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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9주일설교 누가복음18:9-14(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
본문: 누가복음18:9-14
제목: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
오늘은 누가복음18:9-14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
우리 신앙의 주제는 늘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한다는 것도
늘 하나님 나라를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눅17:21)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과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
내가 예수님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주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과 늘 관계를 맺고 기도를 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억울한 일이 있어도 늘 예수님 앞에 나와
기도하고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
그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도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기도는 삶의 태도이고
행동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1.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
오늘 본문도 기도하는 두 사람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리새인에게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분명 9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교만한 사람입니다.
교만은 모든 죄의 뿌리입니다.
교만은 죄 중에 가장 큰 죄입니다.
다른 죄는 교만에 비하면 벼룩에 물린
자국에 불과하다고 CS루이스는 말했습니다.
교만이라는 죄는 최후까지 남아 있는 죄입니다.
우리에게 죄가 눈에 보이지 않게
모든 것이 제거되고 난 뒤에도
남아 있는 죄가 바로 교만이라는 죄입니다.
교만은 우리에게 깊이 뿌리 박혀 있습니다.
우리가 여름날에 풀을 뿌리째 뽑지 않으면
금방 다시 자라듯이 교만이 바로 그렇습니다.
바리새인은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누가 봐도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특권층이었고 아주 말씀을
철저하게 순종하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바리새인은 서서 기도했습니다.
물론 세리도 서서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서서 기도한 동기가 다릅니다.
바리새인은 무엇인가에 의해서
그는 서서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힘 때문에 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슨 힘이었습니까?
외부적인 힘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 속이 아닌
외부의 다른 힘 때문에 섰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그는 서서 기도하였습니다.
그것도 특별한 자리로
그들만 서서 기도하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오직 그가 한 기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가 한 기도는 드러내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하는 기도였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서
또한 기도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기도했습니다.
바리새인이 한 기도는 하나님께 한 기도가 아니라
껍데기만 남은 종교 행위에 불과하였습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성전이었지만
하나님 앞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아니라 사람 앞에 서 있었기에
교만과 허영으로 자신을 드러내었습니다.
그것은 화려한 영적 가면이었습니다.
그런 자기 모습에 만족을 느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관계된 일이 아니라
사람에게 관계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의식하기보다는
사람들에 평판에 더 관심이 있었고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기 위한
종교의식에 더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렇기에 바리새인이 기도한 것은
하나님께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향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아니 자신에게 기도하였습니다.
그의 기도의 시선은 하나님께 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해 주실 것은 없었습니다.
그의 기도의 결과는 하나님의 충만히 아니라
자기의 충만히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한 사람은
하나님의 충만으로 가득하여야 합니다.
자기 의로움에 대한 완전한 확신하고 있있기에
자기가 할 수 있고 해냈다고 생각하는 종교적인 행위목록 곧 십일조, 금식, 기도 등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에게는 나 자신밖에 없었습니다.
나 자신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이고 교만의 본질입니다.
교만의 문제는 이 죄가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나태하거나 밥을 많이 먹거나 분노했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고 수치심을 느낍니다.
하지만 교만은 묘한 자기만족을 느끼게 합니다.
내가 스스로 그럴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자기만족을 느낍니다.
그래서 교만이라는 죄는 다루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엄밀히 말해서 나라는 자신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거울을 통해서 자신을 비춰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거울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러기에 오직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옛날 어떤 선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은 백번 닦은 거울을 품에 가지고 다닌다고 합니다.
그 거울로 자신을 늘 살펴본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거울로 남은 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참 아름다운 말입니다.
하지만 그 거울은 온전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에게 참된 거울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태도로
하나님께 나를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아서
그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사회적 평판과 내가 그렇다고 여기는 존재감이나
내 소유나 내 학문에 근거해서 나 자신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 뻥 치는 것이고 거짓입니다.
교만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잘못된 자의식과 잘못된 평가에서 자신을 바라봅니다.
잘못된 거울로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학벌이나 평판, 인기, 외모, 경제력 등등
이러한 것들로 자신을 평가하려고 하는 것은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이 추구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을
그렇게 확신하도록 한 근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않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그의 행위는 세리의 행위와 달랐습니다.
세리를 거울삼아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는 멋지게 종교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십일조를 어떻게 하고, 기도를 어떻게 하고,
금식을 어떻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를 일상적으로 평가하면 참으로
그럴싸한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성도는 그때가 가장 위험합니다.
세상에서 멋지게 보일 때
곧 겸손하고 신실하게 보일 때가 가장 위험합니다.
그때 우리는 만족감을 느끼며 자부심을 품게 됩니다.
바리새인은 그런 비교의식을 통해서
자기의 의로움을 스스로 증명했습니다.
그의 의로움의 기준은 사람들이었고
특별히 심각한 문제가 있는
세리나 창기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타인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봄으로
자신이 아주 괜찮은 사람으로 여기게 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는
상대평가 되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죄가 작거나 약하다고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거나 인정해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옳고 거룩하고
열심히 한다고 신앙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꽃 같은 시선으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절대평가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이 기준이 됩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삶에 기준이 됩니다.
