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전당 시인선 335, 박성규 시집 『내일 아침 해가 뜨거나 말거나』
문학의전당 ・ 2021. 3. 16. 14:19
박성규 시집 | 내일 아침 해가 뜨거나 말거나 | 문학(시) | 변형국판 | 120쪽 | 2021년 3월 18일 출간
값 10,000원 | ISBN 979_11_5896_507_5 03810 | 바코드 9791158965075
마음의 자리와 시의 울림
이태 전 시집 『텃밭을 건너온 말씀』(시인동네, 2019)으로 큰 호응을 얻었던 박성규 시인의 열두 번째 시집 『내일 아침 해가 뜨거나 말거나』가 문학의전당 335로 출간되었다. 박성규 시인은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귀촌한 이후 무위자연의 준엄한 말씀들을 쉽고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는 문체로 우리에게 들려준다. “비록 내일 세계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한 스피노자의 말처럼 박성규 시인은 오늘을 사는 모든 이들에게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방이 좁다며
확장공사를 한다
여태 빈방으로
그냥 두었으면서도
방을 넓히는 것은
마음이 좁아서 그랬던 것
방이 넓으면
마음이 넓어질까
엉뚱한 생각에 젖지는 않을까
청정한 마음
인연에 맞게 써야 하는데
—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 전문
박성규 시집 『내일 아침 해가 뜨거나 말거나』를 관통하는 시적 사유의 근간(根幹)은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이라는 시 제목에 함축되어 있다.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은 선불교의 혜능 조사와 관련한 일화로 대중에 회자(膾炙)된 ‘금강경’의 법문이다.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라는 보통의 이해는 ‘집착’을 경계하면서 마음의 변화를 응시하라는 뜻이다. 따라서 시인은 “청정한 마음/인연에 맞게 써야 하는데”라며 자기 자세를 경계한다. 아마 이것이 ‘빈방’을 다시 마음의 자리로 삼기 위해 ‘확장’한 시인의 본래 의도였을 것이다. 더 많은 인연을 포용하되 좁게 가둬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빈방마저 더 크게 넓히는 무위로 발현했다고 할 수 있다.
겨울밤
유난히도 잔별이 많다
개똥벌레의 영혼 때문이다
여름이 올 때쯤
이슬을 타고 땅에 내려온 잔별들이
개똥벌레가 되어
낮에는 풀숲 사이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반짝거린다
그렇게 한철 지내다가
밤이 길어지는 겨울이 되면
개똥벌레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
다시 잔별이 된다
누군가의 영혼이 된다
— 「겨울 잔별」 전문
시인이 이토록 ‘마음의 자리’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그의 ‘시의 울림’이 그윽하게 멀리까지 퍼져 나가기를 바라는 순결한 바람 때문이다. 울림이란 반향(反響)이 아니어서 어떤 사물과 부딪쳐도 되돌아오지 않고 그 물체를 포섭하면서 퍼져 나간다. “겨울밤/유난히도 잔별이 많”은 이유는 “개똥벌레의 영혼” 때문인데, 그 영혼마저도 “여름이 올 때쯤/이슬을 타고 땅에 내려온 잔별들이” 변신한 것일 뿐이다. 그렇게 여름 한철이 지나면 “개똥벌레의 영혼”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 다시 ‘잔별’이 된다. 그렇게 또 “누군가의 영혼”이 되는 순환 속에서 계속 빛나는 것이다. 물론 시인은 “청정한 마음/인연”「(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으로 매번 변하는 누군가의 영혼인 ‘잔별’을 지켜봄으로써 자기 마음의 자리를 환하게 하는 것이다.
박성규 시인의 이번 시집은 그윽하게 번지듯 퍼져 나가는 시적 울림을 지향하면서 그 과정에서 접하는 모든 사태, 사건과 사물을 포섭하여 마음의 자리를 견고히 하려는 의지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시집은 결국, ‘청정한 마음’과 ‘자연적인 인연’을 노래하기 위해 그렇지 않은 것들, 즉 무심한 행위나 습관적 반응과 이해와의 조용한 고투(苦鬪)의 기록인 것이다.
