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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라이팅, 그러나 가스등이 비춰주는 것
- 영화 <가스등>(1944)
최근 우리나라에서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를 유행처럼 많이 쓰고 있다. 어느 여자 연예인이 남친인 탤런트를 가스라이팅하는 바람에 그가 출연하는 드라마를 완전히 망쳤다는 등 기사가 나기도 하고, 여성잡지에서는 데이트 폭력과 관련하여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특집으로 만들기도 하며, 가스라이팅 관련 단행본이 한 달에만도 몇 권씩이나 출판되고 있고, TV에서는 친절하게 오래된 영화 <가스등>을 방영해주기도 한다. 심지어 남친과 헤어진 뒤 심하게 스토킹을 계속하던 여자가 경찰에 신고를 당하자 자기가 가스라이팅을 당했다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데 써먹기도 한다. 2021년도에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가장 검색 수가 많았던 단어가 바로 ‘가스라이팅’이라고 하니 가히 그 유행의 정도를 짐작할 만하다.
‘가스라이팅’은 정신적 학대의 한 유형이라 할 것이나 학술적으로는 아직 완전히 확립된 개념은 아니고, 통상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하여 그 사람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로 정의한다. 일반적으로 영화 <가스등>에서 이 용어가 비롯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원래 미국의 극작가 패트릭 해밀턴이 써서 1938년에 연출한 연극 <가스등>이 있고(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이 오리지널 희곡으로 연극이 공연되었다), 1940년에 이를 토대로 영국에서 소롤드 디킨슨이 감독한 영화가 있었으나 별로 빛을 못 보았으며, 그 뒤 1944년에 여성심리 묘사에 탁월한 조지 큐커가 잉그리드 버그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만든 영화가 크게 성공하자 <가스등> 하면 대개 이 작품만 기억하고 있다.
나는 물론 진즉에 이 영화를 보았지만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한 번 보았다. <춘희>, <스타 탄생>, <마이 페어 레이디> 등을 만든 감독답게 역시 조지 큐커는 여성의 내밀한 심리묘사를 끌어내어 관객을 사로잡는 힘이 대단하구나 하고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더 없이 아름다우면서도 보기 안타까울 정도로 가스라이팅의 피해자 역할을 완벽하게 해낸 잉그리드 버그만의 연기도 뛰어났고(그녀는 이 영화로 1945년도 아카데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컬러가 아닌 흑백 스크린에 농담(濃淡) 조절이 잘 되어 화면 속의 인물이 바로 밖으로 튀어나올 듯한 입체감 나는 촬영 기법 역시 놀라웠다. 또한 ‘가스라이팅’이 무엇인지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기본 텍스트로서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간단히 스토리를 훑어보자.
유명한 오페라 가수 앨리스 엘퀴스트가 런던 손턴 광장 근처 그녀의 자택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는데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고 수사는 종결됐다. 앨리스와 함께 살던 조카 폴라(잉그리드 버그만)가 유일한 상속녀로서 이 저택을 상속받지만 악몽 같은 기억을 지우려 성악 교습 차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난다. 그런데 거기서 그만 폴라는 성악 레슨 때 피아노 반주를 해주던 미남 청년 그레고리 안톤(샤를 보와이에)과 사랑에 빠진다. 그레고리가 청혼하고 그의 세심한 배려와 정성에 감격하여 폴라는 서로 깊이 알 시간도 없이 서둘러 그와 결혼한다.
남편이 된 그레고리가 어린 시절부터 런던의 저택에서 살아보는 소박한 꿈을 꾸어 왔다는 이야기를 하자 폴라는 오랜 타지 생활을 마치고 이모 앨리스(한글 자막에 ‘이모’라고 나오는데 왜 폴라와 같은 ‘앨퀴스트’라는 성을 쓰는지는 불분명하다)에게서 물려받은 런던의 집으로 돌아온다. 앨리스의 짐은 다락으로 모두 치우고 집안을 정리하여 그레고리와의 둘만의 보금자리를 꾸며 신혼의 단꿈을 꾸고 있는데, 런던에서의 생활이 시작되고서부터 왠지 그레고리의 태도가 전과 같지가 않다. 첫날 앨리스의 악보 사이에서 서지스 바우어라는 사람이 보낸 것으로 된 편지가 발견되자 이를 낚아채며 화를 내고,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폴라의 외출이나 이웃 초대를 막는가 하면, 그녀의 기억이나 판단력을 탓하고 때로는 감정까지도 잘못됐다며 이상한 여자로 몰고 가는 것이다.
