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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변증법/ 오봉옥
잊을 수 없는 것들은
제 스스로
걸어오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붉은 신호등 앞으로
또 찾아올 건 뭐람
남영동 대공분실 수사관이
취조를 하다 말고
욕조에 물 받는 소리보다 더
귓속을 파고들어
쟁쟁거리며 울리던 것은
면회 온 누이의 말
아부지가 먼산바라기로 살고 있시야
하필 건널목에서
막걸리에 취해
게걸음으로 걸어갈 게 뭐람
고추바람 부는데
뒤차가 경적을 울리는데
죽어서도 나를
걱정하고 계시는지
잠자리가 꿉꿉한 건 아닌지
아버지를 한번 찾아뵈어야겠다
아니 구두끈을 조이고
더 열심히 살아
이제는 정말
아버지를
보내드려야겠다
⸺계간 《시산맥》 2018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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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옥 / 1961년 광주 출생. 1985년 창작과비평사 『16인 신작시집』에 「내 울타리 안에서」 외 7편을 발표하면서 등단. 시집 『지리산 갈대꽃』 『붉은산 검은피(상, 하)』 『나 같은 것도 사랑을 한다』 『노랑』 『섯!』.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문학의 오늘》 편집인.
어미 쥐의 말씀 / 오봉옥
저 죄 많은 두 발 짐승은 시인이란다. 끼끼, 시를 쓴답시고 지금 동강을 간단다. 절집을 찾는단다.
저들이 느릿느릿 게걸음질치는 건 꽃길에 취해서가 아니란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건 속죄의 옷자락이 무거워서란다.
저들에겐 고통을 키우는 유전자가 있단다. 너희는 아득한 구멍 속에서 캄캄한 희열을 느끼지만 저들은 환한 길을 가면서도 터널 같은 외로움을
느낀단다. 이 어미의 눈엔 저들의 내장까지도 보인단다. 저들이 가고 있는 길, 밑도 끝도 없이 꿈을 꾸며 가야할 길, 가서는 다시 돌아올 그 길이 다 보인단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두 발 짐승으로 태어났을꼬, 몇 생이나 닦아야 우리 같은 존재가 될꼬.
내일을 여는 작가 (2004년 가을호)
노랑 / 오봉옥
시작은 늘 노랑이다. 물오른 산수유나무 가지를 보라. 겨울잠 자는 세상을 깨우고 싶어 노랑별 쏟아낸다. 말하고 싶어 노랑이다. 천개의 입을 가진 개나리가 봄이 왔다고 재잘재잘, 봄날 병아리 떼 마냥 종알종알, 유치원 아이들 마냥 조잘조잘, 노랑은 노랑으로 끝나니 노랑이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있어 잠든 아이를 내려놓듯이 노랑꽃들을 내려놓는다. 노랑을 받아든 흙덩이는 그제야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초록으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노랑이 저를 죽여 초록 세상을 만든 것.
공놀이 / 오봉옥
한 아이가 학원도 가지 않고
달을 차고 논다.
발끝으로 톡톡 건드리다가
질풍처럼 몰고 가기도 하고
하늘 높이 뻥, 내지르기도 한다
그 순간 달은 집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저 혼자 노는 아이가 안쓰러워
다시금 풀밭에 통통통 떨어진다.
아이는 오늘
처음으로 세상의 주인이 되어
달을 차고 논다.
골키퍼가 되어 짐승처럼 웅크리기도 하고
패널티킥을 실축한 선수가 되어
연신 헛발질하는 흉내를 내다가도
어느새 다시 골 넣은 선수가 되어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리며
겅중겅중 춤추듯 걷는다.
어라,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되었지?
아이가 달을 숨겨놓으려는 속셈으로
공중으로 뻥 차올리자
구름 벗겨진 하늘이 그것을 날름 받아
시치미 뚝 떼고 하늘가에 내놓는다.
