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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서에 왜왕 무의 이름으로 2번 사신이 옵니다. 462년(세조 대명 6년) 과 478년(순제 승명 2년)입니다. 나무위키나 한국위키 등 일부 인터넷에 틀린 내용들이 돌아다니는데 이상하면 원문을 보고 확인해야 실수를 안 합니다.
濟死,世子興遣使貢獻。世祖 大明 六年(462), 詔曰: <倭 王世子><興>, 奕世載忠, 作藩外海, 稟化寧境, 恭修貢職. 新嗣邊業, 宜授爵號, 可安東將軍․<倭國王>. <興>死, 弟<武>立, 自稱 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일반적으로 책봉을 사신이 온 다음 몇 달 후에 하므로 제가 죽고 왜왕세자 흥의 사신이 도착한 해는 461년입니다. 462년에 왜왕세자 흥을 왜국왕에 책봉하였는데 무가 사신을 보내 흥은 이미 죽고 자신이 왕이 되었다고(立) 합니다. 제란 동생이란 뜻이 아니라 권력의 수평교체라는 뜻입니다. 반면에 부는 수직교체입니다. 그리고 책봉을 요구하지 않고 스스로 칭하기를(自稱), 사지절․도독.<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칠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이라고 합니다.
462년이면 곤지가 개로왕비를 데리고 간 다음 해입니다. 무령왕릉지석과 일본서기를 보면 461년 7월에 무령왕이 태어나고, 곤지가 개로왕비를 앞세우고 왜국 수도에 들어가는 461년 8월부터 10월 사이에 왜국 지배층에 대한 대규모 숙청이 벌어진 후, 461년 11월에 웅략이 왕위에 즉위합니다. 따라서 송서에 왜왕 무가 나타나는 462년은 웅략이 즉위한 직후입니다.
즉위해도 공립되지 못하면 왕세자를 칭해야 합니다. 공립되면 세자자가 떨어집니다. 일본서기는 공립되지 못하고 죽은 왕은 대수와 시호 주지 않고 앞이니 뒤의 공립된 왕의 재위 기간에 포함시켜 기록합니다. 따라서 시변압반황자(관군장군 우현왕 여기) 재위 기간 5년은 웅략(정로장군 좌현왕 여곤)의 재위기간에 포함되어, 461년 11월의 즉위는 456년 11월로, 462년 3월의 공립은 457년 3월로 앞당겨 기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462년에 즉위 축하를 위해 온 오국 사신을 접대하는 것이 웅략의 첫번째 업무입니다. 이것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의 다루왕, 개루왕, 기루왕조의 기록 방식이기도 합니다.
順帝 昇明 元年(477), ... 冬十一月 己酉, <倭國>遣使獻方物.
그리고 462년과 478년 사이인 477년 11월에 유송에 왜국 사신이 도착하여 방물을 바쳤다고 하는데 사신을 보낸 왜왕의 이름이 없습니다. 중원 왕조는 외국에서 왕이 사신을 보내면 이름을 묻고 기록하는 것이 관례인데 왕의 이름이 없다는 것은 사신을 파견한 사람이 왜왕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즉 477년 11월에 왜국의 통치자는 무가 아닙니다. 그런데 무가 죽었다고도 하지 않고, 누가 새로 왜왕이 되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478년에 왜국에서 사신이 오는데 장문의 국서를 가기고 와서 무의 책봉을 간절히 요구하고 있어, 스스로 왜왕을 칭하던 462년의 당당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무의 국서는 과거 왜왕으로서의 화려한 경력을 죽 나열한 다음에 고구려를 비난하고 있는데, 최근에 고구려에 의해 아버지와 형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있는 무의 국서와 번역입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나오는 (3)과 (4)가 중요합니다.
順帝 昇明 二年(478),遣使上表曰:
(1) 「封國偏遠, 作藩于外, 自昔祖禰, 躬擐甲冑, 跋涉山川, 不遑寧處.
봉해진 나라가 먼 곳에 치우쳐 있으며, 바깥에 번국을 이루고 있는데, 과거의 조상으로부터 스스로 갑옷과 투구를 걸치고 산천을 누비느라 편안히 거처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2) 東征毛人五十五國, 西服衆夷六十六國, 渡平海北九十五國, 王道融泰, 廓土遐畿, 累葉朝宗, 不愆于歲.
동으로는 모인(毛人) 55국을 정벌하였고, 서로는 중이(衆夷) 66국을 복종시켰으며, 바다 건너 해북(海北) 95국을 평정하니, 왕도는 편안하며, 땅을 넓히고 왕기를 아득히 크게 하였으며, 여러 대에 걸쳐 조종(朝宗)하여, 해마다 어긋나는 일이 없었습니다.
*무가 그 동안 왜왕으로서 공이 크다는 것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모인과 중이 해북은 혼슈와 홋가이도에 살던 일본 원주민 정복을 뜻합니다. 이 정도 정복을 하려면 적어도 10년 이상 장기간 왕위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臣雖下愚, 忝胤先緖, 驅率所統, 歸崇天極, 道逕百濟, 道逕百濟「逕」各本並作「遙」, 據南史·通典邊防典改. 裝治船舫, 而句驪無道, 圖欲見呑, 掠抄邊隷, 虔劉不已, 每致稽滯, 以失良風. 雖曰進路, 或通或不.
