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이 12월22일 ‘콜럼버스, 세스페데스 신부와 대흥사’라는 기고문을 보내왔다. 이 원장은 기고문에서 15세기 종교를 내세워 선주민들에게 온갖 악행을 저지른 콜럼버스와 임진왜란 때 왜군과 함께 조선에 왔던 세스페데스, 그리고 대흥사에 전해져오던 십자가 문제를 다뤘다. 특히 이 원장은 “(대흥사가) 십자가를 복원하여 천주교에 기증하여 종교 화합 분위기 조성에 앞장서고 싶은 대흥사의 마음은 이해한다”며 “천주교 쪽에서 ‘임진왜란 당시 침략군에 복역했던 세스페데스 신부의 잘못을 우리가 대신 참회하며 용서를 구한다!’는 사과 성명서를 내고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한, 새로 복원한 그 ‘황금 십자가’는 절대로 천주교 쪽에 기증하면 안 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편집자
선의를 악의로 갚은 콜럼버스
1492년 10월12일, 이탈리아 출신으로 스페인 왕실의 지원을 받고 ‘새로운 뱃길’을 찾아 나섰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현재 바하마군도에 속하는 작은 섬(히스파니올라 섬)에 도착하였다. 그곳의 선주민들은 바닷물을 헤치며 걸어와서는 갖가지 선물을 줬다. 콜럼버스는 항해 일지에 그 사람들이 얌전하고 상냥했다고 묘사했다. “그 사람들은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고, 내가 검을 보여줬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이 사람들은 악이 무엇인지 몰랐고, 살인이나 도둑질도 몰랐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했고, 세상에서 가장 기분 좋은 대화를 나눴으며 … 항상 웃었다.”
후원자에게 쓴 편지에서는 “그 사람들은 무척 순진하고, 정직하며, 자기가 가진 것을 너무나도 아낌없이 팍팍 나눠 줍니다. 어떤 물건을 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만약 그 물건을 갖고 있으면, 어느 누구도 부탁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보다 남을 훨씬 더 사랑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지요.”라면서 그곳 주민들이 얼마나 순박한지 생생하게 묘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항해에 지친 자신과 일행에게 먹을거리를 건네주며 친절하게 맞이한 이런 순박한 사람들을 ‘장삿속’으로만 여겼다. “이 사람들은 훌륭한 하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50명만 있으면 우리는 이 사람들을 모조리 다 복종시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넘치는 종교적 열정·주민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열망으로 8년 만에 그 작은 섬 전역에 십자가와 함께 교수대를 각각 340개씩 세웠다.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이를 가리켜 “십자가와 교수대, 이것은 치명적인 역사적 병치(倂置)”라고 하며 그 죄악을 폭로한다.
그 다음으로 콜럼버스는 선주민들에게 일정 시간을 주면서 자신이 정해주는 양의 황금을 찾아오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이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팔을 잘라 버렸다. 황금에 이어 콜럼버스는 스페인에 노예를 보내기로 결정, 약 1200명의 주민을 사로잡아 500명을 골라 보냈다. 대서양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 이들 중 200명이 추위와 질병으로 죽었다. 1498년 9월 콜럼버스는 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팔 수 있는 모든 노예를 잡아서 보낼 것이다.…”
순박한 선주민들의 선의(善意)를 악의(惡意)로, 그것도 하느님의 이름을 팔아서 되돌려준 것이 우리가 오랜 동안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위대한 탐험가' 콜럼버스의 민낯이었다.
임진왜란 왜군 군종 신부 세스페데스
콜럼버스의 범죄 행위가 시작되고 100년이 지난 1592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명(明)나라를 치러 가는 길을 내달라”면서 조선을 침략하여 그 뒤 7년여 동안 온 국토를 유린하고 백성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우리가 임진왜란이라고 부르는 이 때 선봉장 세 명 중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스페인 출신으로 일본에서 천주교 선교활동을 하던 예수회 소속 세스페데스 신부를 초빙하여 현재 경남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에 그들이 쌓은 웅천왜성(熊川倭城)에 머물게 하였다. 세스페데스는 1593년 12월27일 쓰시마 섬(對馬島)과 부산포를 거쳐 들어와 1595년 6월까지 웅천왜성에서 왜군 천주교인들을 위한 미사를 집전하고 세례, 고해성사 등의 왜군 군종신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런데 수백 년 전 불행한 역사에 등장했던 이 세스페데스를 다시 부각시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그가 왜군을 위해 머물렀던 웅천왜성 인근 공원에 그의 고향인 스페인 톨레도의 비야누에바 데 알카르데테 시민들이 기금을 모아 보내 ‘세스페데스 신부 방한 400주년 기념비’를 세웠고, 몇 해 전(2015.11.30)에는 창원시에서 예산 수억 원을 들여 이 공원을 새롭게 단장해 ‘세스페데스 기념공원’으로 개장하는 자리에 주한 스페인 대사를 초청하는 행사를 갖기도 하였다.
