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틴 루터 킹 -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20만 명이 넘는 흑인과 백인들이 경청하러 왔다. 그들은 비행기로, 자동차로, 버스로, 기차로 그리고 걸어서 왔다. 그들은 흑인의 평등한 권리를 요구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기념관의 계단에서 들은 꿈은 한 세대의 꿈이 되었다.
지금이야말로 바로 민주주의의 약속을 현실로 실현할 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바로 어둡고 쓸쓸한 인종 차별의 골짜기로부터 분기하여 인종적 정의의 햇볕 길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흑인에게 시민권이 주어지기 전까지 미국에는 안식도 평온도 없을 것입니다. 정의의 밝은 날이 오기까지 반란의 회오리바람이 계속 우리 국가의 기반을 뒤흔들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정의의 궁전으로 들어가는 문턱에 서 있는 여러분에게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정당한 지위를 얻는 과정에서 우리가 부당한 행위를 해서는 안 됩니다. 흑인 사회를 집어 삼켜버린 놀라운 새 투지가 모든 백인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오늘 그들이 이 자리에 참석한 사실이 입증하듯, 우리의 많은 백인 형제들은 그들의 자유가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자유에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난 속의 영예는 보상 받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계속 일합시다. 미시시피 주로, 앨라배마 주로, 루이지애나 주로 그리고 우리 북부 여러 도시의 빈민가와 게토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변화될 수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변화될 것임을 아십시오.
나는 오늘 나의 여러 친구들에게 말하노니, 나는 어려움과 좌절의 순간이 있었지만 아직도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메리칸 드림에 깊이 뿌리 박은 꿈입니다.
나는 언젠가는 이 나라 국민들이 분기하여 “우리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음을 자명한 진리로 삼는다”는 이 나라 국민 신조의 참 뜻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는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옛 노예의 자손들이 옛 노예 소유주의 자손들과 함께 형제애의 테이블에 앉을 수 있게 되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4명의 자녀들이 언젠가는 그들의 피부색으로 판단 되지 않고 그들의 인품에 의해 판단 되는 나라에서 살게 되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위대한 나라가 되려면, 이 꿈이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유가 뉴햄프셔주의 거대한 언덕 위로부터 울리게 합시다. 자유가 뉴욕주의 강대한 산들로부터 울리게 합시다. 자유가 펜실베이니아주의 앨리게니 산맥으로부터 울리게 합시다!
자유가 콜로라도 주의 눈 덮인 로키 산맥으로부터 울리게 합시다!
자유가 캘리포니아 주의 굽이진 능선으로부터 울리게 합시다!
그뿐만 아니라 자유가 조지아 주의 스톤 마운틴에서도 울리게 합시다.
자유가 미시시피 주의 모든 언덕과 둔덕으로부터도 울리게 합시다. 자유가 모든 산허리로부터 울리게 합시다.
우리가 자유가 울리게 할 때, 모든 크고 작은 마을에서, 모든 주와 모든 도시에서 자유가 울리게 할 것이며, 하나님의 모든 자손들인 흑인과 백인, 유태인과 이방들, 신교도와 구교도가 손에 손을 잡고 옛 흑인영가 “마침내 해방되었도다! 마침내 해방되었도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우리는 마침내 해방되었도다!”를 노래 부를 수 있게 될 날을 앞당길 수 있을 것입니다.
[The world socialist 9] 마틴 루터 킹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일어나 ‘우리는 만인이 평등하게 창조되었음을 확신한다’는 믿음의 참된 뜻대로 살아가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노예의 아들들과 주인의 아들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앉아있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부정과 억압의 열기에 허덕이는 황폐한 땅인 미시시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로 변화되리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나의 네 아이들이 피부색깔이 아니라 그들의 개성으로 평가받는 나라에 살 것이라는 꿈입니다. 오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모든 계곡에 기쁨이 넘쳐나고, 모든 언덕과 산이 낮아지고, 황무지가 옥토가 되고, 굽은 길이 펴지고,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이것을 목도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1963년 8월 워싱턴에서 흑인해방을 바라는 수십만 군중 앞에서 마틴 루터 (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킹목사가 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제목의 유명한 연설 한 대목이다. 1968년 미국에서 반전운동이 확산되는 시점에 로레인 모텔에서 암살당한 킹 목사는 우리에게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가 정도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보다 개선된 부의 분배가 필요하고 미국은 민주적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자칭 “민주적 사회주의자”였다.
