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열 李韓烈(1966~1987)】 "1987년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열사"
1966년 8월 29일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서 아버지 이병섭과 어머니 배은심의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누나 3명이 태어난 다음 태어난 장남이라서 누구보다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광주동산국민학교(現 광주동산초등학교), 광주동성중학교, 광주진흥고등학교(11회)를 졸업했다.
광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있었는데 모범생이었던 이한열은 부모님의 말씀대로 집에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이한열은 나중에야 진상을 알게 된 후 충격을 받고 민주화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86년 재수로 연세대학교 경영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이한열은 경영학과 C반 소속으로 최루탄 피격 당시 입고 있었던 티셔츠도 C반 반티였고 본인도 상당히 마음에 들어 자주 입고 다녔다고 한다.
재학 중 중앙 동아리인 '만화사랑' 창립 멤버로 참여했다. 이 동아리는 당시 운동권이 대중과 멀어지자 대학생들을 운동권으로 쉽게 포섭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대놓고 학생운동 서클을 만들 수는 없었으므로 만화나 음악 등등의 명목을 붙여 동아리를 만들고 활동 구심점으로 삼았다. 이한열은 "비록 명목상일지라도 '만화 동아리'를 표방하고 있으므로 만화를 열심히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부원 중에서 만화를 가장 열심히 배웠다고 한다. 이런 제안에 힘입어 민중 화가를 불러 그림을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1987년 6월 9일 이한열은 '6·10 대회 출정을 위한 범연세인 총궐기 대회'에서 시위대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그날 오후 4시 40분경 학과는 달랐지만 마찬가지로 '소크'였던 도서관학과 2학년생 이종창은 최루탄을 공격적으로 쏴대는 경찰들을 피해 교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같은 시각 이종창처럼 쫓기고 있었던 이한열 역시 교문 안으로 뛰어 들어가다가 수평으로 직사된 최루탄에 후두부를 피격당했다.
최루탄을 맞은 이한열을 발견한 이종창은 이한열을 끌어안고 학교로 들어갔다. 참고로 이종창은 이한열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으며 시위 현장에서 이한열을 부축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이한열은 계속해서 "뒤통수가 아파. 나 괜찮아?"라고 중얼거렸고 뛰어온 학생들이 그를 급히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으나 그날 오후 5시 30분 이한열은 "내일 시청에 나가야 하는데…"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혼수 상태에 빠졌다. 이때 이한열의 왼쪽 뇌 전체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6월 항쟁이 끝나고 6.29 선언이 이루어짐으로써 그의 바람이었던 민주화는 이루어졌으나 안타깝게도 이한열 본인은 이를 자신의 눈으로 보지도 못한 채 결국 25일 만인 1987년 7월 5일 오전 2시 5분에 2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987년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학생이 정부의 폭력 진압으로 희생되는 이 사건이 발생하자 제5공화국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은 가중되었고 이는 6월 항쟁으로 이어졌으며 6.29 선언 직후 노태우가 병문안을 온 적도 있었다.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한풀이춤을 추던 서울대학교 이애주 교수(1947~2021) 역시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는데 운구 행렬 후 서울시청 광장에 남은 100만여 명은 연좌 집회를 열었고, '전두환 퇴진', '청와대 진격'을 외치며 6.29 선언에 주저앉지 말고 전두환 퇴진을 위해 항쟁을 계속하자고 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서울시청에 "조기"를 외치며 조기를 달 것을 요구해 이는 곧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장례위원회, 국민운동본부 지도부,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 등도 100만 인파가 모인 것을 예측하지 못한 까닭에 군중들은 광화문4가 쪽으로 방향을 틀었으나 광화문4가 쪽을 방어하던 경찰 병력이 다연발 최루탄을 발사하자 결국 군중들은 흩어지고 말았으며 6.10 민주 항쟁은 그것으로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