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선인(善人)이 '단종'이었다면
그를 위해 용감히 죽은 자는
바로 성삼문이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다는 말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참 대단한 사람이다.
그런데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면서
우리같이 선인(Good man)도 아니고
죄인(惡人)인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이다.
바로 그 이유는 '사랑'이었으며
죽으심 그 자체는
사랑의 '확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눈길이 가는 말씀이 들어온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아직'은 어떤 일이
완성되기 전이라는 부사다.
그 어떤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부활하신 후이기에
그 뒷 문장은 반대의 결과로 나타난다.
바로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죽으시고
그 결과로 우리를 의롭고
거룩하게 만들어 놓았단 말씀이다.
(히10:10)
그 거룩은 우리의
어떤 노력과 전혀 상관이 없다.
전적인 예수님의 희생에 따른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지금'의 우리 상태는?
'죄인되었을 때 ⇔ 의인되었을 때'
이 반대의 등식이 성립하기에
우린 우리 모습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의인'으로 보신다는 말씀이다.
바로 "의인(The Righteous)"이다.
죄인은 위와 반대의 길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 생각을
일치시키는 것,
그게 믿음이다.
그래야 한 마음이 되지 않겠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의롭게
만드신 예수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겸손'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죄인"의 길에서 돌아서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잘 모른 채...
우리는 사육신의 성삼문처럼
온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하면서까지
몸을 바쳐 희생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지만,
예수님 때문에 너무나 황공하게도
그보다 더한 영원한 '의인',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의로운 사람이,
의(義)의 옷을 입은 사람이 되었다.
가만 생각해 보라~~
이 어찌 놀랍고, 감사하고,
기이한 일 아닌가를...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