세스페데스 공원은 전체 공원(1만4129㎡) 중 3200㎡ 규모로 스페인 국토를 형상화한 회양목과 팬지, 스페인 풍 석재 앉음 벽을 설치해 정원을 조성했다. 공원 입구 가벽을 이용해 왼쪽에는 세스페데스 신부 입국 모습을 황동 조형물로 재현했고 오른쪽에는 스페인에서 만들어온 스페인어 공원 명칭과 스페인을 상징하는 건축물·문화 등을 담은 그림 타일을 붙였다.
이를 통해 스페인이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이미 오래 전에 ‘권리’를 갖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한국과 스페인의 우호’를 겉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임진왜란 당시 침략군을 도와주러 왔던 신부의 행위를 우호 관계의 시작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창원시의 이런 정책은 역사를 잊고 청소년들에게 “앞으로 외국 침략자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하라!”는 무언의 교육을 시키는 것이다.
한편 천주교 마산교구는 2013년까지 ‘한국 최초의 사목터 성역화 기원’을 앞에 내세우며 웅천왜성에서 산상미사를 열다가 여론의 비판이 따가워지자 “성역화가 아니라 전란 중에 세스페데스 신부를 통해 깃들었던 하느님의 손길을 기억하고, 왜성 축조에 동원된 조선 백성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미사”라고 말을 바꾸고 있지만, 속내는 한국 천주교 전래 시점을 임진왜란 시기까지 끌어올리려는 데 있음은 2015년 미사를 집전한 마산교구 총대리주교 배기현 신부가 “어두운 전란의 역사 속에서도 하느님의 손길이 잠시라도 세스페데스 신부라는 빛으로 깃들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 사실에서 누구든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세스페데스 성인화에 호응한 한국 불교
일제 강점 시절인 1927년 전남 해남군 대흥사의 서산대사 유물들 사이에 숨어 있던 황금십자가가 발견되었다가 1974년에 분실된 적이 있다. 십자가 앞뒤에 새겨진 글자 판독 결과 ‘왜군 군종신부 그레고리오 세스페데스의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언제 어떤 경로로 대흥사 보관 서산대사 유물들 틈에 끼어들어갔는지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추측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몇 해 전에 이 세스페데스 황금 십자가 세 개를 옛 사진에 근거해 복원하여, 대흥사와 북한 보현사에 하나씩 보관하고 나머지 하나는 천주교에 기증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각기 황금 일곱(7) 돈을 들여 만들고 화려한 칠보 장식까지 한 십자가 실물을 공개하기도 하였다.
십자가를 복원하여 천주교에 기증하여 종교 화합 분위기 조성에 앞장서고 싶은 대흥사의 마음은 이해한다. 그러나 잠시만 생각해보자. 콜럼버스 일행을 친절하게 맞이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아낌없이 전해주었던 바하마 군도 히스파니올라 섬 선주민들의 선의를 콜럼버스가 어떻게 갚아주었던가. 그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켜 황금을 채취하게 하고, 요구하는 황금을 가져오지 못하는 주민들의 팔다리를 잘라 죽이며, 수백 명을 잡아서 스페인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노예로 보냈던 콜럼버스의 악행을 기억해야 하지 않는가.