거미와 이슬 / 오봉옥
거미의 적은 이슬이다
끈끈이 점액질로 이루어진 집은
이슬의 발바닥이 닿는 순간
스르륵 녹기 시작한다
눅눅해진 거미줄로는
그 무엇도 붙들 수 없어
허공을 베어 먹어야만 한다
거미는 숙명적으로
곡마단의 곡예사가 된다
가느다란 줄에 떼지어 매달리는 이슬을
곡예사가 아니고선
다 털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슬의 살은 공처럼 부드럽다
곡예사는 이슬을 발가락 끝으로 통
통 퉁겨보기도 하고
입으로 빨아들여 농구공처럼 톡
톡 내쏘기도 한다
작은 물방울들을 눈덩이처럼 굴려
크게 만들어놓은 뒤
새총을 쏘듯이 거미줄을 당겼다 놓아
다시금 새하얀 구슬들로 쏟아지게도 한다
이슬을 다 걷은 거미는
괜시리 한번 거미줄을 튕겨본다
오늘도 바람이 불면 그물망 한 가닥
기둥처럼 붙잡고 흔들릴 것이다
그뿐인가,
팽팽한 줄이 퍼덕이는 순간
회심의 미소를 짓기도 할 것이다
— 시집 『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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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던지는 동안 / 오봉옥
1
그대 앞에서 눈발로 흩날린다는 게
얼마나 벅찬 일인지요
혼자서 가만히 불러본다는 게,
몰래몰래 훔쳐본다는 게
얼마나 또 달뜬 일인지요.
그대만이 나를 축제로 이끌 수 있습니다
2
그대가 있어 내 운명의 자리가 바뀌었습니다
그댈 보았기에 거센 바람을
거슬러 가려 했습니다
발가락이 떨어져나가는 아픔도 참고
내 가진 모든 거 버리고 뜨겁게
뜨겁게 흩날리려 했습니다.
그대의 옷깃에 머물 수 있다면
흔적도 없이 스러져가도 좋았습니다
3
그러나 나에겐 발이 없습니다
그대에게 어찌 발을 떼겠습니까
혹여 그대가 흔들린다면,
마음 졸인다며,
그대마저 아프게 된다면 그건
하늘이 무너지는 일입니다
나에겐 발이 없습니다
나를 짓밟는 발이 있을 뿐
4
그대의 발밑에서 그저 사그라지는 순간에도 난
젖은 눈을 돌리렵니다 혹 반짝이는
눈물이 그대의 가슴을 가르며 가 박힐지 모르니까요
그 눈물알갱이가 그대를 또
오래오래 서성이게 할지 모르니까요
먼 훗날 그대 앞에는 공기방울보다 가벼운
눈발이 흩날릴 것입니다
모르지요, 그땐 그대가 순명의 자세로 서서
나를 만지게 될는지
입술이 붉은 열여섯 / 오봉옥
그녀는 동갑내기였다 입술이 붉은 열여섯
그녀는 꽃봉오리였다 하루라도 빨리 피고 싶어 안달하는
그래서 그녀는 날 숨막히게 했다
밤 몰래 담 넘어 올래?
초생달처럼 와선 문고릴 두 번만 잡아다닐래?
하여 치렁치렁 늘어트린 긴 머리칼 한쪽으로 묶어내리고
오자마자 나 어때 어때 하며 안겨들던 그녀는
고작 열여섯 꽃봉오리였다
그녀는 동갑내기였다 입술이 붉은 열여섯
그래서 그녀는 날 숨막히게 했다
제 오라비가 쓸 신혼방이라며
쉬쉬하며 끄을고 가기도 했던
장롱 속의 새 이불 꺼내며
한 번도 쓰지 못한 그 이불 꺼내며
더럽히면 안 돼 안 돼 하며 목부터 끌어안던 그녀는
내가 미처 사내가 아니어서
내가 미처 사내가 아니어서
"야"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던 그녀는.
펌프의 꿈 / 오봉옥
이게 뭐지,
화석처럼 굳어있는 게 신기했던지
고추잠자리 한 마리 날아와
낡은 펌프 손잡이를 움켜쥔다
한때는 동네 사람들이
줄을 서 펌프질을 했으리라
아낙네들은 와서 누구 사내는
펌프질을 잘한다네, 못한다네 하고
한참을 히히덕거리다 가고
온종일 동네 어귀에서 놀다 온 아이들은
지들끼리 등목을 하며 으으으 으으으,
새까만 몸을 마구 비틀었으리라
그걸 본 계집애들은 또 까르르르 웃다가
발그레한 얼굴로 돌아갔으리라
저게 죽어서 고철이 된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쓸쓸해진다
나라도 마중물이 되어 저 목울대를 타고
캄캄한 어둠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
손을 내밀고 살을 섞고 싶다
그때면 낡은 펌프도
울컥울컥 울음을 토해내다가 말하리라
등목 한번 할래?
