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린초~룽마~차부상~카일라스~파양~장무~카트만두
무위의 대지에서 무욕을 배우다 글·그림 박종석 한국화가 (p-chongsuk@hanmail.net) 사진 이동승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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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베트 라사 |
오늘은 9월 19일, 약 360㎞를 달려 룽마(絨瑪)로 가야 한다.
완만한 구릉의 곡선 사이에 있는 길을 따라 유목민에게 다시 길을 물어 작은 호수를 만난다. 흑두루미 2마리가 무료한 북진에 생기를 넣어 준다. 오후엔 진흙늪지에 차가 빠져 많은 시간이 지체되고 오후 6시에 써린쵸(色林錯) 남면에 도착한다.
고도가 4530m로 비취색 호수와 맑은 구름, 그리고 잉크빛 하늘은 가히 천하일품의 전경이었다.
특히 석양의 낙조는 필설로도 그 감탄사를 형용할 수 없는 특별한 황홀경이었다. 이 호수는 1901년 스웨덴의 탐험가 스벤 헤딘 박사가 야크와 30마리의 말 그리고 많은 사람을 고용하여 탐험한 곳으로 오로지 수평선의 대지, 적막한 여행길 마지막에는 말 2필과 혼자 살아남았다는 곳이다.
지구의 3극지는 남극, 북극, 히말라야를 말하지만 티베트의 무인구 또한 3극지에 꼽힐 만큼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고원은 가보지 않으면 그 고독감을 느끼지 못할 곳이다. 그러나 비취색 호수와 그리고 야생 영양 떼, 멀리 누런 초원 저편으로 겹산과 설산들의 티없이 평화로운 풍경들을 보면서 무인구의 비경에 넋을 놓는다.
대원들은 호수를 벗어나면서 늪지대에 다시 차가 빠져 겨우 견인해 전방 식별이 어려운 상황에서 어두운 길 없는 길을 헤매다 다시 70㎞를 되돌아가 밤 11시에 겨우 비어있는 빈 흙집을 한 채 찾았다.
누추하지만 추위를 막아주는 장소를 찾았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총총히 빛나는 별빛으로 위안을 삼아야할 형편이었다.
야생 당나귀와 영양 떼
검은 대지 위에 새날의 빛이 서서히 눈을 뜨니 야크와 새소리가 하루의 시작을 알리며 이른 시각의 햇살에 산책을 나온 영양 떼들은 금년에 낳은 새끼들이라 무서워하지도 않고 뻐끔하니 쳐다본다.
또한 적막한 지평선이 고요하여 구름이 흐르는 소리가 들릴 듯한 그지없는 공간, 쫍죠탕라라는 지역에 도착하여 거친 바람을 막기 위해 천막으로 세운 간이천막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청해성에서 재배한 하얀 풀 버섯과 야크고기, 당면 그리고 배춧잎을 재료로 한 펜당이라는 국수 맛이 시원하고 담백하여 지친 여독을 풀어준다.
청년 마중쿠이의 짧은 영어로 작별 인사를 나누고 다시 떠난다. 유목민들은 1시간에 겨우 20㎞ 정도밖에 갈 수 없는 늪지대라 하지만 계속 북진하기로 했다.
길가의 이정표에 써있는 양호공로(養好公路)를 따라 늪을 지나다 보니 오후 4시, 조그마한 개울가에서 쉬면서 서울에서 가져온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최희준의 ‘하숙생’을 듣는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적막한 고독감을 달래기 위해서는 좋은 쉼터에 의미 있는 노래였다.
폭이 넓은 강을 힘겹게 빠져나간다. 그러다 보니 벌써 수묵빛 사이로 현란한 해거름과 별빛이 깜빡이는 시간, 목적지 니마(尼瑪)까지 70㎞를 앞두고 밤 10시 30분에 유목민의 집에서 민박을 한다. 잠시 하늘을 쳐다보니 온천지가 은가루요 떠들썩한 보석잔치를 하는 듯하다.
신기함을 보는 어린아이 심정이다. 그러나 끝없는 고원의 여행에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그 무엇인가 골똘하며 뒤척이던 밤이었다.
그곳은 랑초썅으로 다음날 새벽엔 얼음과 서릿발이 하얗게 쌓여있다. 오전, 작은 따츠쵸 호수에 비친 파란색 바탕의 호수와 하얀 설산의 대칭이 너무도 아름다워 그곳에서 1시간 가량 머문 후 다시 북진하다보니 20여 마리의 영양 떼가 쏜살같이 달려가는 모습에 함께 경주하듯 흥분하게 한다.