물론 현재 한국 천주교도 그럴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쪽의 선의를 상대에서는 ‘바보스러울 정도로 순진하고 어리석다’고 오해하여 순박한 히스파니올라 섬 선주민들에게 인간 이하의 대접을 했던 콜럼버스의 아류들이 완전히 사라졌으리라고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천주교 쪽에서 “임진왜란 당시 침략군에 복역했던 세스페데스 신부의 잘못을 우리가 대신 참회하며 용서를 구한다!”는 사과 성명서를 내고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한, 새로 복원한 그 ‘황금십자가’는 절대로 천주교 쪽에 기증하면 안 된다.
한국 불교, 제발 정신을 차리자!
[1470호 / 2018년 12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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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성지가 되어버린 천진암의 불편한 진실 기타 |
천주교성지가 되어버린 천진암의 불편한 진실
종교갈등으로 인해 일어나는 세계분쟁은 전체의 반을 넘는다. 종교갈등에 항시 노출된 외국 성직자들이 한국의 불교와 카톨릭이 잘 어울리는 모습에 놀라는 경우가 많다. 일부 개신교 근본주의자들과의 갈등을 빼면 우리는 종교간 화합이 잘 된다는 외부의 평가다.
일부 종교의 배타성과 종교 간 갈등이 일어나는 상황에 사회가 종교를 걱정하고 있다. 종교가 사람들에게 위안과 힘을 주는 시대가 아닌 요즘에 종교인들이 함께 자리한 것만으로도 훈훈한 광경을 보여주는 것도 없다.
* 길상사를 찾은 김수환추기경님을 법정스님이 반갑
게 맞이하는 모습 (사진- 경향신문)
잘 알려진 법정스님과 김수환 추기경의 깊은 우정만큼이나 불교와 천주교는 서로의 종교를 인정하는 기본이 있어 오래전부터 소통이 잘 돼 왔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고 있다.
하지만, 종교간 이해 문제에 관한 현실은 다르다.
천진암은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앵자봉(鶯子峰) 아래에 있는 사찰로 한국 천주교 성지(聖地)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 천진암이 폐사지 였다는 주장은 천주교의 역사왜곡의 논란의 증거가 되고 있다.
*한국천주교의 발상지로 알려진 천진암 ( 사진- 경기일보)
아래는 <한국천주교발상지 천진암성지> 사이트의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이중 몇가지 부분이 논란이 되고 있다.
「천진암은, 고조선 시대 제정일치의 관습으로, 본래 단군영정 천진을 모시고 산제사, 당산제, 산신제 등을 올리던 천진각 혹은 천진당이라는 작은 초가 당집이 오랜 세월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며,특히 일부 선사시대의 석조흔적으로 추정되는 현상을 볼 때, 삼국시대 그 이전부터 소박한 토속신앙의 현장으로 여겨지며, 훗날 천진암이 되어, 1779년을 전후하여 폐찰이 되었었으니, 정약용 선생의 글에, "천진암은 다 허물어져 옛 모습이 하나도 없다......요사체는 반이나 무너져 빈 터가 되었네 (사파무구관,루전요사반허구)" 하였고, 1797년 정사년 당시 홍경모의 남한지에서는, "천진암은 오래된 헌 절인데, 종이를 만드는 곳으로 쓰이다가 이제는 사옹원에서 관리하고 있다(천진암위고사조지물금속사옹원)"고 함으로써, 사찰로서의 기능을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성다블뤼 주교는 1850년 경 기록한 글에서, 이벽성조께서 젊은 선비들과 함께 수도와 강학을 하던 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거처(폐가옥)이었다(l'edifice isole et perdu)고 하였다.」
천진암은, 고조선 시대 제정일치의 관습으로, 본래 단군영정 천진을 모시고 산제사, 당산제, 산신제 등을 올리던 천진각 혹은 천진당이라는 작은 초가 당집이 오랜 세월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는 처음 단락부분은 단군을 천진(天眞)이라고 한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모습을 천진이라고 한 것이다.
정약용의 시에서 앞뒤 모두 생략하고 일부분으로 전체를 해석하거나 천진에 대한 해석이 자의적이라는 지적이 많다.
