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애굽의 약사
1.애굽왕의 계보
(1).메네스(Menes)
B.C3200년경부터 3000년에 이르는 불과 수세기 사이에 나일강연안에 흩어져 생활하는 부족민을 통합하여 정부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를 성립한 파라오로서 상이집트 부족의 지도자로 전설에는 메네스로 되어 있으나아마도 이집트 초대왕 나르메르(Narmer)와 동일인물인 것 이다. 근느 세력을 북으로 뻗쳐 국토를 통합하고 30대에 이르는 첫 왕조를 수립한 것이다. 메네스는 델타의 요충지로부터 남으로 약32km,상.하이집트가 접하는 지점 가까이에 멤피스마을 건설하고 그것을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그 후 멤피스는 고대 이집트 제일의 도시가 되었다
(2).죠세르(Djoser)
멤피스의 묘지 삭카라에 있는 최초에 만들어진 거대한 분묘로서 계단형 피라미드인 이것은 제3왕조의 최초의 왕 죠세르를 위한 것이다.
(3).쿠프(Khufu)외
쿠프( khufu), 카프레(Khafre),멘카우레(Menkaure)는 기제에 있는 세 개의 피라미드의 파라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는 케오푸스,케플렌,미케리누스라는 이름으로 기술되었다)
(4).페피2세(Pepi II)
고왕국시대 최후의 위대한 왕. 90년에 걸쳐 재위함.
(5).네브헤페트레 멘투호테프(Nebhepetre Mentuhotep)
제1중간기후 이집트의 재통일이라는 위대한 위업을 달성한 11왕조의 파라오.
(6).아흐모세1세(Ahmos I)
신왕국시대에 최초로 나타난 위대한 파라오. 그는 이집트를 공격하고 지배한 힉소스를 추방하고 고왕국시대의 영토를 회복했다
(7).아멘호텝프1세(Amenhotep I)
아흐모세1세의 아들로 영토를 남으로 넓혀 그 후 150년에 걸친 번영시대의 첫걸음을 시작하였다.
(8).투트모세1세(Thutmes I)
아멘호텝프의 뒤를 이은 투트메스1세는 국경을 더욱 넓혀 남쪽은 제4폭포 앞까지, 북동은 팔레스티나, 시리아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차지함
(9).하트셉수트여왕(Hatshepsut)
투트메스1세의 딸이며, 또한 이복오빠인 투트메스2세의 왕비이다.투트메스2세가 짧은 치세의 끝에 사망하자 하트셉수트는 나이어린 투트메스3세의 섭정이되어 정권을 장악했다. 투트메스3세는 투트메스2세의 하렘의 소실로부터 얻은 아들로 정식으로는 이 소년이 파라오였다. 하트셉수트는 처음에는 어린왕의 이름으로 통치했으나 얼마 안가서 파라오로 자칭하며 정치를 했다. 이집트왕가에 많은 여인들중 하트셉수트는 왕권과 함께 신권마저 차지하고 상.하이집트의 주권을 의미하는 이중의 관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여왕의 조상에는 남성용 왕복을 입은 모습과 파라오의 전통인 가발수염을 단 것까지 남아있다. 여왕의 등장으로 군사적인 팽창은 약 20여년간 중단되었고, 전쟁을 수습하여 이집트에 평화를 가져왔다. 또한 기념물을 여러개 만들기도 하였다. 이 위대한 여왕을 도운 유능한 인물이 있었는데 센무트(Senmut)라는 사나이로 어떤 기록에 의하면80개의 관직을 겸하고 있었으며 여왕이 가장 신뢰하는 보좌관이었다고 한다. 센무트는 공공사업 담당대신이면서 여왕을 장사지낼 장제전의 건설책임자였다. 여왕의 영원한 생명에 대해 덕을 보려고 센무트는 여왕의 장제전에 자기의 초상을 몰래 새기도록 지시했다. 이 일이 여왕에 발각되어 그의무덤을 부수고 관을 박살냈으며 몰래 새긴 그의 초상을 찾아내어 깨끗이 깎아 버리고 말았다. 하트셉수트여왕이 위대한 파라오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이집트의 나폴레옹"이라 불리우는 투트메스3세를 오랫동안 조종하고 군림했다는 것으로 알수있다.
(10).투트메스3세(Thutmes III)
그는 가가스로 필요한 지원을 얻어 여왕을 물리칠 수 있었고, 그 후 여왕이 센무트의 초상을 삭제했듯이 여왕이 만든 기념물에 새겨진 하트셉수트의 이름을 깎아 버렸다. 하지만 깎아 버려도 그 흔적은 지금까지남아있고,전해오고 있다. 정권을 잡은 투트메스3세는 다시 외국정복을 기도했고, 투트메스1세가 손을 댄팔레스티나,시리아에 대한 정복과 병합을 확고히 하고자 15회 이상이나 원정군을 지휘했고, 그곳을 평정했다. 투트메스3세는 전쟁시 용의주도한 사전준비와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 천재였다고 한다.
(11).아멘호텝프 3세(Amenhotep III)
투트메스3세의 증손인 아멘호텝프3세의 시대는 18왕조의 전성기에 해당된다. 이집트는 평화로왔고, 교역은 번창했으며, 파라오는 궁전과 거대한 조상, 자신을 매장하기위한 장제전, 그리고 각도시에서의 신전 건립등 방대한 건설계획에 힘을 쏟았다.
(12).아멘호텝프 4세(Amenhotep IV)
이때부터 18왕조는 쇠퇴의 빛을 보이며 국위는 침체되기 시작하였다. 아멘호텝프4세는 허약한 사나이로얼굴이 길고, 어깨는 축 늘어졌으며,궁둥이가 크고 다리는 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수세기동안 계속되어온 다신교를 부정하고, 신 아몬에대한 전통적인 신앙을 태양으로 대표되는 유일한 보편적인 신이며 모든 생명의 원천인 신 아톤(Aton)으로 신앙을 바꾸려 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도 "아몬이 넘쳐있는 신성있는 테베의 지도자"의 뜻인 아멘호텝프 대신 "아톤을 섬기는자"를 뜻하는 아켄아톤(IkhnAton)으로 바꾸었다. 그는 모든 신전이나 분묘에서 아몬의 상과 이름을 지우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아켄아톤은 사람들이 직접 신에 접급하지 못하게 하고, 아톤을 숭배하는 것은 그와 그의 일족에게 한하고 일반인은 신왕인 자신을 숭배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의 개혁은실패하고, 그가 죽고나서 이집트는 개혁이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네페르티티(Nefertiti) :특이하게도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아켄아톤의 아내는 끊임없이 대중을 매혹시켰다. 그러나 현재 그녀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에도 왕비로서의 역할이외에는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그녀의 선조에 대해서도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13).람세스 1세(Ramses I)
제 19왕조를 연 최초의 왕으로 군대지휘관 출신이었다. 19-20왕조의 파라오들중엣서 11명의 파라오가 람세스의 이름을 붙이고 있다
(14).람세스2세(Ramses II)
람세스2세는 왕중의 왕다운 인물이었고, 67년 걸친 찬란한 통치를 했다. 그는 힛타이트인과 외교교섭을 시작하여 기록으로서 남은 역사상 첫조약에 서명을 했다. 그는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에 원정했고 남부를 습격했다. 그의 용감한 훈공과 개인적인 용기에 얽힌 이야기를 당시의 신전벽에 새겨져 오늘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카르나크에 있는 유명한 제례용 신전인 대다주실, 그 자신과 아몬신의 영광을 찬양하기위하여 테베의 나일 서안에 건립한 대장제전 라벳세움, 오시리스신에게 바친 아비도스의 대신전, 후에 약탈의 화를 입은 몇 개인가의 멤피스신전, 강을 마주보며 4개의 람세스거상이 늘어선 누비아의 아부심벨의 신전등이 있다.
