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47
9월13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연중 제24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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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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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 하느님이시여, 만사에 있어 당신께 영광이 있어지이다!>
오늘은 교회 역사 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탁월한 명강론가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349~407)의 축일입니다. 그는 초기 그리스도교 정통 교부로 유명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직을 역임했습니다.
지극히 겸손했던 요한이었지만, 뛰어난 강론가이자 성서학자로서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유명세만큼 혹독한 시련과 고통이 생애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성 바실리오와 절친했던 요한은 그를 따라 은수자로서의 수도 생활을 꿈꿨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잠시 꿈을 접었습니다. 자신의 계획을 중단한 그는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며 효도를 다 하다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즉시 광야로 들어가 수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고통과 십자가의 길을 깊이 묵상하며 고행과 극기의 생활로 뛰어들었지만, 결코 균형 감각을 상실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자주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철야나 단식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 속에 불타오르는 하느님의 사랑이 중요합니다. 모든 고행을 그 사랑의 불꽃을 더둑 치열하게 하는 수단으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년간의 철저한 고행은 요한의 건강을 크게 악화시켰습니다. 몸이 너무 아파 더이상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게 된 그는, 어쩔 수 없이 광야를 떠나 고향 안티오티아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요한은 운명적인 만남, 즉 당시 안티오키아의 멜레시오 주교를 만나게 됩니다.
멜레시오 주교는 요한을 보자 마자 즉시 범상치 않은 청년임을 확인하고, 즉시 그를 부제로 서품하였습니다. 부제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과정에서 요한은 오랜 기간 광야에서 갈고 닦았던 성덕과 인품을 자연스럽게 만천하에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4년 후 멜레시오 주교는 극구 사양하는 요한이었지만, 사제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하여 사제품을 받게 한 후 안티오키아 주교좌 성당 주임 설교가로 임명하게 됩니다.
6년간의 광야 생활 가운데 쌓아 올린 탁월한 성경에 대한 요한의 강론은 사람들을 단숨에 사로잡았습니다. 그의 강론을 들은 사람들은 혹시 바오로 사도가 환생하지 않았을까? 하고 의심할 정도로 사목자로서 그의 인품과 학덕, 겸손의 덕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397년 콘스탄티노플 네그다리오 총대주교가 선종하자, 요한은 황제의 간곡한 부탁으로 주교직을 승계합니다. 당시 교회 상황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아리우스파 이단이 기승을 부려 교회에 큰 충격을 가했습니다. 사도 시대의 열렬했던 신앙과 청빈한 삶은 사라지고, 사치스러운데다, 게으르고 냉담한 신자들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평소 엄격한 고행, 그리고 은수 수도자로서의 삶을 추구했던 요한은 그러한 교회 현실 앞에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적어도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콘스탄티노플 교구 안에서만큼은 그런 폐단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며, 요란스럽고 호화스런 모임을 폐지했습니다. 웅장한 주교관 대신 여행자 숙소나 환자들의 수용소를 건립했습니다.
악습에 깊이 빠져버린 사람들 눈에 요한의 모습은 즉시 반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고위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주교, 사제들 가운데서도 성인의 대쪽같은 삶에 큰 불만을 가지고 투덜거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자신의 노선을 꿋꿋이 유지했습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릇된 처신을 하면 인정사정없이 강력한 경고의 조언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에우도시아 황후의 재정적 일탈 앞에서도 직언(直言)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요한은 황제와 황후의 눈에 벗어나게 되었으며, 이런저런 무고와 모함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에서 추방당하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주교로 추대될 때의 엄청난 환영과 박수갈채는 온데간데없고,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비참한 처지가 된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복권되었다가 재차 추방당하는 과정에서 체포되는 순간, 주교좌 성당 앞에 무릎 꿇고 기도를 바친 후 신자들에게 건넨 요한의 고별사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저는 성전(聖戰)을 했고, 달려야 할 길을 달렸습니다. 이제 더는 다시 여러분을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최후로 나는 여러분들이 가끔 나를 위해 간단한 기도나마 바쳐주기를 부탁드립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요한의 말년은 참으로 을씨년스러웠습니다. 유배를 떠나서 어느 정도 정착하려 하면, 황제는 더 열악한 유배지로 그를 유배시켰습니다. 그런 유배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요한은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슬퍼하는 신자들을 격려하고 위로하였습니다.
또 다른 유배지로 떠나는 여행길에 여독에 지친 요한은 길 위에서 세상을 떠나는데, 세상을 떠나기 직전 이런 말씀을 남겼습니다.
