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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사회가 불러오는 낭만에 대하여
변화(變化, change)에는 변환(變換, transformation)의 세계와 전환(轉換, conversion)의 세계가 있으나 서로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모두는 전환(轉換, conversion)을 새로운 좋음으로써의 이념(理念)이 바뀌는 계기로 인식합니다. 시대의 전환이니 사상의 전환이니 경제의 전환이니 사회의 전환이니 모두는 이념적 관점의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시대적 구분에 사고(思考)로서의 기준틀이라 할 내부적 이념의 대응 관계를 적용시킵니다. 세상의 바뀜을 절대적 조건으로 합니다. 그러나 판이 바뀌었다기보다는 틀이 바뀌었다는 것이 합당해 보입니다. 거기에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절대성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선택과 함께 주인의 위치에서 갑자기 노예의 위치로 전락합니다. 계약조건에 얽매인다는 것은 스스로를 옭아매는 것이자 조건에의 의존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내가 정한 것이 아니라 상대가 정한 환불 불가의 조건이 불안을 가져옵니다. 나의 삶이 한순간에 방향 전환된 느낌입니다. 그런 전환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보호 속에 자신이 존재하기를 기원합니다. 의존적 삶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보스에 충성하는 조직원과도 같은 느낌이 듭니다. 과거의 성취를 내 성취로 가져오기 위해 전환(轉換, conversion)을 말하고자 합니다. 수직적 업 다운(up, down)의 이동에 외부로부터의 물리적 힘의 에너지가 필요하듯이 새로운 이념이 구태의연한 과거 이념을 구축(驅逐) 할 때에 전환은 이룩된다고 주장합니다.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과 양식을 버리고 새롭게 새로운 방향으로의 유턴이며 1도씩 변화하는 변환(變換, transformation)이 아니라 90도씩 직각으로 변화하는 전환입니다. 방앗간에서 벼를 쌀로 도정하기 위해 즉 조곡을 정곡으로 도정하기 위해 기계장치들이 필요하듯이 전환(轉換, conversion)에는 형식적인 틀과 에너지가 요구됩니다. 내 스스로의 고투적 에너지로서의 변환이 아니라 외부에 별도의 틀과 에너지에 의해 가동되는 전환인 것입니다. 내부적 동기라기보다는 외부적 동기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결국 도움에 의지한 전환이며 그 전환에는 생각의 틀을 바꾸는 이념의 작동을 위해 계몽이라는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방향의 전환을 완성시키기 위해 선전선동의 도움이 절대적입니다. 결국 기존으로의 원인 회귀가 불가능한 비가역적 구조이기에 절연(絶緣)이나 단절과 같은 전환에만 의지해야 함으로써 자연스러운 인간 삶의 흐름을 파괴하며 모두는 거기에 강제적으로 적응되어야만 하는 끝없는 노예생활을 감내해야 하는 시절을 맞이할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변화나 변환에서는 원인 회귀의 필요성이 불필요합니다. 이웃집으로 마실가는데 자동차가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전환에는 일방통행식(一方通行式) 이기에 되돌아오기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전진만이 가능하기에 주춤거리면 바로 뒤차로부터 비난의 경적소리와 함께 치워져야만 합니다. 거의 비가역적인 것이 전환이라 여겨집니다. 되돌릴 수 없는 두려움을 잠재우기 위해 계몽적인 어리석음의 선전선동이 필수적입니다. 자력이 아니라 타력에 의한 강압적 변화입니다. 굴복하는 온순함이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라고 개념에 의지하는 삶으로 나아가자고 주장하는 느낌입니다. 유연한 유기체적 인간에게 변화(變化, change)로서 급격한 전환보다는 점진적인 변환(變換, transformation)이 수용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것은 서서히 시작되고 서서히 진행되는 점진적인 인간사의 현상이자 과정으로서의 변환이기에입니다. 전환(轉換, conversion)은 과거의 현상을 개념으로 표출해내는 형식이며 변환(變換, transformation)은 미래의 설렘을 맞이하려 꾸준하게 준비하는 변화의 과정으로 여겨집니다.
