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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이순신과 이율곡
이장희 추천 0 조회 60 15.07.13 21:5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목: 정변의 역사 2010.1.19.화

이순신과 이율곡

 충무공 이순신과 율곡 이이는 남이 아니다. 이들은 덕수이씨(德水李氏) 집안의 아저씨와 조카 사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두 사람은 19촌 숙질간이다. 항렬은 이순신이 아저씨뻘로 높지만 나이는 율곡이 아홉 살이 많다.

 덕수이씨 후손들의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한 것은 바로 충무공과 율곡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덕수이씨의 시조는 고려 중엽 때 벼슬을 지낸 이돈수다. 그가 경기도 개성 근교 덕수에 터를 잡으면서 덕수이씨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덕수이씨는 조선조에 모두 1백여 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으며 이 가운데 7명의 정승이 나왔다. 

 충무공과 율곡은 기이하게도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다. 그리고 나라가 존망의 기로에 섰던 한 시대에 구국의 사명을 다하고 돌아갔다.

 율곡 이이는 이원수를 아버지로 하고 우리 역사상 현모양처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사임당 신씨를 어머니로 하여 1536년에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외가인 강릉 오죽헌이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율곡은 16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19살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서에 몰입한다. 얼마 후 하산, 당시의 정통 학문이던 유학에 정진한다. 22살 때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결혼한다.   이듬해 성주 처가에서 강릉으로 가는 길에 당시 명성이 높던 학자 이퇴계를 안동 도산으로 찾아가 만난다. 그 때 58세였던 퇴계는 23살 된 율곡의 면모에 크게 감명 받는다. 율곡은 그해 문과에 응시,‘천도책’이라는 유명한 논문으로 장원 급제했다. 그 후 아홉 차례나 각종 과거에 장원,‘구도장원공’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6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했다.

 율곡은 다가오는 국난을 예견하고‘10만양병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가 죽은 지 8년 뒤 임진왜란 7년 전쟁이 일어난다. 율곡이 예고했던 7년 대란의 참화에서 나라를 지킨 사람은 바로 이순신이다.

 이순신은 대대로 문관의 집안이었다. 그러나 젊은 날 생각한 바 있어 읽던 글을 치우고 무예를 닦아 군인이 됐다. 31살 때 과거에 급제했으나 40이 넘도록 요즘으로 치면 위관급 말직으로만 돌았다. 공의 인품을 전해들은 율곡이 한번 찾아오라는 연락을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일가인데 찾아다니면 공연히 말만 듣는다’고 거절한다. 그만큼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처신 때문에 변방으로만 돌 수밖에 없었다. 당시 율곡은 정계의 중진으로 활약하던 때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끝내 만나지 못했다.  

 이순신은 벼슬에 나선지 25년만이자 임진왜란 한 해 전인 1591년에 친구인 유성룡의 추천으로 전라좌수사에 임명된다. 그에게는 처음으로 벼슬다운벼슬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전열을 정비한 이순신은 옥포 전투를 시작으로 연전연승 가는 곳마다 왜적을 무찌른다. 그러나 영웅의 길은 고난과 형극의 길이기도 했다. 1597년 이순신은 모함을 당해 서울로 압송된다. 적을 보고도 공격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전공이 참작돼 형을 면하고 백의종군토록 명령받았다.

 얼마 후 조선 수군이 정유재란 때 참패를 당하자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기용된다. 그가 없는 사이에 그가 기른 막강 조선 함대는 괴멸되고 12척의 함선과 수백의 병졸만이 남아있었다. 이를 이끌고 적을 명량으로 유인, 133척의 적선 중 31척을 부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순신은 전쟁이 끝날 무렵인 노량해전에서 적을 마지막 무찌르고 전사한다.

 대륙 침략의 허망을 버려야 했던 왜군 후손들조차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 지휘관>으로 추앙할 만큼 이순신의 자취는 크고 뚜렷하다.

 충무공 함대가 남해의 제해권을 갖지 못했다면 임진왜란 때‘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이 실현돼 훗날의 일제 침략이 2백여 년 앞당겨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분석이다.

 한편 덕수이씨(德水李氏)의 시조 이돈수(李敦守)는 고려 중엽 신호위 중랑장(神虎衛 中郞將)의 벼슬을 지냈다. 그의 증손 이윤온(李允?)이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사판도판서(密直使版圖判書) 등을 지냈으며 덕수부원군에 봉해져서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덕수로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107명의 문과급제자와 무과급제자 423명, 정승 7명, 대제학 6명, 공신 20명, 청백리 6명을 낸 덕수이씨는 중종에서 영조 때 까지의 3백년간이 가장 융성을 누린 시기로 나타나고 있다.

