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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7. 묵상글 ( 연중 제3주간 금요일. - 어떤 사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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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7. 연중 제3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어떤 사람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 비유입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에서 다음 구절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그런데 너무 지나친 해석이 아닌지 모르지만
이 말씀이 제게는 주님의 고심을 나타내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 나라를 알아들을 수 있게 잘 설명할 수 있을까 고심하시는.
사실 이 세상을 사는 인간인 우리가 저세상,
곧 하느님 나라를 알아먹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고,
그 설명을 설사 잘 알아들었다 해도 우리의 관심은 무관심입니다.
그래서 3년 동안 열심히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신 주님께서 돌아가실 무렵에는
하느님 나라를 아들의 혼인 잔치에 비유하시는데
여기서 우리는 아무리 초대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아무튼, 주님은 하느님 나라를 우리에게 알려주시려고 애쓰시는데
오늘은 하느님 나라를 씨앗에 비유하십니다.
겨자씨와 같다고도 하시고,
우리가 뿌리면 우리가 모르는 사이 저절로 자라 열매 맺는 씨와 같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씨를 뿌리는 그 어떤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곧 하느님 나라의 씨를 뿌리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슨 씨를 뿌렸는데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씨인 줄 모르기 십상이고,
그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는 더더욱 모르기 십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작은 사랑 실천이, 우리는 모르지만, 하느님 나라 씨앗일 수 있고,
그 작은 사랑이, 어떻게 하느님 나라의 큰 사랑이 될지 우리는 모릅니다.
씨앗을 생각하면 참 신기합니다.
씨앗 박사가 아니라면 씨앗만 보고 어떤 씨앗인지 모르고,
그 씨앗에서 어떠한 열매와 꽃이 열릴지 우리는 모릅니다.
씨앗이란 이토록 작고 알 수 없지만,
여러 가능성이고 무한 가능성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씨앗은 더 여러 가능성이고 무한 가능성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하느님께서 자라고 열매 맺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씨앗이 본래 참 신기한데
하느님 나라의 씨앗은 더 신비롭습니다.
저는 <여기 선교 협동조합>과 <여기 밥상>을 하고,
또 콩나물국밥을 하면서 이런 신기함이랄까 신비함의 체험을 많이 합니다.
콩나물을 키우는 것도 참 신기하고,
어떻게 될지 모르고 시작한 사업이 점차 이런저런 사업으로 발전하여,
지난해에는 이주민과 취약 계층 자녀들을 위한 장학사업이
26명에게 매월 10만 원씩 장학금을 지급하는 사업이 되고,
또 국밥집에선 쌀이 떨어지면 누가 때맞춰 쌀을 보내줍니다.
어제도 이제 쌀이 떨어지고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떤 분이 쌀 20kg을 보내오셨습니다.
며칠 전 제가 그런 기적 체험 얘기하는 것을 듣고,
당신도 동참하는 차원에서 보내신 것인데 그것이 때를 잘 맞춘 거였지요.
이 어떤 분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나라 씨를 뿌리는 <어떤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씨를 뿌리는 어떤 사람이 될 가능성도 있고,
모르고 하는 우리 행위가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 될 가능성도 있음을 성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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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7. 연중 제3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지만,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결코 외부에서부터 이루어지는 변화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듣고 받아들여 안으로부터 오는 나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어떻게 건설되는 걸까?
오늘 <복음>은 이에 대한 해답을 가르쳐줍니다. 그것이 바로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곧 ‘하느님나라’는 씨앗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땅에 씨를 뿌려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7)
그렇습니다. 분명, 씨앗은 자신 안에 싹을 틔우고 잎으로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 안에 뿌려진 씨앗(말씀)의 권능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 교종은 말합니다.
“성경(말씀, 하늘나라)은 읽는 이(응답하는 이) 안에서 자란다(성장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놀랍고 신비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씨가 우리 안에 뿌려지면, 그것이 어떻게 우리를 변화시키고 또 어떻게 성장시키는지를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매 순간 하느님의 힘이 작용하여 하느님 나라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햇살을 받은 나뭇잎이 광합성을 못 알아들으면서도 그것을 채워가고 푸르러가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 나날이 그 신비를 마시며 살아가는 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됩니다.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이게 됩니다. 마치 십자나무처럼, 모든 인류를 끌어안은 큰 나무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십자나무에 인간이 거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비록 작은 ‘겨자씨’지만,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썩기만 하면, 바로 이곳에서 모든 사람들이 와서 깃들일 수 있는 큰 나무로 자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싹이 트고 자라나는 이 놀라운 신비에 순응하게 하소서.