인종차별ㆍ불평등에 눈떠
킹은 1929년 1월 15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시에서 에버니저 침례교회 소속의 목사 마틴 루터 킹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교회에서 자라났으며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증조할아버지도, 형도, 작은아버지도 목사였다.
킹이 태어난 1920년대말은 대공황이 시작될 무렵. 어린 시절 빵을 구하기 위해 줄지어선 사람들을 자주 보아온 그는 나중에 “내가 성년이 돼서 자본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된 것은 이런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일 것”이라고 회상했다.
킹의 아버지 마틴 루터 킹 1세는 유색인종을 위한 전국협회(NAACP) 애틀랜타 지부장으로 활동하며 인종차별에 맞서 투쟁해온 목사였다. 킹이 어린 시절 애틀랜타에서는 흑백분리 제도가 엄격히 유지되고 있었다. 흑인들은 수영장을 이용할 수도 없었고 공원에서 놀 수도 없었고 백인학생들과 다른 고등학교를 다녀야 했다.
도심 번화가의 상점에서 흑인들은 커피 한 잔도 사먹지 못했다. 흑인들은 흑인전용극장에서 철지난 영화나 겨우 볼 수 있었다. 킹은 열네살 때 ‘흑인과 헌법’이라는 주제로 웅변대회에 참가해 입상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백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버스운전사의 욕설을 들었다. 이날의 모욕은 킹의 기억에 깊이 남아있었다.
그는 흑백분리제도뿐 아니라 그와 관련된 억압적이고 야만적인 법령들을 혐오하면서 자랐다. 백인우월주의 단체인 KKK(Ku Klux Klan)단의 폭력을 직접 목격하며 자라난 그는 이런 경험들이 자신의 자아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회고했다.
1944년 모어하우스 대학에 입학한 이후 킹은 인종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시민불복종>을 읽으며 비폭력 저항주의를 처음으로 접한 킹은 4학년때 아버지가 담임목사로 있는 에버니저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사회학 학사 학위를 받은 후 신학공부를 위해 펜실베니아주 체스터에 있는 크로저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신학교에서 사회철학자의 책을 읽으면서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는 빈민가와 인간의 영혼을 억압하는 경제적인 조건, 인간의 영혼을 짓누르는 사회적인 조건에는 무관심한 채 인간의 영적인 구원에만 관심을 갖는 종교는 사멸하게 된다”는 확신을 얻게 됐다.
1949년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은 킹은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인 해석방법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전형적인 약점들을 지적하고 대중의 자의식 성장에 기여했으며, 기독교 조직의 도의심에 자극을 주었다는 점”에 동의를 표시했다.
그는 마르크스 저작을 통해 “빈부격차에 대한 인식이 더욱 깊어졌다”고 인정하고 “현대 미국 자본주의는 사회개혁을 통해서 빈부격차를 상당히 감소시켰지만 부를 보다 효율적으로 분배할 필요성은 여전히 남았다”고 주장했다.
1951년 보스턴 대학 신학과에 입학한 킹은 성악가 코레타 스콧을 만나 1953년 결혼하게 된다. 킹은 1954년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덱스터 애버뉴 침례교회에서 처음으로 목회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목회활동에만 머무르지 않고 교회신도 전원에게 선거권 등록과 NAACP 회원가입을 권유하는 한편 교회 내에 ‘정치사회활동위원회’를 조직했다.
1955년 12월1일 미국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
몽고메리 페어의 창고에서 근무하는 재봉사
로자 파크스 부인은 클리블런드가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42세의 그녀는 하루종일 이리저리 오가느라 피곤했다.
파크스 부인은 앞쪽 백인 좌석 바로 뒤
첫번째 열에 앉았다.