“아, 하느님이시여, 만사에 있어 당신께 영광이 있어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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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A1bwdrX0l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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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하는 것을 무조건 얻는 법: 거룩한 무기력감>
박보영 목사 밑에서 자라던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사랑이 너무도 커서 자주 신발 없이 맨발로 집에 오곤 하였습니다. 거지가 신발이 없어 벗어주고 오는 것입니다. 옷과 자기 도시락등 먹을 것을 주고 오기도 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데 길고양이가 버스에 치였습니다. 그는 불쌍한 마음이 들어 버스에서 내려 고양이를 찾았습니다. 고양이는 죽지 않은 모양입니다. 하지만 핏자국이 보였습니다. 고양이는 컨테이너 밑으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고양이를 끌어내어 치료해 주려고 컨테이너 밑으로 손을 뻗었습니다. 그러자 고양이는 소리를 지르며 그 손을 할퀴었습니다. 그래도 그 청년은 피를 흘리면서도 고양이를 잡아 끌어내었습니다. 고양이는 하반신이 거의 떨어져 나간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청년은 고양이를 안고 울면서 동물병원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동물병원은 고양이를 살릴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으로서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기 위해 손을 내미십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것이 자신을 해치려고 하는 것인 줄 알고 손을 피하거나 그 손을 할퀴기까지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도움을 주실 수가 없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청하지도 않았는데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다시 살리신 기적을 세 번 하셨는데 이번이 유일하게 청하지도 않았는데 살려주신 예입니다. 야이로의 딸은 야이로의 청으로, 라자로는 동생 마리아와 마르타의 믿음을 요구하시며 다시 살리셨습니다. 하지만 나인 고을의 과부의 아들은 그냥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살려주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청하지도 않았는데 은총을 쏟아부어 주신 것일까요?
세상에는 많은 고양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왜 버스에 치인 고양이에게 손을 뻗었을까요? 바로 불쌍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누가 불쌍합니까? 청할 힘조차도 없는 무기력감을 가진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심지어 과부였습니다. 그녀는 우는 일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그냥 지나치실 수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자비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거부한다면 어떻게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길거리에서 살던 가출청소년들을 박보영 목사는 집에 데려와 키웠습니다. 처음에는 따듯한 잠자리와 먹을 것, 깨끗한 옷을 입으면 그 아이들은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달 정도 지나면 다시 바깥세상의 자유를 갈망한다고 합니다.
그때 박 목사는 그들이 처음에 입고 있었던 지린내 나는 옷을 다시 입으라고 합니다. 아이들은 코를 틀어막고 그것을 입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손으로 그 옷을 가져다 버립니다. 그다음 목욕을 세 시간씩 한다고 합니다. 박 목사는 이러한 예식을 통해 자신이 아니면 그들은 아무 존재도 될 수 없음을 인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야 무엇이라도 줄 수 있습니다.
자꾸 밖으로 나가면 자신들이 무엇이라도 되는 듯이 생각하고 무언가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어떠한 신앙과 가르침도 줄 수 없습니다. 움직이는 아이에게 예방주사를 놓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은총은 이렇게 그 주사가 아니면 자신은 병에 걸려 죽을 수도 있음을 알고 자신을 무기력하게 맡기는 이들의 것입니다.
소화 데레사가 꿈을 꾸었습니다. 기도와 희생을 통해 모두가 완덕의 계단으로 오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이도 어린 수도자로서 소화 데레사는 한 계단도 못 올랐습니다. 심지어 꿈에서는 자기 나이보다 더 어렸습니다. 아기였습니다. 아기가 오르고 싶은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지켜보시던 예수님께서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소화 데레사를 들어 제일 꼭대기에 놓으셨습니다. 이렇게 가장 먼저 완덕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은총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힘으로 무언가 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시는 분으로 착각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무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주님은 우리를 도와주실 수 없으십니다. 당신은 그저 우리 보조자가 되기 때문이십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느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내가 오늘 복음의 과부의 처지처럼 거룩한 무기력감으로 주님께 나아가고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은총은 이미 받았다고 보아도 됩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야 모든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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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동창모임을 다니면서 우리가 여러 면에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먼저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입니다. 새벽형인 저는 4시면 일어나서 움직이는 편입니다. 그런 저의 모습이 다른 동창들에게는 약간 이상하게 보일 것 같습니다. 음주에 대해서도 저는 식사를 하면 반주를 즐겨하는 편입니다. 술을 하지 않는 동창들에게 저는 약간 이상하게 보일 것 같습니다. 저는 여행을 다닐 때도 옷을 많이 가지고 다니지 않는 편입니다. 늘 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제가 동창들에게는 약간 이상하게 보일 것 같습니다. 오랜 만에 만난 동창들에게서 제게는 없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동창은 음식을 뚝딱 금세 만들었습니다. 저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동창은 국내 정치상황을 나름대로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도저히 따라 갈 수 없었습니다. 어떤 동창은 손재주가 좋았습니다. 만지면 문제가 해결되곤 하였습니다. 저는 도저히 따라 갈 수 없었습니다. 어떤 동창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였습니다. 지루할 것 같은 시간들이 즐거운 시간으로 변했습니다. 저는 도저히 따라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배가 산으로 가지 않았던 것은 서로의 다른 점을 인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운 마음을 이야기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장례행렬을 보셨습니다. 슬픔에 찬 가족들을 보았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어둠에 빛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며칠 전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음식을 주문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종업원은 주문이 잘못 전달되었다고 곧 갖다 드린다고 하였습니다. 조금 있으니 주인이 왔습니다. 주인은 정중하게 사과를 하고, 주문 한 것 이외의 음식을 더 주었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다른 것으로 보상을 해 주었습니다. 자칫 기분이 나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인의 솔직한 사과를 받은 후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주인은 모든 테이블을 주의 깊게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이상한 느낌이 들어도 곧 와서 손님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습니다. 음식도 맛이 있었지만 주인의 그런 세심한 배려가 있기에 손님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모든 신경이 아이에게 향해 있습니다. 엄마는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배고 고픈지, 옷에 실례를 했는지, 자고 싶은지 알고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저는 아이가 왜 우는지 모릅니다. 엄마만큼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 병든 이, 헐벗은 이, 외로운 이, 슬픔 중에 있는 이들에게 모든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가 자비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첫째는 나 자신이 중심이 되려는 교만함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판단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많은 죄악들은 하느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욕심을 먼저 생각한 교만에서 시작됩니다.