「1779년 당시 이벽 성조 25세, 정약용 17세, 정약종 19세, 정약전 21세, 이승훈 22세, 이총억 14세, 권철신 44세, 등 주로 10대와 20대 젊은이들이 모여서 그 당시 아주 생소하고 이상한 천주교 책을 읽고 토론하는 내용을 일반 유교 서당에서나 정상적인 사찰에서, 또는 일반 가정에서는 실천하기 어려우므로, 다블뤼 주교의 기록대로, 폐허가 된 천진암에서는 여럿이 모여 함께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pour s‘y livrer ensemble a des etudes profondes), 천주교 진리를 탐구하고 실천할 수 있었으니, 천진암은 바로 한민족의 유교 선비들이 불교 암자에서 천주교를 연구하고 실천하기 시작한, 유·불·천이 사람과 장소와 사상을 합류한 곳이고, 조선천주교회가 태동된 한국천주교 발상지이다.
1827년에 65세의 노인이 된 정약용 선생은 옛날의 동료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천진암을 찾아와 현장에서 지은 시에서, "이 곳 천진암에 오르는 바윗돌 사이사이로 난 실같은 오솔길은 내가 어린 아이 적에 오르내리며 놀던 길인데(석아동시유), 여기서 우리는 중용, 대학, 서전, 주역, 즉 상서를 다 외운 후 불에 태워 물에 타서 마시는 소련을 하였었지(상서차소련)! 더우기 저명한 호걸들과 선비들이 모여 강학을 하고, 독서를 하던 곳이 바로 여기였지(호사석강독) !" 하며, 옛 추억을 회고하였다.」
지는 해 나무 끝에 숨고
잔잔한 연못 물빛 사랑스럽구나
.......................(일부 생략)
멀리 대 홈통으로 끌어온 작은 물방울들이
차고 넘치면 가만히 전답으로 들어가네
누가 이 좋은 언덕과 골짜기 가져다가
두어 명 스님들만 차지 하게 했던가
...............................(일부생략)
바위와 산봉우리도 기색을 거두고
울타리와 언덕은 구름 안개가 쌓였네
종소리 나자 스님들과 죽을 먹고
.....................
향은 꺼져 나구네와 함께 잠이 들었구나
슬픈일이지 옛적 현달한 이도
스님이 된 자가 다소 있었지
위의 시는 주어사와 천진암 강학회(1779년)가 시작되고 18년후 1797년, 다산이 36세된 단오날에 형제들과 천진암에 놀러갔다가 지은 유천진암기(遊天眞庵記)이다.
정약용이 시에서도 언급한것처럼 천진암에는 이미 스님들이 살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89년 9월 발행된 월간 <대원> 제 28호 기사에 따르면 “가톨릭인들을 숨겨준 탓으로 관가에서 폐사시켰다. 천진암에서 수도하던 스님도 십여분 참형됐다.” 고 마을 노인들은 증언했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를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천진암 스님들 모두가 참살되었고 사찰은 폐사가 된 사실을 뒷받침한다.
천진암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발행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62년 남상철에 의해 절터가 확인됐고, 1979년 수원교구 내 몇몇 신부들이 성역화 사업을 시작했다. 정약전의 주교요지(主敎要旨)에서도 가톨릭이 모였던 장소가 정확치 않아 논란이 분분한 가운데 후보지 가운데 하나였던 천진암은 수원교구에 의해 대대적인 성역화 사업을 시작되게 되었다.
성역화 사업을 진행하면서 당시 천진암터에 사는 주민들의 땅을 사들이기 위해 “자신의 과수원에 들어가는 주민을 경찰에 고발하고, 외출 후 집에 돌아올때 수차례의 검문과 검색당하게 했다.” 그리고 사찰 신도의 소지품을 검사하는 등 정부의 협조를 얻어 상식 이하의 행동을 한 것으로 기록 돼 있다.
그리고 천진암터에 있던 영통사에 대해 “광주시를 동원해 건축중이던 건물을 일방적으로 건축취소시키고, 예불소리가 시끄럽다고 고발하고, 밤에 건달이 사찰에 침입해 거주자를 위협하고, 신도들이 절 앞 개울에서 쉬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등 ”의 행동을 했다는 증인다.
또 가톨릭계가 추진한 ‘군립공원계획’에 반대한 주민들을 안기부와 경찰서가 조사했다는 내용으로 볼때, 가톨릭과 광주시의 조직적인 탄압이 지속된 것으로 해석된다.
