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4. 3. 3. 일요일.
햇볕이 났다. 봄기운이 더욱 짙어질 게다.
나는 1960년대 말에 대학교에서 행정학 교수의 강의를 받았다. 그 교수는 미국 하버드대학 출신.
컴퓨터에 관해서 강의하는데 나는 컴퓨터에 대한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았다.
우리나라에는 전혀 없는 것이었기에.
내가 컴퓨터를 처음 보고, 손에 만지기 시작한 때는 1980년대 후반.
직장에 컴퓨터가 도입되었고, 컴퓨터는 직장 타자수(여직원)한테만 지급되었고, 일반 직원은 손도 대지 못했다.
점차로 컴퓨터가 더 많이 들어왔고, 직원 1/3이 컴퓨터로 업무를 보기 시작했고, 더 나중에는 직장인 모두한테 컴퓨터가 지급되었다.
그 당시 컴퓨터는 도스(DOS)체제였기에 어떤 명령/지시를 내리려면 어떤 문구를 넣어야 했다.
예컨대 '복사'를 하려면 '복사' 기능에 대한 어떤 지시/명령 글자를 입력해야 했다.
지금은 윈도우(Windows)체제이다.
컴퓨터 마우스를 대고 손가락으로 꾹 누르면 사진, 문장 전체가 복사되어 아무 곳이나 옮겨서 똑같이 재현할 수 있기에 천지가 개벽한 것인 양 컴은 엄청나게 발전했다.
* 윈도즈(Windows)(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사가 개발한 컴퓨터 운영 체제의 하나)
컴퓨터가 발전하면서 개인 카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2000년대 초에는 개인 사이트가 우후죽순처럼 엄청나게 많이 개설되었다.
나는 직장에서 컴퓨터를 일찍 접했고, 또 글쓰기를 좋아해서 컴퓨터에 다다닥 하면서 글을 올렸다.
직장에 다닐 때였기에 내 신분을 감춰야 했다. 즉 이름이 아닌 닉네임으로 가입했다.
나는 식물 가꾸기를 좋아했기에 내가 가입한 카페들은 대부분 농업, 야생화, 산야초 등이 대부분이었다. 국내여행 즉 도보여행도 즐겨했기에 여행에 관한 사이트도 수시로 방문했다.
퇴직한 뒤로는 시골로 내려갔다. 내 집에는 컴퓨터를 설치하지 않았기에 컴퓨터를 만지려면 차 타고 읍내 PC방에 들러서 잠깐씩 컴퓨터를 켰다. 아쉽게도 아흔 살을 훌쩍 넘긴 늙은 어머니는 치매기 증세가 있기에 나는 늘 어머니 곁에 있어야 했다. 즉 내가 읍내에 나가서 PC방에 들러도 고작 30분이나 1시간 이내였다.
나는 퇴직했고 텃밭 세 자리에서 농사를 지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농촌이 아닌 서울에서만 산다.
서울에서는 할 일이 전혀 없는 무기력한 늙은이다. 뭐라도 해야 하기에 날마다 컴퓨터를 켜서 인터넷 뉴스를 보고, 카페 회원이 올린 글을 보고, 나도 글을 올린다. 빠르게 글 쓴다.
이런저런 이유로 내가 활동했던 개인카페는 199개. 40개는 사라졌고, 지금은 159개 목록이 뜬다.
* 사라진 40개 가운데 일부는 다시 되살릴 수는 있으나 그만둔다. 그거 복원해서 무엇할 것인데? 아무것도 없기에...
내가 가입했던 카페마다 내 닉네임은 제각각이다. '곰내, 산다, 바람의 아들, 바람이 되어, 바람처럼, baboya, 최윤환' 등 무척이나 다양하다. 지금은 내 나이가 많아서 극히 일부에서만 활동한다. 대부분은 손을 떼었더니만 내 신분이 더러는 '준회원' 등으로 조치되었고, 내 글이 모두 깡그리 사라진 카페도 제법 많다.
2024년인 지금 내가 활동하는 카페는 내 고교 여자동창생이 개설한 카페, 다달이 문학지를 발간하는 <국보문학카페>, <아름다운 5060카페> 등 몇몇에 국한되었다.
내가 한 때 사용했던 닉네임이 뭐더라? 하면서 카페 목록을 뒤적거리다가 아래 글을 보았다.
내 글이다.
'삶의 이야기방'에 올려야 하는 글인데도 퍼서 여기에 올린다.
삶방에는 하루에 1건 이상 올리지 않아야 하기에 여기 '수필 수상방'에 올린다.
그들도 사람이다
곰내
1.
30여 년 전 경남 창원 등지로 출장나갔다.
생산업체 방문.
그 큰 공장의 본사 앞에는 많은 노동자들이 줄 맞춰서 앉아 있었다.
안내자는 노동자들이 시위한다고 귀띔했다.
그들을 쳐다보는 것조차도 겁이 났다.
