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과 스탈린의 불화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비인간적인 조치로 통치 초기부터 당 기관이 고위 간부들에 오래 권력을 유지하려면 건강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건의 한다. 그러나 레닌도 자신이 창조한 독재 체제의 희생자가 됐다는 사람들도 있다.( 레닌과 스탈린 시대에 2000만 명을 죽였다는 설이 있는) 1921년부터 레닌은 심한 두통을 느끼기 시작한다. 6월14일 당 조직국은 휴가를 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따르지 않았다. 7월 한 달 휴가를 보내고 업무에 복귀 12월 다시 건강이 악화된다. 1922년 초 당에서 일을 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오고, 시골에서 요양하던 레닌은 이제 당의 허가를 받아야 모스코바를 방문할 수 있었다.
그는 10차 공산당대회에서 형식적인 몇 자리 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을 뿐이다. 5월 25일 그는 발작이 찾아왔다. 10월 업무복귀 시는 서기국 중앙위원회에서 엄격한 요양을 명령했고, 서류에 손도 대지 못하게 막았다. 이런 조치는 스탈린이 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레닌은 아내에 구술로 유언장을 남긴다. 이 글에는 스탈린에 대한 적대감이 드러나고 스탈린의 중앙위원회를 공격했다. 일부 글을 보면 “스탈인은 너무 무례하고 서기장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인물이다. 따라서 나는 동지들에게 스탈린을 그 자리에서 제거할 수단을 찾아보라고 권한다.” 사흘 후 급한 (심장) 발작이 찾아와 레닌은 정신을 잃는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1924년 1월이다.
레닌(1870~1924)의 과오와 적악과 독제를 하늘이 알았는지 불과 집권 7년 만에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이자, 결국 그를 하늘이 잡아 갔다.레닌은 초등학교 장학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6살 때 그의 형은 사제 폭탄으로 차르를 암살하려는 혐의로 교수형으로 죽는다. 혁명가적 피가 흐르는 집안임은 틀림없다. 레닌은 러시아 공산당을 창당하고, 최초의 국가 원수가 되었다. 코민테른을 창설했으며, 마르크스 이후 가장 위대한 혁명사상가이고 지도자임도 틀림없다. 그의 가장 심하고 잔인한 후계자 스탈린에게 무서운 속도로 돌아가는 개인 독재 기구의 모든 요소를 물려주었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단자이자 폭력적인 혁명가로 레닌은 독일의 국가자본주의는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이었다. 역사는 기묘한 장난을 쳐서 ‘마치 하나의 알에서 나온 두 마리 병아리처럼 이질적인 두 개의 사회주의를 낳았다. 이 둘은 하나는 러시아의 정치 혁명이고 하나는 독일의 경제조직이다. 둘 다 사회주의에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는 독일의 국가자본주의를 배워야 하고. 받아 들여야 했다. 레닌은 야만적인 러시아에 국가자본주의를 도입해야 했다. 러시아는 노동조합을 장악하여 정부가 관리하고, 레닌은 규율을 어기는 자는 바로 총살할 것이라 말한다. 노조의 주된 목적은 노동규율이었으나 노조는 산업경찰의 역할을 수행했다. 레닌이 군대 징병제와 유사한 ’보편적인 노동 임무‘ 개념을 도입하였다. 책임 생산량을 정착시키기 위한 규칙을 만들고, 이에 반항하는 노동자는 일자리를 잃고 식량 배급도 받지 못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레닌의 언명이었다. 레닌이 죽자, 농민에 대한 새로운 공격을 남겨 놓은 관료주의적 괴물의 손에 맡겼다. 레닌이 남긴 것은 경제적인 파탄에 둘러싸인 견고한 경찰국가였다. 하지만 그는 전기를 꿈꾸며 세상을 하직했다.
