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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정님
0323(일) 불법사드철거 김천촛불집회 👉제 982회👈
●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 박석민 자문위원장
우리나라에 원래 헌법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헌법위원회'라는 기구가 있어서 헌법소원은 거기서 처리하게 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구는 사실상 사문화되었고, 4.19 혁명 당시 잠깐 헌법재판과 관련된 움직임이 있었지만 5.16 쿠데타 이후에는 헌법과 관련된 소원이나 다툼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헌법재판소가 신설되었고, 이는 헌법 제111조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에게 헌법 개정안을 보고해야 했는데, 전두환은 1987년 7월 24일 청남대에서 휴가 중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헌법개정특위 위원이었던 현경대, 남재 등은 여야가 합의한 기존 안을 가져갔습니다. 원래 안은 대법원이 헌법소원을 심리하는 구조였는데, 전두환이 이를 반대했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또다시 헌법 문제로 대법원 앞에서 시위할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대안으로 헌법재판소 설치가 논의되었고, 결국 그 방향으로 정리되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이렇게 태어났지만, 그 구조는 결국 집권 여당의 의도대로 설계된 것입니다. 헌법재판관 9명 중 대통령이 3명을 직접 추천하고, 대법원장이 3명을 추천하지만, 대법원장도 대통령이 임명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3명은 여야가 각각 1명씩 추천하고, 1명은 여야 합의로 정합니다. 하지만 여당이 주도권을 쥔 상황에서는 이 구조가 결국 대통령이 6명을 지명할 수 있는 구조가 되어버립니다. 여기에 여야 합의 몫 1명이 여당 쪽으로 기울게 되면, 8대1이라는 압도적인 구도가 형성될 수 있는 겁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입니다. 당시 헌법재판소는 8대1로 결정했고, 유일하게 반대했던 김이수 재판관(지금은 국회 소추위원으로 활동 중) 외에는 모두 찬성했습니다.
이처럼 헌법재판소에 너무 큰 기대를 걸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은 가능했죠. 헌법 공부를 전문적으로 하지 않은 일반인들이 봐도 탄핵 사유 5가지 중 하나만 해당돼도 파면이 가능한데, 당시에는 다섯 가지 모두에 해당됐으니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문제는 지금입니다. 헌법재판소가 정치적 계산을 하기에는 지금 상황이 너무 심각합니다. 시간도 너무 흘렀고,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니까요. 참고로 독일은 헌법재판관을 국회에서 모두 추천하며, 권한 분산이 잘 되어 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헌법재판소법에 '재판관으로 임명한다'고만 돼 있어서, 현실적으로 유력한 헌법학자나 교수는 재판관이 되기 어렵고, 결국 법조계 내부 인사들 위주로 구성되는 구조입니다.
만약 1987년 당시 전두환이 "미국은 어때?"라고 물었을 때 "미국은 헌법재판소가 없다"고 들었다면, 아마도 우리나라에 헌법재판소가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역사적 순간의 판단이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겁니다.
어쨌든 지금은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곧 나올 것이라는 기대가 큽니다. 다음 주를 넘기면 4월로 접어들기 때문에, 더는 지체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도 많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많은 이들이 힘든 시절을 견디며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좌절하지 말고, 윤석열 정권은 결국 끝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오늘 제982회 김천 촛불을 시작하겠습니다.
● 구자숙 기록팀장
행사를 준비하면서 몇 분이나 오실지, 또 준비한 대로 잘 이뤄질지 긴장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예상 외로 정말 많은 분들이 오셨고, 특히 감동적이었던 것은 저희가 미리 역할을 분담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신 분들이 알아서 자연스럽게 일을 나눠서 해주셨다는 점입니다. 어떤 분은 트럭에 이젤을 싣고 와서 태극기와 김단야 선생의 생애를 소개하는 판넬을 전시했고, 또 어떤 분은 식장을 꾸며주셨습니다. 그 모든 과정이 너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셨고, 특히 감사했던 것은 개령의 어르신들, 양천리 어르신들과 동부리 어르신들께서 참석해주신 일이었습니다. 그중 몇 분은 걸음이 불편하셔서 거의 기다시피 하시며 걷다가 쉬고, 다시 걷고를 반복하시며 오셨는데, 그 모습을 보며 마음이 찡했습니다.
행사 중간에 나눠드린 수건은 유가족인 김현숙 님의 동생과 가족들이 직접 만들어 오신 것이었습니다. 수건을 나눠드리며 "이걸로 괜찮을까, 카스테라라도 드렸어야 했나" 싶은 미안함도 컸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부분들이 참 많았던 하루였습니다.