1시에 30여 채의 집이 있는 작은 시골마을 니마(尼瑪)에 도착했다. 그래도 작은 목욕탕 한 곳이 있으니 이곳에서는 제법 큰 도시로 생각한단다.
겨우 차량에 유류를 보충하고 3시에 출발해 룽마를 향한다. 눈에 보이는 것은 황금들녘 같은 누런 목초지의 지평선에 가끔 중첩되어 보이는 설산 외 고요뿐이다.
오후 5시, 야생 당나귀 떼가 이동한다.
당나귀는 목과 다리는 하얗고 등은 황갈색으로 천적인 이리와 호랑이가 있지만 그 숫자는 많지 않단다. 어느덧 구릉 정상에 오색 깃발인 타르쵸가 돌무더기에서 펄럭인다. 안내하는 파상이 “파솔로 라솔로 이양”이라며 기도한다. 이곳을 지나는 이에게 안전하게 여행하라는 주문이다. 거친 협곡을 따라 내려가는데 야생 당나귀 한 마리를 보고 “왜 한 마리냐”고 가이드에 물으니 이혼 당한 당나귀라 한다. 웃는 그 시간이 무료함과 지친 몸을 달래어 준다.
어두운 밤길을 뚫고 늦은 시각 11시에 룽마에 도착하여 저녁식사를 새벽 1시 30분에 끝낸 힘든 하루였다. 젊은 부부는 작년에 현지 가이드로 수고한 적이 있는 쌍파인 유목민으로 우리들을 반갑게 맞아준다.
네 다섯 채의 마을 뒤편에 붉은 산이 겹겹이 있고 앞은 이브챠카 호수가 있다.
현지 가이드 2명을 포함해 9명으로 하루 종일 길 없는 길을 다시 북진해 마야 설산을 거쳐 오후 7시경 모든 기기가 정지된다는 장소의 초입, 서우캉르(色烏崗日·6100m)를 20㎞ 정도 앞두고 늪지대의 장벽을 넘지 못한다.
내년을 기약하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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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써린쵸의 황홀한 석양 모습. |
사향지로(麝香之路)와 암각화
아쉬운 후퇴지만 내년에는 야크에 짐을 싣고 도보로 수십㎞를 가야한다는 정보만 수집하고 되돌아선다.
실망스럽지만 철수하여 말커차이카 호수에 도착했다. 작년에는 눈이 쌓여 유목민이 사는 집 앞까지 수위가 높았는데 거의 삼분의 일이 줄어들었단다.
68세의 할아버지와 부인 및 자녀들 8명이 단란하게 살고 있는데 어린 손자 3명은 짐승가죽 강보에 싸여 있다. 할아버지는 손자들을 돌보는 낙으로 웃음이 얼굴에 가득하다. 꽤 밤 날씨가 차갑다. 물통 2개를 들고 호수 가장자리에서 물을 떠서 힘겹게 운반하여 대야에 넉넉히 부어 세수를 하는데 눈이 따갑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짠물이었다. 젊은 아낙이 소리 없이 웃는다.
물이 귀한 곳으로 한 컵 정도로 양치질하고 수건에 약간 적셔 얼굴을 닦아야 한다.
일과를 마치고 잠들다가 소변을 보기 위해 새벽 4시에 바깥으로 나오니 조각달이 호수에 비쳐 그 잔영과 함께 고요한 사방의 적막함은 진공 속의 그림 같아 보였다.
이곳은 지구상에서 몇 남지 않은 최후의 한가한 무위의 땅으로 어떤 옳음도 또 어떤 그름도 존재하지 않은 신의 들숨과 날숨을 느낄 수 있는 속박 없는 땅이라는 느낌뿐이다.
다음날 준비해간 고무보트를 띄우고 박철암 대장님은 라이프 재킷을 착용하고 중심부로 진입하여 수심 측정과 그물을 설치하였으나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과 매서운 강추위로 오랜 시간 탐사를 할 수 없었다. 소금물이 손에 닿으니 피부가 강한 독성분 때문에 거칠어지는 현상을 일으킨다.
측정 결과 수심은 10~15m, 수초가 없어 플랑크톤이 살지 않았다. 염도 측정을 위해 물을 한 병 담는다. 오후에 다시 북진하다가 깡탕쵸의 호수를 바라보며 점심식사 후 다시 룽마로 가는데 남남죠모의 만년설 아래 야생 조랑말 20여 마리가 나타났다. 서로 경주하듯 낙원의 생태를 간직한 매혹적인 광경들이다.