결국 34만여평의 땅을 사들인 변기영 신부측은 1979~81년에는 이벽·정약종·권철신·권일신·이승훈 등 한국천주교회 초기인물들의 묘소를 천진암터로 이장했으며, 1990년 영통사 주지 일영스님이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사찰에서 나옴으로써 천진암이 불교의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 사건은 1992년 서울신문에 ‘종교간의 갈등’ 이라는 제목으로 크게 나기도 했지만, 종단에서는 개입하지 않았고 결국 절은 없어졌다.
진관스님, 불교왜곡에 대한 불교계의 무관심 반성과 역사바로세우기 촉구
가톨릭교는 참회와 역사 재조명에 앞장서길 주장
법현스님, 종교간 대화와 서로에 대한 철저한 교리이해 절실 주장
천진암 역사왜곡한 가톨릭측에 진실규명과 사과촉구하기도
이에, 종단협 불교인권위원장 진관스님은 “이렇게 불교에 대한 왜곡이 심한데도 관심조차 없었던 불교계도 반성하고 이제라도 역사 바로세우기에 나서야 한다.” 며 “가톨릭교도 인권과 종교화합 차원에서 참회하고 역사를 재조명하는데 스스로 앞장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태고종 열린선원 주지 법현스님도 ‘가톨릭측의 천진암 역사왜곡’과 관련 불교신문(2267호 10월 7일자)에 특별기고 하기도 했다.
“세기말의 민중들이 항상 그리던 위대한 지도자를 맞이하는 꿈을 꿀 때마다 ‘나=지도자=메시아=부처님’의 말을 할 때마다 종교 간의 대화와 상대 종교의 교리에 대한 체계적 이해가 절실히 필요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기독교(가톨릭교)에서 진행하고 있는 토착화 운동에 관심을 가지던 차에 변기영 신부님이 천진암을 성역화하시는 모습에 우리 천주교가 외국의 선교사 파견 없이 스스로으 필요성과 공부에 의해 출발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려 노력하심에 경외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명동성당처럼 어렵거나 외로운 사람들이 보호받던 곳이 천진암이었고 초기 가톨릭교도들이 천진암 스님들의 보호아래 배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일로 죄없는 스님들이 목숨을 빼앗기고 오늘날에 와서는 절까지도 없어진 것이 아니냐” 며 ‘한국 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성지’(안내지도 및 설명서)의 전량회수와 공개적 폐기처분, 일부 내용 시정과 요청사항의 약속기한을 정해 응답을 요청하면서 불교계 종단과 함께 대응할 것을 밝혔다. .........(중간 생략) 그러나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이에 법현 스님은 “책자와 인터넷 그리고 석조물에 씌어 있는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 주십시오.
단군을 천진(天眞)이라고 한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모습을 천진이라고 한 것입니다.
역사를 왜곡하지 마십시오.....스님들이 살던곳과 대웅전을 제대로 표시하고 복원하는 것이 역사적 사실과 진실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주어사에 있던 해운스님의 비도 불교계에 돌려주십시오. 가톨릭을 믿는 이들이 많이 사는 나라 사람들에 의해 훼손된 이스탄불에 있는 성 소피아성당의 성화(聖畵)가 성화 자체를 그리지 않는 이슬람인들에 의해 복원되고 있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시고, 천진암의 백년 뒤 좋은 모습을 우리 후손들과 세계인에 보여주실 것을 기대하겠습니다.”
이후, 1984년엔 한국천주교회 창시 200주년을 맞아 유적지들에 대한 대대적인 성역화사업이 추진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비, 순례대성당, 강학당, 갈멜 수도원, 가톨릭 신학연구소 등이 세워져 있다
출처: http://whdrypeace.tistory.com/80 [종교평화]
첫댓글 저는 대흥사 십자가는 역사의 조작으로 봅니다.
서산대사 유품에 있다가 1927년에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이게 일제에 아부하면서 세불리기를 한 로마카톨릭이
서산대산 유품에 은근 설쩍 끼워넣기한 것인지도 모르고 그당시의 기사가 날조한 것인지도 모르고
아무튼 2016년 11월에 해남 대흥사 주최로 <황금십자가 복원을 위한 세미나.>를 개최했는데
여기에 5명의 발제자중 한 명인 현장이란 중이 있습니다. 이 중은 법정스님의 속가 5촌으로서
맑고 향기롭게 이사장은 길상사 주지가 당연직으로 하는 정관을 무시하고 법정스님 사후 맑고 향기롭게
이사장을 하려고 온갖 문제를 일으킨 중입니다.
