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자기앞수표 1억 원 정
사람이 일흔 살 고개를 넘어오니 평상시에는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가끔 눈
에 뜨인다. 어제 만난 중학교 동창생 Y씨의 처사도 그런 경우의 하나이다. Y씨
와 K여사는 한 고향에 살았던 중학교 동창생이다. 중학교 졸업 후 갓 스무 살이
되던 해에 J읍의 명문가에 시집을 갔던 K여사는 무슨 영문인지 3년도 채 못 되
어 소박을 맞았는지 갓난애 하나만을 등에 업고서 친정으로 돌아왔다.
소문에 의하면 성격이 호탕하기가 사나이 같던 K여사가 잔소리가 지나쳤던
시어머니를 가족들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안 죽을 만큼 두들겨 패놓았는데 그
게 들통이 나는 바람에 그리 되었다고 하는 소문이 있었다.
K여사 친정의 이웃에 살았던 동창생 A씨가 나에게 전해준 바에 의하면 그 사
연은 좀더 치사하고 비윤리적이다. 대개 부잣집 사나이들이 그렇듯이 남편이라
는 자가 하는 일 없이 자빠져 놀면서 꼴에 사나이라고 이웃집 과부와 상습적으
로 바람을 피우다가 K여사에게 사통 현장이 목격되어 결국 파경이 되었다 한다.
성격이 활달하고 마음씨가 넓은 K여사이다. 정의감이 지나칠 정도로 강했던
K여사는 무술 실력도 대단했는데 보통 사나이 서너 명쯤은 거뜬히 해치우고도
남는 호신술을 지니고 있었다. K여사가 분함을 참지 못해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현장의 두 사람(남편과 과부)을 일어나지 못할 만큼 린치를 했다고 한다.
특히 그런 것의 원인 제공물인 남편의 거시기를 다시는 못쓰게 될 정도로 걷
어차 버렸던 바, 이를 알게 된 일가친척 어른들이 이대로 그냥 놔두었다간 절손
당하기 십상이라며 쫓아내라고 들고나서는 통에 사면초가가 되어 견디지 못해
돌아왔다는 것이다.
하여튼 외동딸로 태어나 눈에 거슬리는 것을 보지 않고 자라난 K여사에게는
구박이 심한 시어머니와 바람둥이 남편의 소행, 이것을 바로세우고 응징한다는
것이 도를 넘었던 것이다, 그녀는 성깔 사납게 날뛰고 힘 있는 대로 쥐어박다가
결혼생활 불과 3년도 안 되어 파국을 맞이한 것이었다.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이 1966년, 지금으로부터 꼭 45년 전이다. 동창 모임에
나와서 눈물을 흘리며 무슨 해결책이 없겠느냐고 하소연 하던 K여사의 설흔살
아릿다운 자태가 완연한데 강산이 4번도 더 변할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이렇게 되자 중학교시절 남모르게 친히 지냈던 Y씨와 K여사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정치의 꿈을 꾸던 Y씨에게 만사에 역동적 능율적 역량을 지닌 K여
사는 커다란 힘이 되었다. 그리하여 의기가 투합 된 두 사람은 고향을 떠나 서울
근교에 정치적 지지기반을 구축할 목적으로 상주할 사무실을 마련하고 그 곳에
서 무슨 일인가를 열심히 하면서 마치 금실 좋은 부부나 연인들처럼 동일목표를
지향하는 동지로서 알콩달콩 긴밀하게 잘 지냈다.
그런지 한 십여 년 지났을 무렵인데, 그들은 무엇을 어떻게 하다가 잘못되었
는지, 대판 싸움이 벌어졌고, 어제까지의 동지가 이젠 철천지 원수로 탈바꿈되
었다. 그러고서 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Y씨는 이 당, 저당 기웃거리며 공천을 받으려 안간힘을 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심심찮게 국영호텔(교도소) 신세를 지기 일쑤였다.
그러던 Y씨에게 무슨 행운이 닥쳤는지 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
"녹야원 형,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네밖엔 이 일을 해 줄 사람이 없네. 귀찮게
생각 말고 내 심부름 좀 해 주시게."
Y씨의 사연인즉 이러한 것이다.
20년 전 K여사와 죽어서도 다시 태어나서도 절대로 만나지 말자는 악담을 주고
받으며 갈라설 무렵, 곧 자기들 사업(?)이 파산(?)이 되던 해에 어느 기업인에
게 집세 보증금 2천만 원을 빼서 사업자금으로 주었었고, 그 기업인은 그 것을
가지고도 망쳤고, 이로 인해 그들은 파경이 되었고, 그러고서 지난 일을 까마득
하게 잊고 살아 왔다는 것이다.
그랬었는 데 며칠 전 그 기업인이 어찌 알고 자기를 찾아와 실패의 연속이던
사업이 빛을 보아 성공했다면서, 수십 명의 은인(빚쟁이)들에게 힘이 닿는 대로
갚아 줄 결심인데, 제일 먼저 Y씨에게 찾아 왔다며 일금 1억 원 짜리 수표 한장
을 건네주었다는 것이다. 이 수표를 어렵게 살고 있다는 K여사에게 좀 전해주면
좋겠다는 부탁이다.
"Y형, 자네, K여사 소식이 그렇게도 깜깜한가? 이 사람아, K여사 환갑 되던 해에
세상 버렸지 않아. 동창생 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자네 혼자만 모르고 있단
말인가? 어허 이 사람이 건망증에 걸린것이여? 벌써 치매증상이 나타난 것이여?
평생 처음 만져보는 큰돈이 생기니 K여사에게 주어야겠다는 갸륵한 생각을 하다
니, 재학시절 인정많고 의리 깊던 자네의 본 모습이구먼, 그 분의 외동딸이 생존
해 있을 것이니 L씨에게 연락해 보게나."
내 말을 듣고 망연자실 허탈한 표정으로 맥없이 되돌아가는 Y씨. 그 자신도
당뇨와 동맥경화로 생의 종착점에 도달하고 있는 처지이건만, 옛 연인의 여생
걱정이 최우선이었다니 제아무리 늙어도 '사랑'의 숨겨진 힘은 그 무엇과도 견
줄 수 없는 플러스 알파의 위력이 있는가 모르겠다. 2011.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