실제로 그레고리는 전문 보석 도둑이자 앨리스 엘퀴스트를 살해한 범인인데 그녀가 외국의 왕실로부터 선물 받은 전설적인 보석을 찾아내어 가로채기 위해서 계획적으로 폴라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그레고리의 교묘한 속임수를 알 수 없는 폴라는 그의 조작에 말려들어 남편이 선물한 브로치를 잃어버리거나 남편의 시계를 훔치고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여기게 되고, 결국 점점 자신을 믿지 못하며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가 되어간다. 한편 밤마다 자기 방의 가스등 불빛이 희미해지기도 하고 다락방에서는 발자국과 알 수 없는 이상한 소리도 들리기에 폴라는 이 사실을 남편에게 말하지만 그레고리는 오히려 폴라가 상상 속에서 지어낸 일이라거나 환청 속을 헤맨다고 몰아세운다. 나중에는 어릴 때 사망한 폴라의 어머니가 정신병으로 죽었다고 꾸며대며 폴라를 정신병원으로 보내려고까지 한다.
한편 예전에 앨리스의 열렬한 팬이었던 런던 경시청의 브라이언 캐머런 경위(조셉 코튼)가 폴라와 함께 런던탑 쪽에 외출 나왔던 그레고리의 어색한 거동을 보고 뭔가 수상한 낌새를 알아챈다. 브라이언은 미제로 처리된 앨리스 살인 사건철도 검토하고 부하 경찰로 하여금 폴라의 집 부근을 순찰 돌게 하는 등 관련 정보를 수집한다. 폴라가 정신병원으로 끌려가기 전날 밤 브라이언은 그레고리가 외출한 틈을 타 한밤중에 그녀의 집을 방문한다. 거기서 브라이언은 가스등 불빛이 희미해지자 누군가가 그 집의 다른 곳에서 또 다른 가스등의 불을 켜고 있음을 알아챈다. 자신이 환영을 본 것이 아니라는 확인한 폴라는 가스등 불빛과 미심쩍은 발자국 소리에 관한 얘기를 더 해주는데 드디어 브라이언은 퍼즐 맞추기와 같은 추리 끝에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다. 밤마다 그레고리는 이웃 빈집을 통해 몰래 자신의 집으로 넘어와 다락방으로 숨어든 다음 가스등을 켜고 앨리스의 보석을 찾아 왔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래층의 가스등 불빛이 희미해졌는데….
그레고리의 방을 수색하던 브라이언은 책상 서랍 속에서 잃어버렸다던 브로치와 있지도 않은 것이라고 몰아붙였던 편지 등을 발견한다. 앨리스에게 그 편지를 보냈던 서지스 바우어가 바로 그레고리인 것이다. 그 시간 작업 때문에 외출한다면서 다락으로 가서 보석을 찾았지만 끝내 못 찾고 그냥 돌아서 나오던 그레고리는 오페라 여주인공 무대의상에 박혀 빛을 발하고 있는 커다란 보석을 발견한다. 순간 그의 눈빛도 크게 빛나고 그 보석에 다가가는데….
마침내 그레고리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그는 포승줄에 묶여 압송되고 폴라는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을 되찾게 된다.
폴라를 보면서 브라이언은 말한다.
“아침에 눈 뜨면 밤이 있었다는 사실은 잊죠. 당신도 그럴 거예요”
우리는 혼자 살 수는 없고 서로 만나 어울려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결국 영향을 주기 위한 것이고, 각자 그 영향이라는 ‘조종’을 통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한다. 그 원하는 것이 경제적인 것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으며, 지식이나 명예일 수도 있다. 그 조종은 내가 상대방에게 영향을 주어 조종을 하기도 하지만 내가 상대방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조종당하기도 한다.