이 현장이란 중은 보성 대원사의 회주며 길상사와 맑고향기롭게를 더럽히고 출가전에는 가톨릭 신도로써 해인사 승가대학 시절에는 <해인>지 편집장을 엮임하여 이름을 알렸고 법련사의 불일서점의 운영책임을 맡기로 했는데 천주교와의 친분을 유지하면서 천주교 이권을 챙겨주는 중입니다. 이 중이 경향신문 기자와 짜고 맑고향기롭게의 합법적 이사장인 것처럼 기사도 냈습니다. 나중에 맑고 향기롭게 이사장 명단에서 삭제되고 길상사 대중에게도 공개적으로 사과를 했다고 합니다.
이 현장이란 중은 지금 미디어붓다에 <불교속의 역사기행>을 쓰고 있는데 이 중은 가톨릭을 위해 언제 훼불할지 모르는 중으로 저는 인식하고 있습니다
1962~1965년에 있었던 제 2차 바디칸 공회의에서 <아시아 불교도들을 어떻게 포섭될 것인가?>논의되었고 그 직후인 1966년에 청와대와 가강 가까운 곳에 로마교황청 대사관을 개관하여 독재정권에 아부하면서 세를 불리기에 성공한 카톨릭이라, 불교의 순진한 스님들은 카톨릭의< 종교평화>라는 양두구육의 술책에 쉽게 넘어가고 지금도 넘어갑니다. 천주교인이 불교단체에 개입해서는 문제와 분쟁을 일으키고, 힘있는 자들을 포섭하여 세례받는 당사자가 세례받는 장소로 가는지도 모르고 참석했다가 엉겁결에
세례를 받는 경우가 허다합니다.민주인사, 부자, 육사출신,작가등 사회에 영향력을 자질 수 있는 자들는 모두 포섭대상 이었습니다.
<아시아 불교도들을 어떻게 포섭될 것인가>하는 교황청의 전략을 수십년 전에 제가 다니던 남산의 대원정사에서
발행한 <대원지>에 기고된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충격적이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들은 불교를 최대 공략지로
목표를 두고 한 것인데 우리 불교는 그것을 귓등으로 웃고 넘어간 것이 아닌가 합니다. 카톨릭은 그런 일환으로
제사를 허용하고 49재를 모방하면서 카톨릭과 불교의 경계점을 모호하게 하여 불자를 엄청나게 포섭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동네 주변에 절에 다니던 보살님들이 지금은 대다수가 천주교 신자들이 된 것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_()_ _(())_
@백우 저도 전주에서 그 잡지, 그 글 읽고 충격받은 바 있습니다.
70 되어가는 제 친구들 "나이 들어가니 종교가 필요 해" 합니다만, 거의 천주교로 가더라구요. 불교로 가더라도 절이 아니라 불교 교양대학으로 가는데 여기서 요즘 서울에서 보면 절이라는 현판보다는 < -정사. -선원>이라는 현판이 더 많이 보이는 현상을 종회, 총무원에서는 잘 살펴야 할 것입니다.
100년 안에는 한국이 가톨릭 국가가 된다는 말이 나돈지가 20년이 됩니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과학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종교인구 수가 떨어지기 때문에
카톨릭 국가가 안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권력과 유착관계가 심한 카톨릭이고 한국에서 대통령이나 고위정치인이 되려면 카톨릭의 뒷받침이 있어야하는
상황이 되어서 앞으로 한국의 종교상황은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습니다.
스님들이 청정하고 불교의 인재를 키워야하는데 중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수행하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자신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몸짓만 하니 슬픕니다.
스님들과 재가자가 합심하여 부처님 가르침이 살아 있도록 해야하는데,우울한 현재와 미래입니다
"스님들이 청정하고, 불교의 인재를 키워야 하는데 ... 자신의 이권을 차지 하기 위한 몸짓만 하니 슬픕니다."