신이 비록 아주 어리석으나 조상의 뒤를 이어 다스리는 곳을 이끌고 중국의 조정을 존중하고자 하였습니다. 가는 길이 백제를 거쳐야 하므로 큰 배를 준비하였는데, 구려(句驪)가 무도하여 집어삼키려 하고, 변방의 속한 곳을 노략질하며 살육을 그치지 않으니, 매번 지체되어 좋은 바람을 놓치게 됩니다. 비록 길을 나서지만 혹은 통하고 혹은 통하지 못합니다.
(4) 臣亡考濟 實忿寇讎, 壅塞天路, 控弦百萬, 義聲感激, 方欲大擧, 奄喪父兄, 使垂成之功, 不獲一簣. 居在諒闇, 不動兵甲, 是以偃息未捷.
신의 돌아가신 아버지 제(濟)가 실로 원수가 천로(天路)를 막는 것에 분노하니, 활을 쏘는 병사 백만이 의로운 소리에 감격하여 바야흐로 크게 일어나고자 하였으나, 갑자기 아버지와 형을 잃으니, 수성(垂成)의 공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마지막 한 삼태기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상중에 있어 병사를 움직이지 못하고 쉬고 있었으므로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백제 한성이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자 곤지가 목협만치와 조미걸취를 사령관과 부사령관으로 하는 구원군을 급파하였지만 백제의 패배와 개로왕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보면 무의 죽은 아버지와 형을 제와 흥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와 흥은 고구려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5) 至今欲練甲治兵, 申父兄之志, 義士虎賁, 文武效功, 白刃交前, 亦所不顧. 若以帝德覆載, 摧此强敵, 克靖方難, 無替前功. 竊自假開府儀同三司, 其餘咸各假授, 其餘咸各假授 各本並脫「各」字, 據南史·通典邊防典補. 以勸忠節.」
지금에 이르러 갑옷과 무기를 잘 갖추어 부형의 뜻을 펼치고자 하니, 의롭고 용맹스러운 병사들이 문무로 공을 이루어, 번쩍이는 칼날이 눈앞에 닥쳐도 또한 눈을 딴 곳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만약 황제의 세상을 뒤덮는 덕으로써 이 강적을 무찔러 온갖 어려움을 극복한다면, 이전의 공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삼가 스스로 개부의동삼사를 가수(假授)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모두 각각 [적당한 관작을] 가수하여, 충절을 권유하였습니다.
우리가 고대의 어떤 사건을 해석할 때, 해석이 A와는 일치하는데 B와는 모순이고, 또는 A와 B와는 일치하는데 C와는 모순이고.... 그러면 틀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반면에 현존하는 한중일 모든 문헌사료와, 모든 고고학사료와, 모든 풍습과 전통 등 문화사료와 단 한치의 빈틈도 없이 완전히 일치한다면 그 해석이 틀릴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나아가 현재는 존재하지 않지만 앞으로 나올 사료까지 내용을 미리 예측할 수 있습니다. 무령왕의 탄생을 설명하려면 후한서와 삼국지의 진왕 기록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첫댓글 무의 부친 제와 흥이 고구려와 관련없다고 하는건 송서의 국서 내용의 앞뒤 맥락을 정면으로 무시한데서 나온 주장일수밖에 없지요 왜왕 무의 국서에 부친 왜왕 제가 자국을 침략한 고구려를 지칭하는 원수들이 중국과 교역할 길이 막으니까 분노해서 군대를 일으키려고 하다가 갑자기 장남 흥과 동시에 사망했다고 나와 있는 것을 보면 고구려의 공격으로 왜왕 제와 흥이 사망한 것으로 유력하게 보여질수밖에 없습니다 왜왕 무의 국서에 자국 왜를 침략한 원수 대상을 고구려 이외에 없으니까요
그리고 웅략은 일본서기에 456년에 즉위했다고 나와 있어서 462년은 웅략의 즉위 6년이 되는 해라 즉위 직후가 되는 해가 아니지요 일본서기의 웅략의 즉위 연도기록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주장인것 같습니다
오류가 있는데 왜왕 무가 사신을 보낸건 승명2년(478년)이었다고 나타나 있지 462년에 무가 사신을 보내었다고 나타나 있지 않지요 462년의 기록은 왜왕 제의 세자 흥을 왜왕으로 책봉한 조서를 선포한 내용이었지 왜왕 무가 사신을 보내었다고 나타난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濟死, 世子興遣使貢獻. 世祖 大明六年, 詔曰:「倭王世子興, 奕世載忠, 作藩外海, 稟化寧境, 恭修貢職. 新嗣邊業, 宜授爵號, 可安東將軍·倭國王.」
제(濟)가 죽자, 세자인 흥(興)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세조(世祖) 대명(大明) 6년(462)에 조를 내려 말하기를, "왜(倭)의 왕세자 흥(興)은 여러 대에 걸쳐 충성을 바쳐왔고, 바다 바깥에서 번국이 되어 교화를 받고 그 변경을 편안케 하였으며, 공손히 조공해왔다. 새로 변방의 업(業)을 이었으니, 마땅히 작호(爵號)를 내려 안동장군·왜국왕으로 한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