(15).클레오파트라(Cleopatra)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그리스 시대 왕비들의 전통적인 이름이기도 하지만, 이 시대의 마지막 군주였던 클레오파트라 7세 여왕의 이름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클레오파트라 여왕(기원전 51-30)은 이집트의 그리스시대(기원전 332-30) 마지막 통치자로서 로마 제국과의 끊임없는 대립과 갈등속에서 파란만장한 정치생활을 이끌었다. 기원전 51년 그녀의 부친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죽자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클레오파트라의 정치적 후견인이 되었고, 그가 케사르에게 쫒겨나 알렉산드리아에서 암살당한 뒤 정식으로 이집트 왕위에 올랐다. 케사르가 죽은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와 관곌르 맺었고, 로마는 이에 대항하여 기원전 32년 이집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기원전 31년 벌어진 악티움(Actium) 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의 해군이 주축이 된 안토니우스 측은 경쟁세력인 옥타비우스에게 패했고 클레로파트라는 기우너전 30년 8월 10일 알렉산드리아에서 안토니우스와 함께 자결하였다.
2. 프톨레미 왕조( B.C. 323-30)
나이 스물에 왕위에 올라 천하를 호령하던 알렉산더 대왕이 33세에 급사하자 그의 장군 가운데 한 명인 “프톨레마이우스”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이집트에 프톨레미 왕조를 세우고 자신을 “프톨레미 1세”라고 칭하며 왕위에 오르는데 재색을 겸비한 요부 또는 간부라는 주위의 눈총에도 아랑곳 없이 오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 남동생 두 명 (프톨레마이우스 13세 와 14세)은 물론 로마의 씨져(Caesar)와도 결혼했던 저 유명한 “클레오파트라 7세”도 바로 “프톨레마이우스 12세” 왕의 공주였다. 프톨레미왕조는 앗수르의 셀류크스 왕조와 이어지는 안티오커스왕조로 더불어 150년 동안 전쟁을 지르게 되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국력은 극도로 쇠약하게 되었고 마침내 로마의 속주가 되고 말았다.
3. 애굽 사람들의 신(神)
애굽의 종교는 태양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하루에도 태양의 모습은 다양하게 느껴진다. 태양의 다양한 모습은 다양한 애굽의 종교를 낳았다. 애굽종교의 내용은 여러사회가 태양을 어떻게 보았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졌다. 다음에 있는 신들은 태양종교에 관련되 중요한 신(神)들이다.
6-1 아몬(Amon)
애굽의 신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신이다. 아몬은 태양의 숨은면을 상징하는 신이다. 그는 숨어 있는 신이라고 불렀다. 그는 모든 신과 세상 만물을 창조한 어버이신이며 창조주이다.또 암소로 표현하기도 한다.
6-2 레(Re)
이신은 둘째로 가는 태양신이다. 그는 정점에 이른 정오의 태양의 신이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호흡을 주려고 사방의 바람을 만들었다는 창조신이기도 하다.
6-3 케프리(Khepri)
이 신은 떠오르는 태양을 상징한다. 풍뎅이 벌레로 나타난다.
6-4 아툼(Atum)
헬리오폴리스의 창조신이며 서쪽하늘에서 사라지는 태양을 상징한다. 황소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케프리, 레, 아툼,은 태양종교의 삼위신이다.
6-5 아톤(Aton)
둥근 태양의 모습을 구체화 한 디스크(日輪)이다. 그 햇살은 사람의 피부에 닿아 양자의 접촉이 이룩된다.
6-6 프타(Ptah)
멤피스의 창조신이다. 황소로 변신 또는 표현된다.
6-7 아포피스(Apophis)
뱀으로 상징되는 신이다. 아포피스는 태양의 영원한 적수이다. 악의 화신이다.
6-8 오시리스(Osoris)
나일강의 신이다. 그는 죽음과 부활의 신이기도 하다. 오시리스는 애굽에 풍요한 안정을 베푼다. 태양이 없는 밤하늘에 뜬 달은 오시리스의 모습이기도 하다.
6-9 호루스(Horus)
오리시스의 아들이다. 그는 살아있는 바로와 동일시 된다. 새매는 호루스의 상징이다.
6-10 이외에
토드(Thoth)-지혜의 신인 원숭이. 토드의 아내는 헤카(Heka)- 개구리
세트(Set)- 악어이며 동쪽의 신 네집트(Nechebt)- 뱀이며 남쪽의 신
바스트(Bast) - 고양이이며 여자의 신.
애굽인들이 섬기던 나라들이 이러한 잡다한 것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신들이 다 가짜요 참 신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시기 위하여 열 번이나 되풀이 되는 재앙을 내리셨던 것이다.
이집트의 역사
지금부터 6,000년 전 이집트는 주민의 생업과 정치, 종교, 문화의 정서가 서로 다른 두 지역처럼 나일 삼각주의 하이집트와 상류지방인 상이집트로 나누어졌다. 상이집트는 사막화가 진행되면서 이용할 만한 토지가 점차 줄어들고 생산성도 떨어져 가는 나일 강변의 좁고 긴 지역이었다. 하이집트는 오늘날 카이로 북부에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 있는 인구가 밀집된 풍요로운 땅으로 다른 이민족들과의 교역과 교류가 육지와 바다를 통해서 활발이 이루어지던 지역이었다. 그후 1,000여 년에 걸쳐 끊임없이 적대하고 경쟁하던 상, 하이집트는 기원전 3000년경 무렵 상이집트의 나르메르(혹은 메네스)라는 왕에 의해 최초로 통일되어 수도는 중간지점인 나일 델타 곡창지대가 시작되는 멤피스에 건설되었다.
나르메르의 통일은 이집트 민족의 통합과 이집트 문명의 비약적인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통일 후, 이집트는 강력한 사회적인 힘을 갖게 되었다. 이 시대를 제1왕조, 제2왕조라 하는데 이집트는 정부 조직과 행정 체계, 건축과 토목 기술, 예술 등 모든 면에서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집트 인들의 문자 체계인 히에로글리프도 정비되었고, 1년을 365일로 하는 역법이 완성되었다. 기원전 약 2800년경의 제3왕조의 2대 군주 조세르는 이집트 왕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역사상 최초로 피라미드를 건설한 군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피라미드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은 제4왕조에서 나타난다. 제4왕조의 초대 왕은 그의 후계자가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대피라미드를 기자에 세우게 된다. 제4왕조는 고대 이집트 왕국이 정점에 도달한 시기였으며, 사람인 동시에 신이기도 했던 파라오와 그의 왕권이 문자 그대로 절대적이었던 시기였다. 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의 아들 우세르카프가 세운 제5왕조에서는 태양신 숭배가 절정에 이른다. 오시리스 신을 대신하여 태양신 라가 최고신이 되었고, 군주들은 태양신의 아들임을 자처했으며, 태양신을 위한 신전이 건축되었다.
