적시켰기 때문에 윤공의 황후인 인판대중희(忍坂大中姬)가 계보상으로는 웅략의 어머니가 되고 태후 자격으로 웅략조에도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더 오래 살기 때문에 왕은 죽어도 왕비는 태후가 되어 나옵니다. 무령왕의 어머니인 귤희보다 나이가 많은 한원과 치히는 웅략이 죽은 다음에도 나오는데 귤희는 왜국에 온 지 10년 째인 웅략 14년(470)에 다음처럼 슬픈 이야기를 끝으로 안 보입니다. "이때 황후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 무엇인가 안 좋은 일을 상징적으로 기록한 것인데 아마도 30대 젊은 나이에 일찍 죽은 것 같습니다. 왜국으로 건너간 무령왕의 어머니는 곤지를 왕으로 만들어주었지만, 자신은 아들을 낳자마자 생이별을 하는 등 개인적으로 불행하였습니다.
곤지 즉 웅략이 477년 7월에 백제에서 죽을 때 62세였던 것으로 보아 그의 형인 개로왕도 475년에 고구려군에게 죽을 때 60대 초 중반이었습니다. 그러면 곤지는 415년 생으로 무령왕의 어머니를 왜국으로 데려가던 461년에는 46살입니다. 당시 이미 두 명의 왕비로부터 5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다섯 아들이 두 명의 왕비로부터 태어났으므로 한원의 자녀들은 평균 3년 터울로 계산합니다. 동성왕의 동생인 백발이 484년에 38세로 죽었으므로 446년생입니다. 그러면 백발의 형인 동성왕은, 누이인 치족희가 자신보다 먼저 태어났거나 백발보다 늦게 태어났으면 3년을 앞당겨 443년생이고, 동성왕과 백발 사이에 태어났으면 6년을 앞당겨 440년생입니다. 그러면 무령왕이 461년생이므로 동성왕은 무령왕보다 18~21살이 많습니다.
방송에 어떤 역사 교수가 나와 무령왕이 동성왕의 제2자라고 기록한 삼국사기가 틀렸다고 하였습니다.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더 나이가 많은데 동성왕의 아들, 그것도 어떻게 둘째 아들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분은 백제본기의 제2자의 뜻도 모르고 사서를 분석할 능력도 없는 것입니다. 무령왕은 동성왕의 제2자가 맞습니다.
오역은 또 있습니다. 2가지만 예를 들겠습니다.
[오역 1] 웅략 5년, 秋七月, 軍君入京 旣而有五子(군군(군지)이 왕경에 들어왔을 때 이미 다섯 아들이 있었다.)
旣 는 '이미'라는 뜻입니다. 이때 곤지가 46살이므로 충분히 다섯 아들을 둘 수 있는 나이입니다. 그런데 이를 오역하여 “군군이 왕경에 들어왔다. '이후' 다섯 아들을 두었다.”라고 번역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곤지가 46살까지는 자식이 없다가 무령왕의 어머니를 데려온 이후에 다섯 아들을 낳았다는 것인데, 역사학 이전에 생물학적 상식을 벗어나는 오역입니다.
[오역 2] 무열천황 4년, 末多王無道 暴虐百姓 國人共除 武寧王立 諱斯麻王 是琨支王子之子 則末多王異母兄也. 琨支向倭.(말다왕이 무도하고 백성들에 포악하여 국인이 제거하고 무령왕을 세웠다. 휘를 사마왕이라 한다. 곤지왕의 아들이다. 즉 말다왕이 이모형(어머니가 다른 형)이다. 더 이상은 알 수 없다.) 그런데 원문의 '말다왕이 이모형이다'를 고쳐 중간에 ~의를 뜻하는 之자를 집어넣는 것입니다. 則末多王(之)異母兄也. 그리고 '무령왕이 말다왕의 이모형이다.' 라고 번역한 것을 보았습니다. 왜 之자를 넣는냐에는 이유가 없는데, 아직까지 之자 들어간 일본서기 판본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 부분의 일본서기를 마음대로 오역하다보니 내용이 삼국사기, 무령왕릉 지석, 송서 등 모든 사료와 맞지 않고, 무령왕보다 20살 정도 많은 동성왕이 오히려 무령왕보다 나이가 어린 것이 되는 등 사료 전체가 뒤죽박죽이 됩니다.