이시오프 스탈린(1879~1953)은 당시 러시아 식민지였던 ‘그루지야’ 공화국 고리 시에서 신기료장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티플리스 신학교에 진학했으며, 재학 중 비밀리에 국제공산주의의 최고 이론가인 카를 마르크스의 저서와 다른 금서들을 읽다가 1899년 신학교에서 퇴교를 당한다. 신학생일 때 이름은 ‘요시프 주가슈빌리(Josef Djugashvili)’이었다. 레닌은 9살 어린 스탈린에 지시하면 로봇처럼 명령침투가 되고, 즉각 이행하는 스탈린에게 민족문제 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한다. 레닌이 스탈린을 좋아하는 이유는 산적한 업무를 단번에 해치우는 능력과, 폭력행위나 담화 및 연설 혹은 지면상의 열정적인 논쟁을 잘하고, 국사를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식욕이었다. 그를 중앙 서기국, 일상의 운영을 맡는 조직국, 신속한 결정을 내릴 정치국에 레닌이 스탈린을 올려놓았다. 스탈인은 여러 직위와 중요한 위원회 위원을 겸직 했다. 레닌의 전폭적인 지지와 미로처럼 얽힌 당과 정부, 소비에트 기관들에서 인사이동을 시킨다.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고 명령이 잘 침투되는 조직을 만들기 위해서다. 레닌에 의해 당은 자기 통제력을 상실한다. 중앙위원회는 소속위원을 포함하여 어떤 당원이든 사형 선고를 내릴 권한을 갖게 된다. 새로 선출된 위원들은 모두 스탈린과 특별한 관계인으로 채워진다.
레닌은 정치 목적에 맞는 특별한 의미 있는 단어나 표현을 찾는 데는 사악하면서도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핀란드와 발트 해 국가들, 폴란드는 러시아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들 나라는 부르주아 공화국으로 명명되었지만 이것은 유예기간이고, 소비에트 권력이 강해지자 프롤레타리아 공화국으로 편입되었다. 이 수법을 스탈린이 아시아에서 써먹는다. 민족자결주의가 고개를 들면 ‘부르주아’라는 낙인을 찍고 탄압을 가했다, 스탈린은 그런 분리운동은 민족의상으로 변장을 하고 노동대중의 권력에 대항하려는‘ 시도라 말한다. 1923년 전 소련연방 소비에트 대회에서 25명으로 이루어진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상부에서 엄격한 지령에 따르는 간부였기에 헌법은 실제로 스탈린이 초안을 마련한다. 즉 연방헌법에 고도로 중앙 집권화 된 독재 체제에 외적인 법적 형태를 부여해주었다. 그러나 헌법과 무관하게 실제 모든 권력은 소수 (스탈린 등) 지배 집단의 손아귀에 있었다.
마침내 레닌은 자신이 그토록 정성들여 구축해 놓은 이 거대한 비밀 제국의 소유권을 스탈린에게 넘겨주었다. 스탈린을 당 서기장으로 임명하고, 그의 심복들을 보좌역으로 삼게 했다. 이런 결정은 비밀리에 이워졌고, 1922년 4월 4일 프라우다지에 그다지 눈에 뛰지 않는 기사 형태로 발표되었다. 레닌이 범한 어리석음은 한 사람, 즉 스탈린에게 정치국과 조직국 업무에, 열댓 개의 당 업무를 넘겨준 것이다. 두 달 뒤 레닌은 최초의 발작을 일으키고 죽어갔다. 그야말로 소련이란 국가의 임자가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돈을 버는 사람과 쓰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말도 있다. 정도를 걸어 세운 나라는 오래 갈 것이고 사욕과 위선으로 세운 나라와 왕조는 삼대도 못가고 망한 것을 역사에서 우리는 많이 보아 왔으니 말이다.
이제 공산주의는 사회주의라는 경제체재로 중국과 북한 쿠바와 베네즈웰라가 있다고들 하나, 소련은 그래도 가재는 게 편일 것이다.