둘째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열등감입니다. 지난날의 잘못과 죄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열등감은 우리를 영성생활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우리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양털같이 희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자비의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은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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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7,11-17: 젊은이여, 일어나라
예수께서는 나인이라는 곳에 가시다가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주신다. 죽은 사람이 과부의 외아들이라는 사실이 슬픈 상황이다. 백인대장의 경우에는 병을 고쳐달라는 청을 받으시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부탁드리지 않았는데 주검 가까이 가신다. 예수님은 과부에게는 눈물을 빨아들이는 해면이 되셨고, 아들에게는 생명이 되셨다. 죽은 사람을 땅에 묻으러 가고 있었다. 이 상여 길에서 생명이요 부활이신 그리스도를 만난다. 그분은 죽음과 부패를 이기신 분이시다. 그분은 과부의 눈물이 그치도록 자비를 베푸신다. “울지 마라.”(13절) 여인을 울게 했던 원인이 그 말씀과 함께 사라졌다.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고통과 기쁨에 함께하시며, 결국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분임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인간의 슬픔을 함께 나누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상여에 손을 대시고 상여를 멈추셨다(14절). 그리고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14절) 명령하셨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 젊은이에게 생명을 되찾아 주셨다. 이렇게 다시 살아난 아들이 어머니 품에 안기게 되었다.(15절) 예수께서는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소외당하는 많은 사람에게 특별한 애정을 보여주심을 알 수 있다. 구원은 우리 인간이 무슨 자격이 있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은 언제나 우리에게 내려지지만, 그것을 알아보고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몫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군중들의 반응을 보면 처음에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하면서도 그것이 즉시 하느님을 찬양하는 말로 바뀐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16절) 한다. 나인의 과부의 외아들은 아무도 생각지 못한 놀라운 방법으로 살아났으며, 그 기적은 온 유다와 그 주변 온 지방에 퍼졌고 모두가 감탄했다. 놀라운 기적 앞에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신앙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이 말은 우리가 항상 조그만 일에서도 하느님께 감사하며 그분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가장 큰 기적은 무엇이라고 했는가?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 변화하는 것이다. 내가 먼저 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나 세상이 변할 수 없다. 나 자신의 진정한 변화의 기적을 청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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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예수님께서 어떤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이야기는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생명의 주인’이라는 말은, 사람을 살리거나 죽이는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권한과 권능은 육신의 생명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도 작용하는 권한과 권능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육신의 생명에 대해서도, 또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도, 그 생명을 주거나 주지 않을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이 말을 간단하게 줄이면,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예수님만)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의 출발점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고, 그렇게 사는 것의 출발점은 예수님만 믿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2코린 5,1) 우리는 임시 거처일 뿐인 ‘천막집’에 대해서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영원한 집에 들어가서 살 ‘자격’을 얻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그 집을 마련하셨지만, 아무나 그 집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그 뒤에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루카 7,11-15)
‘과부의 젊은 외아들’이라는 말에서 ‘십자가 밑에 서 계신 성모님’이 연상됩니다. 성모님도 과부였고, 예수님도 ‘젊은 외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의 관을 따라가며 울고 있는 과부의 심정은, 십자가 밑에 서서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았던 성모님의 심정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것은, 어쩌면 당신의 십자가 수난 때 성모님이 겪게 될 고통을 미리 생각하셨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가엾게 여기신 사람은 ‘죽은 젊은이’가 아니라, 그 젊은이의 어머니입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가장 크게 슬퍼하고 아파하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성모님이 예수님보다 더 큰 고통을 겪으셨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죽은 사람 자신이 얼마나 슬퍼하는지를 모르긴 합니다. 죽은 사람 자신도 슬퍼할 것이고 고통스러워하겠지만, 그래도 그것은 저쪽 세상에서의 일입니다.>