경직된 이념은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자신의 정당성으로 포장합니다. 경직된 이념의 세계에서 바라볼 때에 전환은 지금까지 유지해오던 세상의 사상사(思想史) 즉 세계관이 단번에 바뀌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즉 몇 년간 비로 쓸려나가고 빗자루로 쓸려나가 모래가 드러나며 낮아진 마당을 신선한 새 황토 흙으로 물과 함께 다져 하루아침에 높고 매끈한 새로운 땅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과거를 깡그리 빗자루로 쓸어내자는 허구적 강단(剛斷)을 온화한 표현으로 감추는 느낌이 전환(轉換, conversion)에는 있습니다. 그런 의미의 무게감은 인간의 영역이라 할 정신의 세계에서는 적용될 수 있겠으나 실체적인 모든 삶의 방식과 영역을 들어내서 판을 바꾼다는 의미로는 오히려 직설적인 표현으로서의 혁신(革新, innovation)이나 혁명(革命, revolution)이라고 불러야 마땅해 보입니다. 즉 전환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나약함과 함께 영악한 느낌을 불러일으켜 줍니다. 혁명의 전단계로서의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전면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조정하겠다는 무서운 영악함이 느껴집니다. 무력(武力)이 가미되지 않은 추진(推進)이기에 나약한 선비들에게 의지하려는 그들의 호감을 역이용해 추진력으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전환에는 과거부터 이어져오던 사고로서의 생각의 판을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생각의 판을 바꾸는 사고의 틀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기에 정당성을 가지며 그것으로 기존의 틀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인지 전환을 이야기할 때에 그 새로운 사고의 틀을 말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구태의연한 과거의 세계관의 붕괴와 새로운 이념의 개시에 의해 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현실적으로 정당성을 확보할 만한 규준을 정하기는 난해해 보입니다. 사고의 틀은 당연하게도 누구나가 인정할만한 합리적 방향성을 근본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다양성이 혼재하는 현실에서 그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결국 과거로서의 세계에 대한 평가만이 가능할 뿐입니다. 성급한 마음에 합리적 방향성을 이념으로 대체한다든지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댄다든지 윤리적인 감각 인식을 동원해 말하려 한다는 것은 거짓된 양식을 스스로가 찬양하는 것이자 정치적 술수의 선전선동으로 몰아가려 외치는 집단적 구호로 여겨집니다. 현대인에게 집단적 사고(思考)의 틀은 구시대로 되돌릴 뿐입니다.
현대의 직업군들은 과거와 달리 전문가 집단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 직업군들에서의 구성원의 자격은 당연히 해당 분야에 남과 다른 전문적인 능력과 그에 따른 식견으로 자신의 업무에 통찰적인 지적 능력이 우수해야 할 것입니다. 직무능력에서의 자신감이 넘쳐나기에 일반인들은 그들 전문가 집단에서 행하는 일들에 신뢰를 보내고 함께 더불어 살아갈 사회적 질서로서의 에너지를 얻으며 함께 동조되는 순리적 삶을 이어갑니다. 그 어떤 불합리한 외압에도 굴복하지 않음으로써 튼튼한 사회적 구조물을 만들어갑니다. 인간의 몸이 유기체이듯이 사회적 생물(生物)의 흐름 즉 정치의 몸도 그처럼 다양한 전문가들이 자기 영역에서 열심히 종사할 때에 그 흐름은 냇물이 흐르듯이 자연을 거부하지 않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갑니다. 영구적으로 인간이 만든 개념이라는 저수지의 틀에 유기체적 인간을 가둘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올바른 삶의 모습이자 사회의 질서이며 세계의 원리이자 우주의 존재적 기능입니다. 그런 질서는 또 다른 새로운 질서의 탄생으로 변환(變換, transformation) 됨이 마땅해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창조적 질서만이 있지 않듯이 파괴적 질서 또한 그 힘의 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합니다. 그런 질서의 파괴는 어느 영역에선가 전문가 집단이 내부적 노력을 게을리하는 영악함의 출세를 원하는 대범함이 삐쳐 나올 때에 시작됩니다. 그들의 무기는 낭만적 개념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전문가적인 직업의식을 내팽개칩니다. 개념의 자격증만을 가지면 되었지 더 이상 무슨 노력이 필요하냐는 오만과 착각의 오류에 빠져 자신이 소속된 전문가 집단을 스스로가 허물어갑니다. 거기에 핑계 꺼리마 저 덧붙여 시대적 전환(轉換, conversion)을 낭만적으로 호소합니다. 고투적 삶을 버리고 집단의 전체에 의지하기를 넘어서서 집단 자체를 이끌어가려는 억지적인 정치질서를 창조하고자 애씁니다. 대립적인 각을 세움으로써 자신의 떼거리 힘의 의지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런 놀고먹는 아부(阿附)에 빠져 거기에서 떨어져 나오는 힘의 에너지로 투쟁의 열사를 자원합니다.