—오봉옥 시선집『나를 만지다』(2015)에서
https://naver.me/G0lAzClO
시집 『섯!』(천년의시작, 시작시인선 265, 2018.
07.02)
시작시인선 0265 오봉옥 시집
오봉옥의「등불」 감상 / 서대선
이렇게 환한 등불 본 적 있나요
개미 두어 마리가 죽은 나방을 움켜쥐고
영차 영차 손잔등만한 언덕을 기어오를 때
공놀이하던 한 아이가 잠시 가던 길을 비켜줍니다
순간 개미의 앞길이 환해집니다
이렇게 빛나는 등불 본 적 있나요
일곱 살짜리 계집아이가 허리 꺾인 꽃을 보고는
냉큼 돌아서 집으로 달려가더니
밴드 하나를 치켜들고 와 허리를 감습니다
순간 눈부신 꽃밭이 펼쳐집니다
오늘 나는 두 아이에게서 배웁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등불이 될 수 있다는 걸
서대선 (시인)
“일곱 살짜리 계집아이가 허리 꺾인 꽃을 보고는/냉큼 돌아서 집으로 달려가더니/밴드 하나를 치켜들고 와 허리를 감습니다” 이리도 예쁘고 고운 마음은 어디서 오는가.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에 따른 행동을 하게 되는 친사회적 행동은 공감(empathy)능력과 동정(sympathy)하는 마음에서 생겨난다. 공감은 타인의 정서 상태를 이해하는 능력이고, 동정심은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는 조망능력이다.
이타적 행동(altruistic behavior)은 생득적인 측면과 학습의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 신생아들의 경우 다른 아기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고통에 공감하여 따라 우는 반응을 보인다. 또한 6개월이 지난 유아들은 이타적인 행위를 인지할 수 있으며,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였다. 유아가 약 14개월이 지나면 타인이 떨어뜨린 물건을 집어주려는 것과 같은 도구적인 도움(instrumental helping)을 주려는 행동이 나타난다. 이런 행동은 상황에 주의를 집중할 수 있는 교감신경계가 발달하게 되면서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을 도움행동으로 전환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이타적 행동발달에 영향을 미치는 외적 요인으로는 모델모방이다. 즉, 부모가 이타적 행동을 솔선수범 할 때, 자녀들도 이타적 행동을 활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개미 두어 마리가 죽은 나방을 움켜쥐고/영차 영차 손잔등만한 언덕을 기어오를 때/공놀이 하던 한 아이가 잠시 가던 길을 비켜” 주는 마음을 아주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세상은 조금 더 환해지리라.
낙엽 한장 / 오봉옥
베낭에 따라붙은 낙엽 한 장
그냥 떼어버릴 일 아니다
그 나무의 전생과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땅이니
죽어가면서도 마지막으로 한 번
손을 내밀어보는 이유가
필시 또 있었을 것이니 (31)
운명 / 오봉옥
나비는 무심결에
놀다 갔을 뿐인데
나비의 발가락이
그리운 꽃은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흔들린다
내게도 그런 사람 있었다
그녀는 단지
스쳐갔을 뿐인데
어쩌자고 내 가슴엔
보름달 그녀가 꽝,
박혀오는 것이었다
하필 그때
시간이 멈출 일은
또
무엇인가
가슴에 뜬 달은
날이 바뀌고
산천이 바뀌어도
지지않는다 아니
나이 들어 쓸쓸할수록
그 빛은
바람을 일으켜 내달린다
막무가내로 달려가 부서진다
그뿐인가
죽어서도
불도장으로 남게 될
아쉬움 하나
콩닥거리는 마음을
그때 그냥 콱,
들켜버렸더라면
아비와 벚꽃 / 오봉옥
불 피워라 귀한 손님 오신다
울 아비 말 떨어지기 무섭게
우리 삼 형제 장작불 피워 올렸지
아궁이가 아닌 벚나무 아래에서
벚나무 등짝을 뎁히고 또 뎁혔지
벚나무 가지에도 훈김이 기어올라
그 콧잔등을 오래오래 간지럽혔지
그때면 온몸을 노릇노릇하게 지진
벚나무가 제 차례가 된 줄 알고
꽃망울을 밀어 올리기 시작했지
뻥이요, 예고도 없이 꽃밥을 터트려
온 동네 아이들의 입 헤벌리게 했지
참 좋은 날 왔네 그려,
그러게나 말이시
벚꽃 띄워 한잔 하세,
울 아비 밤새도록 술잔을 기울이다
그만 벚꽃에 취해 나자빠졌지
이쯤되면
여든 살을 자신 벚나무도 한 말씀
그래, 이 사람들아
나도 이 맛에 꽃 피우네 그려!
