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고백 하나있다.
"나는 텔레비전 중독자다."
어느 정도이기에 스스럼없이 '중독자'라는 표현을 썼을까? 아마, 의아해하는 분 있을 것이다. 잠깐 설명하면 이렇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자마자 텔레비전을 켠다. 꼭 봐야 하거나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어서가 아니다. 오줌보가 차면 화장실에 가듯이 그냥 집에 들어서면 가방을 던져놓고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텔레비전 켜기다. 신문을 볼 때도 책을 볼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외출을 위해 화장을 할 때도 텔레비전 전원은 언제나 켜져 있다. 잠을 자기 전까지 보는 것도 텔레비전이다. 이 정도면 과히 중증, 아니 고도 중독에 해당될지 모르겠다.
물론. 고치려고 노력한다. 꼭 보고 싶은 프로그램만 골라서 보자, 신문이나 책을 볼 때는 끄자, 텔레비전 보는 것이 주 일이 아니라면 켜 두지 말자 등등 나름 방법을 생각하고 행동도 하지만 대개는 실패한다. 중독되었으니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혹자는 그럴 것이다. "텔레비전을 없애 버려!" 이 생각을 안 해봤을까? 하지만 필자에게는 살림을 용도 폐기할 권리가 없다.
가을을 맞아 다시 한 번 TV 시청 줄이기에 도전하려고 한다. 가을과 어울리는 단어 '독서'를 통해서다. 이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지난 달 열린 성수노동자건강센터와 서울동부비정규노동센터의 8월 특강 '우리는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를 들으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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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독서습관 소개하는 수강생. 8월 17일 열린 특강은 수강생들 소개와 각자의 독서습관을 이야기하면서 시작되었다. |
ⓒ 이현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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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는 세계를 보는 방법
강사는 박민영씨. 한겨레 문화센터의 '인문학적 사고와 글쓰기' 인기 강사이면서 <즐거움의 가치사전> <이즘 : 인간이 남긴 모든 생각> <논어는 진보다> 등 다수의 책을 집필한 분이다. 강의는 수강생 소개와 각자의 요즘 읽는 책을 소개하면서 자연스럽게 독서습관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필자는 당시 업무에 필요한 몇 건의 서류 외에는 읽고 있는 책이 없었다.
박민영씨는 "세계는 책으로 이루어졌다"며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언뜻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이 말을 그의 강의에서 요약하면 이렇다.
"인간의 경험은 정보를 주기도 하지만 책을 읽지 않으면 경험의 한계에 부딪힌다. 책은 저자의 정신을 통째로 그것도 체계적으로 담아낸다. 작가의 정신세계로 직접 들어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책이고 작가정신이 독자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것도 책이다. 세계가 이미 지적인 영역을 통해 인식되고 그 지적인 패러다임이 현실 힘을 발휘한다. 독서를 통해 세계는 나에 의해 적극적으로 해석된다."
왠지 책을 읽지 않으면 어젯밤 텔레비전을 못 봐 TV 이야기꽃을 피우는 수다에 끼어들 수 없듯이 내가 발붙이고 사는 세계와 동떨어질 것만 같다. 박민영씨는 책을 읽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한 몇 가지 조언도 덧붙였는데 여기 소개한다.
1. 전자매체와 접촉하는 시간을 통제하라
전자매체는 책을 읽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책은 정보 습득을 위한 여러 매체 중 하나로 인식될 뿐이다. 인터넷에 올라있는 글들은 글쓴이의 총체적인 정신세계보다는 단편 정보를 전달한다. 하지만 저자가 적어도 6개월에서 수십 년 동안 걸려 쓴 책에는 저자의 총체적인 정신 세계가 담겨있다.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의 뇌파는 흐려지고, 사고력은 평소의 절반으로 줄어든다. 반면 독서는 읽는 이의 사유능력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2. 독서하기 좋은 환경으로 방을 꾸며라
돈을 들여 고급스럽게 서재를 꾸미라는 말이 아니다. 독서에 방해되는 것들을 치우라는 것이다. 방은 정서적 공간이자 문화적 표현이다. "무슨 책이든 좋다고 생각되면 사라. 사서 방에 쌓아두면 독서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외면이긴 하지만 이것이 중요하다.(A. 베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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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다가오는 가을을 맞아 열린 성수노동자건강센터와 서울동부비정규노동센터의 8월 특강은 텔레비전 중독자에게 유용했다. |
ⓒ 이현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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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 달에 일정액을 정해 책을 구입하라
가계 지출에서 식비가 차지하는 비율을 엥겔계수라고 한다. 정신적 주식은 뭐니 뭐니 해도 '책'이다. 가계 지출에서 책값이 차지하는 비율이 '지적 엥겔계수'. 당신의 지적 엥겔계수는 얼마인가? 몸을 즐겁게 하기 위해 한 달에 수십 만 원씩 쓰면서도 정신을 고양하기 위해 쓰는 책값은 몇 만원도 아까워하지는 않는가? 한꺼번에 전집 한 질을 들여놓기보다는 매달 조금씩 사라. 한 달에 한 권씩만 읽어도 당신은 우리나라에서 중급 독서자이다.
