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불가사리
오늘 아침 출근해서의 일이다. 화장실에 갔더니, 화장실 안과 그 앞의 복도 일대가 온통 물바다다.
마침 바께쓰와 실걸레로 물을 치우고 있는 청소부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간밤에 누가
세면기의 수도꼭지를 빼어갔다는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또 불가사리의 짓이로구나’ 입 속으로 중얼
거렸다.
주로 쇠붙이를 먹고사는 불가사리가 우리나라에 나타나기는 이조 초엽, 수도가 아직 지금의 서울로
천도하기 전의 일인가 한다.
배불(排佛) 사상에 젖어 있던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후 얼마 되지 않아 모든 중을 잡아드리라는 영을
내린 일이 있다. 중을 잡아 바치는 자에게는 관직을 준다는 현상까지 붙였다.
송도에 사는 어느 선비 하나가, 벼슬을 해볼 욕심으로 매일같이 중을 찾아 헤매었으나, 좀처럼 중을
만나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행운은 제 발로 찾아왔다. 어느 얼빠진 탁발승이 동냥을 얻으러
온 것이다. 선비의 아내가 나가보니 중은 중인데 하필이면 자기의 친오빠가 아닌가. 선비의 아내는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대낮에 한길을 다니느냐고 짐짓 놀라면서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다락방에다
숨겨놓았다.
해질 무렵 피로에 지친 남편이 돌아오자 아내는 다락문을 가리키며, 이제 벼슬은 따놓은 거나 마찬가지
라고 좋아한다. 다락문을 열고 사연을 알게 된 선비는, 아내를 뒤란 우물가로 데리고 가서 “너는 남편의
출세를 위하여 혈육을 희생시키고자 하였으니, 장차 자신의 영화를 위해서 남편까지도 제물로 삼을지
모를 무서운 여자다”라고 하면서 비정의 아내를 깊은 우물 속에 집어 넣었다.
처남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외출을 하지 말도록 당부한 선비는, 그 다음날부터도 계속해서 도시락
을 싸들고 중 잡기 행각에 나섰다.
다락에 숨어있던 중은 무료를 잊기 위해, 먹다 남은 밥덩어리를 주물러서 생쥐만한 동물 인형을 만들었
더니, 이것이 진짜 생물로 변하여 바늘이든가 못이라든가 하는 쇠붙이를 먹으며 점점 자라서, 나중에는
식칼이나 낫 또는 호미와 같은 집안의 쇠붙이를 모조리 집아먹고, 강아지만큼 자라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하루는 여느 때와 같이 저녁때에 피로에 지쳐 돌아온 선비를 보고 처남인 중이 ‘머지않아 벼슬을 얻을
기회가 올 것이니, 이제 중 잡는 일은 그만두어 달라.’고 무엇인가 귓속말로 속삭이고는 종적을 감추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송도 장안에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수가 나타나서 연장이나
쟁기 또는 수레 할 것 없이 쇠붙이라는 쇠붙이는 모조리 먹어버리는 것이다. 창으로 찌르거나 활로
쏘아도 죽기는커녕 도리어 창이고 화살이고 할 것 없이 그대로 삼켜버린다.
조정에서는 궁여지책으로, 이 괴수를 잡는 자에게 많은 상금과 벼슬은 준다는 방을 써 붙였지만, 어떤
천하장사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때, 처남벌의 중으로부터 비책을 들어두었던 선비는 괴수 사냥을 자청하고 나서, 시내 한복판 광장
에다 쓰지 못하는 쇠붙이를 될수록 많이 쌓아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광장에는 삽시간에 고철
(古鐵)이 산같이 쌓였다.
송악산에 숨어있던 괴수가 쇠 냄새를 맡고 광장으로 나와서 고철더미에 다가가 쇠붙이를 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선비는 괴수의 뒤로 다가가서 꼬리에 불을 붙이니 괴수는 그 자리에서 몇 개의 쇠 조각과 연기로
변해버렸다. 선비는 약속대로 많은 상금을 타고 오랜 숙원이던 벼슬을 얻어했다.
이상은 김동인 씨의 불가사리에 관한 삽화의 대강이거니와, 이조 초엽이 아닌 현대에도 이 불가사리가
가끔 나타나서 못된 짓을 곧잘 한다.
간밤의 수도꼭지 사건도 이 현대판 불가사리의 짓이지만, 비단 수도꼭지뿐만이 아니다.
출입문의 손잡이, 수세식 변기의 부속 기구, 또는 하수구의 맨홀 뚜껑, 지붕 물받이의 홈통, 가시철망의
철사 따위, 쇠붙이는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먹어버린다.
한번은 건축 공사가 완공되어 영선계장이 준공검사를 한다기에 따라가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사방 창문의 손잡이가 하나도 붙어 있지 않다. 나는 속으로 ‘벌써 불가사리가 다녀갔구나’ 생각
하며 시치미를 떼고 시공업자에게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분명히 달아놓았는데 어느새 없어졌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불가사리가 쇠붙이를 먹고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지만, 옛날의 불가사리가 한낮에 대로를
활보하며 창칼과 정면으로 대결하는데 반하여, 현대판 불가사리는 음흉하고 좀스러워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언제 나타나서 언제 먹어버리는지 알 도리가 없고, 먹는 것도 기껏해야 수도꼭지 아니면 문손잡이
가 고작이다.
하기야 어느 면에서는 현대판 불가사리가 보다 대담한 점이 있는지도 모른다.
일전에는 도청 뒤편의 드높은 굴뚝에 시설되어 있는 피뢰침과 거기 연결되어 있는 동선을 먹힌 일이 있다.
이 굴뚝은 워낙 높아서 비계공이라는 특수인부만이 오를 수 있는데, 이 굴뚝에 그것도 야간에 올라가서
빼먹었으니 얼마나 담이 큰놈인지 모르겠다. 그보다 전류가 흐르는 고압선을 잘라먹은 놈도 있었으니.
이 현대판 불가사리는 전기도 통하지 않는 놈인지, 그렇지 않으면 목숨을 내놓을 만큼 담대한 놈인지
정체를 알 수 없다.
연전에는 국립박물관의 금불상과 광주 봉은사의 향로와 같은 문화재만을 골라 먹는 놈이 있어서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더니, 이번에는 레미제라불의 장발장처럼 천주교 성당의 촛대를 집어 삼킨
불가사리도 나타났다.
원래 송도에 불가사리가 나타나게 된 동기는 이성계의 배불 사상에 항거하여, 부처님의 무한한 힘과
높은 덕을 이 나라 백성에게 알리기 위함인데 반하여, 현대판 불가사리는 오직 쇠가죽같이 질긴 자신의
배를 채우는 데만 목적이 있는지라 이와 같은 무엄한 짓도 거리낌 없이 해치운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이처럼 무엄한 놈이 천벌을 받지 않고 대로를 활보하는 것을 보면, 부처님이나 예수님의 자비심도 어지
간한가 보다.
사회의 좀, 문화의 좀, 국가의 좀인 이놈을 퇴치하는 묘안은 없을까? 이놈은 붙잡아서 옥에 가두어도
쇠창살을 잘라먹고 뛰쳐나올 것이고, 사형을 집행하려해도 전기의자를 전선과 함께 먹어치울 것이
뻔하니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놈이다.
실걸레를 가지고 물을 치우는데 열중하는 청소부의 뒷모습을 보며, 현대판 불가사리를 퇴치하기 위해
서는 역시 선인들의 지혜를 본떠서, 많은 상금과 높은 벼슬을 준다는 방을 써 붙일밖에 없구나 생각하며
화장실을 뒤로하였다. (새강원)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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