여러 사찰에서 종무원으로 일한 바 있는 저로서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또 위 인용에서 ' 불교의 인재를 키워야 하는데...' 는 은평 민법현스님, 경주 남산 우룡스님, 고 김탄허스님, 고 강석주 스님, 고 박법정스님... 께서도 늘 강조하시고, 주창하셨던 사안입니다.
사진을 보십시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스님 대하는 태도가 한국 불자들과는 참 다른 광경이지요? 그런데 왜 한국 스님들은 이런 대접을 받지 못 하는가? 포괄적으로 답한다면 다 자업자득이고, 인과응보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하여 위대한 탐험가로 알려진 콜럼버스가 실은 평화롭게 살던 원주민들을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살을 자행한 희대의 악인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악행은 감춰진 채
승자의 논리로 왜곡되어 지금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십자가를 들고 무력을 앞세워 원주민을 멸종시키다
시피한 그들의 악행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종교간의 대화로 평화를 이루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불교는 기독교보다는 천주교와 친근하게 지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불자의 관점에서는 천주교나 기독교나 한 종교이지 다른 두 종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친목을 도모하면서도 안으로는 자신들의 믿음과 교세확장에 열을 올리는 것은 그들의 특성상 당연한 귀결일지
모릅니다. 기독교는 끊임없이 십자가를 앞세워 인명을 무자비하게 살상해 온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일입니다.
소위 우리나라 카톨릭의 성지라는 곳은 대개 불교의 폐사지와 관계 깊습니다. 부처님의 자비로 천주학을 하다 피신한
그들을 감춰 주었다가 함께 결딴 난 예가 많습니다. 천진암, 곤지암이 그런 예가 될 것입니다. 그 거룩한 자비정신의
도량은 폐사가 되고 그 자리가 저들의 순교지라고 하여 성역화하여 불교는 내몰리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대대로 전해오는 저들의 유전이 아닌가 합니다.
불교는 지혜의 종교인데도 불구하고 카톨릭의 친근한 얼굴에 반해 개종하는 사례는 부지기수 입니다.
이런한 일은 아마도 우리나라 제1의 종단이라는 조계종이 청정하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해서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스님들이 수행과 포교에 전념하는 것이 아니라 권승들은 탐욕으로 일관하고 권력 밖의
스님들은 각자도생하느라 앞가림도 모자라 신도교육과 복지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종단의 책임자들이 크게 각성하지 않으면 불교는 점점 빛이 바래지 않을까 우려 됩니다.
종단의 적폐를 개혁하여 청정승가를 이루어 불교가 사회에 빛을 발하기를 합장해 봅니다. _()_ _(())_
구구절절 지당한 법문입니다.
보신각 집회 때 당시 총무원장이 화계사 본사인 수덕사 출신인데, 화계사에서도 보신각 집회에 동참했다는 글을 모 불교 카페에 올린 바 있습니다.
며칠 뒤 그 카페 회원이고, 조계종 종무원이라는 사람이 저에게 강력하게 항의하며 훼종했다고, 이단이라고 떠들어서 그 카페 탈퇴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카페 운영자는 여태 저에게 전화 한 통 없습니다. 즉 의식없이 스님 추종하는 신도에게도 문제가 많습니다. 그 카페 운영자는 봉은사 성실 신도인데 그 주지는 자승 수하에 있는 사람입니다.
감사합니다......_()_
본문 기사를 법현스님 카톡방에 올렸는데 조계종 포교사 한 분이 필자 이병두 거사가 자승 졸개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코몐트 없는 것을 보고 실소했습니다.
자승 졸개... 자승이만 처내면 제자리로 올 것을... 자승 수하에서도 面從腹背 口蜜腹劍자가 어찌 없으리... _()_ _(())_
지금은 세력 줄 잡아서 圖生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잘못 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스님들도 많을 줄 압니다.
숲을 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숲만 보고 나무를 보지 않으면 병이 들어 있는 것을 간과할 수 있고,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않으면 대의를 그르칠 수 있습니다.
@백우 어제 저는 법현스님이 개설한 카톡방에서 나왔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대화하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다. 초대받은 사람은 70여 분인데 대화하는 사람은 다섯도 안된다.
2.'만공회' 가입광고, BBS 해외 여행광고, 보시 권유 등 비본질적 내용이 대부분이다.
3.법사라는 사람, 종무원이라는 사람들의 발언이 지나치게 편파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