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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2주일설교 누가복음18:1-8(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본문: 누가복음18:1-8
제목: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오늘은 누가복음18:1-8의 말씀을 가지고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그리스도인은 여러가지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기도는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그 중요한 것은 그 기도가
응답을 받을 수 있어야 기도입니다.
기도를 하지만 그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모습이라면 그것은 헛수고가 됩니다.
우리의 애씀이 헛수고가 되면
그것처럼 허망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도를 해야 하지만
바른 기도를 해야 합니다.
특별히 누가복음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할지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할지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게 될 본문도
기도에 대한 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바르게 기도하는 성도님이 되시기 바랍니다.
1.재림의 날에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그리고 다시 이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처음에 오신 것을 초림이라고 하고
다시 오시는 것을 재림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은
초림과 재림 사이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복음17:22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인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실때
그 예수님의 날을 하루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걱정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재림하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헛것이며
우리의 모든 노력을 수포로 돌아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의 때를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살아 있는 동안 신앙생활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 중에 기도의 생활이 바르게 되어야 합니다.
종종 기도를 앉아서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는 것만을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도는 삶이며 태도이며 행동이 기도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지고 행동해야 합니까?
2.억울한 일을 풀어 주시는 하나님
우리는 재림의 날을 기다리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을 구름만 떠도
주님이 다시 오시는가 해서 설레며 기대하였습니다.
우리는 늘 주님의 오실 것을 맞이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중에 가장 우리가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늘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상황이 어떠하든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늘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과
낙심하지 말하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핵심도 마찬가지로
늘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과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초림과 재림사이에 지루한 삶을 살아가는
지금에 때에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낙심하지 않고 늘 기도한다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우리가 사는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해 주십니다.
한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거들떠 보지 않는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사법적 정의가 살아 있어야
그 사회는 희망이 있고 안정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무시하는 그런 재판관이 있는 사회는
참으로 출구가 없는 시대이며 답이 없는 시대입니다.
아무리 악이 성행한다고 해도
재판관이 공의를 가지고 사람을 존중해서 재판을 한다고
하면 그 사회는 안정된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사회에 과부가 있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과부라는 존재는
참으로 연약하고 불쌍한 존재였습니다.
지금은 여성에게 많은 일자리가 있어서
과부가 되어도 일해서 먹고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과부는 일할 곳도 없으니 참으로 가난했고
보호자가 없으니 불쌍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과부에게 원한이 있었습니다.
아니 원한이 많이 생겼을 것입니다.
보호자가 없으니 힘이 없으니
늘 억울한 일이 생겼고 그래서 원한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과부는 재판관을 찾아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재판관이 어떤 재판관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자였습니다.
그러면 그가 무엇을 원했겠습니까?
무엇을 존중하고
무엇을 두려워했겠습니까?
돈을 존중했을 것이고
자신보다 강한 권력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니 과부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줄리 만무했습니다.
과부이기에 억울했습니다.
약자였기에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돈도 없고 힘도 없었기에 바랄 것은 오직 재판관이
바르게 판결을 내려 주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 밖에 없어서 재판관에게 매일같이 찾아가
"저에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이 있다고
그러니 올바른 판결을 내려달라”고 졸라댔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습니다.
다른 것을 그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것을 할 힘도 능력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재판관은 들을 척도 안했습니다.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재판관이
그런 과부의 억울한 사정을 돌아보았겠습니까?
재판관은 그렇게 졸라대는 과부를 지나가는 개가 짖는 양
인상을 쓰며 무시하며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과부의 억울한 사정을
불의한 재판관은 들어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과부는 억울한 사정을 재판관에게 말하고
재판관은 그 과부를 거들떠 보지 않으며
그렇게 몇날 몇일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재판관이 혼자 말하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지만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여기서 번거롭게 한다는 말은
눈 밑을 때린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눈 밑을 때리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견딜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재판관은 과부의 원수에 대한
억울한 사정을 들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과부에게 있는 억울한 사정은
그에게 정당성이 있음을 말합니다.
정당성이 없으면 억울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당하는 고난도 힘들기는 하지만
억울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과부는 교회와 성도를 말하고
불의한 재판관은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 믿고 사는 것은
정당성이 있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우리에게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미워하고 우리에게 불이익을 주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억울하다고 생각합니다.
과부가 정당성이 있기에
재판관에게 계속 가서 졸라댔습니다.
그것을 아는 재판관은 눈밑을 계속 맞는 것 같은
상황이 되어 괴로워서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재판관이 사람들을 무시했지만
계속적으로 정당한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재판관으로서 사람들 앞에 견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정당한 내용으로 계속해서 찾아오니
불의한 재판장도 그를 괴롭게 하니
원한을 들어 주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7절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그렇습니다.
불의한 재판장도 정당한 요구에 대해서
번거로워서라고 들어 주었는데
우리를 사랑하는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
오래 참으시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밤낮 부르짖는 자들의 원한을
분명 풀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한말씀을 더 하십니다.