이 이야기에 대해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사람의 죽음이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라면,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일은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일이 처음부터 하느님의 계획이었고 뜻이었다면, 다시 살리려고 일부러 죽게 하신 것인가?” 하느님과 예수님은 항상 하나로 일치되어 있고, 예수님의 일은 곧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요한 5,19) 따라서 ‘예수님의 일’ 가운데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일은 하나도 없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겉으로 어떻게 보이든지 간에,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려고 그 사람을 일부러 죽게 한 것은 아니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바치신 기도가 그런 의문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1,41-42) 이 기도로 모든 의문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기도는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다면 살고 죽는 것을 모두 예수님께 맡겨 드려야 한다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줍니다. <아직까지도 인간 세상의 슬픔과 고통은 수수께끼(신비)로 남아 있는데, 그 수수께끼를 풀 열쇠를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그 어머니에게 ‘기쁨’을 돌려주셨다.”로 해석됩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하고 참된 기쁨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루카 7,16-17)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라는 말은 당연한 ‘진리’인데, 당시 사람들이 이 말을 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 내렸다.” 정도의 뜻으로 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은총을 하느님 대신에 전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이 직접 은총을 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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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구약 시대에도 죽었다가 살아난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엘리야가 되살린 사렙타 과부의 아들(1열왕 17,17-24 참조), 엘리사가 되살린 수넴 여자의 아들(2열왕 4,18-37 참조), 엘리사의 유해에 닿아 되살아난 주검(2열왕 13,20-21 참조) 등이 있는데, 이들은 잠시 ‘소생’하였다가 때가 되면 다시 죽을 이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소생’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견줄 바 못 되지만, 분명 죽은 이를 다시 살린 이 행적은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을 드러내는 강력한 표징이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남편이나 장성한 아들 같은 법적 보호자가 없는 과부는 으레 고아나 이방인처럼 절대 빈곤 계층으로 전락하기 일쑤였습니다. 나인에서 예수님께서는 삶의 유일한 의미인 외아들을 잃고 상여를 따르며 슬피 우는 과부를 가엾이 여기셨고, 아들을 되살려 어머니에게 돌려주셨습니다. 다른 기적들과 달리 당신께 신앙 고백이나 간절한 청원을 드리는 이도 없었고, 더구나 관에 손을 대실 때에는 주검과 접촉하는 것을 심각한 부정으로 여기는 율법마저(민수 19,11-19 참조) 거스르셔야 하였는데도 말입니다. 이 기적은 주님께서, 죽음이 삼켜 버린 지독한 고통 속에 ‘주님, 살려 주십시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칠 기력조차 없는 이를 그 누구보다 가엾이 여기시는 분이심을, 서둘러 다가가 그를 생명과 구원으로 채워 주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여실히 보여 줍니다.
한 분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을 이루는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소중한 지체입니다(제1독서 참조). 어쩌다 삶에서 생기를 잃고 잠시 어둠을 겪고 있다면, “젊은이야, 일어나라!” 하고 명하시는 그분의 손을 잡고 힘차게 일어나 다시 생명의 길을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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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기적을 부르는 믿음>
"죽은 자식 불알 잡기"라는 말 들어 보셨습니까. 죽은 후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이고 그래봐야 다시 살아날 수 없으니 아쉬움을 접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되는 일이 오늘 복음에 발생했지요.
한 과부가 외아들이 죽자 장례를 지내려 상여를 따라 갑니다. 마침 나인이라는 동네를 가고 계시던 예수님께서 슬픔에 잠겨 떠나가는 상여와 마주치시지요. 측은한 마음이 드신 예수님께서는 과부를 위로하시며 젊은이를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십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옛 예언자들 중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하고, 하느님의 사람이 찾아와 주셨다고도 하며 깜짝 놀란 반응을 보이지요.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기적은 오늘 복음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서도 전해지는 사건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과부와 고아는 이방인과 함께 사회의 가장 밑바닥 층에 속하는 약자들입니다. 아무데도 의지할 곳 없는 이들은 재산과 권리조차도 제대로 행사할 수 없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과부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은 그 아들이었고 그가 생의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마저 죽음에 빼앗겨 버리는 일이 일어났지요.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약자들의 보호자이심을 드러내기 위해 성경 저자들은 구약과 신약에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내는 기적을 연이어 언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약과 신약성경에서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는 기적이 열왕기 상권 17장과 오늘 복음인 루카 복음 7장에 언급되고 있지마는 배경과 주제는 전혀 다릅니다.
열왕기 상권 17장에는 엘리야 예언자에게 먹을 것을 준 사렙타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숨지는 일이 일어나지요. 이때 엘리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소리쳐 부르며 죽은 아이 위에 엎드려 몸과 몸을 맞추기를 세 번 합니다. 이는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에 따라 생명의 힘이 산 사람에게서 죽은 사람에게로 옮겨간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엘리야가 세 번 몸을 맞추기를 했습니다만 여기에서의 핵심은 엘리야의 기도입니다.
"주 저의 하느님, 이 아이 안으로 목숨이 돌아오게 해 주십시오."(1열왕 17,21) 그러자 하느님께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죽은 아이에게 다시 생명의 호흡을 주셨고, 마침내 아이는 살아났습니다. 하느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기적을 일으키셨지요.
반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슬픔에 잠겨 떠나가는 상여를 멈추시고ㅈ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마라."(루카 7,13)고 위로하시며 앞으로 다가서십니다.