 시조 이돈수의 아들 이양준(李陽俊)은 조산대부(朝散大夫)로 흥위위 보승장군(興威衛 保勝將軍)을 역임하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어사대부(御史大夫), 이부 상서(吏部尙書) 등에 추증되었다.

 그 후 이양준의 아들 이소(李소)가 고려 고종(高宗) 때 남성시(南省試)에 급제하여 통의대부(通議大夫)로 전법 판서(典法判書)와 지삼사사(知三司事), 세자내직랑(世子內直郞) 등을 역임하였다.

 이소의 아들 형제 중 장자인 이윤온이 판도판서(版圖判書)와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며 나라에 공을 세워 선충경절공신(宣忠勁節功臣)에 책록되고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첨의정승(僉議政丞),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에 추증되어, 덕수부원군(德水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중종 때 대제학과 좌의정을 지낸 이행, 명종때 영의정에 오른 이기, 인조때 대제학에 오르고 이름난 학자로서 문하에 많은 학자를 배출한 이식(李植)등이 인물이다.

 이밖에 이안눌(李安訥)은 1599년 문과급제하고 여러 언관직(言官職)을 거쳐 예조와 형조판서를 역임하였고 시에 뛰어나 흔히 이태백(李太白)에 비유되었으며 글씨에도 능했다.

 조산시대 과거 급제자는 이이(李珥, 1536 丙申生) : 문과(文科) 명종19년(1564)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경증(李景曾, 1595 乙未生) : 문과(文科) 인조2년(1624) 알성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탄(李坦, 1669 己酉生) : 문과(文科) 숙종21년(1695) 별시2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택진(李宅鎭, 1731 辛亥生) : 문과(文科) 영조33년(1757)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항(李沆, 1774 甲午生) : 문과(文科) 순조6년(1806)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노집(李魯集, 1773 癸巳生) : 문과(文科) 순조16년(1816) 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양신(李亮信, 1801 辛酉生) : 문과(文科) 헌종15년(1849)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조신(李肇信, 1828 戊子生) : 문과(文科) 철종9년(1858) 별시2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민규(李敏奎, 1853 癸丑生) : 문과(文科) 고종22년(1885)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빈(李○, 1853 癸丑生) : 문과(文科) 연산군8년(1502) 별시 이등(二等) 등 모두 395명이 있다. 문과 103명, 무과 9명, 사마시 275명, 역과 4명, 의과 2명, 음양과 2명 등이다.

 세거지는 충남 아산군 음봉면 백암리 이다. 충무공 이순신을 모신 겨레의 성역 현충사가 있는 이곳은 덕수이씨 가문이 4백여년을 지켜온 터밭이기도 하다. 충무공은 서울에서 태어나 8살때 외가가 있던 이마을에 이사와 여기서 자랐고 그의 후손들이 마을을 지켜 이씨마을이 되었다.

 현충사 안에는 지금도 충무공의 옛집이 남아있으며 그가 활을 쏘고 무예를 닦았다는 수령 5백년 높이 20여m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우뚝하다. 1966년 성역화작업이 추진되면서 이곳에 살던 후손들은 현충사 뒤쪽으로 이주했다.

주민소득은 농업이 주였으나 현충사부지로 많은 농토가 흡수된뒤 농업과 함께 기념품을 참배객에게 팔아 소득을 올린다.

 본관 덕수(德水)는 황해도 개풍군(開豊郡)에 속해 있던 옛 지명이다. 고구려 때는 덕물현(德勿縣) 또는 인물현(仁物縣)이었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덕수현(德水縣)으로 개칭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 강음(江陰)·정주(定州) 등과 함께 개성현으로 편입되었다. 1389년(공양왕 1)에 덕수현에 감무를 두었다. 1442년(세종 24)에는 해풍군(海豊郡)과 병합하여 풍덕군이 되었고,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개성군에 편입되었다가 1930년 개성군의 송도면이 개성부로 승격되면서 기존의 개성군 일부가 풍덕군과 통합되어 개풍군(開豊郡)으로 개편되었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덕수이씨는 1985년에는 총 10,580가구 43,505명, 2000년에는 총 15,711가구 50,486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주요파는 ▲영중추공파 ▲춘당공파 ▲집의공파 등이다. 

( 정복규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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