대중적 투쟁에 내부적 진실은 없습니다. 외부적 원망에 근거하는 오만의 신념만이 넘쳐나며 그것은 개념과 그 집합인 이념에서 시작되는 찻잔 속 태풍일 뿐입니다. 그들의 죄과는 전문가들이 평생을 바쳐 일하는 현장에서 그들을 경멸하며 자신의 우월로 지도자가 되어 휘두르는 개념의 정치적 폭력입니다. 영악하며 이성적인 인간이 만든 인공의 올가미가 개념입니다. 자가당착적 인생관에 빠져 자신의 투쟁이 국가와 나라를 위한 유일한 대안이라는 착각을 진리로 수용합니다. 놀고먹는 인간입니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 모래알을 씹어 먹는 제자가 있다는 말을 허투루 여깁니다. 세상의 한량을 그들은 동경합니다. 진리를 멋대로 들이밀 때에 세상의 분열은 시작되며 사회적 지진의 불안에 떠는 나약한 추종자들을 앞세워 전환(轉換, conversion)의 동기를 끄집어냅니다. 모든 진리는 내부적으로 녹아들 때이지 외부적인 투쟁의 도구가 되어서는 독단을 불러올 뿐입니다. 믿음으로서의 신앙이 지성으로서의 교의(敎義)로 나아갈 때에 유기체적 인간의 신체는 오염의 전환(轉換, conversion)을 맞이합니다.
전문가들은 수십 년을 노력해왔기에 자기 앞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타인을 질타하거나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바꾸어야 한다는 대중적 혁명의식을 갖기는커녕 경멸합니다. 즉 변환-인이 될 수는 있으나 전환-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전문가들이 땀 흘려 이룩한 기득권을 전환인들 또한 경멸합니다. 전환(轉換, conversion)의 의미가 과거의 기득권을 적폐로 분쇄하고 낭만의 미래로 향할 때에 거기에는 자신의 게으름을 감추고 대중을 선전선동해대는 정치적 불협화음을 생성시킵니다. 정치적 질서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가식으로 전환됩니다. 그들은 밝은 햇빛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무지를 감추기 위해 당연하게도 뒤에서의 조정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이념의 갓 파더(The Godfather)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놀고먹는 인간이 되어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를 천시하며 그들의 갹출금(醵出金)으로 호의호식합니다. 뒷구멍에 기어들어가 비열한 자신의 희생정신을 과장하기까지 거침이 없습니다. 미다스 (Midas)의 손이 되었다고 나를 따르라고 혁명의 깃발을 선사합니다. 너희는 앞에서 총알받이가 되고 나는 뒤에서 거두는 농부가 되리라 외칩니다.
그들의 문제는 혁명이 성공했다고 드디어 햇빛으로 나오며 적나라하게 창백한 얼굴의 경직된 독성이 햇볕에 적응하지 못하는 순간 시작됩니다. 아무런 전문가적인 식견이 없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더해 경직된 신념의 투사이기에 오직 내 길 만을 가겠다는 소통 부재의 마이 미스(my miss)를 마이웨이(my way)로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의 세계가 소멸해버렸기에 그들이 지나가는 길에는 시들어가는 온정에만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모든 구호와 이념의 선전선동에는 온정의 아름다움으로 포장된 낭만을 앞세워 전진하려는 쓰레기들이 조연으로 출연합니다. 쓰레기는 쓰레기에 끌립니다. 발-꼬랑내조차 향기롭게 느껴집니다. 전환(轉換, conversion)의 에너지에는 알곡들이 없기에 거기에 동참한 자들은 이념을 먹고 살아가야 합니다.
변환(變換, transformation)에 처한 인간이라면 갈증에 목말라 해골바가지의 물을 마시고서 득도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전환-인들에게는 회개(悔改)로서의 회심(回心, metanoia)은커녕 반야(般若, 프라즈나, prajna)로서의 회귀의 기회조차도 없습니다. 비가역적임을 주장해온 그들이기에 절대적인 추구에서 도돌이표(repeat mark) 기호들을 모두 지웠기 때문입니다. 집단적으로 앞에 가는 자를 따라 절벽으로 떨어지는 레밍 쥐의 신세입니다. 즉 이념을 신념으로 간직한 이상 그들에게는 비전향 장기수처럼 죽음만이 자신의 신체를 바꿀 수 있지 내면의 정신은 차돌과도 같이 단단합니다.