저의 힘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으로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주님!
당신은 겨자씨처럼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길인 까닭입니다.
오늘 제가 형제들 앞에서 작아지게 하소서!
십자나무에 인류의 거처를 마련하듯, 형제들의 거처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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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7. 연중 제3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야 합니다
한 유치원 원장님이 아이들에게 꽃씨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제일 예쁜 꽃을 피워온 아이에게는 멋진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아이들은 서로 ‘내가 제일 예쁜 꽃을 피워야지!’ 하며 신이 났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아이들은 꽃이 활짝 핀 화분을 들고 왔습니다. 그러나 원장님의 표정은 이상하게도 밝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아이가 빈 화분을 들고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저는 게을러서 꽃을 못 피웠어요!”원장님은 그제서 환하게 웃으시며 그 아이에게 멋진 선물을 주었습니다. 나누어준 씨앗은 싹이 나지 않는 가짜였던 것입니다.
정말 싹을 틔워야 할 것은 우리의 진실한 마음입니다. 사실, 씨앗이 생명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면 아무리 기다려도 싹은 트지 않습니다. 또한 씨앗 자체의 신비로운 힘을 믿지 않는다면 씨앗에서 싹이 트고 새싹이 돋아나도록 땅을 가꿀 이유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하면서도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씨앗이 땅에 묻혀 모든 것이 끝나고 정지된 것처럼 보일 때 땅속에 있는 씨앗은 은밀하게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지금 당장 밝히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싹을 틔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좋든 나쁘든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가꾸어야 합니다. 나의 수고와 땀, 희생 봉헌이 미약해 보일지라도 결코, 작지 않음을 기뻐해야 합니다. 때가 되면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겨자씨가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씨의 크기는 0.95-1.6밀리미터=보니까 아주 먼지 같아요!)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되듯이(마르 4,32) 우리의 정성도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저절로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와‘겨자씨의 비유’는‘하느님 나라의 시작은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끝은 성대하리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농부가 가을에 수확을 위해 봄에 씨를 뿌리고 잘 자라도록 온갖 정성을 다해 가꾸듯이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를 정성껏 가꿀 때 비로소 건설될 수 있는 나라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무리는 작고 초라하게 시작되었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을 포함하는 교회공동체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선을 행하고 진리 안에 자유로워야 하겠습니다. 겨자씨 한 알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무한한 가능성이 들어있듯이 우리의 사랑과 희생도 무한한 가능성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실“사람은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요한3,27). 그리고 보상을 바랄 수 없습니다. “누가 먼저 무엇을 드렸기에 주님의 답례를 바라겠습니까?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로마11,35-36). 우리의 모든 활동에 주님께서 함께하고 계심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겨자씨처럼 작은 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고 봉사합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질서이고 사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유광수). 우리도 가장 작은 이의 모습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해야 하겠습니다.