오후 4시 룽마에 도착하여 곧바로 4㎞ 떨어진 쟈린산의 암각화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자갈이 깔려있는 고원을 지나 산자락 밑에서 안내원을 따라 산등성이를 오르니 바위들과 돌을 산에 깔아 놓은 듯한 석산이다. 바위는 암갈색으로 철분이 많이 함유된 듯하고 돌들이 쇠처럼 단단하였다.
10여 군데 50여m 반경 안에 암각화들이 산재해 있었는데 1~2m 크기의 암갈색 석질에 야크, 영양 그리고 태양과 달, 북극성 등 알 수 없는 형상들이 있다.
약 1만년 전의 암각화로 이런 고원의 오지에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 존재할 수 있는가.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히말라야산맥을 중심으로 2003년 7월에 탐방한 파키스탄의 훈자와 인도 라다크 지방에도 이와 비슷한 암각화가 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조사에 따르면 중앙아시아 전 지역에 걸쳐 발견되고 있는 원시미술, 즉 동굴벽화나 암각화의 유사성을 들고 있다. 북으로 알타이 지방에서 남으로 인도 서북부 카슈미르에 퍼져 있는 원시미술이 보존된 현장들은 알타이, 호투비, 호탄, 쌍호, 루톡, 라다크, 카슈미르 암각화 등 기법과 내용에서 수렵문화의 특징을 보여준다.
이러한 수렵화들은 자생적으로 그려진 것으로 학계에서 해석하였으나 초원을 따라 이동이 가능한 수렵문화의 특성과 유적지의 분포도에 따라 이동설로 기울어지고 있다.
시간적, 공간적으로 떨어진 여러 곳에서 유사한 문화활동이 전개된 것은 실크로드처럼 로마 귀족들의 최음제로 인기품목이었던 사향(사슴의 생식기)의 무역로로 통했던 티베트 창탕고원에서 인도 서북부의 카슈미르로 연결되는 고대의 대상로인 사향지로(麝香之路)가 암각화와 수렵문화의 이동설인 학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나는 암각화 표식 도상을 그리고 촬영 후 준비해간 화선지로 탁본을 시도해 보았으나 암석표면의 요철이 없어 끝내 탁본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6시 10분 하산했다.
다시 7㎞ 떨어진 노천온천으로 향했다.
깊은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니 큰 물줄기의 하천에서 맑은 담수가 거세게 흐른다. 그 위 골짜기에 10m 높이의 진흙 기둥들이 죽순처럼 솟아있고 그 석순에서 김이 나면서 물이 흐르고 있었다.
해발 4600m에 150평 규모의 노천에 30℃ 정도의 뜨거운 온천수가 김을 모락모락 피우고 있었다. 대원들은 감탄을 하면서 머리를 감고 세면을 즐겼다. 괴이한 형상들의 석주에는 이빨화석들이 용암 사이에 배열되어 있다 하였으나 그것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오후 8시에 하산하고 다음날 밤새 흰눈으로 덮어버린 쟈린산과 봉분이 10여 개인 겔링 설산을 뒤로하고 우루쵸(屋肉措)로 가는데 순식간에 휘몰아치는 거친 눈발에 온 대지가 순백색으로 변하는 기상 현상에 몸을 움츠리고 잠시 유목민의 집안으로 들어가 눈발을 피했다.
집안에는 어린 손자 4명을 할머니가 감싸 안고 해발 5100m의 추위를 달래고 있었다. 또 가다보니 덩치 큰 검은 야생 야크가 언덕 위에서 움츠리고 있다.
다시 해발 5400m의 고원을 몇 번 넘어 최북단의 껄무상이라는 지역에 도착했다. 칠흑 같은 어둠에서 불빛을 겨우 찾아 어느 유목민 집의 문을 두드려 하룻밤 신세를 졌다.
잔잔한 미소의 중년부인 그리고 3형제의 남편, 알고 보니 일처다부제의 가족관계이다.
그들의 편안한 배려와 관심은 늘 그렇듯이 자상하고 온화한 미소와 차분한 수발로 이어져 지친 나그네의 피곤함을 감싸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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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베트 라사 |
7000㎞ 대장정 마치고 카트만두 도착
다음날 새벽, 집 앞 호수 륨쟈의 한 모퉁이로부터 떠오르는 새벽빛. 덩치 큰 까마귀의 날갯짓이 생기가 넘친다. 대원들은 태양의 신선한 기운을 느끼며 다시 북진한다. 고원 어느 지점에서 당나귀 시체 2구를 만난다.
흔연히 대자연으로 품으로 회귀한 동물들, 장엄한 자연의 품에서 아름다운 순례를 마치고 떠난 사체가 혐오스럽지 않고 자연스럽다는 생각뿐이다.