제5왕조 군주들이 피라미드 벽화에는 이집트 인들이 시리아, 누비아 등지에서 벌인 원정 사업이 그려져 있으며, 이러한 업적은 팔레르모 스톤(Palermo Stone) 같은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제5왕조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군주의 절대 권력은 제6왕조 때 완전히 약화되고, 이후 이집트인들은 폭력과 내전으로 점철되고, 비관과 혼란이 가득한 제7~10왕조의 제1중간기를 겪게 된다. 마네토의 제11왕조(기원전2133~1991년)와 제12왕조(기원전 1991~1785년)에 해당되는 중왕국시대는 테베의 왕자 멘투호텝 2세가 오랜 고난과 투쟁 끝에 이룩한 상, 하이집트의 재통일도 시작된다.
통일은 모든 계층이 이집트 인들에게 향상된 삶을 가져다 주었으며, 절대 다수의 이집트인들로부터 환영받았다. 멘투호텝 2세는 통일 후 바로 누비아, 리비아, 시리아, 시나이 원정에 나서 성공을 거두었다. 상이집트 총독으로서 이러한 원정 사업의 책임자였던 재상 아메네메트가 제12왕조를 연다. 이 왕조시대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기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이집트 역사의 황금기라고 하는 세소스트리스 3세와 아메네메트 3세의 재위 기간은 평화와 안정의 시기였으며, 신인 동시에 인간이었던 파라오들이 인간 쪽에 더 가까워진 시기였다. 제12왕조 초기부터 번영하는 이집트는 외국인들, 주로 아시아인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으며, 통상 외교의 확대로 이집트에 외래 문화와 사상이 밀려 오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하여 제12왕조 말부터 점차 국가의 통제권이 약화되고, 나라가 분열되면서 여러 대 전부터 이집트 땅에 들어와 정착한 아시아 쪽 외국인들이 제16왕조와 제17왕조 시기에는 이집트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들을 힉소스(이민족 통치자들)라고 부른다.
아시아 인들의 지배는 이집트에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는 전기가 되었다. 새로운 악기와 음악 양식, 청동 세공술에서 도자기 제조, 베짜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술 혁신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품종의 곡물과 곡식이 도입된다. 전쟁에는 새로운 유형의 무기와 아울러 전차와 말이 등장하였다. 제13왕조 때부터 힉소스 지배가 끝날 때까지의 혼돈기를 제2중간기라 부른다. 제18왕조는 이민족 힉소스의 지배를 벗어 던지기 위해 여러 대에 걸쳐 투쟁하던 테베의 왕가 출신 아흐모세가 열었다. 그는 힉소스의 세력을 델타 지역에서 소탕하고, 상하 이집트를 재통일하였으며 이집트의 옛 영토를 회복했다.
그후 투트모스 3세는 스스로 이끈 여러 차례의 원정전에서 승리하면서 이집트의 옛땅을 수복하고 아시아 지역을 편입하여 '나일 제4폭포'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러한 이집트의 정치 세력은 아멘호텝 3세 시대에 절정에 달했다. 그는 황금의 호루스, 진리의 통치자, 상하이집트의 왕, 라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불렸다. 아멘호텝 4세는 이집트의 모든 파라오 중 가장 논쟁이 대상이 되는 인물일 것이다. 그는 테베의 수호신 아문을 버리고, 역사상 최초로 유일신교의 신 개념을 확립한 종교 개혁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수도를 중부 이집트의 알-아마르나로 옮기고 신도시 아케타텐(아텐의 지평선)을 건설하였다.
신왕국시대에 누렸던 영화는 1922년 발굴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왕가의 계곡'에서 출토된 화려한 부장품들, 그중에서도 파라오 시신의 얼굴 덮개인 '투탕카멘'의 황금 가면 등으로 확인된다. 제19왕조는 람세스 1세부터 시작한다. 그의 뒤를 이은 세티 1세는 훌륭한 군사 지도자로 아시아의 지배자가 된 히타이트 왕국을 무력으로 압도하고, 나일 삼각주로 들어오려는 리비아 인들에게 효과적으로 대처하였다. 3대 군주 람세스 2세는 66년간 이집트를 다스린 위대한 왕이었다. 평화 조약과 혼인 동맹을 맺는 등 히타이트족과의 오랜 적대 관계를 청산하는 데 성공하였다.
제20왕조의 오랜 평화시대가 가고, 왕권이 몰락하고 사제들이 정치를 농단하고, 외세의 침입을 받는 제21~25왕조가 이어진다. 제3중간기라고 불리는 이 혼돈과 좌절의 시기에는 리비아계 군주들이 통치하고 누비아인들이 상이집트 전역과 중이집트의 멤피스까지 약탈하며, 에티오피아 군주들과 앗시리아인들의 지배를 받게 된다.
기원전 663~332년의 후기왕조 시대는 이집트를 지배하던 아시리아인들을 무찌른 하이집트 델타 지역 사이스의 왕자 프삼티크 1세의 제26왕조로부터 시작된다. 2대 군주 네코의 시대에는 상업이 발달하고 해군력이 증강되었으며, 나일강과 홍해 사이에 운하가 건설되었고, 특히 이집트와 그리스 사이에 교역이 발달하며, 많은 그리스인들이 상인으로서, 왕가의 용병으로서 이집트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제27왕조 시대에 페르시아의 군주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총독을 두어 다스렸으나 이집트인들은 복종하지 않았다. 외세의 강점에도 불구하고 건축과 조각과 문학이 흥성했다.
페르시아 군주들의 암살, 사망, 아테네와의 마라톤 전투에서의 패전 등을 계기로 델타 지역에서 끊임없이 반페르시아 봉기가 일어났고, 그때마다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제28왕조를 연 사이스 출신 아미르타에우스에 의해 반 페르시아 투쟁은 드디어 승리를 거두고, 제29왕조시대에는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세력 균형에 힘입어 이집트가 다시 국제 무대의 일원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제30왕조에서는 줄곧 번영을 누릴 수 있었으나 제20왕조의 마지막 군주 넥타네보가 페르시아군의 침입을 저지하는데 실패하고 누비아로 도망함으로써 이집트인에 의한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고 페르시아 군주들의 제31왕조가 들어섰다.
기원전 332년 가을 알렉산더 대제의 마케도니아-그리스 군이 이집트로 진군하자 이집트인들은 그들을 해방자로 환영했다. 알렉산더는 나일 삼각주 서편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였고, 지중해에 면한 이 항구 도시는 이집트 최대의 도시로 발전한다. 이집트 통치를 마케도니아, 그리스, 이집트인 행정관들에게 나누어 맡기고 떠난 알렉산더가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사망하자 이집트는 우여곡절을 거쳐 마케도니아 귀족 출신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수중에 들어갔다.