분명 하나님은 정당성을 가지고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기도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기도에
분명 응답해 주신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그렇게 끝까지 기도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처럼
그렇게 그 억울한 일이 풀어질때까지
우리의 기도가 늘 그렇게 기도하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은 이가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그런 자들을 보기기 어렵다고 하십니다.
구한것을 응답받는 이가 적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3.낙심하지 말고 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정당한 기도를 하지만
우리가 사는 날 동안 구체적인 응답이 없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했는데 응답이 없어서 낙심을 합니다.
그런 응답도 없는 기도를
왜 해야 되느냐고 항의를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낙심하지 말고 늘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시기 위해
오늘의 말씀을 우리에게 해 주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도하면서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당성이 있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했지만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응답이 되지 않을 수 있기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주변에서 보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하는 행동을 보면
복 받을 사람같아 보이지 않는데
복을 받고 넉넉하고 여유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까요?
그런데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반드시 부모님이나 조부모들이 기도를 하였습니다.
윗세대들이 자녀손들을 향한 낙심하지 않고
항상 한 기도가 있었기에 그 기도의 응답을
지금 세대들이 받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기도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부모가 기도하면 후대들이 응답을 받고 삽니다.
그러므로 내 눈에 아무 증거 없어도
우리는 앞으로 펼쳐질 장엄한 미래를 보면서
낙심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도 그러한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세가지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때가 어느 때였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 떠나고
제자들마저도 떠나던 때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낙심할 수 밖에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때 예수님은 어떤 기도를 하였습니까?
첫번째는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두번째는 자신의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말씀을 받은 제자들이 거룩하신 이름으로
온전히 보전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세번째는 그 제자들을 통해 복음을 받고 세워질
하나님의 나라와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세상에서 악에 빠지지 않고
세상에 속하지 않고
진리로 거룩하게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져서 우리가 복을 받고 누리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현세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기도는 지경을 넓혀야 합니다.
땅끝까지 기도하는 것을 넘어서
역사의 언덕을 넘어서 우리의 기도가 뻗쳐가야 합니다.
그 기도가 정당성이 있다면
그 기도는 반드시 응답이 됩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계속 기도한다면
우리 세대가 아니더라도 다음 아니 다음 세대에
응답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 기도의 열매를 볼 수도 있고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 응답이 꽃을 따고 열매를 먹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중보기도 하셨습니다.
먼저 자신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아들을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말씀하시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것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이 예수님께 주신
바르고 정당성이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항상 정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런 정당성이 있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이 됩니다.
그렇다고 꼭 내가 그 응답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반드시 응답이 되기에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기 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정당한 기도가 됩니다.
그런 기도가 응답이 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존중입니다.
하나님을 존중하며 기도할 때 어찌 응답이 없겠습니까?
내 말을 존중하는 자녀가 어찌 이쁘지 않겠습니까?
내 말을 따르는 자녀에게
어떻게 좋은 것을 주지 않겠습니까?
부모인 우리도 그러한데
하나님께 우리가 그 말씀을 따르며 바르게 구하는 것을
어떻게 응답해 주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구하는 것을
주실 분으로 알기에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의 지경을 넓혀야 합니다.
기도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살아 있는 호흡입니다.
여기에 바로 경건의 시작되는 것이며
그것이 꽃 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기도는 회개의 첫번째 증거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기도를 태만히 하면 넘어지게 하는 첩경이 됩니다.
그리고 기도는 우리 영혼에게 유익을 줍니다.
기도는 시작하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일시적인 양심의 가책, 격앙된 감정등은
우리로 기도를 시작하게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꾸준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쉽게 싫증을 느끼며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야”라는
사탄의 제안에 쉽게 굴복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 주님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기도를 바쁘게 끝내거나, 또는 부주의하게 함부로 하거나
기도를 온통 생략해 버리려는
은밀한 충동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까?
그럴때 바로 악마로부터 오는 유혹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마를 저항하여
우리 뒤로 물리 쳐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앞에 있게 해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기도하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반드시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기도가 정당성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정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 기도가 응답이 되었습니까?
응답이 되기도 했고 아직 되지 않기도 했습니다.
응답이 되지 않았다고 기도를 멈추어 있지는 않습니까?
과부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는 기도하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기도가 정당하다면 응답이 되지 않았다고 해도
낙심하지 말고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따르고
그 말씀 안에서 기도하면 하나님은 분명 응답해 주십니다.
내가 보지 못하더라도 내 자손들이 볼 것이며
내 후배들이 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넓혀야 합니다.
장래의 우리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은 비록 작은 인원이지만 나중에 놀랄만한 역사가 있는 교회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장래의 우리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은 혼란 스럽고 어려움에 있지만
아름답고 복된 나라가 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를 이어 올 장래의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서
쉬지말고 기도하여 놀라운 응답이
우리 세대를 넘어 다음 세대에
응답이 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