1929년 12월 31일 스탈린은 독제체재의 절대적인 지배자인 자신의 50번 째 생일을 자축했다. 그의 독제와 잔인성은 달리 비교할 역사적 예를 찾기도 힘들다. 스탈린은 러시아 농민을 강제 집단화를 명령한다. 이 때문에 죽은 사람도 많다. 대략 500만 명의 농민이 살해당했고, 그 두 배의 사람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스탈인의 콤플렉스는 네 가지인데, 그는 키가 163센티미터에 불과하고, 왼 발 두 번째 발가락과 세 번째 발가락이 붙어 있었다. 왼 팔이 어릴 때 사고로 짧았으며 왼손은 오른손보다 눈에 뛰게 컸다. 그는 항상 오른손을 숨겼단다. 이런 장애로 그는 굉장히 힘들어 했으며, 실재든 상상이든 지적 무능력 또한 그를 괴롭혔다고 한다. 이런 열등감은 스탈린이 자기보다 뛰어난 모든 사람에게 복수를 하게끔 만들었다. “모든 사람에게 자신과 똑같은 고통을 맛보게 해주겠다는 그의 복수심에 악마적이고 비인간적인 측면이 있다. 그는 보잘 것 없는 악의가 가득한 인간이었다, 아니 그는 인간이 아니라 악마였다.”
스탈린은 폭력과 관련하여서는 레닌처럼 이데올로기에 휩싸인 열정 같은 것은 없었다. 레닌이 세운 독재 국 러시아의 정치와 독재기구, 대량 학살의 창시자였기 때문에 그의 후계자 가운데는 한 사람도 결백한 인물은 없었다. 모두가 잔인한 살인자 들 뿐이다. 스탈린의 이름에 길고 지루한 호칭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강철 인간, 화강암 같은 볼셰비키, 놋쇠처럼 단단한 레닌주의자, 철의 병사, 세계적인 천재라는 수식어가 그를 따라다녔다. 본질을 보면 공포 통치 체재다. 유전학자, 목적론자, 기계론자, 변증론자 등으로 다양하게 알려진 지도적인 사상가들 이 거의 유사종교 집단으로 변질되었다.
1942년 8월 모스크바서 처칠에게 말하기를 스탈린은 냉담하게 1000만 명의 농민을 처리했다고 말했다. 죽은 농민이외에 북유럽이나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로 1,100만 명이 이송됐고, 그 중 1/3은 강제수용소로, 1/3은 국내 오지로 추방, 1/3은 이동 중 죽거나 살해당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고려인도 이때 중앙아시아로 이주 된 것이었다. 그들의 도망을 막기 위해 국내 통행증 제도가 도입됐고, 허가 없이 주거지를 변경하면 감옥에 가두었다. 농민들에겐 그 때가 로마제국의 말기나 봉건사회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 때 상황은 차르제의 가장 어두운 시기보다 참혹했다.
농민들은 곡물을 바치느니 소출량을 차라리 불태웠고, 농기구를 부쉈다. 그들은 1,800만 마리의 말과 3,000만 마리의 암소(전체의 45%), 1억 마리의 양과 염소(전체의 2/3)를 몰살시켰다. 따라서 1933년 러시아의 곡물 생산량은 1913년 생산량의 65%에 불과했다. 스탈린의 면전에서 바른말을 하는 사람은 스탈린의 두 번째 부인 ‘나대주다’뿐이었다. 그녀는 스탈린에게서 떠났다. 그리고 농민 앞에서 스탈린이 농민을 다루는 야만적인 방식을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권총으로 자살한다. 스탈린의 첫 아들 ‘야코프’도 1928년 권총으로 자살한다.
2019.05.15.
모던 타임스1 두 번째 요약
폴 존슨 지음
살림 간
첫댓글 대량학살의 창시자 레닌가
자기가 키운 스탈린에서 버림을 당하였고
스탈린도 역시 말로가 좋지 않았나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학살하였으니
좋을 리가 없겠지요. 잘 감상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