노래를 불러주신 우현덕 님, 그리고 대구에서 오신 서용덕 씨께도 큰 감사를 드립니다. 서용덕 씨는 ‘광복군 행진곡’을 작곡하신 분인데, 대구시 예산으로 만든 곡이라 독립군 추모행사 등에서 무료로 불러주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번에도 자비로 오셔서 직접 노래를 불러주시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아주 뜻밖의 손님도 계셨습니다. 한 분께 어디서 오셨냐고 여쭤봤더니 “구미요” 하시길래 “아, 저도 구미인데요” 했더니, 그분이 장세용 전 구미시장님이셨습니다. 부인과 함께 오셔서 행사 후 식사 자리에도 함께 해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참여 덕분에 어제의 행사는 큰 문제 없이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행사를 열게 된 배경을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어느 신문 칼럼에서 읽은 글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1·2·3 내란 이후 어떤 이가 쓴 글인데, “사람들은 마치 새로운 일이 벌어진 것처럼 놀라지만, 윤석열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정체를 계속 드러내 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전두환을 두고 “5·18만 빼고는 잘했다”, 이명박에 대해선 “BBK 사건 때 쿨했다”고 말하며 그가 존경하는 인물, 좋아하는 인물들을 통해 그의 정체성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결국, 그 사람이 누구를 존경하고 누구를 따르며 누구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삶이 드러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누구를 기리고, 누구를 따라가고, 누구의 삶을 본받으려 하는지에 따라 우리의 인생 방향이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 쌀 수확량이 1930년대에 최고치를 찍었다고 교과서에 배웠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그렇게 수확량이 많았는데, 왜 그 시절엔 사람들이 굶었나요?”라고 물으니, 선생님이 말문이 막히셨던 기억이 납니다. 결국 일본이 모두 가져갔기 때문이었죠.
우리는 일본이 와서 철도 놓고 길 닦고 근대화를 이뤘다고 배웠지만,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을 보면 그 이면에 조선인들이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잘 나와 있습니다. 빚 몇 푼 못 갚으면 이자에 이자를 붙여 감옥에 가거나, 철도공사로 끌려갔습니다. 땅을 빼앗기고, 반항하면 매질당하고, 당산나무 아래 동네 사람들 앞에서 고문당하거나 총살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만든 길과 철도를 통해 쌀은 일본으로 빼앗겼습니다. 그 슬픔을 담은 노래가 바로 ‘아리랑’입니다.
이런 아픈 역사를 우리는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배웠습니다. 나라를 위해 싸운 이들은 집안이 풍비박산났고,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는 ‘빨갱이’라며 외면받았습니다. 저도 학교 다닐 때 김원봉이나 의열단에 대해 전혀 배우지 못했습니다.
개령 출신의 뛰어난 독립운동가 김단야에 대해서도 지역 사람들조차 잘 몰랐고, 개령에서 네 차례의 만세운동이 있었다는 사실도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들을 알리고, 김천에서의 독립운동 역사 또한 되새기기 위해 이번 추모식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준비도 미흡했고, 행사 운영도 서툰 사람인데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이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습니다. 2019년에 김단야를 처음 알고 세미나를 열었던 경험이 이번 행사로 이어졌고, 앞으로도 그의 이념이 무엇이었든 독립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향한 걸음을 이어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이념을 타고난 게 아닙니다. 이념은 선택이 아니라 시대의 강요였고, 우리는 그 시대에 주어진 길을 걸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이념을 넘어서 독립, 민주, 평화를 위해 싸운 이들의 삶을 기억하고,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실천이라고 믿습니다.
크게 나서지 못하더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진정한 이어받음이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 백창욱 예수살기 목사님
최근 미국과 한국의 관계 속에서, 미국이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어떻게 한국을 통제하고 있는지에 대한 여러 가지 사례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현재 어떤 위치에 있으며, 어떻게 이 예속의 사슬을 끊어내야 할지를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사례는 작년 11월 27일, 우크라이나 특사가 한국을 방문한 일이었습니다. 여러분도 뉴스를 통해 접하셨겠지만, 보통 어떤 나라의 특사가 방문한다는 것은 이미 그 전에 양국 간에 일정한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나서 뭔가 새로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논의된 것을 형식적으로 확인하는 자리라는 거죠.
당시에도 북한이 러시아에 붙어 참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를 빌미로 우크라이나와 한국 간의 군사 협력을 강화하고, 무기 지원을 받기 위한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 특사는 빈손으로 돌아갔습니다.
한 유튜버의 분석에 따르면, 당시 이 일을 주도한 것은 미국의 네오콘 세력이었지만, 이후 트럼프가 대선에서 당선되면서 트럼프 세력에 의해 협의가 모두 무산되었고, 결국 우크라이나는 아무런 성과 없이 철수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미국 내 권력 싸움이 국제 외교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사례였죠.
