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을 부인하고 마5;38-42
43-44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며,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주금도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의중은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자아는 전적으로 제거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자아의 이익, 자기 방어적인 태도, 모욕, 공격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전 4;3절에 자신에게 매우 불괘한 소리을 듣습니다.
아볼로는 설교을 잘하는데 ,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인데.. 바울은 누구냐? 아주 모욕하고, 비판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때 바울은 “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즉 바울은 자기의 판단의 문제을 하나님께 일임했습니다.
조지 뮬러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 언제가는 제가 죽은날이 그의 의견,그가 좋아하는것들과 취미 및 자기 의지에 대해서 죽는날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세상의 친구들의 비난에 죽을수 있었고, 그들의 비난에 대하여 죽을수 있었다.
즉 우리는 우리자신에 대하여 자아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한가지 관심은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된 기독교인만이 할수 있는 것입니다.
자연인은 자기의 명예와 이름을 위해 싸우는 사람입니다.
이런 관념에서 항상 자기 방어를 합니다.
항상 공격적 이고, 자기 주장, 자기명예를 변호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을 찬양 합니다.
중생의 교리는 [거듭남] 에 대하여 ... “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사신 것이라” 말할수 있는 사람은 오직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 밖에 없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 만이 가능합니다.
나는 어떻게 해야 그와 같이 살수 있을까?
1. 우리는 우리 자아의 문제를 정직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즉 내가 이 방어적 심리작용을 느끼는 순간 조용히 나를 대면하면...
“ 어째서 이것이 나를 뒤흔들어 놓은가?
어째서 나는 이것으로 가슴 아파 하는가?
이것이 바로 더럽고 무서운 자기 관심이면
“나는 이 병적 상태에 빠진 것이 아닐까?
이것은 우리의 체험을 통해 모두 말고 있습니다.
이것은 극히 고통스러운 것 이지만 주님의 가르신 수준에 도달하려고 한다면 이런 과정은 통과 해야 한다.
이것이 자기부정이다.
자기 이익과 자기 관심을 개입되는 범위를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요, 무서운 발견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까?
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까?
우리는 우리 생활과 비참과 불행과 실패와 많은 문제 거리가 오직 한가지 , 곧 자아 때문이라는을 인식하고 있는지 ...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면 , 불행 , 긴장, 짜증, 못된 성깔과 우리을 부끄럽게 여기는 말과 행동, 불안하게 균형을 잡지 목하는 마음의 원인?
자아는 생활의 모든 불행의 주된 원인입니다.
자아 *자기(自己) 자신(自身)에 대한 의식(意識)이나 관념
성경은 인류의 타락은 그 책임은 자아 에 있습니다.
마귀는 자아의 관점에서 죄을 짓게 했습니다.
“ 하나님은 너에게 공평하지 않다. 그리고 사람은 이 말에 동의 합니다. 이것이 타락의 원인 입니다.
모든 문제는 바로 자아, 자기 주장 때문입니다.
자아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도전을 의미 합니다.
자아는 하나님 대신 나를 보좌위에 올려 놓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러므로 나를 하나님과 분리 시키는 것은 항상 자아입니다.
생활의 불행한 순간은 궁극적 으로 이 분리 때문에 일어납니다.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가진 사람은 행복 합니다.
땅속에 있든지 .
발이 착고에 매여 있든지 .
또는 화형을 당하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한 그는 그대로 행복합니다.
성경은 사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주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사람 전체는 하나님을 영화 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아을 영화롭게 하거나 자기이익을 보호하려는 욕망은 필연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영광을 구하는 대신 나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죄하시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어째서 오십니까?
이는 궁극적으로 인류을 자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벌고 말구유로 오심을 보십시오?
주님은 자기을 전혀 고려 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진술의 본질을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과 동등” 이셨지만 주님은 자신을 전혀 고려 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자기을 낯추고 자기을 부인 하셨습니다.
“ 나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요 , 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 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의 극치는 십자가의 죽음심을 통해 보는 것입니다.
사도의 논법[ 말이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방법]은 .. 빌립보서 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벧전2;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신약은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을 “ 새백성, 새인간성, 새 창조가 형태를 이루고 , 자기와 같은 백성으로 구성된 새나라를 세우기 원했습니다. 이에 주님은 모범 이십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즉 “ 우리는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그의 만드신바”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자기 방어 나 자기 민감성의 생활이 아니라 ,
비록 우리가 모욕을 당하더라도 보복하지 않는 생활을 살기 위함입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태도을 말하는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인은 각자 자신의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해악을 받았을 때 즉시 자기 방어와 보복하려는 마음을 가진다.
이는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자기을 자랑하고 , 영화롭게 하며, 자신을 신으로 올려 세우려는 무서운 유산을 가지고 있다.
나의 모든 관심사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경배 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삶을 살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 하셨고 그 약속대로 우리 속에 거하시며 우리의 소망이 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