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베이스 연주자인 레오폴도 보케리니와 마리아 산타 프로스페리의 3번째 아이로 태어난 루이지 로돌포 보케리니는 어린 나이에 그 지역 성당의 음악감독에게 맡겨졌다. 13세가 되었을 때 그는 이미 그곳에서 더이상 배울 것이 없었다. 그래서 로마로 가서 성베드로 대성당의 음악감독이며 유명한 첼로 연주자인 조반니 바티스타 코스탄치에게 배웠다. 로마에서 그는 조반니 다 팔레스트리나로부터 비롯된 다성음악 전통과 아르칸젤로 코렐리의 기악곡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로마 교회들의 저녁기도 시간에 미뉴에트 악장으로 끝나는 교향곡을 듣고 매료당했다. 후에 그는 이 춤곡을 양식화하기보다는 이상화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1757년 보케리니와 그의 아버지는 빈 황실극장 관현악단의 연주자로 초빙되었다. 그곳에서 어린 보케리니는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가 주도 아래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시작된 고전주의 음악을 흡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2번째 빈 여행(1760)에서 17세의 보케리니는 〈2대의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6개의 트리오〉 G.(제라르 번호) 77~82(보케리니의 자필 목록에는 작품1로 적혀 있음)를 발표하여 작곡가로 데뷔했는데, 이 작품은 당시 명성이 높았던 글루크의 칭찬을 받았다.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고향 루카에 대한 향수를 누를 수 없었던 보케리니는 1764년 8월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 교회와 극장 관현악단에서 영구적인 지위를 얻었다. 작곡가로서 그는 산타크로체 성당의 종교 행사와 그밖의 축제 등에 참여했고 1765년경 루카에서 여러 편의 오라토리오를 작곡했다. 1765년에는 롬바르디아에 있는 조반니 바티스타 삼마르티니의 관현악단에도 있었는데, 이 밀라노 출신 작곡가와의 공동작업에서 22세의 보케리니는 현악 4중주의 새로운 기법인 '대화' 양식을 터득했다(→ 색인 : 대위법). 첼로의 선율은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대위적인(독립적인 선율들을 조화롭게 얽어놓는 것) 선율과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그는 새로 터득한 이 기법을 토스카나 출신의 대가들로 구성된 현악 4중주단에서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1766년 아버지가 죽자 그는 영원히 루카를 떠날 결심을 했다. 토스카나 출신의 거장 바이올린 연주자인 만프레디의 동의를 얻어 도착한 목적지는 파리였는데, 당시 프랑스는 이탈리아 음악가들을 환대했으므로 그의 선택은 성공적인 것이었다. 프랑스의 출판업자인 그랑제·브니에르·셰바르디에르가 이전에 작곡된 보케리니의 작품들(1761년에 작곡된 6곡의 현악4중주 G. 159~164[보케리니의 작품번호 2],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6곡의 2중주 G. 56~61[보케리니의 작품번호 3])과 신작(각각 1766, 1766년경에 작곡된 2대의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6곡의 3중주 G. 83~88[보케리니의 작품번호 4], 교향곡 D장조 G. 500)을 출판하자, 파리 음악계는 루카에서 온 이 젊은 작곡가와 경쟁했다. 하프시코드 연주자인 브리용 드 쥐 부인을 만나 하프시코드와 바이올린을 위한 6곡의 소나타 G. 25~30(보케리니의 작품번호 5)이라는 훌륭한 작품을 작곡했다. 그의 양식은 곧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첼로 협주곡 6번 D장조 G. 479(1768경)는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K. 218(1775)의 모델이 되었다.