한 젊은 남자가 아름다운 여자에게 좋은 매너로 접근, 미리 알아낸 그녀의 취향에 맞춰 식당과 메뉴를 정하여 저녁 식사를 하고 공통된 관심사에 대하여 대화를 나눈 다음 그녀가 보고 싶어 했던 뮤지컬을 함께 감상했다고 하자.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가스라이팅’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 젊은 남자가 아름다운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보인 행동에 진정성이 있건 없건 그 여자의 심리상태를 조작하여 자신감을 떨어뜨리는 행위까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데이트를 몇 번 더 하고 관계가 어느 정도 친밀해진 다음에 남자가 여자에게 “예쁜 여자라고 다 그런 건 아닌데 넌 정말 아무 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 “왜 이렇게 남들이 싫어하는 것만 골라서 해? 이러니 다들 따로 놀고 속을 털어놓을 친구 하나 없지.” “정신줄은 어디다 놓고 다니는 거야? 내 참….” “나니까 그래도 만나주는 거야. 내가 보호해주지 않으면 넌 이 세상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어.” 식으로 얘기한다면 본격적으로 가스라이팅이 시작된 것이다. 그 여자로 하여금 자신에 대하여 의심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가스라이팅’이란 이렇게 피해자로 하여금 더 이상 스스로의 기억과 판단뿐만 아니라 자신이 겪은 현실에서의 경험에 대하여도 믿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상대방을 완전히 인격적으로 파괴하는 행위를 의미하는데, 가정이나 학교, 또는 연인 등 아주 가까운 관계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가스라이팅을 많이 하고 또 당하고 있다.
엄마는 아이한테 “넌 원래 그런 애였어. 그래도 나니까 너를 이만큼이라도 만들어 놨지.”라고 험한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마구 퍼부어댄다. 그리고 아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키우려고 하지는 않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라는 식으로 엄마가 생각하는 틀에 아이를 끼워 맞추려고만 하고서는 “이게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라고 한다. 이게 바로 엄마가 아이를 손쉽게 지배하려는 가스라이팅이 아니고 무엇인가.
직장에서도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 “김 대리는 정말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 일도 못하는구만. 그래서 내가 사람 좀 만들어 보려고 이 부서로 끌고 오긴 했지만 좀 더 열심히 해야겠어.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회장님 조카인 내가 김 대리 하나는 확실히 책임질 테니까.” 이런 식으로 부하를 다루는 것은 지배력 강화를 위한 전형적인 직장 내 가스라이팅이다.
가스라이팅은 정치에도 활용할 수 있다. 원자력과 감염병에 대한 공포를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여 국가가 이를 막아주지 않으면 국민들은 금방 생명이나 건강에 큰 위협이 올 것처럼 겁을 준다. 그런 다음 국가가 나서서 공포에 사로잡힌 국민들을 보호하는 정책들을 실행함으로써 국민들로 하여금 정부에만 의존하게 하는 심리상태를 유도하는 것도 집권자를 유혹하는 통치방법 중 하나다. 중과세와 잘못된 입법 등으로 국민생활을 극도로 어렵게 만든 다음 보조금 지급 등 파격적인 무상복지를 제공하여 일반국민들이 스스로 서지 못하고 정부에만 매달리도록 만드는 것도 틀림없는 가스라이팅이라 할 것이다.
가스라이팅은 그 피해자의 영혼을 갉아먹는 정신적 학대로서 매우 비열한 행위다. 그러나 그 행위만 가지고 처벌할 수 있느냐에 대하여는 논란이 있다. 물론 피해자에 대한 비정상적인 심리통제를 이용하여 심한 욕설이나 성폭행 등 물리적 2차 가해를 하거나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범죄를 구성하므로 형사처벌을 할 수 있다. 다만 가스라이팅 그 자체만으로는 우리 형법상으로 죄형법정주의라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처벌이 어렵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외국의 경우처럼 법에서 ‘강압적 통제’ 또는 ‘심리지배’라는 개념을 도입, 가스라이팅 그 자체를 범죄로 규정하여 처벌함으로써 피해자 보호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회적 병리 현상을 무조건 법으로 통제하여 해결하려는 사고방식 역시 문제라고 본다. 가스라이팅에 대하여 심리학과 사회학 분야에서 좀 더 진지한 학문적 연구를 깊이 한 다음 이를 토대로 법적 규제 여부를 신중히 검토해야 할 것으로 본다. 우선은 잠재적 피해자들에게 가스라이팅의 실상과 해악을 충분히 알리고 이에 말려드는 것을 막고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잘 이끄는 것이 시급하다고 본다.