프롤레마이오스 왕가에 권력 투쟁이 빈발하여, 전성기 때 영토의 많은 부분을 상실하게 되어, 마지막 100년은 로마의 보호 없이는 독립도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약화되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의 후손들은 기원전 30년 안토니우스와 연대하여 옥타비아누스와 대결하려 했던 클레오파트라 7세가 악티움 해전에서 패하고 알렉산드리아가 함락당하여 자살할 때까지 300년 이상 이집트를 다스렸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세계의 중심이었고, 학문과 예술의 수준이 세계 최고인 도시였다.
야심파이고 보기 드물 게 유능했던 클레오파트라 7세의 자살로 고대 이집트 시대는 막을 내리고 이집트는 로마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로마 황제들은 이집트의 전통을 존중하였고, 이스스 숭배를 비롯한 이집트 문화의 영향이 로마까지 파급되었다. 한편 기독교가 이집트로 전파된다. 기독교는 발생 초기 박해를 받았으나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보호 속에서 급격히 발전한다. 특히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이집트의 모든 우상 신전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린바 있다.
이집트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비잔틴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자 이집트에서의 토착종교는 거점을 점점 잃어 갔다. 기독교 수도자와 은둔자들이 급격히 늘어나 세계 최초로 이집트에 수도원이 등장하였다. 성서, 성자들과 순교자들의 삶에 대한 번역물이 주를 이루는 풍부한 콥트문학이 이집트에서 발달했다
고대 이집트의 주민과 언어
고대 이집트인은 니그로이드를 모체로 함족과 셈족의 피가 섞인 주민이다. 고대 이집트어는 아프리카적 요소에 함어와 셈어가 섞여 발달했다. 아프리카적 요소인 상형문자(히에로글리프)는 셈족의 쐐기문자와 같은 비상형문자로 바뀌지 않은 채 3000년 이상 사용되었다. 고대 이집트어는 고왕국시대의 고어(古語), 중왕국시대∼신왕국시대의 중기어(中期語), 신왕국시대∼말기왕조시대의 말기어 3가지로 나누어진다. 신전의 문자나 칙령 등에는 히에로글리프를 사용했다. 한편, 고왕국시대의 신관(神官)은 히에로글리프의 간략서체인 신관문자를 만들었다. BC 7세기에는 도상성(圖像性)이 없는 속필문자(速筆文字)인 민중문자가 고안되어 상업 등에 이용되었다. 콥트어는 3세기 말 이집트어에서 생긴 뒤 새로운 문자체계로 표현되었다. 이슬람교도에게 정복당한 이후는 아라비아어를 사용했으며, 오늘날은 아라비아어의 이집트방언을 사용하고 있다.
이슬람 이전
구석기시대 이집트인은 유목생활을 하였다. 북아프리카와 이집트가 건조화되기 시작한 이후는 강가에 모여 살았다. 신석기시대는 하(下)이집트 파이윰분지에서 BC 5000년 무렵에 시작되었는데 이 문화를 파이윰A라고 한다. BC 4500년 무렵에는 상(上)이집트에 구리를 이용하는 바다리문화가 발생했다. BC 4000년 무렵에는 보다 진보된 나카다 제 1 기문화가 출현하여 초보적인 이집트문자가 발생했으며, 이어 BC 3500년 무렵 나카다 제 2 기문화로 발전했다. 나일강을 중심으로 마을이 연합하고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에 국가가 생긴 것은 이 무렵이다. 하이집트는 파이윰으로부터 북쪽지역에, 상이집트는 파이윰에서 아스완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⑴ 초기왕조시대:BC 3000년 무렵 상이집트의 왕 메네스가 이집트를 통일한 뒤 제 1 왕조가 시작되었다. 수도는 티니스에 있었다. 왕권이 신격화되어 왕관의 형상도 왕권의 상징인 매와 뱀으로 정해졌다. 호루스신을 섬겼으며, 대형 왕묘 구축기술을 갖추었다. 제 2 왕조 초기의 왕은 수도를 멤피스 근처로 옮기고 왕묘를 세웠으며, 다음 왕 페리브센은 수도를 상이집트의 아비도스로 옮기고, 호루스신의 적(敵)인 세트신을 섬겨 종교상의 변혁을 가져왔다. 제 2 왕조는 BC 2700년 무렵의 카세케무이왕시대에 몰락했다. 이 제 1 ∼2왕조시대를 티니스시대·고졸시대(古拙時代)·초기왕조시대라 한다.
⑵ 고왕국시대:BC 2700년 무렵 제3왕조는 멤피스에 수도를 두었다. 조세르왕시대에 국력이 신장되어 최초의 석조피라미드를 사카라에 구축했다. 그 규모는 동서 121m, 남북 109m, 높이 60m였다. 그 뒤의 왕은 이것을 모방하여 피라미드로 왕묘를 만들었다. 제 4 왕조는 BC 2600년 무렵 스네프루왕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왕조는 남쪽으로 누비아, 동쪽으로 아시아, 서쪽으로는 리비아로 진출했다. 스네프루왕은 마이둠피라미드·굴절피라미드와 그 뒤 다슈르의 저경사(低傾斜) 피라미드를 건축했고, 아들 쿠푸왕은 기자에 대형피라미드를 세웠다. 카프레·멘카우레 등의 왕들도 각각 피라미드를 구축했으며, 제 4 왕조에서 라(Ra;太陽神) 신앙은 왕가의 신앙인 동시에 국가의 신앙으로 확립되었다. 또한 이때 미이라를 만드는 기술도 생겼다. 제5왕조는 BC 2450년 무렵 우세르카프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나스왕의 피라미드에는 사후 왕의 안녕과 영생을 기원하는 피라미드 교서가 내부에 새겨져 있다. 제 6 왕조 페피 2세시대는 왕권이 쇠약해져 지방호족과 고관이 권력을 장악하다가 BC 2263년 무렵 몰락했다. 제3∼6왕조에 이르는 이 시대를 피라미드시대라고도 한다.
⑶ 제 1 중간기:고왕국시대 뒤 제 1 중간기는 혼란기였다. 이 혼란기는 제7∼10왕조까지 이어지는데 왕조들은 전국토를 통치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지 못한 지역적 존재에 불과했다.
⑷ 중왕국시대:제11왕조의 안데프 1세는 BC 2160년 무렵 상이집트 테베를 중심으로 혼란을 수습하고 국가재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멘투헤테프 2세가 재통일을 완성하고, 상부를 피라미드형으로 만든 대형 장제전(葬祭殿)을 디르알바리에 세웠다. 멘투헤테프 3세는 누비아의 일부를 이집트 지배하에 두었다. BC 2000년 무렵 아메넴하트 1세에 의해 시작된 제12왕조는 수도를 하이집트의 이타우이(지금의 다슈르)로 옮겼다. 그리고 테베지역의 아멘신을 왕가의 신으로 섬겼다. 아메넴하트 1세는 수에즈 지협에 성채를 구축했고, 말년에는 아들 세누세르트 1세와 공동통치를 하였다. 세누세르트 1세는 나일강지류를 개발, 홍해에 연결하였으며, 아메넴하트 3세는 농업을 진흥시키고 하이집트에 댐을 구축했다. 한편, 세누세르트 1세에 의해 식민지가 된 누비아에서는 금이 산출되어 이집트를 부유하게 만들었다. 제12왕조는 행정 및 군사제도를 정비했으며 문화적으로 번영했는데, BC 1785년 무렵 몰락하고 제13왕조가 이를 계승했다. 우카프·소베리호테프·아메넴하트·세켐레스·켄지엘 등의 왕들이 알려져 있으나 통치력은 극히 미약했다. 이 시대는 BC 1750년 무렵에 몰락하였다.