불신이 가득한 이 세상에 빈 화분을 들고 눈물을 지을 수 있는 진실함으로 하느님 나라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진실함이 있으면, 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의 나라요, 불신과 거짓으로 서로를 경계하면 그곳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쑥쑥 자라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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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7. 연중 제3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후배 신부님 식탁에 멋진 그림이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퍼즐을 맞춘 것입니다. 퍼즐은 서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퍼즐을 맞출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1000개의 퍼즐은 각자 서로의 짝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퍼즐이 조화를 이루려면 다른 점을 버리고, 같은 점을 찾아야 합니다. 이번 성지순례는 4명의 신부님이 함께 했습니다. 서로 다른 4개의 퍼즐이 조화를 이루어서 은총이 가득한 순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4명의 사제는 각기 살아온 삶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것을 인정하면 퍼즐을 맞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퍼즐은 엉망이 되어서 조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퍼즐을 맞추지 못해서 헤어지는 부부가 있습니다. 상대방의 부정적인 면만 보면 절대로 퍼즐은 맞출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긍정적인을 찾아내면 퍼즐은 쉽게 맞출 수 있습니다. 화목한 부부는 문제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서로의 긍정적인 면을 찾아냈기 때문입니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정적인 면만 찾으려면 얼굴을 보는 것도 고통입니다.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면 아침 인사가 즐거워집니다. 한 사람은 조직적이고 논리적이기 때문에 문제의 해결책을 잘 찾아냅니다. 영어소통이 자유롭기 때문에 외부에서 오는 서류를 쉽게 이해합니다. 한 사람은 쾌할 하기에 분위기를 밝게 합니다. 취재를 가서도 좋은 기사를 찾아냅니다. 한 사람은 차분하기 때문에 잘못된 부분을 쉽게 찾아냅니다. 서류정리도 늘 깔끔하게 해 놓습니다. 저는 일을 지시하기보다는 맡기는 편입니다. 처음에는 직원들이 힘들어했습니다. 늘 지시를 받아서 일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가 알아서 자신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회사 일로 크게 걱정하지 않고, 홀가분하게 홍보를 다니고 있습니다. 팬데믹의 어려움 속에서도 지난 4년간 큰 무리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부정적인 면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서로의 긍정적인 면을 찾아냈기 때문입니다.
이번 순례의 여정 중에 신부님들의 긍정적인 면을 많이 보았습니다. 한 신부님은 이번 순례가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항공권 예약, 숙소 예약, 렌터카 예약을 모두 하였습니다. 매일 우리가 가야 할 순례 장소도 미리 정해 놓았습니다. 다만 정해진 약속 시간에 조금 늦게 나오는 편이지만 그 시간도 충분히 알기에 묵주기도하면서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한 신부님은 간식과 의약품을 잘 챙겼습니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신부님께서 조용히 해결 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경건한 모습으로 순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신부님을 보면 우리가 이곳에 왜 왔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한 신부님은 이번 순례의 총무를 맡았습니다. 순례 중에 사용하는 모든 비용을 정산하였습니다. 모두가 피곤한 중에도 운전을 해 주었습니다. 버스로 이동할 때는 이동 방법도 찾아 주었습니다. 길 찾는 능력이 좋아서 잘 모르는 곳을 갈 때면 신부님을 따라갔습니다. 지난 4년 동안 같이 다니면서 저는 주로 정리와 청소를 하였습니다. 이번 순례에서 크게 할 일은 없었지만 조연으로 함께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순례 중에 겨자씨를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정말 작았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현재의 삶을 충실하게 살고 하느님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퍼즐을 사용해야 들어 잘 맞출 수 있을지 생각해 봅니다. 원망과 불평보다는 감사와 긍정의 마음을 지닐 때 하느님나라의 퍼즐을 맞출 수 있습니다. 위선과 교만보다는 겸손과 봉사의 삶을 사는 사람이 하느님나라의 퍼즐을 맞출 수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보다는 온유와 인내의 삶을 사는 사람이 하느님나라의 퍼즐을 맞출 수 있습니다. 그 시간이 비록 멀고 험할지라도 우리는 모두 하느님나라의 퍼즐을 맞추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 믿어서 생명을 얻을 사람입니다.” 2023년에는 감사와 긍정으로, 겸손과 봉사로, 온유와 인내로 하느님나라의 퍼즐을 잘 맞추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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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7. 연중 제3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갑곶성지에 있을 때,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미사에 참석한 아이에 대한 기억이 남습니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다른 아이와 달리 이 아이는 똑바로 앉아서 제 강론을 너무나 열심히 경청하였기 때문입니다. 경청하는 아이를 보니 저 역시 신이 나서 강론을 더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는데 어른들은 전혀 웃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크게 웃으며 제가 원하는 반응을 보여줬습니다. 미사 후에 아이에게 “신부님 강론 잘 들어줘서 고마워.”라면서 막대사탕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생전 처음으로 사탕을 받아 본 아이처럼 좋아하며, “아싸~”를 외칩니다. 이 모습이 너무 예뻐서 사탕 하나 더 주게 되더군요.
