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7. 화요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251-356) 기념일, 히브6,10-20 마르2,23-28
자유인
- 영혼의 닻(an anchor of the soul) -
영혼의 닻인 희망을 하느님 중심에 내린 사람이 정녕 자유인自由人이요, 성인聖人입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복음의 예수님은 물론이고 복음에 잠시 등장하는 다윗,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성 안토니오,
제1독서 히브리서에 또 잠시 등장하는 아브라함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이 분들뿐 아니라 모든 성인들이 ‘영혼의 닻’인 희망을 하느님께 내렸기에
하느님에게까지 이르러 참으로 자유를 누렸던 분입니다.
이런 분들이 정녕 ‘희망의 표지들’이자 우리 영혼의 닻인 희망을 하느님께 내리도록 부단히 자극합니다.
희망의 상징, 정주의 상징인 닻입니다.
요즘 써놓고 내심 자유를 누리는 ‘자유가 되었다’라는 자작시를 감히 나누고 싶습니다.
-조금 잃고/크게 얻어/바다가 되었다
높이에서/아래 전부를 바라보는 /하늘이 되었다
자유가 되었다/사랑이 되었다/모두가 되었다
하느님이 되었다-
불경不敬하게 느껴지지만 위 성인들의 심중이 이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느님이 되었다’라는 표현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 분명 그러했을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긴 것은 아니다.”
인권대헌장의 기초가 되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은 사람 앞에 상대화됩니다.
절대적인 것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사람 위에 사람없고, 사람 밑에 사람없습니다.
사람이 판별의 잣대입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마음을 대변합니다.
이어 당신이 모든 분별의 잣대임을 천명하심도 하느님과의 일치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느님 마음에 정통했던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임으로 안식일법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절대적인 당신 앞에서는 상대화됨을 말해 줍니다.
하느님께 영혼의 닻인 희망을 내렸기에 이런 대담한 확신에 찬 고백입니다.
그러니 어렵고 힘든 일에, 또 복잡하고 혼란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의 판별의 기준은 분명합니다.
“과연 예수님은 이런 경우 어떻게 대응對應하고 대처對處했을까?”
기도중에 그 답을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에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밀이삭을 뜯는 것에 항의하는 바리사이들에게
다윗의 예를 들면서, 당신 자신을 다윗과 견주면서, 적극적으로 제자들을 두호斗護하십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다윗의 이런 자유는, 예수님께서 안식일법을 상대화할 수 있는 이런 자유의 비결은 도대체 어디서 기인하는지요.
바로 이분들의 자유는 하느님이 그들을 신뢰하고 있다는 확신에서 기인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그는 끈기있게 기다린 끝에 약속된 것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을 끝까지 신뢰한 그들을 하느님 역시 그들을 끝까지 신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나를 신뢰하신다는 이 확신이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 참으로 자유롭게 합니다.
“이 희망은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멜키체텍과 같은 영원한 대사제가 되시어,
우리를 위하여 선구자로 그곳에 들어가셨습니다.”(히브6,19-20)
이런 영원한 대사제이신 예수님을 따라 우리 영혼의 닻인 희망을 하느님께 내릴 때
우리 역시 하느님 계신 곳에 이를 것입니다.
모든 성인들이 선구자인 영원한 대사제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께 이르렀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수도승들의 아버지’라 칭하는 안토니오 성인 역시 경이驚異롭기 한이 없습니다.
잠시 그에 관한 일화를 나눕니다.
- 양친이 죽은 후, 그는 많은 유산을 상속 받았습니다.
어느 날 교회에 갔다가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19,21)라는 말씀을 듣고 곧이 곧대로 실행했습니다.
이어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마태6,34)라는 말씀을 듣고 남은 최소한의 재산마져 처분하고 독수자가 됩니다.
그는 소금과 곁들인 빵과 물만 먹었고, 잠은 거친 매트에서 잤습니다.
그는 곧 겸손과 거룩함과 자기절제의 모델이 되었고 숱한 유혹에 맞서 잘 관리했습니다.
그는 20년 동안 6개월 마다 먹을 것을 날라다 주는 이만을 제외하곤
누구도 만남이 없이 산꼭대기의 옛 성의 폐허지에서 하느님만을 찾으며 지냈습니다.
마침내 첫 수도원을 세웠고 필요로 할 때만 수도원을 방문했고 독수자로 홀로 살았습니다.
그 엄격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정력적이고 기쁨 가득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많은 수도승들 가운데서 단지 그의 ‘명랑함(cheeriness)’으로 한눈에 그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찾아오는 이들이 그로부터 배운것처럼 안토니오 역시 그들로부터 배웠습니다.
마침내 356년 선종했으니 그 나이 105세입니다.
그때까지 결코 아픈 적도 없었고, 늘 건강한 시력에 건강한 치아를 지녔다 합니다.-
참 불가사의不可思議의 경이로운 인물입니다.
영혼의 닻인 희망을 하느님께 깊이깊이 내렸음에 대한 생생한 증거입니다.
장수가 축복祝福이 아니라 재앙災殃인 시대입니다.
잘 늙다가 때되어 잘 죽는 축복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치매걸린 노인들을 돌보는 분의 고백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아프고 춥고 배고프고 욕하고’ 본능만 남은 이들은 짐승들과 같았고,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고 모든 것을 보호에 맡겨야 하는 절망의 자리 거기 노인 요양원은 지옥과 같았다 했습니다.
참으로 존엄한 품위를 유지하면서 자유인으로 살 수는 없는지요?
하루하루 날마다 영혼의 닻인 희망을 하느님께 깊이 깊이 내리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 마음의 눈으로 보고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마음만이, 예수님 사랑만이 분별의 잣대입니다.
영원한 대사제이신 주님께 다시 영혼의 닻인 희망을 깊이 내리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제 좌우명座右銘인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자작시 마지막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
첫댓글 하루하루 날마다 영혼의 닻인 희망을 하느님께 깊이 깊이 내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