이 영화에서 그레고리는 전문가다운 보석 도둑으로서, 그리고 가스라이팅의 가해자로서 매우 치밀하고 완벽하게 그 역할을 다해 나간다.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인 앨리스 엘퀴스트를 살해했으나 외국 왕실로부터 선물 받은 그 보석은 찾을 수 없자 오랜 기간 준비하여 그 상속녀인 폴라에게 접근하기 위해 피아노 반주자로 위장취업을 하고 그녀를 유혹하여 결혼하기에 이른다. 결국 범행 현장인 앨리스의 집에 폴라의 남편이 된 몸으로 돌아와서 보석을 찾는데, 정신적으로 극도로 약해져 있는 그녀로 하여금 더욱 더 자존감을 떨구고 자신에 대하여 믿음을 잃게 만들어 버려 자기를 방해하지 못하게 한다. 그레고리가 들인 가정부 낸시는 그레고리에 맞장구를 치며 주인마님인 폴라를 깔보는 말투를 내뱉고, 나이든 요리사 엘리자베스는 귀가 어두워 그레고리가 다락방에서 보석을 찾으며 내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러니 그들은 그레고리의 가스라이팅 행위를 도와주는 역할만 하는 셈이 된다.
그런데 일반적인 가스라이팅은 피해자의 자주성을 무너뜨려 가해자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음에 비하여 그레고리는 폴라에게는 애초부터 마음에 없었고 오직 보석뿐이었다. 그는 런던탑에 전시된 왕관의 보석을 보고 “보석은 정말 멋진 것이지. 자신만의 생명을 가지고 있어.”라고 읊조리기도 했는데 역시 전문 보석 도둑답다.
가스라이팅에서는 제3자가 개입되면 그 양상이 크게 달라지게 된다. 이 영화에서도 브라이언 캐머런 경위가 나타나면서부터 그레고리의 가스라이팅은 균열되기 시작한다. 앨리스의 열렬한 팬이었던 브라이언은 런던탑 근처에서 외출 나온 그레고리와 폴라 부부를 만나 앨리스를 닮은 폴라를 보고 목례를 하면서 인연이 이어진다. 실은 오래 전 공연장에서 앨리스의 옆에 있던 어린 폴라를 본 일이 있었는데 그때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 브라이언은 폴라의 저택 주변을 서성거리며 탐문을 하기도 하고, 경시청장 보좌관이라는 직함을 이용, 오래 묵은 앨리스 랭퀴스트 살인 사건 미제 수사 서류철을 보기도 하며, 경찰관 한 명을 폴라의 집 주변을 순찰하도록 심어 놓기도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영화는 형사 브라이언이 그레고리를 체포하고 폴라가 악성 최면 같은 그레고리의 조종 상태에서 벗어나면서 미국 영화의 정석대로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참 다행이다. 그런데 박수라도 치고 싶어야 마땅할 텐데 왠지 아쉬운 구석이 남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왜 폴라는 자신이 스스로 일어서지를 못하고 또 다른 남성이 구출해줘야만 자신이 처한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1944년의 시대상황의 한계라고는 하지만 폴라가 자력으로 위기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뭔가 숙제를 남겨놓은 듯하다. 조지 큐커 감독도 이러한 숙제를 의식했는지 20년 뒤인 1964년에 <마이 페어 레이디>를 만들면서는 크게 달라진다. 즉, 언어학자와 대령 두 남자의 도움으로 빈민가의 꽃 파는 미천한 여자에서 완벽한 표준 영어를 구사하는 세련된 귀부인으로 성숙해진 일라이자 두리틀(오드리 헵번)이 이들을 멋지게 걷어차고 자립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관객(특히 여성)에게 통쾌함을 선사하는 것이다(원전으로 삼은 버나드 쇼의 희곡 <피그말리온>의 결말과도 사뭇 다르다).