그리고는 상여를 메고 가던 사람들의 걸음을 멈추게 하시고 상여에 손을 대며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14)고 명령하십니다. 그러자 '죽은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루카 7,15)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어머니에게 돌려주시지요. 이렇듯이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와는 전혀 다르게 직접 당신의 힘으로 죽었던 과부의 아들을 살려내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하고 말하기도"(루카 7,16)하지요.
예수님의 이 이야기는 곧 온 유다와 그 근방에 두루 퍼져나갔습니다. 구약에서는 엘리야가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도움을 청했지만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직접 죽은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과부의 외아들을 직접 살려 주시는 사건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예수님의 출현과 함께 이 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하느님 나라는 죽은 후에나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실천되는 그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래 전 인도에서 살았던 현자 썬 다싱의 이야기입니다. 네팔을 여행하다가 썬 다싱은 히말라야 산맥이 위치한 곳에서 우연히 한 여행자를 만나게 됩니다. 눈보라를 헤치며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가고 있던 그들은 눈밭에 쓰러진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썬 다싱이 갈등 끝에 그 사람을 데리고 가자 하자, "미쳤군요, 우리도 죽을 판인데… 우리는 인가를 찾아야만 살 수 있습니다." 하며 동행자는 서둘러 떠나고 말았습니다.
썬 다싱은 죽을 각오를 하고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죽어가는 사람을 등에 업고 한 발자국씩 혼신의 힘을 다해 걸어갔습니다.
얼마를 가다보니 몸이 훈훈해졌고 등에 업혀 있던 사람도 깨어났습니다. 둘은 몸을 밀착하여 서로의 온기를 받으며 앞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동녘이 밝아오자 그들은 인가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쯤 가다가 싸늘하게 식은 시신을 발견하였습니다. 혼자 살겠다고 먼저 간 사람이 마을 어귀에서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이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곳에 기적이 일어나고 새로운 희망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죽은 이도 일으켜 살리시는 하느님 나라는 구약이나 신약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은 지금 우리 안에서도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말씀으로 오신 그 분을 믿고, 그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고통받는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희망을 되찾아 주는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이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인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내 방식을 고집하고 내 능력대로 살고 싶어하면서 기적을 바라는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지요.
그런 삶의 자세에서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절망에서 희망을 부르는 기적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인간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이루는 기적을 불러오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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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병수 루카 신부님]
오늘 복음은 나인이라는 동네에 죽은 외아들의 과부와 만나는 장면입니다. 당시 가부장적인 유다 사회 안에서 과부라는 것만 해도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거기다 외아들까지 잃었으니 더 이상 할 말이 필요 없습니다. 과부가 느낀 슬픔은 절망 그 자체였고 죽음보다 더한 슬픔이었습니다.
남편을 여의고 나서 여인에게 펼쳐진 고통의 세월은 그나마 견딜 수 있었습니다. 외아들이란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것입니다. 과부의 삶은 외아들의 죽음으로 이제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과부의 통곡소리가 얼마나 크고 슬펐던지 나인 동네 곳곳에 그 소리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너무도 안쓰러운 나머지 너나 할 것 없이 장례 행렬에 참여하여 큰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이런 과부의 절망적인 슬픔을 측은히 여기신 예수께서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도 큰 슬픔에 잠겨있는 과부의 얼굴을 눈여겨보신 예수께서는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다가가십니다.
지칠 대로 지친 과부의 어깨에 손을 엊으시며 따듯이 위로해 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슬픔의 원천인 죽음마저 물리치십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왜 사랑하시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고통, 우리의 상처, 우리의 부끄러움, 우리의 한계, 우리의 과오, 우리의 실수, 우리의 치부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오늘 이 과부의 애절한 울부짖음을 예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상여의 행렬을 멈추게 하시고, 과부에게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그 과부의 크나큰 슬픔을 안쓰러워하시며 과부를 위로하십니다. 그리고 이미 죽은 지 오래되어 관에 넣어진 채 무덤으로 향해 가는 과부의 아들을 살리십니다.
참으로 주님의 손길은 생명의 손길이요 축복의 손길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이제 죽음의 행렬이 생명의 행렬로, 슬픔의 행렬이 기쁨의 행렬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참으로 필요한 우리의 자세는 바로 나인 동네의 과부와 같은 간절한 심정을 지니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오실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우리를 향해 다가오실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슬픔을 아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오셔서 우리를 향해 "울지 말라."고 다정하게 우리의 등을 두드리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노력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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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승훈 루카 신부님]
<‘과부의 처지를 가엽게 여겨’>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이미 죽어 장례를 치루고자 사람들이 메고나온 어떤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주시는 사건을 들려줍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인이라는 곳은 예수님의 고향 땅 나자렛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나라렛에서 걸어서 두어 시간 거리에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함께 나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장례 행렬을 만나게 됩니다.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장례행렬의 사연을 알게 된 예수님은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주십니다.