평생의 옹고집으로 자살까지도 비루한 창조적 시각으로 마감하려 영웅적 모습을 간직해 보여주려 합니다. 스스로 그것이 마지막 결단으로 착각합니다. 전문가적인 배움의 노력이 없을 때에 인간의 성숙은 그처럼 독버섯으로 뒤덮입니다. 독버섯일수록 그 겉모습은 화려하며 색깔의 아름다움 또한 유혹적입니다. 거짓된 진실의 옷을 낭만적으로 화려하게 차려입고 죽음의 대비를 몰고 옵니다. 좋은 삼베옷으로 수의(壽衣)를 준비하는 차분함을 적폐로 여겨 청산하고자 애씁니다. 죽음까지도 가식적 삶으로 종료하고자 할 뿐입니다. 죽음을 통해 영웅이 탄생하며 조문이 줄을 이어갑니다. 그 어디에도 자연스러움은 없으며 낭만적 온정만을 신봉합니다. 자신이 만들어낸 거짓 개념들로서의 형식을 창조해 거기에 옭아 매인 자승자박의 인간군입니다.
우리가 시대를 선택할 수 없듯이 우리의 운명 또한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억울하다고 머슴처럼 인간이 만들어낸 기호로서의 개념을 신줏단지 붙잡듯이 부여안고 운명을 죽음으로 전환(轉換, conversion) 시킵니다. 그들은 세상이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에 대한 양식으로 설명문을 작성해 그것으로 얼마든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자만합니다. 현대는 존재를 기반으로 하는 단지 기술되는 세계일 뿐입니다. 계몽은 근대의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설명되는 세계의 양식(樣式)입니다. 그런 지식을 동원해 현대를 바꾸어보겠다는 것은 마치 갓 쓰고 도포 입은 양반이 현대인들을 교육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해보겠다는 꼴입니다. 그들에게 윤리도덕으로서의 성리학은 법으로 이전되었다는 현대의 세계관은 배운 적도 경험한 적도 없기에 오직 온정의 구태의연한 윤리도덕을 진리로 여깁니다.
법을 집행한다는 사람들조차도 그처럼 유교적 온정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면서 개념의 노예가 되어 자랑스럽게 살아가는 시절입니다. 현대는 냉철한 법조문에 새겨진 대로 규명할 뿐입니다. 심정적이니 윤리적이니 내가 경험해봐서 아는데라든지 양심에 비추어본다든지 하는 낭만적 감상들은 좋은 술맛을 해칠 뿐입니다. 현대인에게 중세 말기의 마녀재판 판결문을 들이대는 꼴입니다. 진정한 적폐(積弊)는 동굴 속 깊숙이 박혀있습니다. 된장 속의 구더기와도 같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깊숙이 파고듭니다. 결국 발견해낸다고 하더라도 바글바글 들끓어대는 구더기가 무서워 외면합니다. 구더기가 배설해대면 해댈수록 장의 냄새는 더욱더 고약해지니 결국 구더기가 슬은 장은 버려야만 합니다.
예술계에서 인상주의가 한 시대를 풍미했으니 다시 시도하자고 나대는 꼴입니다. 과거의 적폐들을 모두 없애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자고 주장하며 역으로 과거의 수단과 근거를 가져다 쓰려는 전문가적인 창조적 식견이 부족한 어리석음입니다. 창조에서 멀어진 그들에게 남은 것은 낭만적인 친밀함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를 동지(同志)라고 자기도 모르게 부르는 것입니다. 낭만은 지성의 감쇄와 함께 합니다. 인상주의야말로 과거 고전주의로서의 지성의 감쇄와 함께 시작되었을 따름입니다. 그것은 한순간의 시대적 낭만입니다. 억지로 만들어낸 개념의 낭만이 아니었습니다. 노력 없이도 척 보면 감상이 가능한 감각 인식에서 나오는 직관의 아름다움을 새겨준 자연주의에서 시작된 낭만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유구한 역사적 삶의 구석구석에는 고전주의의 지성에 대한 갈망으로 채워져 왔을 따름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알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안타까움은 그런 본능적 앎을 영악한 앎으로 대치했다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낭만이 아니라 인공의 영악함으로 만들어낸 가식적 낭만입니다. 영악함에서의 앎은 개념의 앎이며 거기에 인간의 진정한 고투적 앎의 세계는 존재조차 하지 않습니다. 오직 경직된 이념만이 미세먼지처럼 허공을 부유하며 인간들을 오염시킬 뿐입니다. 낭만적 주의 주장들은 고전주의가 회의적으로 되어갈 때에 부활합니다. 구더기가 슬은 장을 버리듯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성들 또한 언젠가 분열의 쓰레기로 여겨지는 순간 자연스레 소멸할 뿐입니다.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규합(糾合) 된 힘은 모두가 창조를 갈망할 때에 저절로 나오며 그것이야말로 진정 고전주의의 근간(根幹)입니다.