그렇다. 가스라이팅에 휘말리지 않고 또 이에서 벗어나려면 정면으로 맞서 싸우거나 피해서 도망치라(fight or flight)는 조언을 많이 한다. 그러나 먼저 타인에 의해 내 인생이 좌우되지 않도록 자존감을 지키고 내 삶에 대한 뚜렷한 주인의식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알고 잘 챙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본인뿐인 것이다. 물론 이론적으로 그렇게 말하긴 쉽지만 실제로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말려들지 않거나 벗어나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가해자(흔히 ‘가스라이터’라고 이름 붙이기도 한다)가 워낙 교묘하게 접근하고 조종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피해자도 마음 붙일 곳이 없는 외톨이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하는데 주변에는 가해자밖에 없어 가해자에게 더욱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을 되도록 자주 그리고 많이 만나는 것이 좋다. 가스라이팅의 피해자들은 현실에서 겪는 모든 반응과 경험을 믿지 못하는 상태로 떨어지기 때문에 자신을 피해자로 인지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런데 제3자와 자주 만나 대화시간을 늘리게 되면 ‘나와 가해자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고 그것은 바로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그레고리는 이러한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토록 폴라를 외부와 차단시켰던 것이다. 다만 형사 브라이언이 찾아오는 것은 막을 수 없었으므로 그레고리의 가스라이팅을 무너뜨릴 틈이 생긴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가스등’은 그레고리가 폴라를 심리지배하기 위한 상황 조작의 소도구로 쓰인다. ‘gaslighting’은 본래 가스등에 불을 붙이는 행위다. 그레고리가 다락방에서 가스등에 불을 켜면 가스가 줄어들어 아래층의 가스등 불빛이 희미해져 폴라는 불안해진다. “집안이 왜 이렇게 어두워지죠?”라고 묻는 폴라에게 그레고리는 자신이 가스등을 흐리게 해놓은 장본인이면서도 “그렇지 않아. 당신이 잘못 본 거야.”라며 그녀의 예민함을 꾸며대어 탓하면서 가스라이팅을 해댄다. 그래서 ‘가스라이팅’은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그런데 경관이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안개 낀 런던 거리의 가스등을 켜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 <가스등>을 이번에 다시 보면서 나는 생뚱맞게 아주 옛날 학창 시절에 읊조렸던 김광균의 시 「와사등(瓦斯燈)」의 한 대목이 문득 떠올랐다.
- 내 홀로 어디 가라는 슬픈 신호(信號)냐
그때는 ‘와사등’이 비록 차디차지만 나의 헛된 방황을 끝낼 길을 희미하게나마 비춰주는 작은 등불을 상징하는 걸로 받아들였었다.
시 「와사등」은 영화 <가스등>이 나오기 훨씬 이전인 1936년에 나온 작품이다. 자의적으로 해석을 한 것이었지만 「와사등」은 먼 훗날 한 문학소년(또는 문학청년)에게 정체성의 혼란을 멈추고 홀로서기를 할 수 있는 신호기 역할을 해 주었던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가스등이 반드시 부정적인 상징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형사 브라이언이 폴라로부터 그레고리가 외출한 뒤 조금 있다가 가스등이 깜빡거리며 희미해진다는 말을 듣고 그녀를 그레고리의 마수로부터 구출하고 오래된 살인 미제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도(照度)가 낮은 ‘가스등’은 태양처럼 밝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어두운 절망의 터널 속에서 빠져나올 길을 가르쳐주는 희미한 등불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한편 이 영화에서 가스라이팅의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제3자인 브라이언이 바로 폴라로 하여금 가스라이팅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빛을 내비쳐주는 ‘가스등’일지도 모른다.
영화 <가스등>이 70년이 훨씬 더 지난 오늘날의 관객들에게 그들과 그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한번 점검해 보고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확실히 다질 소중한 기회를 준다면 참으로 고마운 일이라 하겠다.☼
(경제포커스 2022. 1. 13.)
추기(追記): 이 영화에서 맹랑한 가정부로 나와 그 역할을 적절하게 잘 해낸 배우가 바로 한때 <제시카의 추리극장>에서 우리의 사랑을 받았던 ‘할머니 탐정’ 앤절라 랜즈베리다. 이 영화가 데뷔작인데 연기력을 인정받아 바로 아카데미영화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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