복음은 그 이유를 ‘과부의 처지를 가엽게 여겨’ 서라고 말합니다. 복음의 이 말씀 속에서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한없는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의지할 것이라고는 아들 하나 밖에 없던, 가난하고 힘없는 여인인 과부의 처지를 가슴아파하시며, 그 여인에게 아들을 돌려주시려 작정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살아난 젊은이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을 목격하게 될 때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너무 놀라운 일을 목격하게 될 때,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될 때, 사람들은 감격을 넘어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나인의 젊은이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예수님은 절망 속에 울고 있는 과부에게 희망을 주셨듯이, 인생의 여정 속에 죽음과 같은 절망을 체험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희망의 손길을 내어 뻗어십니다.
우리는 때대로 우리의 삶이 우리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다 우리의 능력의 한계를 체험하게 될 때, 고통스러워하며 절망하게 됩니다. 심지어 하느님의 원망하기까지 합니다. 한걸음 물러서 보면 인간의 삶은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라도, 누구나 이겨내어야 고통을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불완전함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절망하게 될 때, 나인의 젊은이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예수님을 기억합시다.
고통 속에서도 우리가 주님께 믿음을 잃지 않을 때 자비하신 주님은 죽음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우리를 구해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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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된 삶>
루카 7,11-17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참된 삶>
가고픈
길을 가다가
아픈 사람을 만나면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사람에게
다가가는 겁니다
가엾은 마음으로
그 사람과
함께 아파하는 겁니다
함께 아픈 만큼
그 사람의
곁이 되어주는 겁니다
곁이 되어줌으로써
그 사람을
낫게 하는 겁니다
길을 가다가
아픈 사람을 만나면
또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더 이상 갈 수 없을 지라도
아픈 사람을 만나서
가던 길을 멈추고
함께 하는 곳
그곳이
바로
가야할 곳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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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은 기적을 낳는다>
때때로 하느님께서 기적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좀 더 확실히 보여주면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또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새 생활을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기적을 보여주면 오히려 두려움을 느낄까요? 어찌 되었든 당장 내가 요구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기적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기적을 행하셨고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을 지니셨지만, 그분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주님과 하나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도 어디에서 신비한 현상이 일어났다고 하면 기어이 쫓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신비한 현상을 보고 믿음이 성장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그때뿐입니다. 열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기적을 통해서 주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알맹이에는 관심이 없고ㅈ기이한 현상에만 눈길이 머물러있습니다.
그들은 실천 없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믿고자 하는 이들에게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기적이 믿음을 성장시키기보다는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기적이나 신비한 현상을 보거들랑 하느님께 대한 합당한 두려움으로 죄를 피하고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새롭게 눈뜨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루카 7,13).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괴로움을 겪고 있는 백성을 차마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청하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죽은 젊은이를 일으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아파하는 당신 백성을 보시고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슬픔을 없애 주십니다. 우리도 제대로 보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가끔 나는 사람들에게 ‘거지에게 동냥을 줘봤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들이 ‘예’라고 대답하면, 나는 ‘당신은 동냥을 줄때 그 사람의 눈을 바라봤나요? 아니면 그들의 손이라도 잡아주었나요?"라고 되묻습니다.
눈을 맞추고 손을 잡아야 그들과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은 단지 돈만 던져주고 가버리거든요”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의 필요를 채워주었듯이 우리도“보고”마음의 공명을 이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능력에 찬 말씀으로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그분 안에 머물면 능력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4) “하느님께서 당신의 힘을 펼치시어 나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에 따라, 나는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에페3,7) 하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기적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총에 힘입어 주님의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내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주님께서 어려운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셨듯이 믿음으로 그들을 챙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행동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신비한 현상은 어디에나 있어도 믿음은 어디에나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길이 기이한 현상이 아니라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께로 모아지길 바랍니다. 은총 덩어리보다 은총의 주관자를 만나는 기쁨에 감사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사랑을 외치는 예언자이셨듯이 우리도 세상의 예언자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이사 40,31)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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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누가 사람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앵’하고 태어나, ‘휙’하고 살다가, ‘억’하고 죽더라.” 맞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인생이 긴 것 같지만,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갑니다. 얼마 전에 서울 신학교 동창 신부가 강화에 찾아왔습니다.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오랜만에 옛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서울 신학교 다닐 때의 사건 사고를 이야기했고, 또 재미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실컷 웃었습니다. 그런데 엊그제에 있었던 일처럼 생생한데 벌써 30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에 하늘 같았던 교수 신부님들보다도 더 나이가 많은 지금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기다릴 때 가장 생각나는 것은 무엇일까요? 돈? 명예? 권력? 그 모든 것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유일한 ㅅ것이 기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좋은 기억을 많이 간직하는 사람은 죽음 앞에서 의연해질 수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최후의 순간에 어떤 기억을 떠올릴 것 같습니까?