도덕과 예의범절이 법으로 수용되었듯이 현대는 도덕의 잣대로 인간존재를 규율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 적폐이기에 청산의 대상입니다. 지나온 인식을 새롭게 끄집어낸다는 것은 과거 회귀의 환원적 오류이자 근대적 인과율일 뿐입니다. 자신의 게으른 욕망의 이익을 위한 가식적 수단이자 도구입니다. 그러나 규명하기는 난해해 보입니다.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고 단언하고 근대의 시작을 계몽주의로 보며 20세기 현대의 시작을 모더니즘이라 하듯이 지금의 21세기 또한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동시대(contemporary)로서의 어떤 일련의 양식적 특징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다양한 양식들이 넘쳐나기에 아직 규명되고 있지 못할 뿐입니다. 수많은 대중(大衆)의 시대에 누가 주인공인지 모를 뿐입니다. 시대에 어울리는 보편적 질서로서의 내재적 가치를 발견하는 일는 현재의 미래 것입니다. 우리의 세계관은 결국 후손들의 몫입니다.
결국 시대가 지나고 나서 즉 수많은 가치들이 감쇄되고 알곡들만이 남는 세월의 흐름이 있어야 세계관의 규명 또한 가능해질 것입니다. 즉 과거는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으나 현대는 삶의 변화 속에 처해있을 따름입니다. 무수한 변화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분열의 현장이며 서로가 자신의 신념을 전파하기에 애쓰는 시절입니다. 그러한 현실적 삶의 세계에서 인간은 저절로 올바름의 판단력이 증대되고 전체적인 사회적 흐름 또한 그러한 방향으로 변화되어 나아갈 뿐입니다. 즉 건전한 비판이야말로 진정 올바름으로 나아가는 사회적 질서의 제1원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의 특성은 그러한 비판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서서히 변화에 적응해가며 그런 점진적 변화의 물결이 다양하게 쏟아져 나올 때야말로 변환(變換, transformation)의 순간이라 여겨집니다. 모든 변화들은 점진적으로 누적된 결과들의 표출이라 여겨집니다. 개인과 집단을 벗어나 사회 전체가 즉 국가적인 정체성의 전환(轉換, conversion)을 강제적이고 정치적인 의도로 바꾸어갈 수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전환은 과거사를 지향하며 변환은 현대사를 이야기합니다. 과거를 살면서 행복을 말할 수는 없으며 행복은 오직 오늘을 사는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현대(contemporary, con+tempus)라는 개념에는 함께 더불어 순간을 살아가기에 대단한 노고 없이 현대를 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거기에서는 세계의 형식이라는 전체의 틀에 대한 포착을 요구합니다. 판단의 근거로서 부분을 포착해 전체를 매도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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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늘 좋은 말씀으로 가르침 주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셔서 오래오래 건필하세요 갈대생각님^^
(๑・̑◡・̑๑ 갈대생각님 반갑습니다.(๑・̑◡・̑๑
"자기답게/12"
주신글
감사히 읽고
감사한 마음 전하고 갑니다.
추석 명절 잘 보내셨습니까?
즐겁고 행복한 추석 명절 보내셨는지요!!
이번 추석의 행복한 기운을 가득담아
남은 한해를 잘 헤쳐나가시기 바랍니다.
조석으로 기온이 많이 내려가니 감기 조심하시고
남은 추석 연휴도 보람있게 보내십시오.
(๑・̑◡・̑๑) 추천"콕" (๑・̑◡・̑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