⑸ 제 2 중간기:중왕국시대가 끝난 뒤 혼란기인 제 2 중간기가 시작되었다. 제 2 중간기 초에는 이집트인을 왕으로 세운 제14왕조가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침입한 힉소스는 BC 1730년 무렵 아바리시(지금의 타니스)를 수도로 제15왕조를 세웠고, 그 뒤 제16왕조까지 이어갔다. 그러나 힉소스는 하이집트만 직접 통치했을 뿐 상이집트는 지방호족을 통해 간접 통치했다. 이런 상황에서 테베에 기반을 둔 영주가 BC 1680년 무렵 제17왕조를 세웠다. 초기에는 힉소스왕조와 공존했으나 5대 세케넨레왕에 이어 그의 아들 카메스왕이 힉소스를 몰아냈다.
⑹ 신왕국시대:힉소스를 완전히 몰아낸 것은 다음 왕 아메스 1세시대 BC 1580년 무렵이다. 그로부터 제18왕조가 시작되어 수세평화주의(守勢平和主義) 국가에서 공격적인 군사국가로 변했다. 전쟁에서는 힉소스가 들여온 말과 전차를 중요시했다. 그리고 아멘신(神)의 세력이 팽창하여 힉소스를 몰아내고 최고의 국가신이 된 동시에 태양신 라를 흡수하여 아멘라라고도 했다. 또한 아멘신을 위한 카르나크신전·룩소르신전, 핫솁수트여왕이 장제전(葬祭殿) 등을 세웠다. 6대왕 투트모세 3세는 영토를 가장 크게 넓혔는데, 남쪽으로는 누비아의 나일강 제 4 급류까지, 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강 일대까지 지배했다. 제10대 이크나톤왕은 종교개혁을 실시하여 아멘신의 영향력을 일시적으로 축소시켰다. 한편 이 시대의 아마르나양식은 후대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제18왕조 이후에 람세스 1세가 삼각주지대에 제19왕조를 세웠으며, 3대 람세스 2세는 정복왕 또는 건축왕으로 유명하다. 히타이트와 맺은 평화조약은 인류가 맺은 최초의 성문화된 평화조약이다. 건축은 이집트 및 누비아·아시아 각지에서 이루어졌는데, 그 가운데 아부심벨의 대암굴신전이 대표적이다. 제20왕조는 BC 1200년 무렵 세트나크트가 세웠다. 그러나 아들 람세스 3세 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여 BC 1080년 무렵 몰락했다.
⑺ 후기왕조시대:스멘데스왕이 타니스에 세운 제21왕조에 이어 BC 960년 무렵 리비아인이 제22왕조를 열었다. 힉소스 이래 2번째 외국인 왕조이다. BC 817년 무렵에도 리비아인이 제23왕조를 세웠으나 사이스에 기반을 둔 이집트인 지도자가 일어나 BC 780년 무렵 제24왕조를 세웠다. 21∼24왕조시대를 말기왕조시대 또는 제3중간기라 한다. 제 3 중간기 뒤에는 누비아인이 제25왕조를 열었다. BC 663년에는 이집트인이 제26왕조를 세웠고, BC 525년에는 페르시아의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점령하고 페르시아령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제27왕조이다. BC 404년 이집트인 아미르타이스가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제28왕조를 세운 이후 이집트인이 제29·30왕조를 세웠다. 이 세 왕조가 파라오시대의 마지막 이집트 왕조이다.
⑻ 프톨레마이오스왕조시대:BC 341년에는 페르시아의 아르탁세륵세스 3세가, BC 332년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했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죽은 뒤 부장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알렉산드리아에 프톨레마이오스왕조를 세웠다. 프톨레마이오스왕조는 이집트 고유의 문화를 존중했으며, 왕들은 이집트식 신전을 세우고 이집트식 상형문자를 새겼다. 왕가의 공용어는 그리스어였으며, 왕명은 상형문자·민중문자·그리스문자 3가지로 발표했다.
⑼ 로마제국령시대:BC 30년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가 로마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자살하자, 로마는 이집트를 속주로 삼고 알렉산드리아에서 곡물을 가져갔다. 395년 로마제국이 서로마제국과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으로 분열된 이후는 비잔틴제국령으로 편입되었는데, 유스티니아누스대제가 신전폐쇄를 명한 이후 파라오시대의 문화전통이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그리스도교는 비잔틴제국령이 되기 이전부터 이집트에 들어와 있었으며, 콥트어에 그리스문자 및 음을 이용하여 독자적인 콥트문자체계를 만들었다. 비잔틴제국시대의 이집트는 물질적인 착취와 종교적인 박해를 받았다.
이슬람 이후
641년 아랍인 아므르 빈 알라스가 이집트를 정복하여 군영도시 푸스타트를 건설하고 이집트를 통치했다. 아랍인은 푸스타트·알렉산드리아·아스완 등 주요 도시에 살며 조세를 징수하고 수비대를 두었다.
⑴ 옴미아드·아바스왕조:이집트의 아랍화·이슬람화는 칼리프권력에 복종하던 옴미아드왕조·아바스왕조시대(661∼868)에 진행되었다. 현주민 콥트계 그리스도교도는 이슬람교로 개종했으며 아랍인이 농촌에 정착했다. 통치기구가 정비되고 8세기 이후에는 아라비아어가 공용어로 되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아랍화·이슬람화에 대해 콥트계 그리스도교도가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아랍인은 지도적 위치를 잃었다.
⑵ 독립왕조시대:868년 이집트에 파견된 투르크계 군인 아마드 빈 툴룬은 반(半)독립왕조인 툴룬왕조를 세웠다. 아마드 빈 툴룬은 877년 시리아를 점령하고 툴룬왕조에 통합시켜 영역국가(領域國家) 이집트의 원형을 만들었다. 아바스왕조로의 재통합시대와 이흐시드왕조시대를 거쳐 969년 이후는 파티마왕조가 이집트를 지배했다. 그해 이집트를 공략한 파티마왕조의 제 4 대 칼리프인 무이즈의 장군 자우하르는 푸스타트 북동쪽에 카히라라는 수도를 건설했다. 파티마왕조는 수니파 아바스왕조의 칼리프에 대해 칼리프권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아즈하르사원을 건설하는 등 활발한 종교·문화활동을 벌였다. 1169년 파티마왕조의 재상이었던 쿠르드인 살라 웃딘은 아이유브왕조를 수립했다. 살라 웃딘은 십자군을 막기 위해 군대를 재편성하고 시리아의 영유권을 부활시키는 동시에 수니파의 지배체제를 확립했다. 한편, 이크타제도를 도입하여 군인에게 봉토를 지급했다. 1250년에는 맘루크세력이 신왕조를 수립했으나 뒤에 바리 맘루크왕조(1250∼1390)와 부르지 맘루크왕조(1382∼1517)로 나뉘었다. 술탄을 우두머리로 바리 맘루크왕조는 십자군과 몽고인을 격퇴시킴으로써 강성해졌으나, 군벌의 세력다툼 격화와 왕조 말기의 경제적 혼란 및 중계무역지로서의 기능상실로 점차 쇠퇴하였다.