어린아이는 작고 사소한 일에도 감탄사를 자주 외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웬만한 일에는 감탄하지 않습니다. 그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뇌의 기능 탓이라고 하더군요. 뇌의 대뇌피질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때만 활성화됩니다. 따라서 어린아이는 매 순간이 새로운 정보이니 대뇌피질이 활성화되어 감탄사를 외치지만, 어른은 새로운 정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감탄사가 없는 것입니다. 뇌가 활성화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감탄하는 삶이 재미있을까요? 감탄 없는 삶이 재미있을까요? 감탄이 없는 삶은 너무 힘듭니다. 뇌가 활성화되지 못해서 삭막한 삶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새로운 일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세상 사람들이 잘 하지 않는 사랑 실천, 봉사활동, 그 밖에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것을 감탄사 넣어가며 열심히 실천하면 신나는 삶이 됩니다. 감탄하는 삶이 훨씬 재미있고 기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얻는 것도 더 많아집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 말씀입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를 들면서, 농부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또 어떻게 자라는지 몰라도 수확할 때까지 저절로 자라는 씨앗처럼,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미처 모르는 사이에 계속해서 충만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당연한 것이 아니지요.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로 하느님 나라가 우리 곁에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충분히 감탄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탄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당연히 내가 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받지 못함에 주님께 불평불만을 계속해서 늘어놓고 있습니다.
나의 감탄사를 찾는 데 집중했으면 합니다. 이 감탄사를 들으신 주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만큼 당신의 크신 섭리를 깨달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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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가져라. 계획을 세워라. 그리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라. 약속하건대, 당신은 거기에 이를 것이다(조 코플로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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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7. 연중 제3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신비가
-침묵과 경청, 존경과 사랑, 인내와 믿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주님께 네 길을 맡기고 신뢰하여라.
그분이 몸소 해주시리라.
빛처럼 네 정의를 빛내시고,
대낮처럼 네 공정을 밝히시리라.“(시편37,5-6)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신비가가 됩시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마땅한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비상한, 특별한 신비가가 아니라 일상의 평범한 신비가입니다. 이래야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습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입니다. 어떻게? 시종일관, 한결같이 침묵과 경청, 존경과 사랑, 인내와 믿음을 훈련하여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언젠가 살아야 할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사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살지 못하면 언젠가 산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살지 못하면 내일도, 또 죽어서도 못삽니다. 사랑의 신비가입니다. 사랑의 눈이 열릴 때 오늘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다음 고백 그대로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옵니다.”
사실 사랑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들입니다. 저절로 “아, 놀랍다, 새롭다, 좋다” 탄성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저절로 시인이, 사랑의 시인이, 사랑의 신비가가 될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를, 겨자씨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이야말로 이런 신비가의 모범입니다. 참으로 일상의 하찮은 사실에서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찮은 일상의 비유로는 겨자씨의 비유도 대동소이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생명의 신비입니다. 숨겨진 것이,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요란하거나 시끄러움 없이, 말없이 침묵중에 묵묵히 일하시는 하느님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의 일에 잘 협력해 드리는 일입니다. 침묵중에 겸손히 바라보고 지켜보고 경청하는 관상가로 사는 것입니다.
불필요하게 건드리지 않고 그냥 놔두는 것입니다. 이건 비단 일상의 자세일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어리석게도 유혹에 빠져 긁어 부스럼 만든다든가 녹을 지우려 그릇을 깬다든가 미풍을 태풍으로 만들지 않는 일이니 말그대로 지혜롭고 겸손한 삶입니다. 이렇게 살다가 나서지 말고 필요하다 생각될 때 조용히 뒤따라가며 가꾸고 돌보며 협력해 드리는 일입니다.
사랑의 침묵, 사랑의 경청입니다. 침묵과 경청에 이어 존경과 사랑입니다. 프란치스코 현재의 교황님께서 고 베네딕도 전임 교황님을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했는지, 감동적인 인터뷰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이런 존경과 사랑의 자세가 하느님 나라의 삶에 필수입니다.