파리 주재 스페인 대사가 그를 마드리드로 초청함으로써 파리에서의 활발한 교류와 열정은 종지부를 찍었다. 이 희망적이고 그럴 듯해 보이는 제의에 현혹되어 스페인으로 간 그는 음모와 계략으로 가득찬 카를로스 3세의 궁정에서 오래도록 격리되어 있어야만 했다. 왕의 동생인 돈 루이스 왕자는 첼로 연주자와 작곡가로 봉사한 대가로 그에게 매년 3만 레알을 지급했으며, 반대를 무릅쓰고 한 결혼 때문에 왕관을 포기하고 마드리드에서 멀리 떨어진 라스 아레나스 성으로 물러난 후에도 보케리니를 곁에 두기를 원했다. 교활한 아스투리아스 공(후에 카를로스 4세가 됨)의 음모와 그를 시기하는 궁정 음악가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보케리니는 평온한 가운데서 작품을 썼으며 귀족들로 구성된 현악4중주단에 끼어 연주하기도 했다. 그동안 유명한 6곡의 현악4중주 G. 177~182(1772, 보케리니 작품번호 15[어떤 판에는 11로 기재됨]가 탄생했다. 마드리드는 그에게 있어 제2의 고향이 되었다. 그곳에서 클레멘티나 펠리코와 결혼하여 5명의 자녀를 두었다. 1785년 왕자가 죽자 왕은 그에게 1만 2,000레알의 연금을 하사했다. 그는 또한 아마추어 첼로 연주자였던 프로이센의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로부터도 연금을 받았다. 그는 프리드리히 왕과 오래도록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1곡의 교향곡과 여러편의 3중주·4중주·5중주곡을 왕에게 헌정했다. 마침내 오수나의 여귀족이 그를 마드리드의 푸에르타데라베가 궁전에 있는 자신의 사설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임명했다. 보케리니는 엄청난 수의 기악곡뿐만 아니라 〈슬픔의 성모 Stabat Mater〉 G. 532(1781), 사르수엘라(zarzuela:희가극의 한 형식) 〈클레멘티나 La Clementina〉 G. 540(1786, 라몬 데 라 크루스의 대본), 크리스마스 〈비얀시코 Villancicos〉 G. 539(1783) 등의 성악곡도 작곡했다. 보케리니는 전통적인 고전음악 형식에 충실하면서도 스페인의 대중음악을 수용했다. 사실 그는 친구였던 스페인의 위대한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가 살았던 '고야 시대'를 음악으로 대표했다.
첫번째 부인을 잃은 보케리니는 1787년 호아키나 포레티와 결혼했다. 1787~97년 베를린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마련해준 직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에 대한 역사적 증거는 빈약하다. 1798년 새로 즉위한 프로이센 국왕이 연금을 철회하고 오수나의 여귀족도 파리로 가버리게 되자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가중되는 재정적 압박감 때문에 고생했다. 남을 쉽게 믿는 성격 때문에 탐욕스런 파리의 출판업자 플레옐로 인해 타격을 입었으며 전염병으로 2번째 부인과 두 딸을 잃고 더욱 큰 슬픔에 빠졌다. 몇 년 동안 궁핍한 처지에서 보낸 후 뤼시앙 보나파르트의 후원으로 잠시 형편이 나아졌다. 그러나 1800년 뤼시앙이 마드리드 주재 프랑스 공화국 대사로 부임해가자 1801년부터 이전보다 더 극심한 가난 속에 빠져 1804년에는 세 아이들과 한방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의 마지막 완성작인 현악4중주 90번 F장조 G. 248은 바로 그해에 작곡되었다. 그곡을 작곡하자마자 세상을 떠났으며 마드리드의 산후스토 교회에 묻혔다. 1927년 그의 유해는 고향 루카의 산타프란체스코 성당으로 옮겨졌다. 1969년 프랑스의 학자 이브 제라르는 〈루이지 보케리니 작품들의 주제적·문헌적·비평적 목록 Thematic, Bibliographical, and Critical Catalogue of the Works of Luigi Boccherini〉을 출판했다. 그의 작품에 알파벳 'G'와 함께 있는 숫자는 연대적 순서가 아니라 작품의 유형에 따라 제라르가 붙인 것이다.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그의 음악적 표현력은 그 이전 세대의 음악적 형식주의를 해체하여 아름다움과 우아함으로 이끌어갔다. 스페인의 이론가 안토니오 엑시메노는 그를 가리켜 '유럽의 기쁨'이라고 했다. 보케리니의 작품이 요제프 하이든의 작품과 자주 비교되기는 하지만 그의 음악은 동시대 작곡가들의 특징인 추진력과 활력이 종종 결여되어 있다. 우수가 깃든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와 최상의 기품은 아마도 그의 음악을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들로부터 가장 잘 구별지어주는 특성일 것이다.
Gu. Barblan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