두 번째 사례는 최근 벌어진 일입니다. 박선원 의원이 유튜브에서 밝힌 내용인데, 어느 날 미국의 대리 대사를 만났고, 그 대사가 박 의원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헌법재판소의 판결 선고를 이재명 대표의 항소심 선고 시점과 맞춰보는 게 어떻겠느냐"고요. 만약 지금 선고가 나와버리면 대선 국면으로 분위기가 급변하고, 국민의힘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미국 대사급 인사가 이런 말을 했다는 건 단순한 사담이 아닌, 미국 정부의 입장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됩니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인가요?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 한국인의 운명을 좌우할 중대한 사안에 대해 왜 외국의 의견이 더 중요하게 작용해야 합니까? 왜 우리의 고위 관료들은 국민의 뜻보다 미국의 의중을 더 중시하는 걸까요?
그 사람들의 출세와 자리는 모두 이 땅에서 얻은 것인데, 정작 결정적 순간에는 미국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현실이 정말 화가 납니다. 이와 같은 구조는 한덕수 전 총리, 최상훈 대사 등의 발언과 행보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저는 지난 화요일, 강현욱 고문님이 참석하셨던 포럼에 다녀왔습니다. ‘팔레스타인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페미니스트에게 배운다’라는 주제로 열린 이 포럼은, 제국의 폭력과 지배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자리였습니다. 강 고문님은 사드 문제를 중심으로 발표하셨고, 군산·제주 강정마을 관련 내용도 공유되었습니다.
강정 해군기지 이야기는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처음엔 단순한 해군기지를 짓는다는 얘기만 있었지만, 무력과 억압으로 강제적으로 기지가 세워졌고, 그 이후로 제주는 군사기지화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해군 우주센터, 레이더 기지, 그리고 지금은 성산포 제2공항 건설까지 이어지고 있죠. 제주 제1공항이 포화상태라는 명분으로 시작된 제2공항 계획은 결국 미군의 전략적 활용을 위한 포석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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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뿐만 아니라 군산, 평택, 성주, 새만금 등 서해안 전체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군사벨트에 맞춰 재편되고 있습니다. 새만금 역시 개발 명목으로 갯벌을 매립했지만, 현재는 미군이 별도의 활주로를 계획 중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한국의 주권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군 기지의 주소가 '캘리포니아'라는 사실, 거기에 한국 국민은 배제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헌재 판결도 결국은, 단지 특정 정치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런 예속된 구조를 극복하고 정권을 교체하며, 주권을 국민에게 되돌려주는 과정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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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군사화 흐름에 저항하는 우리의 싸움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일제 강점기의 어두운 시절에도 김단야라는 인물이 있었기에 그를 기억하고 추모할 수 있듯이, 지금 이 자리엔 우리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 아닙니다. 전국적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이 싸움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 불씨를 살리고, 지키고, 계속 이어가야 합니다. 지금처럼 갈수록 군사적으로 포섭되고 종속되는 현실을 타파하고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그 길에 우리 모두가 함께 끝까지 함께 갑시다. 투쟁! 투쟁!
● 우현덕 수사스앰
‘교육너머’에서 역사 공부를 하면서, 제가 개령 출신이라는 이유로 저를 불러낸 적이 있었습니다. “개령 사람 아는 사람 있지 않냐”고 해서, 그때 함께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죠. 그 당시만 해도 김단야 선생님에 대해서 잘 몰랐고, 주변에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중학교 학생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 김단야 선생님을 알고 있더라고요. 심지어 개령초등학교 아이들도 알고 있어서, 어디서 배웠냐고 물었더니 학교에서 배웠다고 해요. 그 말을 듣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이 모든 게 결국 구자숙 선생님과 ‘교육너머’ 역사 모임에서 꾸준히 해오신 활동 덕분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어제는 독립군가를 부르려고 했는데, 날씨가 너무 맑고 햇살이 좋아서 오히려 집중이 잘 안 되더라고요. 제가 노래하는 날은 이상하게도 춥거나 비가 오거나, 그런 날씨가 많았는데, 이렇게 햇살이 좋으니까 오히려 방해가 되네요^^
🎵 독립군가
🎵 내 가는 이 길 험난하여도
🎵 제비처럼
🎵 My Son
● 이봉란 엄니 '후원금'과 '편지'
❤️ 사랑하는 여러분께,
먼저 가신 분을 미워할 수도,
원망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아이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내드리며, 삶의 끝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오신 것에 깊이 감사드릴 뿐입니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지친 몸을 잘 가누지 못하고 있지만, 고마운 얼굴들을 뵙고 싶은 마음에 오늘은 용기를 내어 밖으로 나가보려 합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것에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이들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나니 마음이 참 무겁지만, 그 안에서 또 감사의 마음이 피어납니다.
그 마음을 담아, 김천대책위에 후원금 전합니다. 조금이라도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늘 함께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