-교황은 베네딕도 16세를 “신사(a gentleman)”로 표현하셨으며, 그분의 죽음과 더불어 “나는 아버지를 잃었다(I lost a father)”고 말씀하셨다. 내게 있어 그분은 ‘하나의 보장’(a security)’이었다. 내가 의문에 직면했을 때, 나는 지체없이 차를 불러 그분 계신 수도원에 가서 여쭤보곤 했다.-
얼마나 솔직하고 겸손한 자세인지요! 전임 교황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 그리고 두분간의 영적우정이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바로 이런 타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 합니다. 존경과 사랑 역시 하느님 나라를 위한 의식적, 필수적 영성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아마 프란치스코 교황님에게 이런 전임 교황님과의 아름다웠던 영적우정의 추억은 하느님 나라를 사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어 두 하느님 나라의 비유가 가르치는 바 인내와 믿음입니다. 한없는 기다림의 인내로 표현되는 믿음입니다. 오늘 히브리서도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기다림의 인내와 믿음을 강조합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때를 기다리는 인내의 믿음이 지혜요 겸손입니다.
봄꽃들 폈다하여 먹음직스러운 배열매가 아니라 가을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막연한 인내가 아니라 참으로 이런 인내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 희망, 사랑의 신망애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주님께 대한 신망애 없이는 한없는 기다림의 인내는 불가능합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올 이가 지체하지 않으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러나 뒤로 물러서는 자는 내 마음이 기꺼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 믿어서 생명을 얻을 사람입니다.-
바로 인내와 믿음을 강조하는 히브리서 저자는 이어지는 11장에서 믿음에 대해 길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며 믿음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인내와 믿음의 경우 제가 드리고 싶은 답은 단 하나, “하루하루살라”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정주의 삶을 살다보니 요셉수도원에 정주한지 만35년입니다. 밖에서 볼 때 수도원은 평화로운 천국같지만 안에서 보면 하루하루가 영적전투 치열한 최전방입니다.
오늘이 내일입니다. 하루하루 잘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이며, 마침내 선종의 선물같은 죽음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하루하루 사시기에 다음같은 고백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은총의 시간이자 새로운 기회다. 그러니 매일 기쁘게 살아야 한다. 기쁨을 결缺하고 있을 때, 복음은 이웃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기쁜소식, 복음은 그의 본성상 ‘기쁨의 선포’(a proclamation of joy)’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합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 비유의 궁극의 가르침입니다. 침묵과 경청, 존경과 사랑, 인내와 믿음의 자세로 시종일관, 한결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인사대천명의 노력을 다하며 주님께 협조하는 것입니다.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나한테 달린 듯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끝으로 제 좌우명 기도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마지막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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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7. 연중 제3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한줌>
한줌 믿음
온 몸과 마음으로
정성껏 품어요
목숨 바칠
굳건한 믿음
담고 있으니까요
한줌 희망
온 몸과 마음으로
정성껏 품어요
꺼지지 않을
불타는 희망
담고 있으니까요
한줌 사랑
온 몸과 마음으로
정성껏 품어요
아낌없이 내어줄
뜨거운 사랑
담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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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7. 연중 제3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씨를 뿌리고 자는 사이에 씨는 자라는데, 그 사람은 모른다.’
우리가 매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찰’이라는 것입니다. 매일의 미사 안에서도 성찰하고 있으며 성무일도의 끝 기도에서도 우리는 성찰을 합니다.
‘성찰’을 단순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단순하게 이야기한다면 나의 하루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즉 무슨 말을 했었는지, 어떤 행동을 했었는지, 어떤 마음을 먹었었는지, 기뻤는지, 슬펐는지 등의 하루의 모든 것을 다시 바라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마음 밭에 씨를 뿌리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씨앗은 자라나서 희망과 즐거움이 될 것이고, 슬픔의 씨앗은 자라나서 우울과 절망이 될 것입니다.
따뜻한 말과 행동의 씨앗은 자라나서 친절과 봉사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말과 행동들은 자라나서 냉대와 무관심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씨앗을 뿌리느냐에 따라서 그 열매는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오늘 어떤 씨앗을 뿌리고 싶으십니까? 어떤 것이 우리 마음 밭에 자라나기를 원하십니까?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해보십시오. 그리고 주님 보시기에 예쁜 씨앗이 뿌려질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청소하기
제가 지내는 이곳은 일명 ‘식복사’라고 불리는 분이 안 계십니다. 그래서 매일 스스로 청소하고 빨래하고 식사를 준비해야 합니다. 물론 사제로서 기도와 강론 준비를 소홀히 할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먹어야 살 수 있으니까 식사 준비는 매일 합니다.