그녀가 앉자마자 버스 기사는
“방금 올라탄 백인 손님들이 앉아야 하니
흑인들이 앉는 뒤쪽으로 옮겨 앉으라”고 말했다.
그러나 뒤쪽에는 빈 자리가 없었다.
기사의 말을 따르면 그녀는 서서 가야 하고 늦게 탄 백인은 자리에 앉아 가게 된다.
파크스 부인과 함께 버스에 오른 흑인들은 운전기사의 말에 따랐지만
그녀는 조용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버스 기사는 경찰을 불렀고 그녀는 체포됐다.
흑인과 여성운동가들은 버스 안 타기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덱스터 침례교회를 빌려 집회를 열기로 했다.
그 교회의 담임목사인 마틴 루터 킹은 그때까지 파크스 부인 사건을 알지 못했다.
당시 26세였던 킹목사는 그 해 보스턴대학교에서 갓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몽고메리로 부임한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젊은이었다.
몇주전 킹목사는 목회에 전념하기 위해
‘유색인들의 복지증진을 위한 전국협의회’의장직을 거절한 참이었다.
4일 뒤 집회가 열리는 날 킹목사는 준비회의에 조금 늦게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그에게 “당신을 의장으로 뽑았소”라고 인사했다.
흑인들이 저항한다는 사실에 백인들이 분노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의장은 그 증오의 창끝에 서는 일이었다.
킹목사는 천천히 대답했다.
“누군가 해야하는 일이라면”
그는 불과 20분 뒤 교회에 모인 5000명의 군중과 기자들 앞에서 연설을 해야 했다.
아무런 메모도 없이 연단에 오른 킹목사는
“우리는 억압당하고 짓밟히는 데 지쳤다”고 입을 열었다.
청중은 갈채를 보냈다.
텔레비전 카메라의 불빛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킹목사는 백인들의 폭력적 인종차별단체인
큐 클럭스 클랜(Ku Klux Klan·KKK단)의 행태와 시의회의 잔혹함을 언급하면서
흑인들은 평화적 방법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탕으로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버스 안 타기' 거부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집에 돌아온 킹목사에게 조롱과 협박의 전화가 줄을 이었다.
그에게는 2년전 결혼한 아내와 태어난 지 몇 주 되지 않은 딸이 있었다.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책상 앞에 엎드렸다.
“주님,저는 의로운 일을 위해 투쟁한다고 믿습니다.
제가 이렇게 무력하게 용기를 잃고 그들 앞에 서면 그들도 흔들릴 것입니다.
저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습니다”
그 순간 킹목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
이 때 “정의와 진리를 위해 일어서라. 내가 항상 네 곁에 있겠다”는
내적인 음성을 들었다고 그는 훗날 회상했다.
한달 뒤인 1956년 1월3일 밤 9시30분쯤이었다.
킹목사의 집 베란다에서 찢어지는 폭발음이 들렸다.
킹 목사 가족은 급히 다른 방으로 옮겨갔다.
그 때 또 한번 폭발음이 집을 뒤흔들었다.
유리조각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연기가 났다.
밖에서 연설중이던 킹목사는 즉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접근을 막는 경찰과 마찰을 일으키고 있었다.
모두 흥분한 상태였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이 늘어났다.
폭탄 폭발로 부서진 베란다에 오른 킹목사는 손을 들었다.
군중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는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제 아내와 아이는 무사합니다. 제발 무기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복수를 통해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백인 형제들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든 우리는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증오를 사랑으로 이겨야 합니다…
내가 이 투쟁을 계속할 수 없을 때라도 하나님이 당신들과 함께 하는 한
이 운동은 계속 될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확신을 갖고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사람들은 흩어졌다.
군중 가운데서 한 경관은
“흑인 목사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지금 모두 시체가 됐을 것”이라고 중얼거렸다.
킹목사가 흥분한 군중을 진정시킨 일은 다음날 신문에 보도됐다.
사람들은 그를 흑인들의 위대한 지도자로 보기 시작했다.