⑶ 오스만지배하의 이집트:1517년 이집트는 오스만제국의 속주가 되어 총독의 통치를 받았다. 때문에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는 이스탄불로 바뀌었고 이집트는 정체기를 맞이했다. 초기에는 중앙집권적 징세체제가 시행되었으나 17세기 후반 이후 징세청부제도가 보급되면서 징세청부를 맡은 맘루크층은 농촌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고 이집트총독의 권한은 명목적인 것이 되었다. 한편, 맘루크층은 파벌을 조성하며 이집트사회에 토착화하였다. 18세기 후반에는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을 공언하는 유력한 맘루크가 나오게 되는데, 이 맘루크를 뒷받침한 것은 농촌으로부터의 수입 외에 동방무역에서 얻은 수익이었다.
⑷ 메메트알리왕조:1798년 이집트를 원정한 나폴레옹은 3년 동안 이집트를 지배했다. 이 3년동안 나폴레옹은 근대국가를 건설하고자 이스탄불로부터 알바니아인 용병대 장교를 파견했으며, 1805년 나폴레옹이 퇴각한 뒤에 이 사업은 메메트 알리에게 넘어갔다. 메메트 알리는 맘루크세력을 없애고 징세청부제도를 폐
지했다. 그리고 토지를 조사하여 일원적으로 농민을 지배하는 한편 전매제도(專賣制度)·근대공장설립·징병제 실시와 함께 근대적 군대를 창설하고 기술학교를 설립하는 등 부국강병과 식산흥업정책(殖産興業政策)을 실시했다. 대외적으로는 와하브파를 소탕하기 위해 아라비아반도로 출병하여 수단을 정복하고 그리스독립전쟁에서 오스만제국을 지원했으며 제1·2차 시리아전쟁 등을 통한 영토확장정책을 꾀했다. 그러나 유럽 열강과 충돌하여 40년 런던 4 국조약을 체결하고, 수단을 제외한 정복지를 포기하는 동시에 이집트 국내시장을 개방했다. 한편, 그 대가로 메메트 알리 일족의 이집트총독 세습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⑸ 영국식민지 이집트와 독립:메메트 알리가 죽은 뒤 사이드와 이스마일은 자유주의적 경제체제를 원칙으로 수에즈운하 개설 등 근대화정책을 실시했다. 그동안 이집트재정의 외자의존과 목화의 단일경작 농업구조가 진전됨에 따라 이집트경제는 유럽에 종속되었다. 1876년 이집트재정은 파탄되어 국제관리하에 놓여졌으며, 유럽열강은 이집트내정에 간섭했다. 79년 일어난 민족주의운동이었던 아라비의 반란을 무력진압한 영국은 이집트를 군사지배하에 두었다. 제 1 차세계대전 뒤 1919년 자글룰을 지도자로 하여 반영민족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영국은 22년 명목상 이집트독립을 승인했다. 그 뒤 이집트 정치는 영국으로부터의 완전독립을 목표로 전개되었다.
⑹ 나세르 이후:1952년 7월 23일 G.A. 나세르가 이끄는 자유장교단은 이집트혁명으로 파루크를 퇴위시키고, 이듬해 이집트공화국을 선언했다. 혁명정권은 제 1 차농지개혁과 공업화정책 등을 통해 국민통합과 자립된 국민경제를 목표로 했으나 56년 제 2 차중동전쟁(수에즈전쟁) 뒤에는 계획경제를 바탕으로 공공부문을 확대했다. 58년에는 시리아와 통합하여 아랍연합공화국이 수립되었다. 61년 시리아통합이 해체된 뒤에는 제 2 차농지개혁, 대기업의 국유화, 사회복지제도 확충 등 사회주의적 정책이 실시되었다. 그 동안 나세르는 아랍민족주의운동을 배경으로 국제정치무대에서 비동맹중립주의를 지켰으나, 이 정책은 67년 제 3 차중동전쟁을 계기로 좌절되었다. 70년 요르단내전으로 아랍세계의 분열위기가 높아지고 요르단정부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사이의 화해가 진행되는 가운데 나세르가 죽었다. 나세르의 뒤를 이은 M.A. 사다트는 73년 제 4 차중동전쟁을 계기로 경제통제를 완화하고, 외자를 도입할 목적으로 개방정책을 실시했다. 그에 따라 경제는 활기를 띠고 물자가 풍부해진 반면 국제수지는 악화되고 물가가 폭등했다. 77년 1월에는 생활필수품의 가격인상을 계기로 폭동이 일어났다. 사다트는 친러시아노선에서 벗어나 친미국노선으로 전환하고 77년 11월 이스라엘을 방문했다. 79년에는 캠프데이비드합의에 따라 이스라엘과 단독평화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 외교정책은 아랍세계의 분열과 이집트의 고립을 가져왔으며, 그는 81년 10월 이슬람원리주의자에게 암살되었다. 그 후임으로 M.H. 무바라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87년 재선되었다. 90년 이슬람원리주의자들과의 대결이 계속되는 가운데, 12월 총선거에서 여당인 국민민주당이 압승하여 무바라크가 계속 정권을 잡았다.
이집트의 파라오 이전과 파라오들의 시대
1. 파라오 이전의 상,하 이집트
세계에서 제일 긴 강 나일(The Nile) 은 적도 지방의 빅토리아 호수에서 발원하여 6,671 km 를 흘러 지중해로 들어간다. 강은 바다에 닿기 1,000 km 쯤 전 아스완에 있는 '나일의 제1폭포'를 통과하는데,이집트 역사는 대략 나일의 이 마지막 1,000km 구간, 즉 나일의 제1폭포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유역에서 지난 6,000년 동안 일어난 일들이다.
12,000∼10,000년 전 쯤인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기상변화가 계속되어 원래 드넓은 숲이었던 북부 아프리카 지역이 점차 사막으로 변해갔다. 사람들은 나일강 유역에 모여 살게 되었으나 해마다 강물이 범람하는 이곳도 처음부터 사람이 편히 살 수 있는 풍요한 땅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범람으로 비옥해진 땅에 농사를 지으면서 범람에 대처하는 토목과 관개기술을 개발해내고 도시를 건설하고 또 신화를 창조해내면서, 후세의 사람들이 '고대 이집트 문명'이라고 부르게 되는 위대한 문명의 기초를 다져놓은 것이다. 지금부터 6,000년전쯤이 되자 이집트는 주민의 생업과 정치,종교,문화적 정서가 서로 다른 두 지역처럼 되었으니 나일 삼각주의 하(下) 이집트와 상류지방인 상(上) 이집트가 그것이다. 상 이집트는사막화가 진행되면서 이용할 만한 토지가 점차 줄어들고 생산성도 떨어져 가는 나일 강변의 좁고 긴 지역이고, 하 이집트는 오늘날 카이로 북부에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있는 인구가 밀집된 풍요로운 땅으로, 다른 이민족들과의 교역과 교류가 육지와 바다를 통해 활발히 이루어지던 지역이었다.