입어야 하니까 빨래도 열심히 합니다.
기도와 강론 준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청소는 가끔 미루는 것이 제 모습입니다.
처음에는 하루 이틀 미루어도 티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길어지면 수북한 먼지를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도 이렇지 않을까요? 하루 이틀 청소하지 않았을 때는 보이지 않지만, 너무 미루면 먼지가 수북이 쌓입니다. 그리고 청소는 더욱 어려워집니다.
마음 청소도 너무 미루지 마세요. 너무 많은 먼지가 싸일 때까지 미루지는 마셔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마음 청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찰’이고 ‘고백성사’입니다.
마음 청소하시고 예쁘고 맑고 자신 있는 그리스도인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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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7. 연중 제3주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느님 나라는 꿈을 주려는 꿈이 심어지는 것
왜 애플사는 창조적일까요? 그들은 모든 경쟁사보다 훨씬 더 혁신적입니다.
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민권 운동을 이끌었던 것일까요?
그가 미국 민권운동 이전에 고통받았던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만이 그 시대의 훌륭한 연설가도 아니었습니다. 왜 그였을까요?
그리고 왜 라이트 형제는 동력 조절 유인 비행을 발명해 낼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 이유를 골든 써클(Golden Circle)이라 부릅니다.
왜? 어떻게? 무엇을? 이 작은 아이디어는 몇몇 단체 그리고 리더들이 왜 영감을 줄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여기서 제가 “왜?”라고 했을 때 “이윤 창출” 같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결과입니다.
“왜”라는 것은 즉, 무엇이 당신의 목적인지? 당신의 이유가 무엇인지, 당신의 신념이 무엇인지를 의미합니다.
당신이 속한 조직은 왜 존재합니까? 당신은 왜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납니까?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저는 애플사의 사례를 주로 듭니다.
애플사가 다른 여타 기업과 같다면, 그들의 마케팅 메시지는 이렇겠죠.
“우리는 훌륭한 컴퓨터를 만듭니다.
그것들은 매우 아름다운 디자인에, 쉽게 이용할 수 있고 편리합니다. 사고 싶나요?”
애플사가 실제로 선전하는 방식은 이렇죠.
“우리가 하는 모두 것들, 우리는 기존의 현상에 도전하고,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기존의 현상에 도전하는 우리의 방식은 제품을 아름답게 디자인하며, 간단히 사용할 수 있고, 편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방금 훌륭한 컴퓨터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구입하고 싶은가요?”
분명하게 다릅니다.
저는 정보의 순서를 뒤집어 놓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라이트 형제의 일화만큼 좋은 예는 없지요.
대부분 사람은 사무엘 피에폰트 랭리(Samuel Pierpont Langley)에 대하여 모릅니다.
20세기 초, 인력에 의한 비행에 대한 추구는 오늘날의 닷컴 열기와 비슷했습니다.
모든 이들이 시도했었죠.
사무엘 피에르폰트 랭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정하는 성공 비법이라는 걸 가지고 있었죠.
사무엘 피에르폰트 랭리는 미 육군성에서 5만 달러를 받았습니다.
비행기구를 발명하기 위해서 말이죠.
하버드 학위가 있고 학술 협회에서 일했으며 인맥 역시 아주 좋았죠.
그는 그 당시 모든 지식인을 알고 있었죠.
그는 풍부한 자금으로 최고의 지식인들을 고용했습니다.
이후 시장 상황은 훌륭했습니다.
뉴욕 타임스지는 어디서나 그를 취재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랭리를 지지했죠.
그런데 어째서 그에 관해 전혀 들어본 적이 없을까요?
백여 마일 건너 오하이오 데이턴에는 올 빌, 윌버 라이트 형제가 있었죠.
그들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성공 비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요.
자금도 없었고. 그들은 자전거 가게에서 일하면서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라이트 형제 팀 중 누구도 대학교 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올빌, 윌버 둘 다 말이죠.
그리고 뉴욕 타임스지는 그들을 취재하지 않았죠. 다른 점은, 올빌, 윌버 이들은 이유, 목적, 신념에 의해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비행 기계를 발명할 수 있다면, 세계 흐름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무엘 피에르폰트 랭리는 달랐습니다. 그는 부유해지고 유명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결과를 추구했죠. 그는 부유함을 추구했습니다.