고을 성문에서 두 행렬이 마주쳤습니다. 하나는 마을로 들어가는 예수님의 일행이었고, 또 하나는 마을에서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이었습니다. 죽은 이는 한 과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그 과부는 남편을 잃고 아들 하나를 바라보며 유일한 희망을 걸고 살아왔을 것입니다. 이제 그 아들마저 잃은 이 여인의 처지는 어떠했을까요? 당시는 여자 혼자서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셨던 것입니다. 외아들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만히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죽음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 죽음 앞에서 힘든 기억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서 있는 외아들의 어머니를 가엾이 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울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고 명령하십니다. 구원의 행위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서도 주님께 대한 사랑의 기억을 만드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아닌 다른 기억만을 만들면, 결국 후회를 남길 수밖에 없는 삶이 됩니다. 그러나 구원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시는 분이시기에 주님께 대한 기억이 구원의 큰 선물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할 일이 있다는 것. 그게 바로 살아 있는 거라고 그녀는 말했다.(천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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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람을 찾아오시는 하느님>
- 생명, 일치, 찬양 -
강론 쓰기전 우선 생각하는 것이 강론 주제를 나타내는 제목입니다. 방금 읽은 오늘 복음을 요약하는 알렐루야 복음 환호송이 은혜롭습니다. “우리 가운데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 바로 여기서 착안한 강론 제목 ‘사람을 찾아오시는 하느님’입니다.
‘사람을 찾는 하느님’(이현주 역)은 유대인 랍비 신비주의자 아브라함 여호수아 헤셀의 작품으로 제가 오랜동안 밑줄치며 메모하며, 열광하며 읽었던 책명이기도 합니다. 읽을 때 마다 늘 새로운 가르침과 깨우침을 얻었던 책입니다.
우리 수도자를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라 정의하는데, ‘하느님을 찾는 사람’만 있는게 아니라, 반대로 ‘사람을 찾는 하느님’도 있습니다. 사람을 찾아오신 하느님이기에 비로소 하느님을 찾는 삶이 가능해졌습니다. 바로 이를 노래한 제 예전 짧은 자작 애송시가 생각납니다.
“나무에게 하늘을 가도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1997.2
그러니 하느님을 찾는 고단한 구도求道의 삶을 잠시 멈추고 하늘을 담는 호수처럼, 찾아오신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관상적 휴식을 즐기자는 요지의 시입니다. 찾아오시는 겸손한 사랑의 하느님이 바로 예수님이요 성령님이요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환대하여 마음속 깊이 모시는 참으로 복된 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기도하듯이 “오소서 예수여”, “오소서 성령님”을 노래하기도 합니다.
“오소서 주 예수여, 이 마음에 오소서.”(성가153)
“오소서 성령이여, 우리 맘에 오소서.”(성가142)
'오소서, 주 예수님' '오소서, 성령님' 바로 제가 호흡에 맞춰 기도하는 성구(만트라)입니다. 이리하여 그리스도를 호흡하며 사는 삶이 실현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시는 일화입니다. 복음의 청중들은 물론 미사에 참석한 우리 역시 예수님이 바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오로지 희망을 걸었던 외아들의 죽음은 과부 어머니에게 얼마나 큰 슬픔이었을까요!
오늘 복음 장면이 그림처럼 선명합니다. 죽음의 대열과 생명의 대열이 조우遭遇합니다. 그대로 파스카의 기적이 일어나기 직전입니다. 생명과 빛, 희망의 대열을 상징하는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과 외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죽음과 어둠, 절망의 대열을 상징하는 과부 일행의 극적인 만남입니다.
우연이 아닌 분명 과부의 울부짖음이 하느님께 도달되어 마침내 예수님이 찾아오셨으니 그대로 섭리의 은총입니다. 다음 그림처럼 선명한 감동적인 대목은 그대로 예수님을 통한 자비로운 하느님의 개입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얼마나 멋진 예수님이신지요! 바로 하느님은 이런분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으로 파스카 신비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순간 죽음은 생명으로, 어둠은 빛으로, 절망은 희망으로 돌변한 것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이 바로 생명의 하느님이심을 입증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그대로 반영하는 예수님은 그대로 하느님의 현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강조하신 하느님의 세 특성이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 드러납니다. ‘가까이 계심(closeness)’, ‘연민(compassion)’, 그리고 ‘부드러움(tenderness)’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가까워질수록 예수님처럼 우리도 연민과 부드러움, 겸손과 지혜의 사람이 될 수 있고, 우리 모두의 소망이기도 할 것입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오늘 복음의 핵심 말마디이며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을 향한 명령입니다. ‘일어나라’는 말마디는 부활에 쓰이는 단어입니다. 살아있다 하나 실상 영혼은 시들어 죽어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바로 이런 우리들을 영적 죽음으로부터 살려내는 말씀입니다. 흡사 나자로를 살려낼 때 “라자로야 나오너라”(요한11,43)는 장면을, 회당장의 딸을 살리실 때 “탈리타 쿰, 소녀야 일어나라”(마르5,41)는 은혜로운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무기력, 무의욕, 무감각한 마음이 들 때, 좌절감이나 자포자기 절망감이나 원망, 실망하는 마음이 되어 영혼이 시들어 죽어간다 생각될 때 지체없이 “젊은이야, 일어나라.” 주님의 말씀을 연상하여 즉시 일어나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앞에 모든 이가 ‘젊은이’이기 때문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것이 바로 파스카의 삶입니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대죄라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이렇게 넘어지면 즉시 일어나 다시 시작해야 영적탄력도 영적감성도 손상되지 않습니다. 우울증이나 치매에도 걸리지 않습니다. 곤경에 처할 때 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파스카의 예수님이 계시기에 이런 파스카의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은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셨듯이 우리 하나하나를 살리시고, 이어 공동체에 일치와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나인 몸과 여러 지체들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한 몸 공동체에 대해, 또 교회의 다양한 은사에 대해 귀한 가르침을 줍니다.
