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 고수와의 Dinner Time 2017.
10. 9 (제9호)
영화를 정직하게 대하라!!
‘동문고수와의 디너타임’ 9회는영화계 편이다.
그를 만난 곳은 ‘별들의 고향’ 충무로였다.
바로 영화계의 거장이라는수식어로만으로는부족한 듯한 이장호(16회, 72세) 동문이다.
이 동문을 만난 날은 오후 늦게 비가 오며 날씨가 다소 궂었다.
하지만 그를 만난다는 소식에 후배들은 ‘바람불어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 참석자: 이장호(16회) 영화감독,
윤인호(34회) 영화감독,
박유승(35회) 배우,
황광현(45회) 배우(예명: 황동주) (사)한국방송예술인단체 총연합회사무총장
· 일시: 2017. 9. 19. 저녁7시
· 장소: 충무로 진고개
· 진행·정리: 배성민(43회, 머니투데이 문화부장)
대담 내용
+ 지하철로 오면서 충무로역을 지나왔습니다. 대종상 수상식 사진이 역 곳곳에 붙어있던데 당연히 선배님 사진도 있었죠?
"난 상복이 별로 없는데. 다른 분들 사진이 많겠지. (하지만 이동문의 겸손과는 달리 그는 데뷔작‘ 별들의 고향’으로 대종상 신인감독상을
수상했고 수년의 공백 끝에 1980년 재기작 ‘바람불어 좋은 날’로 역시 대종상 감독상을 받았다.)"
+ 선배님은 신문로 경희궁 세대입니다. 그 시절 서울중고생 이장호는어땠나요?
“그때 난 한마디로 껄렁껄렁했지. 공부도 잘못해 열등감이 많았고. 수재들 틈에서 밑바닥이었지. 사실모교 욕을 더 많이 하고 살았는데...... 물론 지금은 고마움이 많지만.”
“감독보다 배우 하고 싶었다”
+ 이 동네가 충무로입니다. 충무로에 대한 기억을 들려주신다면요. 충무로 뮤지컬 영화제 에서도 역할을 하시는 것으로 압니다. 영화감독을 처음하시기로 한 계기 같은 게 있나요?
“그때 충무로를 진고개라고 불렀는데 오늘 식당도 진고개 잖아. (곁에 있던 윤인호 동문 등 영화 및 방송계 후배들도 ‘영화계에 처음 들어온 곳이 충무로였다’는 기억을 보탰다.) 난 사실 그때 영화를 잘 몰랐고 감독은 더더군다나 몰랐어. 극장에서 영화보면 감독이 뭐 하는지를 모르잖아.
배우만 보이지. 감독은 화면에 안 나타나니까 역할을 몰랐지. 원래는 연기를 하고 싶었고, 그쪽으로 나갔으면 했어. 큰 마음 먹고 불쑥 찾아간 영화사(신필름)에서 신상옥 감독님이 뭐 하고 싶냐고 물었는데 배우한다는 소리가 안 나오더라구. 주변에 잘생긴 사람 천지였구 말이야."
+ 아버지나 어머니 같은 가족얘기를 좀 들려주시죠.
"아버지는 공보처 영화 검열관이셨는데
남들이 배우나 감독을 딴따라라고 할 때 많이 다르셨어. 나를 배우시키려고 하셨고 감독 되기 전이나 후로도 “내 아들이 이장호다” 라고 자랑도 많이 하셨지 영화가 흥행하거나 하면 술도 많이 사신 것으로 알아."
최인호에게 “니 소설은 내가 찜했어. 나한테 줘”
+ 감독 데뷔작 ‘별들의 고향’은 선배님을 비롯해 최인호 선배, 이장희 선배 등 동문들의 손길이 곳곳에 밴 것으로 압니다. 의기투합 하신 계기가 있으셨는지요?
"인호는 조숙하고 사회물정을 빨리 알았던데 비해 난 공부가 떨어진만큼 세상돌아가는 것에도 밝지 못했어. 인호하고 초등학교부터
같이 다녔는데 인호가 나한테 많이 했던 얘기가 기억나.
“넌 철들려면 아직 멀었어......”