오후 3시에 차부샹에 도착하여 유목민들의 자녀들이 공부하는 학교를 견학하고 박철암 대장님이 준비하신 배드민턴 라켓 한 꾸러미를 선물하니 젊은 교장선생님은 양고기 한 마리로 푸짐하게 점심식사를 대접한다. 기념 촬영과 한국에서 가져간 태극기에 서로 사인을 하고 아쉬운 작별을 한다.
그리고 한참을 가다보니 대평원 절반이 먹빛으로 뒤덮인 어두운 그 사이에 오색 무지개가 뜨는 광경은 절로 감탄사가 나오는 희귀한 장면이었다.
아리(阿里)고원인 꽤 큰 도시 가이처(改則)에 밤 10시에 도착했다. 차량 1대가 고장나 지원대원 2명이 퇴각하고 이틀을 여기서 더 머물게 된다.
차량을 수리하여 라사로 다시 돌아가는데 약 15여 일 걸린다고 한다. 아쉬운 작별에 서로 부둥켜안고 그간의 고락에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다시 고원을 지나 사막으로 변해 가는 아리고원을 넘어 마미샹을 거쳐 460㎞를 전진하다보니 그간 보지 못했던 오리 떼가 많이 앉아있는 담수호와 늘씬한 고니도 만난다.
해발 5420m의 고분 같은 산등성이를 넘고 몰아치는 강풍과 잔설 사이에 노란 이끼 같은 흰 꽃이 핀다는 아레니리아라는 식물을 촬영하고 전진하다가 순례단 30여 명을 만난다. 오로지 내세의 행복을 기원해 오체투지로 순례하며 신산(神山)으로 불리는 카일라스( 6714m) 산으로 향하는 티베트 인들의 얼굴에는 불행의 그늘이라고는 발견할 수 없는 무욕의 땅에 순백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다음은 5400m의 고원을 넘어 어두운 밤 호루에 도착한다. 내유주숙(內有住宿)이라는 허름한 간판을 보고 들어가 그곳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다음날 나무나니봉(7694m)의 아침햇살에 반영된 분홍색 설산에 매료되어 스케치를 하고 카일라스의 남면과 타르첸에서 성산의 위엄과 숭고미를 만끽하면서 정면에 보이는 나무나니봉의 만년설에 흠뻑 취해 스케치를 2점이나 하고 만두로 점심식사를 한다.
카일라스 성산에 오래 머물지 못함과 악조건으로 목표했던 여러 가지를 이루지 못해 못내 아쉬워하면서 오늘 하루 파양까지 360㎞를 달려 어둠 속에서 불빛을 보고 규모가 큰 시골 마을임에 안도한다.
초대소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29일 협곡을 따라 분지로 흘러가는 하천을 통과하여 중파(仲巴)에서 중식을 해결하고 사막화되어 가는 풍경 속에서의 질주는 그간에 시달린 타이어 바퀴 하나가 완전히 찢어져 교체하느라 1시간 이상 머물다가 오후 6시에 260㎞를 달려 현청 소재지인 사카에 도착했다.
상가신축이나 도로공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이곳은 교통요충지로 꽤나 큰 도시이다.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도강해야할 바지선의 늦은 수리와 조립으로 오후 3시에 장푸강을 건너고 중니공로(中尼公路)의 광활한 대지와 협곡을 타고 장엄한 히말라야 산맥을 바라보면서 네팔과의 국경지대인 니나무현에 도착한다.
니나무현은 인구 5000여 명의 대도시로 이곳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다음날 국경선인 장무를 통과할 준비와 그간의 탈 없는 여정을 정리했다.
네팔 코다리를 거쳐 칼리조 마을의 북적대는 인파를 헤치고 카트만두에 도착하여 지친 몸을 풀었으나 긴장이 풀리면서 감기 몸살로 꽤 힘이 들었다.
이번 탐험은 특별한 경험과 예측할 수 없는 계획에서 자연에 대한 과신은 절대 금물이라는 경각심을 일깨워준 시간이었다. 약 7000㎞에 달하는 대장정은 고산병으로 얼굴이 붓고 20여 일을 씻지 못해 힘든 부분이 있었지만 화가로서 특별한 외출이 아니었나 싶다.
그 미지의 땅에서는 이분법적 사고나 탐욕이 필요치 않은 지구상의 마지막 낙원으로, 이상향 즉 샹그릴라에서 본 신비의 노래와 순백의 사람들이 나의 뇌리에 머물며 헝클어진 실타래 같은 이율배반의 계산에 젖어있는 나를 자꾸만 부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