주님은 우리를 살리실 뿐 아니라 살아 있는 유기적 그리스도의 한 몸 공동체로 만들어 주시며 공동체의 세가지 특징은 일치성, 다양성, 연대성입니다. 이런 상호보완의 일치와 평화의 공동체는 그대로 하느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바로 다음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하느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이들을 첫째가 사도들이고 둘째가 예언자들이며, 셋째가 교사들입니다.”
이어지는 공동체 형제들의 받은 은사가 모두 주님의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정말 ‘신의 한 수’와도 같은 주님의 선물들로 이뤄진 여기 우리 수도공동체입니다. 살아갈수록 공동체 형제들에 대한 고마움도 날로 커집니다. 그리하여 변함없는 제 고백이 지금도 여전히 게시판에 붙어 있습니다.
“저에게 가장 큰 스승은 여기 몸담고 살아가는 수도공동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똑같은 부활과 생명의 주님께서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살리시고 공동체에 일치와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이에 대한 감사의 응답은 무엇일까요?
하느님께 찬양과 찬미를,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주님을 뵌 군중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했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움이 아닌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찬양과 찬미를, 영광을 드립니다. 바로 우리의 마땅한 응답이요, 그리하여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은 동방 4대 교부들(아타나시오, 바실리오, 요한 크리소스토모, 나지안죠의 그레고리오)중 하나인 개혁가이자 예언자이자 교회학자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학자 기념일입니다. 참으로 전폭적으로 신자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파란만장한 삶에 탁월한 설교로 ‘황금의 입’이라 금구金口라는 불리는 성인으로 설교자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수차례의 유배중 마지막 유배시 임종때의 일화도 감동적입니다. 전설적인 신비스런 일화를 소개합니다. 마지막 임종처는 순교자 바실리쿠스(+311) 작은 경당입니다.
임종하던 날 밤, 순교 성인 바실리쿠스가 꿈에 요한 크리소스토모에게 나타나 “마음을 편히 가지시오. 요한 형제, 아침이면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오.” 말했다 하며, 이 꿈에 앞서 바실리쿠스 경당 사제에게도 꿈에 나타나 “요한 형제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게. 그가 오고 있네.”라고 말했다 합니다. 새삼 우연은 없고 자비로운 하느님의 섭리하에 있는 믿는 이들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임종시 장면입니다.
요한은 흰 수의를 덮어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자기 옷은 그가 감격스럽게 읽었던 위대한 은수자 안토니오를 본받아 둘러서 있는 사람들에게 선사합니다. 그런 다음 마지막 임종기도를 바칩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 찬미받으소서.”
또는 이를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만 결국은 같은 내용입니다. 평생 하느님께 찬양과 찬미, 영광을 돌렸던 삶의 요약과도 같은 임종어는 흡사 수도원 정문의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이란 성규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강요된 고통으로 사망할 당시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나이는 대략 58세였다 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새 생명과 일치, 평화를 선물하시며, 우리는 주님께 감사의 찬양으로 응답하는 복된 시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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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14)
<측은지심이신 예수님!>
오늘은 설교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루카 7,11-17)은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의 '죽은 과부의 외아들을 다시 살리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불쌍한 처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그의 죽었던 외아들을 '말씀으로' 다시 살리십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오늘 복음은 우리를 향한, 불쌍한 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측은지심'을 드러냅니다. 과부와 다른 사람들의 믿음이나 간절한 청은 나오지 않고, 오직 불쌍한 사람을 가엾이 여기시는 '예수님의 측은지심' 만이 드러납니다.
측은지심이신 예수님께서 죽은 불쌍한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리시자,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루카 7,16) 그리고 예수님의 이 이야기, 곧 복음이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갑니다.
나인의 불쌍한 과부에게 측은지심이 되어주신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의 측은지심'이 되어주십니다. 그 주님께서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죽고 싶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외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노라.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시다."(1코린 1,23-24/ 복음환호송)
당신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신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들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십자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니 얼른 다시 일어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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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KfDCBk_I8J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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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 14)
삶도 죽음도
사랑도 이별도
생명의 주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생명의 주님을
모른채
살았습니다.
일으켜 세우시고
일어나게 하시는
생명의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 안에서는
그 어떤 생명도
버려지는 일이
없습니다.
소중한 사랑을
되돌려 놓으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생명없는 이별
사랑없는 이별을
아파합니다.
사그라들지 않는
뜨거운 사랑을
다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젊은이의 사랑을
다시 살리십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이들의 것입니다.
빼앗아 갈 수 없는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사랑은 지금 여기
이곳에 함께 합니다.
우리에게는 다시
사랑하게하시는
다시 살게하시는
사랑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루카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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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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