공장 안에 들어섰다.
엄청나게 큰 기계들이 줄을 지었고, 이따금 책상이 있었고 작업복 입은 직원도 있었다.
모두 서서 작업한다.
'왜 서서 일해요? 앉으면 편한데?'
'의자가 없어요. 서서 일하면 더 많이 일하니까요.'
세상에나. 의자가 없는 책상이라니...
서서 일하면 작업능률이 더 오른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지방공단에 방문해서야 알았다.
의자가 없는 책상이라니.
그 회사의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본사 건물 현관 입구가 있는 운동장에서 줄지어 앉아서 침묵으로 시위하는 지를 짐작했다.
노동자계급과 사무직 관리계급의 인식은 하늘과 땅 사이었다.
나는 안내를 받아서 공장장, 부사장 등한테서 브리핑을 받는데도 굳어진 얼굴이 내내 펴지지 않았다.
그들은 얼마나 피곤할까?
그들도 사람인데 얼마나 다리 아플까?
그렇게까지 노동자계급을 쥐어짜야 했을까?
사업주(事業主)의 인간성이 무척이나 그랬다.
1.
30여 년 전의 일이다.
신문에서 개고기 수입 영업을 시작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해외수출을 하던 제법 큰 회사였다. 초일류는 아니어도 2급의 회사였다.
부장과 차장이 내 사무실에 왔기에 내가 물었다.
'어떤 신문에 보니까 귀사에서는 개를 수입하여 국내에서 멍멍탕 사업을 하겠다고 하대요. 사실인가요?"
'예.'
'그랬나요? 무척이나 그렇네요. 귀사처럼 큰 회사는 어떤 전문성을 지니었고, 특수한 물건을 만들어서 수출하는 데에 주력을 해야지 개장사라니요? 개장사는 국내의 작은 영세업자, 즉 소시민이 해야 마땅하지요. 이들의 생계조차 위험하는 게 큰 기업체에서 할 일인가요? 나는 아니라고 봅니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한 귀사의 본사업을 주시할 겁니다. 그만큼 당신네들도 힘이 들겠지요.'
그들의 표정이 굳었다.
며칠 뒤였다. 그들이 재방문했다.
'저희 회사에서는 그 사업을 접었다 하네요. 그런 소소한 사업은 영세업자나 하는 게 맞네요.'
'고맙소. 내가 뭐 도와줄 거 없소?'
라면서 내 표정도 밝아졌다.
2018. 8. 13. 월요일.
2018년 말복은 8월 16일.
예전에 썼던 것 여기에 올렸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예.
그럴 겁니다.
지금 제 생활의 패턴은 고작 과거의 일이나 회상하는 수준이지요.
지금 등허리 굽어가는 늙은이가 어디로 나가서 무엇을 할 것인데요?
님은 컴을 부전공했군요.
우리나라 컴퓨터 초창기에는 복사하려면 엄청나게 큰 기계로 복사했지요. 정말로 방 반 칸을 차지할 만큼 컸지요.
노동자들이 모래알 고르는 기구처럼 생긴 도구를 컴 과련 직원 둘이서 이를 흔들어서 복사했지요. 검정물감이 든 가루를 골고루 떨어뜨려야 하기에.
제가 일찍 컴을 접했기에 제 자식한테 개인PC를 사 줄 때에는 소형 자동차 한 대 값이었지요.
제 큰아들은 컴 관련 학과에 다녔고, 지금도 컴 관련회사에 다니지요.
컴퓨터와 사이버 공간으로 인해 인연이 온라인을 타고 오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도 했지만 그만큼 가벼워지기도 했지요.
일찍 컴을 접하신 분이라 컴에 대한 추억이 많으시네요. ^^
댓글 고맙습니다.
컴퓨터는 일찍 접했지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인원을 가진 조직체이기에 별도로 컴 시스템을 개발해서 전국에 퍼뜨렸지요.
산하기관에 전산부가 별도로 있는데도 행정 수요자 측면에서 저는 컴 시스템 개발팀장을 역임했지요.
산하기관에서 파견된 전산맨과 전산업체 전문가들을 총괄하면서 세 차례나 개발해서, 보급했지요.
1990년대 말, 2000년 초에 민간 카페가 개설되기 시작되었지요.
지금은 아마도 전국에 5,000만 개 이상의 개인카페가 존재할 것 같다고 예상하지요.
컴이 무엇인가를 일찍 알았기에 저는 개인카페 가입 초기에는 닉네임으로 가입해서 활동했지요.
신분을 숨길 필요가 있었던 시절이었지요.
컴퓨터 접한지는 오래되었죠
아들이 집에 오면
컴 만젔구나 듣기 싫어 새로 사고
이젠 폰으로만 접합니다 옛날에는 블로그 많이 했어요
댓글 고맙습니다.
예.
새로운 시대에 사시는군요.
폰으로도 의사소통하는 세상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