라이트 형제의 꿈을 믿은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열과 성의를 다해 헌신적으로 일했습니다.
랭리의 직원들은 단지 월급봉투를 위해 일했죠. 랭리가 잘못된 목적에 의해 동기 부여가 되었다는 증거는 라이트 형제가 비행한 날, 그가 그만두었다는 점입니다.
다른 예를 보겠습니다.
1963년 여름, 250,000명의 사람이 워싱턴에 있는 쇼핑몰에 킹 목사의 연설을 듣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초대장도 날짜를 확인할 수 있는 웹 사이트도 없었죠.
킹 목사만이 미국에서 유일하게 연설을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만이 미 인권운동 초기에 고통받던 유일한 흑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변화하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말했죠. 그리고 그의 신념을 믿은 사람들은 그의 이유를 가지고 가서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몇몇 사람들은 조직화했습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리고 여기 250,000명의 사람들이 바로 그날, 그 시간에 나왔죠, 그의 연설을 듣기 위해 말이죠.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를 위해 나온 것일까요? 제로(0). 그들은 스스로를 위해 나온 것입니다.
아무튼, 그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했죠, “계획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이 아닌.
정치가들이 그들의 12가지의 포괄적 계획에 대해 하는 말을 들어보세요.
그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영감을 주지 못합니다.
세상에는 리더와 이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리더는 힘의 위치 혹은 권위를 쥐고 있죠.
하지만 우리를 이끄는 이들은 영감을 줍니다. 그들이 개인이건 혹은 단체이건 간에, 우리는 이끄는 이들을 따르죠.
우리의 의무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바라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끄는 이들을 따릅니다.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 말이죠.
그리고 “왜”와 함께 시작하는 이들은 그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거나 영감을 주는 다른 이를 찾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이먼 시넥의 TED 강연, ‘위대한 지도자들은 어떻게 행동을 이끌어낼까’ 강연의 줄거리입니다.
사이먼 사이넥은 위대한 리더들이 사람들의 행동을 끌어내는 방법을 ‘골든 서클’로 설명한다.
이유(Why) ➡ 방법(How) ➡ 결과(What)입니다.
인간 뇌를 횡단면으로 자르면 골든서클과 완벽히 일치한다고 합니다.
뇌의 겉에 있는 신경들은 행동을 지시 내리지는 못합니다. 느끼고 반응할 뿐이죠.
그러나 가운데 있는 신경은 행동하고, 말을 하라고 지시 내릴 수 있습니다.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그 이성을 움직이는 것은 그 가장 가운데 변연계라고 합니다.
거기서는 ‘믿음’이 형성됩니다.
보통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왜의 순서로 산다면, 믿음이 심겨진 이들은 왜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지의 순서로 삽니다.
육-혼-영의 순서로 사는 것이 아닌, 믿음의 사람들은 영-혼-육의 순서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공하는 사람들의 특징이고 예수님께서는 이 영 안에 당신의 믿음의 씨앗을 심어주러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심어진 이들은 평생을 그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따라서 내가 나를 증명할 꿈이 없다면 아직은 말씀이 내 안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꿈의 성격은 어떨까요? 예수님은 오늘 하느님 나라 둘째 비유에서 새들이 와서 쉬게 한다는 내용을 들려주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가진 사람은 주위 사람들이 와서 쉬게 하는 휴식 같은 친구가 된다는 데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대부분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냥 살아갑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처럼 그냥 환경에서 주어지는 것에 순응합니다.
그는 자신이 유태인을 죽이는 데 엄청난 공을 세웠음에도 그저 시켜서 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죄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심판받은 이유는 ‘왜?’에서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세상에 휩쓸립니다.
그리고 결국엔 주위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 안에 주님께서 이웃에게 휴식과 에너지와 양식이 되어주라는 명령이 들어있음을 믿읍시다.
이 믿음은 방법을 찾게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줄 것입니다.
이런 삶이 하느님 나라가 심겨진 이들의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헤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믿음을 찾는 이들이 와서 쉬게 됩니다.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면서 주위 사람에게도 그 믿음을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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