그 친구가 등단하고 조선일보에 ‘별들의 고향’을 연재했는데 인기가 대단했지.
내가 친하니까 계속 얘기를 했지.
'니 소설은 내가 찜 했어.' 그러니 인호가 할 수 없이 거두어줬다고 할까?"
+ 동문인 게 큰 도움이 되었네요. 소설 『별들의 고향』을 동문들에게 많이 팔았다는 얘기는 무슨 얘기인가요?
"『별들의 고향』이 낙양의 지가를 올리는 베스트셀러가
된 뒤 영화판권문제가
자연스레 나왔지. 나는 겨우 조감독이었고
인호는 입장이 어려우니까 출판사사장에게
권한을 다 넘겨버렸어. 출판사사장은 책이 영화화되면 덜 팔릴까 걱정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책을 좀 팔아드리겠습니다”했지. 근데 난데없이 어디에 팔아. 그냥 한번 해본 소리인데...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동창회에 성공한 기업인선배들에게 팔아달라고 요청하기로 했지.
어느 날 출판사에 갔더니“ 되게 잘 판다”며 입을 쩍 벌려. 그리곤 영화화하게 되면 나한테 최 우선권을 주겠다는 거야.
아 다른 일도 있었네. 그때 황순원 선생님 아들 중 황경규라고 조선일보문화부기자가 있었어. 내 동기인데 그 친구가‘ 별들의 고향’ 영화판권을 얻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는 기사를 썼는데 거기에 동기라서 그랬는지 내 이름을 넣어줬어. 내 이름이 처음 매스컴에 등장한 거지."
+ 이장희 동문의 음악은 어떻게 된 건가요?
"음악도 인호의 추천과 영향이 컸지. 그 친구가 각본이나 이런 영화 쪽 경험이 있으면 장희에게 안 맡겼을 텐데
그걸 덜컥 맡긴 거야. 둘은 서울고-연대동문이잖아. 원래 영화음악은 시간을 정확히 재서 오케스트라가 전체를 만들어내는데 돈이 많이 들어. 그래서 여유를 부릴 수 없는데 장희는 영화음악은 안 해봐 스튜디오를 한 달 동안 마음 놓고 쓸 수 있도록 해놨어. 결국 6~7번 음악을 입혀 최고가 나왔지. (이장희 동문이 영화‘별들의 고향’에서 읊조리는 듯 불렀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는 그야말로 공전의 히트를 했다.)"
조감독으로 배창호 동문 발탁
+ 선배님은 역시 동문이신 배창호 감독을 조감독으로 쓰셔서 또 다른 영화적 업적을 이루도록 후원하셨습니다. 80년대 영화계는 서울고 출신 이장호와 배창호의 시대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배창호랑은 원래 처음에는 인연이 없었어. 내가 영화 ‘어제 내린 비’까지 만들고 하길 종감독이랑 영상시대동인을 하고 있었지. 그때 배우랑 조감독을 공동모집한다고 광고를 냈는데 누군가 원서를 낸 거야. 서울고-연세대 출신이 있길래 보니까 그게 배창호 였어. 근데 서류전형 후 덕수궁에서 면접을 하는데 정작 그 친구가 오지 않았어. 잊어버리고 지나갔는데 하루는 인호가 후배 한 명을 조감독으로 쓰라고 했어. 불미스러운 일로 쉬고 있던 때였는데 어머니가 하던 명동 주점으로 배창호가 온 거야. 체격도 크고 곤색 양복에 007가방을들고서
“선배, 선배” 하는 거야. 그때 내가 제일 무서워했던 게 정보요원이었는데 정보기관에서 나온 줄 알았지(웃음).
창호는 생일이 음력4월4일로나랑같아. 근데 내가 활동을 못할 때니 그 친구를 돌봐줄 수가 없더라고. 창호는 그후 종합상사에 취직해 케냐로 갔어. 말릴 수도 없었지. 어느 날인가 창호한테서 편지가 왔어. 선배 중에 김성진 문화공보부장관이
있었잖아. 그 선배가 공무로 케냐를 방문했다가 배창호를 만났는데 창호가 김선배에게 “이장호라는 선배가 있는데 대마초 때문에 활동을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대, 그러자 김장관이 자기를 찾아오라고 했다는 거야. 그래서 찾아갔더니 당장 활동하라는 거야.