다음은 6세기 전반의 무령왕릉 지석입니다.
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 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 丙戌朔 七日壬辰 崩到
乙巳年八月 癸酉朔 十二日甲申 安登冠大墓 立志如左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는 계묘년(523) 5월 7일 임진날에 돌아가셔서, 을사년(525) 8월 12일 갑신날에 이르러 대묘에 예를 갖추어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
당시 백제는 왕이 죽으면 2년 3개월 후에 장사를 지내는데, 5세기 후반의 곤지가 죽었을 때 이미 그렇게 장사 지내지는 것으로부터, 이 풍습은 왜국 왕실 풍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무령왕에게 백제왕 계보를 물어보면 그는 다음처럼 답할 것입니다.
... 14대 여휘 - 15대 응신(왜국으로 천도) - 16대 인덕 - 17대 이중 - 18대 반정 - 18대 윤공 - 20대 안강 - 21대 웅략(백제로 천도) - 22대 동성 - 23대 무령(자신)
5세기 중반에 지배층이 주로 부여씨인 나라는 396년에 광개토왕에게 토벌되고 왜국으로 천도한 목지국밖에 없기 때문에 한국고대사를 어느 정도 공부를 한 분은 송서의 11장군 책봉기록을 보는 순간 일본서기를 펴보았을 것입니다. 무령왕이 태어나던 461년에 곤지가 백제왕실의 여인을 데리고 왜국으로 갔다면 이유는 딱 1가지로, 후한서와 삼국지 목지국 진왕 기록에 나오는 진왕으로 공립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왜국에 새 왕이 나와야 하는데 462년 송서에 왜왕 무가 출현합니다. 즉 곤지가 백제왕실의 여인을 왕비로 세우고 왜왕 무가 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 죽은 왕이 왜왕이 아니고 왜왕세자인 것으로 부터 공립이 안 되고 죽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곤지가 이때 백제에 와서 백제왕실의 여인을 데려간 상황을 알 수 있는데, 461년에 왜국 지배층 사이에 서로 왕이 되려고 내전이 발생했고, 백제왕실의 여인을 데려간 곤지가 내전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일본서기는 왜왕 무에게 천황시호를 주어야 하는데 앞의 왜왕세자 흥은 공립이 안 되고 죽었으므로 천황시호를 안 주고 그의 재위기간도 무의 재위 기간을 앞당겨 흡수되었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곤지가 내전에서 승리하고 왜왕 무가 되던 되던 461년의 상황은 5년 앞당겨 456년에, 왕비를 세우고 공립되던 462년의 상황은 457년에 기록되었습니다.
백제로 천도한 곤지가 왕이 되기는 커녕 후계자가 아직 공립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죽어버리자 왜국은 다시 내전의 위험에 휩싸이게 됩니다. 왜국의 최고 권력자이던 동성왕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면, 어버지인 왜왕 무가 살아있는 것처럼 해서 책봉을 받아 시간을 번 후, 자신은 백제로 돌아가 왕이 된 후 신라와 혼인하여 공립문제를 해결합니다. 목지국은 즉위 후 2년 이내 공립이 원칙입니다. 후한서와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목지국이 어떤 나라인지만 조금만 안다면 곤지관련 기록은 매우 단순한 사건으로 한중일 사서가 맞는지간단히 체크해볼 수 있습니다. 이상한 곳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왜왕세자 흥을 안강에 왜왕 무를 웅략에 비정한 일본학계는 절반만 맞았는데 아직도 일본서기를 못 읽습니다.
일본서기의 응신에서 웅략에 이르는 7대조는 삼국사기에 없는 목지국 본기의 일부입니다. 송서 백제조의 11인 장군 책봉 기록은 5세기 일본서기의 신뢰성과 당시 왜국의 실체를 보여주므로 언젠가 틀림없이 일본 역사교과서에 실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