— 백인덕(시인)
밭고랑을 덮고 있는 풀을
힘껏 잡아당겼더니
감자가 딸려 나왔다
보기엔 풀밭인데
웬 감자가 나오나 싶어
고랑에 있는 풀도 뽑았더니
역시 감자가 튀어 나왔다
풀 더미 속에서
감자가 딸려 나오는데
내년에는 아예 풀만 심을까
— 「망각의 뒤편」 전문
우리 집 문지기 접시꽃이
소천했다
팔뚝만 한 가지여서
무사히 생을 지킬 것 같더니만
태풍 들이닥친 날 밤
맥없이 쓰러졌다
층층이 안테나를 달고
밤마다 별 이야기를 타전해 줘서
우주와 소통하며 지내왔는데
쓰러지고 보니 안쓰러웠다
살려내긴 틀렸지만
쓰러진 환자를 그냥 둘 수 없어
평상에 가지런히 누이고 보니
골다공증 환자다
제 소임 다한다고 얼마나 애썼을까
요절했다고 애달파해야 하나
비 그치면 다비라도 해주어야겠다
— 「접시꽃 3」 전문
양파 모종을 사왔더니
종일 일하려면 잘 먹어야 된다고
삼겹살과 파절이로 상을 차려온 아내
얼굴이 참 밝았다
덕분에 속을 든든하게 채우고 나와
양파를 심으려는데
모종이 반이나 없어졌다
실파인 줄 알고 아침상 차린 아내
얼굴이 샐쭉해졌다
미탁 때문에 침수되어
병든 작물 뽑아내고 양파라도 심으려 했는데
실파와 양파도 구분 못한다고 핀잔을 줬다
아내 얼굴이 파절이가 되었다
핀잔을 주고
내 얼굴은 하회탈이 되었다
― 「핀잔」 전문
참 착하다, 저것들
힘든 계절을 만났어도
제대로 못 자란 것은 안타깝고
쑥쑥 큰 것은 뿌듯하지만
구시렁대지도 않고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저것들
착하다 못해 순박하다
오직 제자리에서
제 영역만 지키고 살면서도
목이 말라도 볕이 뜨거워도
불평불만 없이 지내는 저것들
참
착하다
― 「민초의 땅」 전문
풍요를 꿈꾸며
씨앗을 뿌렸다
그대로 두면 풀밭
손길이 닿으면 채소밭
저들 세상
경계도 없고 다툼도 없는데
애간장 타는 것은 나
그냥 두어야 하나
풀을 뽑아야 하나
― 「선택론」 전문
그림자 하나 끌고 여기까지 왔다.
기진맥진했다.
이젠 그림자가 나를 끌고 간다.
모른 척, 해야겠다
2021년 3월
박성규
박성규의 이번 시집은 그윽하게 번지듯 퍼져 나가는 시적 울림을 지향하면서 그 과정에서 접하는 모든 사태, 사건과 사물을 포섭하여 마음의 자리를 견고히 하려는 의지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결국, ‘청정한 마음’과 ‘자연적인 인연’을 노래하기 위해 그렇지 않은 것들, 즉 무심한 행위나 습관적 반응과 이해와의 조용한 고투(苦鬪)의 기록인 것이다. 하여, 위계가 없는 곳, 명료하게 선언된 경지에서는 높낮이 없이, 낮은 음조의 시도(詩)도, 높은 목청의 노래도 한결같이 울리지 않을까. 그렇게 살다 보면 “마당과 방이 같은 높이인 까닭/살아보면”「(예언」) 알게 되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최근 보여주고 있는 박성규 시인의 무위의 삶과 시의 경작에 대해 일견 부러운 마음이 든다.
— 백인덕(시인)
박성규 시인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2004년 《시인정신》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꽃아』 『멍청한 뉴스』 『오래된 곁눈질』 『어떤 실험』 『이제 반딧불을 밝혀야겠다』 『텃밭을 건너온 말씀』 외 다수가 있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회원과 〈시와여백〉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1부
겨울 잔별 13
선택론 14
메뚜기 사랑 15
접시꽃 3 16
낮달 18
주객전도 19
호박씨를 까먹었다 20
망각의 뒤편 22
부레옥잠 23
가지 맛 24
우수에 내리는 비 26
꼬리명주나비의 방문 27
아, 글쎄 28
중생 30
대한(大寒) 31
별의 노래 32
제2부
핀잔 35
꽃의 생 36
뚱딴지 37
바람기 심한 바람 38
고분 40
동병상련 41
폭풍주의보 42
단수 44
여진(餘震) 45
버릇 46
볼펜의 계시 48
상처 49
표백제 50
시를 읽고 싶을 땐 52
두부가 먹고 싶은 밤 53
떼 54
제3부
넝쿨의 진실 57
접시꽃 4 58
아카시 꽃피니 60
노루귀 61
진달래 62
그것 참 64
민초의 땅 65
하지 감자 66
극락암 홍매 68
우포의 밤길 69
미역국 70
오월 72
미련 73
솔릭 74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 76
고장 난 마음 77
동백아 동백아 78
동반자 80
제4부
예언 83
투호 84
활쏘기 85
도둑고양이 86
교촌마을에 뜬 달 88
비단벌레 자동차 89
생명의 끈 90
월정교에서 92
월성 발굴조사 A 지구 93
바다가 그리운 11시 94
들판의 방학 96
제비 소식 97
사랑의 묘약 98
묘심(妙心) 100
평동 소야곡 101
밤을 기다리는 이유 102
새를 기다리며 104
해설
백인덕(시인)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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