내 소식을 듣고 창호도 사표 던지고 왔더라. 내가 시나리오 작업을 석 달째 하고 있는데 중정 직원이 왜 다시 활동하냐고 묻더라고. 그래서 김성진장관 얘길 하니까 나만 혼자 자유롭게 활동할 수는 없다는 거야. 결국 창호와 나는 실업자 비슷하게 됐지."
+ 두분이 다시 영화를 함께 하신 건 언제 인가요?
"1979년 박정희대통령이
비명에 가고 서울의 봄이 오면서 문화계에도 해금 바람이왔어. 그때 찍으려던 영화가 ‘바람불어 좋은 날’이었어. 그때 퍼스트 조감독으로 경험은 없지만 창호를 발탁한 거지. 그리고 나서 어땠냐구? 알다시피 내가 호랑이를 키운 거였지(웃음).
내가‘바보선언’, ‘어둠의 자식들’, ‘과부 춤’같은 사회 비판적 영화를 계속 만들어 잠시 도태되는듯했고,그 때 창호는‘고래사냥’,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등으로 승승장구했고."
+ '바보선언', ‘이장호의 외인구단’같은 흥행작을 만드시지 않았나요?
"‘바보선언’은 원래 검열 때문에 창고에 처박혀있었는데 스크린쿼터 교차 상영 덕에 우연히 극장에 걸렸다가 10만명 가까이 드는데 성공을 했지. 영화사들이 다음 작품하자고 하더라고. 그 뒤로'이장호의 외인구단'도 만들었고 (윤인호 동문은 ‘바보선언’은 당시 영화학도들 사이에서 미장센과 표현양식에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낸 기념비적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길에서도 쉬지 않는 나그네’처럼 영화 혼을 불사르다
+ 요즘
영화산업의 대기업 수직계열화 문제가 핫이슈로 대두되고 있는데 선배님 생각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또 영화산업의 미래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나도 이제 노인이라 미래에 대한 예측은 불가하지. 사실 지금 변화는 현기증이나. 스마트 폰· 노트북 하다가 괴로워 천국 가고 싶다는 생각도 한적이 있다고.
이건 말 할 수 있는데 역사의 흐름은 반복된다는 것이야. 직설적으로 말하면 CJ, 롯데, 메가박스 같은 독점체제가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아. 변화의 시대잖아. 이탈리아는 무솔리니 독재와 패전 이후 네오리얼리즘이 싹텄고 프랑스도 헐리우드 흉내내다가 누벨바그라는 맨손으로 다시 시작하는 흐름이 나왔어. 종주국 격인 미국 헐리우드도 워너브러더스·파라마운트가 도산했을 때 뉴아메리칸 시네마 같은 독립영화가 그 대안이 된거라구. 혁명은 그 흐름이 있는데 독점의 횡포가 대중의 환영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 흐름은 더 빨라질 거구. 조금 더 살면 그 흐름을 볼 것 같아."
+ 최근
신앙을 바탕으로 작품을 준비하신다는 말도 들었었는데요?
"광주에서 영화를 준비 중인데 1912년 광주에 찾아온 간호선교사 얘기야. 나는 한국의 예수를 영화로 만들고 싶은 생각이 있어."
+ 영화감독, 연기, 연출가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내 스승 얘기를 해볼게. 김규동시인과
신상옥감독님이
인터뷰한 책이 있어. 거기에서 김규동시인이
영화감독에게
제일 중요한 게 뭐냐고 신감독에게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 ‘인격’이었어. 신상옥감독이 인격적으로 뛰어났다기보다 영화에 대한 정직한 태도, 작품을 대할 때 정직한 면......그런 것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할까."
이장호 동문은 '외인구단'을 흥행시켜 그 돈으로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를 만들었고 베를린영화제에서
수상(칼리가리상)을 했다.
그는 영화처럼 여전히 쉬지 않는다. 자신을 찾는 후배들에게 재능기부를 하는 틈틈이 꺼지지 않는 영화 혼을 발산하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