2. 이집트 고대 역사 : 파라오들의 시대
1) 초기왕조시대 (기원전 3000-2780년경)
1,000여년에 걸쳐 끊임없이 적대하고 경쟁하던 상,하 이집트는 기원전 3000년 무렵 상 이집트의 르메르라는 왕에 의해 최초로 통일되고 수도는 상,하 이집트의 중간 지점인 멤피스에 건설되었다. 이집트 민족의 통합과 이집트 문명의 비약적 발전의 계기가 되었고, 이집트 고대사의 시발점이 된 나르메르의 통일은 히에라 콘폴리스에서 출토된 '나르메르 팔레트'라는 점토판에, 호루스 밑에 꿇어 앉아 있는 하 이집트 왕이 나르메르왕에게 항복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일이 있고 2,700년쯤 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332-30년)의 신관(神官) 마네토는 고대 이집트의 역사를 파라오(군주,왕) 들의 계보에 따라 모두 31개의 왕조로 나누어 서술하였는데, 마네토의 서술은 그가 메네스라는 이름으로 부른 나르메르의 상,하 이집트 통일에서 시작하여 이집트 출신의 마지막 파라오 넥타네보 2세의 죽음 (기원전 343년)으로 끝을 맺는다.
고대 이집트 역사 서술에 사용되는 '제 몇왕조'라는 명칭은 마네토의 이 서술체계를 활용한 것이며, 초기왕조시대는 마네토의 제1,제2왕조에 해당된다.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 통일로 가능해졌다. 통일 이집트의 초대 군주 나르메르의 재위 중 멤피스에서 나일강의 흐름을 바꾸는 공사가 있었는가 하면, 그의 후계자인 아하, 3대 군주 제르시대에 이집트인들은 누비아로, 시나이로 원정을 한다. 제1왕조가 발전의 절정을 이룬 때는 5대 군주 덴의 시대였다. 덴 왕은 제국의 행정 제도를 완비하고 상 이집트의 군주임을 상징하는 흰색 왕관과 하 이집트의 군주임을 상징하는 붉은 왕관을 결합시킨 이중 왕관을 최초로 착용하였고, 영토 확장과 국가 기반의 확립, 국민적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제2왕조의 초대 군주의 칭호 헤텝세켐위 ('두 세력이 평화스러운' 이라는 뜻) 는 상,하 이집트 사이에 분쟁이 끝난 것을 상징하는 듯하다. 제1, 제2왕조시대에 이집트는 정부 조직과 행정 체계, 건축과 토목기술, 예술 등 모든 면에서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집트인들이 문자 체계인 히에로글리프(상형문자)도 정비되었고, 1년을 365일로 하는 역법이 완성되었다.
2) 고왕국시대 (기원전 2780-2270년경)와 제 1중간기 (기원전 2263-2040년)
고왕국시대는 마네토의 제3 - 6왕조에 해당된다. 제3왕조의 2대 군주 조세르는 이집트 왕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역사상 최초로 피라미드를 건설한 군주로도 유명하다. 조세르 치하의 재상이며, 제사장이고, 의사이며, 사상가이자 건축가인 임호텝이 조세르의 무덤으로 고안해 사카라에 건설한 '계단식 피라미드' 는 세계 최초의 대규모 석조 건축물로서 파라오의 절대권력과 조직화된 국력을 짐작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임호텝은 훗날 '치료의 신'으로 추앙받으며 의자에 앉아 있는 서기관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피라미드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은 제4왕조 (기원전 2723-2563년) 에서 나타난다. 제4왕조의 초대 왕은 스네프루였는데, 그의 후계자 쿠푸가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대 피라미드를 기자 지방에 세운 것이다.
평균 2,300kg 짜리 돌 2백 30만개가 들어간 이 공사는 고대 이집트 인들의 건축 기술, 측량과 설계의 정확함, 국가 동원 체제, 기획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쿠푸의 아들 카프라가 세운 피라미드도 아버지의 것 못지 않으나 그는 '계곡신전'에 있는 스핑크스로 더 유명하다. 왕릉 단지의 수호신으로 여겨지는 스핑크스의 얼굴은 카프라의 것이라고 한다. 멘카우라의 피라미드도 똑같이 유명하다. 이 두 피라미드는 대 피라미드보다 약간 작은 크기로 그 옆에 서 있다. 제4왕조는 고대 이집트왕국이 정점에 도달한 시기였으며, 사람인 동시에 신(神)이기도 했던 왕과 그의 왕권이 문자 그대로 절대적이었던 시기였다. 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의 아들 우세르카프가 세운 제5왕조 (기원전2563-2423년)에 서는 태양신 숭배가 절정에 이른다. 오시리스 신을 대신하여 태양신 라가 최고신이 되었고, 군주들은 태양신의 아들임을 자처했으며, 태양신을 위한 신전이 건축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집트 신화에서 태양신 라는 때로는 오시리스 신과 동일시되기도 하며, 때로는 호루스 신과 합성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태양신 라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은 호루스 신과 같이 매의 얼굴을 한 사람이 머리에 태양을 얹고 있는 형상이며, 태양은 뱀이 둥글게 한번 몸을 튼 모습으로 표현된다. 제5왕조 군주들의 피라미드 벽화에는 이집트 인들이 시리아, 누비아 등지에서 벌인 원정 사업이 그려져 있으며, 이러한 업적은 '팔레르모스톤(Palermo Stone)' 같은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제5왕조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군주의 절대 권력은 제6왕조 (기원전2432-2263년) 때 완전히 약화되고, 이후 이집트 인들은 폭력과 내전으로 점철되고 비관과 혼란이 가득한 제7∼10왕조의 제1중간기를 겪게 된다.
3) 중왕국 시대 (기원전 2133-1785년)와 제 2중간기 (기원전 1785-1575년)
마네토의 제11왕조 (기원전 2133-1991년)와 제12왕조 (기원전 1991-1785년) 에 해당되는 중왕국 시대는 테베의 왕자 멘투호텝 2세가 오랜 고난과 투쟁 끝에 이룩한 상,하 이집트의 재통일로 시작된다. 그는 호루스의 새로운 이름인 스마토위 ('두 땅을 통일하는 자'라는 뜻)를 자신의 칭호로 택했다. 통일은 모든 계층의 이집트인들에게 향상된 삶을 가져다 주었으며, 절대 다수의 이집트인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멘투호텝 2세는 통일 후 바로 누비아, 리비아, 시리아, 시나이 원정에 나서 성공을 거두었고, 그의 뒤를 이은 멘투호텝 3세는 누비아 지역에 대한 직접 지배를 위해 콥토스에서 와디 함마마트를 거쳐 홍해로 이르는 길을 재개척했다. 상 이집트 총독으로서 이러한 원정 사업의 책임자였던 재상 아메네메트가 제12왕조를 연다.