바리새인의 문제는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하지 않았고
그렇게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은 사람 앞에 서면 분명히 완전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속이기는 쉽습니다.
보이고 싶은 것만 보이고
보이기 싫은 것은 보이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면 상당히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것은 진짜가 아닙니다.
우리의 진짜는 오직 하나님 앞에 설 때 만
발견되는 것입니다.
교만이라는 하는 것은, 자아로 가득 찬 사람이고
겸손은 하나님으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은 12절에 보면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한 해에 한 번
대 속죄일에 금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했습니다.
장이 서면 금식한 모습으로 배회하면서
자신이 금식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십일조는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참으로 거룩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거룩한 사람이라고 자기 확신하고 있있습니다.
그것은 본성적으로 자기를 속이는 행동이었습니다.
선한 일을 했으니 진짜 선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자기의 선함과 탁월함을 기정사실로 했습니다.
그에게 옳은 일 선한 일은 자신에게 함정이었습니다.
그것이 교만이라는 것을 모르고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답이 없었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보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정답으로 타인을 비판했습니다.
타인의 연약함을 통해
자신 문제를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그런 완전성이 가장 큰 죄란 사실을
자기의 확신이 가장 큰 실패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섰다고 생각했을 때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괜찮다, 내가 서 있다, 내가 선하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환경, 평판 등을 잊어야 합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묵상하면
그곳에 교만이 기생하기 좋은 밭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만 남게 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고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라는 사실입니다.
교만은 실패와 멸망이 따라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길이 교만을 이길 수 있습니까?
2. 교만을 이기는 길은 무엇입니까?
13절입니다.
교만을 이기는 길은 오직 하나님 앞에 서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에 세리가 나옵니다.
그는 유대인 처지에서 보면 자신들의 재산을
약탈하는 자였고 민족의 배신자였습니다.
그들을 지배했던 로마보다 더 악한 일제 강점기 때
친일파 순사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처럼 그는 선과 의로움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바리새인과 다르게 세리는 멀리 떨어져서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가슴을 치고 있었습니다.
왜 하늘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불꽃 같은 눈으로 보는 시선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가 한 말은“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뿐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구한 것은 불쌍히 여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없으면 살 수 없음을 알기에
그렇게 구하였습니다.
그가 기도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한 기도였습니다.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다고 한 것도 아닙니다.
세리는 자신에게 전혀 선함이 없다는 것을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철저히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떠함을 바로 알고
자비를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만을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노력한다고 교만이 이겨집니까?
아마도 노력하면 더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교만을 이기는 비결은 자신의 실상을 보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 보는 것이 아닌
시선을 하나님 앞에 두어야 합니다.
이사야 6장에서 선지자 이사야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입술이 부정한 자라”고 고백합니다.
선지자인 이사야가 어떻게 그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자신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겸손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덕목이 아닙니다.
겸손은 존재와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겸손은 결단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해지는 길은 하나님 앞에 서는 길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쉽게 가능한 것이 겸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크심과
거룩하심을 안다면 나의 불완전함과 죄를 알게 되어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3.의롭다 하심과 높임을 받은 자는 누구인가?
세리는 강하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아니면
자신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알았기에 하나님 앞에
구할 것은 긍휼과 자비였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이 구한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이 의롭다는 것만을 드러내었지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기에 얻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긍휼과 자비를 구한 세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의롭다고 하심을 받았습니다.
높아졌습니다.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의롭다고 하심과 높아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회에서 어떤 사람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선 존재로 봅니다.
말씀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보혈만 의지한 겸손한 자에게
의롭다 하심과 높아짐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놀라운 변화가 있습니다.
14절에서 보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바리새인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세리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의롭다고 하심을 얻은 자는 누구입니까?
이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세리였던 사람임에는 분명하지만
세리라고 하지 않고 이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께 나와 기도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한 사람입니다.
오직 자비와 은혜를 구한 사람입니다.
자신을 오직 하나님께서
용납해 주시기를 구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크시고 놀라운 사랑과 자비 앞에서
사는 것이 겸손입니다.
아담처럼 죄를 짓고 두렵고 수치스러워
도망가거나 숨어 있는 것이 겸손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해서 도망치는 것은
겸손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구하는 마음
하나님께 오직 시선을 두는 마음입니다.
찬송가 279장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가 비오니
죄인 오라 하실때에 날 부르소서”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마음
이런 겸손함이 있을 때 하나님의 존귀함이 따라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 받고
하나님에게 존귀하다고 인정받고 살아야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사람들에게
거룩한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를 모른다고 하실 것이며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선은 오직 하나님께 있어야 합니다.
오직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으로 채워지길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그 아들 예수님과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그 말씀을 어떻게 듣고 행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오직 서야 할 곳은 하나님 앞이며
우리가 신경을 써야 할 시선은 하나님이며
듣고 따라야 할 것은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감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성도님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