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해안선, 백사장과 어우러진 소나무 숲, 산 정상에 걸린 옅은 안개, 구불구불 이어진 산길. 그 시적인 풍경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어요. 그러자 어느 새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토기를 빚고 음식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1992년 강원 양양 오산리 신석기 유적을 찾은 세계적인 여성고고학자 사라 넬슨(덴버대 교수)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는 그 영감을 바탕으로 소설 ‘영혼의 새’를 썼다. 이 책은 1999년 출간되어 인터넷 서점 아마존에서 별 다섯개를 받았으며 지난해 국내에서도 출간됐다.
◇신석기인들을 유혹했던 땅=소설은 입양아 출신 한국계 미국인 고고학도인 클라라가 한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다가 BC 6000년 유적인 오산리 발굴에 참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클라라는 무당굿을 구경하다 신내림을 받는다. 영혼의 새로 변신한 그는 신석기 모계사회를 여행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 토기를 굽고 직접 수로·어로·채집생활을 하는 신석기인들의 삶을 체험하면서….
이렇게 사라 넬슨이 매혹된 동해는 신석기인들에게도 유혹의 땅이었나 보다. 최북단인 고성 문암리에도 오산리와 비슷한 연대의 신석기 유적이 발견됐고, 올해 강릉 초당동에서도 BC 4000~BC 3000년으로 추정되는 중요한 취락유적이 확인됐으니 말이다.
초당동. 조선의 혁명사상가인 허균의 생가로 유명한 이곳은 요즘엔 초당두부 맛으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초당동과 강문동 일대, 즉 직선거리 1㎞, 폭 500m에는 90년대부터 신석기 유물이 광범위하게 발견되었다. 이곳을 신석기시대 ‘도시유적’이라고 하면 과장일까. 비단 신석기뿐 아니라 청동기~철기를 거쳐 신라까지 다양하게 이어진 조상들의 터전이었다. 그러나 후손들이 그 의미를 알 턱이 없으니 생기는 게 만날 음식점들뿐이다. 속수무책이던 강릉시가 허균·허난설헌 생가로 알려진 곳의 빈터 700여평에 오누이를 기리는 자료관을 만들 계획을 세웠고, 사전발굴조사에서 뜻밖에 신석기 보고(寶庫)를 발견한 것이다.
“바닥에 신석기 중기유물들이 쫙 깔려 있었어요. 원형의 집터 4곳과 야외 화덕 시설도 4곳 확인됐어요.” 발굴단인 강원문화재연구소 지현병 연구실장의 말이 이어진다.
“3호 주거지(남북 6m20㎝, 동서 6m60㎝)였어요. 서벽에는 그물추를 제작하기 위한 도구들이 쌓여 있었어요. 그물추의 원료인 강자갈돌들과 그물추 제작에 쓰인 돌망치 같은 타격도구들이 널려 있었어요. 그런데 동벽은 서벽과 확연히 달랐어요. 화살촉을 만들 때 사용한 숫돌과 화살촉 재료로 쓰인 석재들(석재들은 일정 크기로 잘라놓았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어요. 주거지 중심부엔 작업대가 있었고요.”
◇공동생활 이루며 ‘분업’한 흔적=이 3호 집터 안에서는 미처 완성되지 않은 석촉 3점도 발견됐다. 또 특이한 것은 토기들만 즐비하게 나온 2호 주거지 밖에 마련된 야외화덕 4기. 이 유구·유물의 양상은 아주 중요한 시사점을 던지고 있었다. 공방터임이 분명한 3호 집터 안에 ‘화살촉 제작 시설 따로, 그물추 제작 시설 따로’ 마련돼 있다는 건 직업분화를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2호 주거지 안팎의 상황은 그쪽이 토기를 구운 ‘토기제작소’였음을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신석기인들이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전문가들이 따로따로 만들어 물물교환을 했다는 얘기가 아닌가.
이밖에도 중요한 사실들이 확인됐다. 우선 거의 완전한 형태로 확인된 ‘붉은간토기(홍도·紅陶)’. 입지름 27㎝, 높이 18㎝에 이를 정도로 큰 신석기토기가 이렇게 거의 완전하게 출토된 것은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또 하나 매력적인 성과는 ‘신석기 토기 박물관’이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로 다양한 당대의 토기들이 나왔다는 점. 요하·요서지방에서 주로 출토되는 갈짓자(之)문 토기편과 서해안 지역의 점열곡선문·단사선문, 금강유역의 금강식토기, 남해안식의 태선문(굵은 선문양)·사격자문·제형집선문(사각선 문양)·능형집선문(마름모꼴), 동북지방의 강상리식 점열집선문 등 한반도 전체에서 발견되는 모든 신석기토기들이 총집합했다. 이미 신석기시대에 한반도 전체에서 교역이 이뤄졌음을 알려주는 흔적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건 외부침입을 막기 위해 집주변을 도랑처럼 파서 두른 환호를 발견했다는 점. 환호는 대표적인 청동기 유구로 알려져왔는데 신석기 유적에서 확인된 것이다. 환호는 일정한 취락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유구. 이미 신석기시대에 공동생활을 했다는 얘기다.
먼저 ‘분업’이 이뤄진 시기를 보자. 지금까지 우리나라 선사시대에 있어서 분업이 이루어진 시기는 청동기시대인 BC 10세기부터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이번 발굴은 ‘분업의 시기’를 2,000~3,000여년이나 앞으로 당긴 것이다.
◇점점 올라가는 신석기연대=우리나라 선사시대 중에서도 ‘신석기시대의 시작’은 광복 후엔 겨우 BC 2000년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에 들어와 BC 6000년으로 올라갔다. 사라 넬슨이 매혹된 양양 오산리 발굴덕분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지금으로부터 1만년 전까지 올라가는 이른바 ‘초기 신석기 유적’이 제주도 고산리에서 발견됐다. 고산리에서는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넘어가는 단계의 석기와 토기가 수만점 출토됐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연구는 서해안, 동해안, 남해안 지역으로 크게 구분되어 있다. 각 지역 나름으로 문화의 차이를 말해주고 있는데 그 대표되는 것이 바로 토기의 특징이다. 즉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의 경우 서해안은 뾰족밑토기(尖底土器)이고 동해안은 납작밑토기(平底土器)인 반면 남해안은 돌대문토기(隆起線文土器)로 확연히 구분되고 있다. 인류는 보편적으로 신석기시대에 들어와서 정착생활을 하게 된다. 마을을 이루면서 농사가 시작되고 토기를 제작하여 사용할 줄 알게 된다. 돌을 깨어서 도구로 사용하던 인류는 신석기시대에 들어와 갈아서 만든 ‘마제석기’를 쓰게 된다. 이와 같이 농경과 토기제작, 그리고 마제석기가 신석기시대의 3대 요소이다. 이를 흔히 ‘신석기혁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동하면서 먹을 것을 찾아 따먹던 구석기시대를 벗어나 한곳에 살면서 생산경제체제로 전환, 마을을 이루어 삶을 살고 잉여농산물을 저장할 수 있는 용기를 만들어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비생산계급과 생산계급으로 나누어지고, 나아가 권력이 탄생되었음은 물론 궁극적으로 국가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초당동 유적발굴은 정착생활과 분업에 따른 물물교환, 그리고 활발한 교역 등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