4. 책과 호흡하는 문화생활
프랑스 대혁명 책을 읽고 관련 다큐멘터리를 본다거나, 다큐멘터리를 본 다음 관련 책을 읽어보자. 책과 다른 장르의 예술작품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문학은 물론 드라마 영화도 모두 글에서 파생된 장르이다.
5. 나의 문제와 연관된 독서를 하라
개인 문제에 '진지하고 투철한' 관심이 인간과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된다. 자신의 내적 요구에 기초한 책 읽기는 책을 왕성하게 보도록 한다. 자신의 문제가 곧 사회문제임을 알 때, 즉 나와 세계의 경계가 허물어질 때 '지적 폭발'이 일어난다. 자기 삶의 문제를 독서로 해결하려고 노력하자.
6. 자신만의 도서목록을 작성하라
독서 방향이 잡히고 게으르지도 않게 된다. 목록에 있는 책을 다 읽지 못해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한 달간의 독서계획, 일 년의 독서계획을 갖는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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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상 한켠위에 있는 책과 서류들. 영어공부, 교양, 업무에 필요한 책과 서류가 책상 한켠위에 쌓였지만 업무와 관련없는 것은 늘 뒷전으로 밀린다. |
ⓒ 이현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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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 책 50권 있다면 '지성인'
한편 박민영씨는 "많이 읽는다고 지성인은 아니"라고 지적하면서 "책을 깊게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멘토가 되는 책을 정독·정리·재독하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멘토 책이 50권만 되어도 지성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수강생 각자가 멘토 책 50권을 만들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라고 전달했다. 그리고 책을 '고르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면 베스트셀러보다는 스테디셀러를 선택하고 쉬운 책에서 어려운 책으로 넘어가보라고 조언했다. "독서가 늘려면 약간 힘에 부쳐야 한다"는 말이 이어졌다.
책을 읽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일상에 쫓겨 사는 필자 같은 범인에게는 그닥 쉬운 일에 속하지도 않는다. 강사 지적처럼 책보다 쉽게 잡히는 텔레비전 인터넷 눈요기 잡지 그리고 술자리 유혹이 지천이다. 야근 잦았던 한 주, 술자리 많은 한 주였다면 잠으로 주말을 보내기 일쑤다. 하지만, "공부하는 데 시간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시간이 있어도 공부하지 않는다"는 회남자(淮南子)*의 지적을 피해갈 수 없다.
*회남자(淮南子) : 중국의 고전. BC 2세기에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그의 빈객(賓客)들과 함께 지었다. 형이상학·우주론·국가정치·행위규범 등의 내용을 다루었다. 이 책의 우주론 내용은 도가에서만이 아니라 후대의 유학자들도 정설로 채택했다.(네이트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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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에 읽을 책 3권. 과연 나는 책 읽기와 TV 시청 줄이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
ⓒ 이현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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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는 벗처럼 TV는 독처럼
책 읽기로 텔레비전 시청을 줄여보겠다는, 일타 쌍피의 전략은 현재 실행 중이다. 9월의 책으로 박민영씨 추천 시집 <바늘구멍 속의 폭풍>(김기택, 문학과지성사)과 <글쓰기의 전략>(정희모·이재성, 들녘)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임승수, 시대의창)을 샀다. 시집 외 두 권은 내적 요구로 구입한 책들이다. 9월 중순을 향해가는 지금, 책 읽는 속도는 더디고 텔레비전 보는 시간은 크게 줄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구립 도서관 열람실 이용이다. 최근 두어 번 시도했는데 효과가 좋다. 다행히 구립 도서관이 직장과 집에서 멀지 않고 밤 열시까지 개방하니 평일 늦은 저녁이든 주말이든 이용이 가능하다. 회원증을 만들면 무료로 책을 빌려볼 수 있는 이점도 있다.
기상이변이니 온난화니 해서 계절이 예전 같지 않다지만 아직까지 가을은 책 읽기에 분명 좋은 시기인 것 같다. 가을이 지나고 12월이 되면 책 읽기는 벗처럼 가까이 하고 텔레비전은 독처럼 멀리하는 '나'를 그려본다.
덧붙이는 글 : 텔레비전을 아예 '끊겠다'는 결심보다 '줄이기'로 마음먹은 것은 가끔은 꼭 봐야할 프로그램도 있기 때문이다. 독이 상황에 따라 유용하게 쓰이는 것처럼 TV도 '골라보는' 안목만 있다면 완전 바보상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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