그해 12월20일 연방법원은 버스 안에서의 인종차별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몽고메리의 흑인들이 버스를 타지 않은지 382일만의 일이었다.
킹목사를 비롯한 흑인 목사들은
그날 아침 일찍부터 하루종일 버스에 올라타고 다녔다.
운전기사에게 “당신의 버스를 타게 돼 기쁩니다”고 인사하고
앞자리에 앉아 승객들에게도 미소를 지었다.
흑인에게나,백인에게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1929년 1월15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외할아버지는 모두 침례교 전도사였다.
15세에 애틀랜타 모어하우스 대학에 입학한 그는 의학과 법학에 관심을 가졌지만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졸업후 신학교에 진학한다.
크로저신학교에서 그는 간디의 비폭력 철학과
현대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의 사상을 접한다.
신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보스턴대학교에서
파울 틸리히와 헨리 넬슨 위먼에 대한 논문을 섰다.
보스턴에서 그는 뉴잉글랜드 음악학교의 코레타 스콧을 만나 1953년 결혼하고
박사학위를 마친 해 코레타의 고향인 몽고메리로 부임한다.
몽고메리 흑인들의 비폭력 운동이 성공을 거두자
남부 도시 곳곳에서 비슷한 운동들이 일어났다.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즈버러에서는 흑인 학생들이
백인들만 들어가는 식당에 들어가 연좌농성을 벌였다.
흑인과 백인이 함께 버스를 타고 남부지방을 순회하는‘자유의 여행’도 시작됐다.
남부 기독교지도자협의회에서는 흑인들의 투표권을 요구했다.
농성과 평화행진에 참여한 킹 목사는 여러 차례 체포당하고 법정에 섰다.
흑인 지도자에 대한 구속과 시위금지령 같은 탄압이 계속됐다.
곳곳에서 물리적인 충돌이 빚어졌다.
킹 목사의 비폭력 노선에 대한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실질적인 결실이 보이지 않는 데 대해 조바심을 느낀 흑인들은
점점 호전적으로 변해갔다.
1963년에는 10주간 186개 지역에서 750회 이상의 시위가 일어났다.
링컨 기념일인 8월28일에는 25만명의 군중이 워싱턴DC 링컨기념관 앞에 모였다.
연단에 선 킹 목사는
“나에게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며 연설을 시작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에서 이전 노예의 자녀들과
노예 주인의 자녀들이 형재애로 한 식탁에 앉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앨라배마의 인종주의자들이 물러가고
거기서 나의 어린 아들과 딸이 백인의 아들딸들과 형제와 자매로
손에 손을 잡고 살아갈 것이라는 꿈입니다”
이듬해 킹목사는 35세라는 젊은 나이로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역대 최연소 수상자였다.
킹목사의 저항운동은 점차 흑인의 경계를 넘어섰다.
그는 흑인들만의 차별을 위해 운동하는 것은
다른 가난한 사람들의 적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흑인 인구의 반이 극빈계층에 속했지만 그 수는 전체 빈곤층의 5분의 1에 불과했다.
그는 모든 가난한 사람들의 사회적 혜택을 위해 노동조합들과 손을 잡고 투쟁했다.
그 즈음 미국 정부는 베트남 참전을 결정한다.
킹 목사는
“미국 정부가 베트남에서 한 사람의 적군을 죽이기 위해 50만달러를 쓰면서
미국내 빈곤 퇴치를 위해선 한 사람에게 52달러를 지출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고 비난하면서 “인종차별과 빈곤,전쟁이 상호 관련돼 있다”고 강조했다.
1968년 4월4일 테네시주 멤피스의 한 모텔에서 총성이 들렸다.
총을 쏜 사람은 제임스 얼 레이,총탄을 맞은 사람은 마틴 루터 킹 목사였다.
킹목사가 죽자 미국 전역의 63개 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4월8일 애틀랜타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는 15만명이 참석했다.
흑인뿐만 아니라 백인들도 적지 않았다.
제임스 얼 레이는 몇년 뒤 미국 중앙정보부(CIA)가
자신을 암살범으로 고용했다고 털어놨다.
김지방기자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