엄마가 있는 방 / 오정옥
세상에 제일 무서운 것
천둥 번개도 삼신할매도 아니더라.
엄마도 없어 텅빈 집
도깨비 소설보다 무서운 집이더라.
순사에게 끌려간 과일 행상 울 엄마
철창에 갇혀서도
리어카에 놓고 온 사과 걱정할 적에
우린 찬밥 한 덩어리 굳어가듯 앉은 채로
꼴딱 날을 셀 수밖에 없었더라.
별들을 오래오래
창가를 서성일 수밖에 없었더라.
사랑 / 오봉옥
사람이 위대한 건
사랑이라는 등불을 발명해서다
이 세상 어떤 빛이
그보다 환할 수 있겠는가
사랑이 꺼지면
나도
세상도
암흑천지가 된다
그러니 그대여
젊어선 젊어서 사랑을 하고
늙어선 늙어서 사랑을 하자
살아있어서
살아있어서
우리 죽도록 사랑을 하자
섯! / 오봉옥
우리를 숨죽이게 한 건 3.8선이 아니었다
검문하러 올라온 총 든 군인도
검게 탄 초병들의 날카로운 눈빛도 아니었다
기찻길 건널목에 붉은 글씨로 써놓은 말 섯!
그 말이 급한 우리를 순간 얼어붙게 만들었다
두 다리로 짱짱히 버티고 서 고함을 지르는 섯,
그 뒤엔 회초리를 든 호랑이 선생님이
두 눈 부릅뜨고 서 있는 것 같았다
머리에 모자를 쓰고 있는 것도 아닌데
커다란 방점이 떠억 하고 찍혀 있는 것 같았다
멈춤 정도야 뭐 말랑말랑한 말로 느껴질 뿐이었다
섯에 비하면 정지나 스톱 같은 말도 그저
앙탈이나 부리는 언어로 느껴질 뿐이었다
남에서 올라온 내 발 앞에 꽝,
대못을 박고 가로막는 섯!
그 섯 가져와 자살 바위 옆에 세워두고 싶었다
그 섯 가져와 기러기 떼 날아가는 노을 속에
슬그머니 척, 걸어두고 싶었다
사소하거나 거룩한 / 오봉옥
TV에서 연어의 귀향을 보고 있는데
죽어서가 아니라
죽으러 가는 그 눈부신 행렬을
애처로운 눈길로 따라가고 있는데
아내가 갑자기 뱀처럼 휘어 감는다
폭포에 몸을 던져 아가미가 찢기고
거슬러 오르다 오르다
지느러미가 뜯겨 피 철철 흐르는데
비늘을 벗겨 낸 아내가 파르르 떨며
내 안의 깊은 여울 속으로 뛰어든다
상처투성이 몸으로 마침내 알을 낳고
꼬리로 바닥을 휘저어 자갈이불로 덮은 뒤
그제야 저를 놓아버리는 연어
난 다음 장면이 궁금해 죽겠는데
아내는 다음 세상이 궁금하다는 듯
숨넘어가는 소리를 낸다
그대 앞에서 춤을
세상에
이런 은유가 있었다니!
그리워서,
사무치게 그리워서
펄펄펄 살아나는
이 마음이
춤이었다니!
천 갈래 만 갈래로 나뉘어져
막무가내로 소용돌이치는
이 애타는 몸이
춤이었다니!
너를 가득 채운 내 가슴은
오늘도 출렁출렁,
⸺시집 『섯!』 (2018. 7)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