이 왕조시대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기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아메네메트는 아문을 수호신으로 하는 테베 출신이었으나 이집트 전역을 보다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멤피스 남쪽에 새로운 도시 이트즈-토위 ('두 땅을 쥔'이라는 뜻)를 건설하고 천도했다. 그리고 근처에 자신의 피라미드를 건설했다. 누비아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나일의 제2폭포' 지역에 요새를 건설했으며, 아시아인들의 델타 지역 침입을 막기 위해 와디 툼밀라트에 '통치자의 성' 이라는 요새를 세웠다. 그의 후계자들도 신석기시대 농경문화의 발상지인 파이윰 지방을 재확보하는 등 이집트 번영에 박차를 가했다. 이집트 역사의 황금기라고 하는 세소스트리스 3세와 아메네메트 3세의 재위기간은 평화와 안정의 시기였으며, 신인 동시에 인간이었던 군주들이 인간쪽에 더 가까워진 시기였다. 제12왕조 초기부터 번영하는 이집트는 외국인들, 주로 아시아인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으며, 통상과 외교의 확대로 이집트에 외래문화와 사상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세소스트리스 3세와 아메네메트 3세의 황금기에 이어 아메네메트 4세와 세벤크네프루 여왕 통치기에도 아시아 인들이 기회의 나라 이집트로 몰려와 자신들의 재능을 발휘하여 이집트 문화와 사회발전에 기여하면서 자신들의 입지와 세력을 강화했다.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제12왕조 말부터 점차 국가의 통제권이 약화되고, 나라가 분열되면서 여러 대 전부터 이집트 땅에 들어와 정착한 아시아계 외국인들이 제16왕조와 제17왕조 시기에는 이집트를 지배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들을 힉소스(이민족 통치자들) 라고 부른다. 아시아인들의 지배는 이집트에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는 전기가 되었다. 새로운 악기와 음악 양식, 청동 세공술에서 도자기 제조, 베짜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술 혁신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품종의 동물과 곡식이 도입된다. 전쟁에는 새로운 유형의 무기와 아울러 전차와 말이 등장하였다. 제13왕조 때부터 힉소스 지배가 끝날 때까지의 혼돈기가 제2중간기 (기원전 1785-1575년) 이다.
4) 신왕국시대 (기원전 1575-1085년)와 제 3중간기 (기원전 1085-664년)
제18왕조 (기원전 1575-1308년) 는 이민족 힉소스의 지배를 벗어 던지기 위해 여러 대에 걸쳐 투쟁하던 테베의 왕가 출신 아흐모세가 열었다. 아흐모세는 가문의 전통에 따라 '아문 신의 아내'라는 칭호를 가진 친누이 노프레타리와 결혼하였는데 이러한 친오누이 간의 결혼은 신과 여신의 결혼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중왕국시대부터 상실되기 시작한 왕의 신성성을 회복하려는 고도의 정치 행위였다. 아흐모세는 힉소스의 세력을 델타 지역에 소탕하고 상,하 이집트를 재통일하였으며, 이집트의 옛 영토를 회복했다.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아멘호텝 1세는 이집트 국경을 남쪽의 제3폭포까지 확대했다. 제18왕조의 4대 군주 투트모세 2세의 정처 핫쳅수트는 그녀의 남편이 후궁에게서 낳은 투트모세 3세가 겨우 열 살의 나이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섭정을 하다가 나중에는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녀는 회화나 조각에서는 남자의 복장을 하고 수염을 단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문헌에서는 그녀를 가리키는 데 여성형 인칭대명사가 사용되고 있다. 그녀의 집권 기간 중 이집트는 대체로 평화로웠으나 통치영역이 크게 축소되었다. 그녀가 죽은 뒤 투트모세 3세는 스스로 이끈 여러 차례의 원정전에서 승리하면서 이집트의 옛땅을 수복하고 아시아 지역을 편입하여 '나일의 제4폭포'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러한 이집트의 정치 세력은 아멘호텝 3세 시대에 절정에 달했다. 그는 황금의 호루스, 진리의 통치자, 상,하 이집트의 왕, 라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불렸다. 아멘호텝 4세는 이집트의 모든 왕들 중 가장 논쟁의 대상이 되는 인물일 것이다. 그는 테베의 수호신 아문을 버리고 역사상 최초로 유일신교의 신 개념을 확립한 종교 개혁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왕위에 오른지 5년 되는 해에 자신의 이름을 태양신의 숭배를 뜻하는 아케나텐('아텐에게 봉사하는'이란뜻) 으로 바꾸고, 태양신의 구체적인 형상인 아텐(태양판) 을 유일한 존재로 숭배하고, 아텐에게 바치는 수많은 신전을 지었다. 그는 수도를 중부 이집트의 알아마르나로 옮기고 신도시 아케타텐 (아텐의 지평선)을 건설하였다. 신왕국시대에 누렸던 영화는 1922년 발굴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왕들의 골짜기'에서 출토된 화려한 부장품들, 그
중에서도 파라오 시신의 얼굴 덮개인 '투탄카문 왕의 황금 가면' 등으로 잘 확인된다. 9살에 왕위를 계승한 소년왕 투탄카문은 즉위 3년째되는 해에 도읍을 옮기고, 아텐 숭배를 버렸으며, 이름도 투탄카문으로 바꾸었다. 그 뒤 왕권은 아이, 호렘헵을 거쳐 재상이자 장군이었던 람세스의 가문으로 넘어간다. 19왕조 (기원전 1308-1186년)는 람세스 1세부터 시작한다.
그의 뒤를 이은 세티 1세는 훌륭한 군사 지도자로 아시아의 지배자가 된 히타이트 왕국을 무력으로 압도하였고, 나일 삼각주로 들어오려는 리비아 인들에게 효과적으로 대처하였다. 3대 군주 람세스 2세는 66년 간이나 이집트를 다스린 위대한 왕이다. 평화 조약과 혼인 동맹을 맺는등 히타이트 족과의 오랜 적대 관계를 청산하는 데 성공했다. 성경의 출애급기에 나오는 압제자 파라오가 람세스 2세이다. 뒤를 이은 그의13째 아들 메르네프타는 유대 민족이 이집트에서 대탈출 (출애급) 할 당시의 군주로 추정되고 있다. 메르네프타의 전승 기념비에 있는 '이스라엘은 황량하며, 씨 뿌릴 땅이 없다'는 대목은 이스라엘을 언급한 가장 오래된 문헌자료다. 제20왕조 (기원전 1186-1085년)의 오랜 평화 시대가 가고, 왕권이 몰락하고 사제들이 정치를 농단하고 외세의 침입을 받는 제21∼25왕조 (기원전 1009∼664년)가 이어진다. 제 3중간기라고 불리는 이 혼돈과 좌절의 시기에는 리비아계 군주들이 통치하고, 누비아인들이 상 이집트 전역과 중 이집트의 멤피스까지 약탈하며, 이디오피아 군주들과 앗시리아 인들의 지배를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