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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출신지 |
이주한 곳 |
순교지 |
순교일 |
윤지충 바오로 |
진산 장구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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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남문밖 |
1791년 |
권상연 야고보 |
진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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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남문밖 |
1791년 |
윤지헌 프란치스코 |
진산 |
고산 저구리 |
전주 남문밖 |
1801년 |
원씨 |
금산 솔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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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
1801년 |
김토마스(풍헌) |
청양 |
금산, 고산 |
진안에서 병사 |
1801년 |
이씨(이여삼의 형) |
홍주 배올 |
금산 개직이 |
유배 중 사망 |
1804년 |
이여삼 바오로 |
홍주 배올 |
금산 개직이 |
홍주 |
1812년 |
장대원 마티아 |
결성 덕머리 |
금산 솔티 |
공주 |
1813년 |
강씨 |
금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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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송 중 자살 |
1827년 |
이성화(태권) 베드로 |
홍주 배올 |
금산 |
전주 숲정이 |
1839년 |
오종례 야고보 |
은진 |
진산 |
전주 |
1839년 |
임베드로 |
남포 |
진산 |
전주 옥 |
1839년 |
이소사 막달레나 |
금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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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
1840년 |
김영오 아오스딩 |
홍주 용면 불무동 |
진산 가새벌 |
공주 |
1866년 |
김영삼 |
연산 |
진산 가새벌 |
전주 |
1866년 |
김베드로 |
진산 |
연산 상사바위 |
공주 |
1866년 |
최덕겸 |
진산 |
공주 도간리 |
공주 |
1866년 |
김공우 |
진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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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
1866년 |
최첨지 |
진산 |
공주 국실 |
공주 |
1867년 |
전춘서 안드레아 |
금산 |
남포 간재 |
서울 |
1867년 |
전루시아 |
진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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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 |
1867년 |
이택경의 아들 |
진산 오항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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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옥 |
1867년 |
손막달레나 |
금산 개직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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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 |
1868년 |
박운겸 |
금산 동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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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 |
1868년 |
한경영(정률) |
금산 개직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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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 |
1868년 |
송루시아 |
진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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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약으로 살해 |
1868년 |
전성백 야고보 |
금산 개직이 |
공주 산유리 |
공주 |
1868년 |
현프란치스코 |
진산 문바위 |
공주 금동리 |
공주 |
1868년 |
장아나스타시아 |
진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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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
1868년 |
김요한 |
연산 |
진산 가새벌 |
서울 |
1877년 |
장정선 |
진산 |
연산 동면 오리올 |
서울 |
1880년 |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접경에 있는 대둔산 자락은 윤지충의 순교 이후부터 신자들의 피난처였다. 윤지충의 동생 윤지헌이 고산 저구리(전북 완주군 운주면 고산)로 이주한 이후 신유박해(1801년)를 거치면서 각지의 신자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이 고산지방 신앙공동체는 대둔산 줄기를 따라 점차 확대되었는데 기해박해 이전에 이미 진산까지 확대되었다. 장대원이 1812년 이전에 이주한 금산의 솔티(금산군 남일면 신정리)가 신자들의 옹기마을이고 보면 윤지충의 순교 이후에도 이 지역이 한국 교회 초창기부터 신앙공동체의 뿌리를 얼마나 깊이 내리고 있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1856년에는 최양업 신부가 진밭들(금산군 진산면 두지리) 교우촌에서 어른 15명에게 세례를 준 이후에 외교인들에게 발각되어 봉변을 당한 적이 있다.
진산은 고산지방 신자들과의 교류 안에서, 그리고 타지역에서 이주해오는 신자들을 통해 힘을 얻으며 계속해서 신앙공동체를 형성했다. 그 중심에 지방리 공소의 전신인 가새벌이 있었다.
3. 지방리 공소의 전신 가새벌
금산군 진산면 지방리(芝芳里)의 마을 초입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있다.
“본래 진산군 서면의 지역으로써 땅이 기름지고 지초가 잘 자라 지초골이라 했는데 상마근리, 장대동, 가장동, 가사동, 산직촌을 병합하여 지방리라 했으며 북동쪽으로 냇가에 길쭉하게 마을이 생겼다 하여 가장말이라 했으며 북쪽으로 지형이 스님의 가사처럼 생겼다 하여 가사벌이란 마을의 이름이 붙여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비문의 내용을 보건데 지방리는 몇몇 자연부락이 합쳐진 마을이다. 이 지역에는 본래 지방골(혹은 지초골), 장대울(혹은 장대말), 가새벌(혹은 가사동), 가장골, 산지기가 산다하여 붙여진 산직촌 등의 이름을 가진 자연부락이 산재해 있었다. 행정구역 개편 과정에서 말단 단위인 리(里)의 이름을 붙일 때 이들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지방골의 이름을 따서 지방리라는 이름이 생겨난 듯하다. 지방리에는 아직도 지방골, 가새벌, 재실말, 장대말이란 자연부락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곳은 가새벌이다. 바로 여기가 지방리 공소의 전신인 가새벌 공소가 있던 곳이다.
가새벌은 현재 대전교구의 은퇴 신부를 위한 사제관이 자리한 곳인데 그 뒷산에는 이곳 신자들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금산군지>>에는 이 마을의 지형이 스님들이 입는 가사(袈裟)처럼 생겼다하여 ‘가사벌’이라 불린다고 기록하지만 의문이다. ‘가사’라는 한자어와‘벌’이라는 순수한 한국말이 합쳐진 것도 이상하지만‘벌’이 의미하는 들 혹은 평야와, 산자락의 모양을 따서 지었다는‘가사’라는 이름도 그리 어울리지는 않는다.
천주교 자료에 나오는‘가세발’혹은‘가벌’이라는 이름이 오히려 더 정확할 것이다. 1866년에 순교한 김요한이‘진산 가벌’에서 잡혔다고 되어 있고, 1885년부터 보고된 선교사들의 교세통계표에는‘가새벌’로 기록되어 있다. 김요한의 기록에 나타나는 가새벌이란 이름은 그의 조카가 증언한 이름이니 이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가새벌이란 이름은 바로 마을 앞을 지나는 하천의 모양 혹은 그 마을의 위치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 아닐까 한다.
가새벌에 대한 기록은 병인박해와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이전의 기록에도‘진산’이란 이름이 등장하는데 가새벌과 직접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병인박해 이전의 기록은 대부분 관변 자료인데 여기에는 현감이나 군수가 있는 지명만 기록하기에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이에 비해 병인박해 자료들은 목격하거나 들은 증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기록한 것이어서 마을의 이름이 구체적이다. 병인박해 이후 기록된 가새벌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원자료가 그리 많지 않으므로 모두 인용한다.
“김영삼은 김요한의 형이니, 부모께 잘 배워 열심 수계하더니, 병인군난(1866)에 전주 포교 와 성명 묻고‘네 성교를 하느냐?’하거늘‘내 과연 천주 성교를 봉행하였느라’하니 포교들이 여러 소솔을 다 잡아가려 하는 고로 하나도 안 갈 수 없으매 슬픈 마음을 강잉(强仍)하여 혼자 포교를 따라 전주로 가니, 영장이 문왈‘네 천주학을 하느냐?’하니‘과연 성교를 하였나이다.’하옥한 지 두 달 후 참수치명하니 나이 20세요, 증인은 대흥 우러내 사는 그 조카 김 토마스니 나이 28세라.
“김영삼. 연산 사람이라. 병인년 군난에 전주 포교에게 잡혀 하옥한 지 두 달 후에 참수 치명하니, 나이는 20세러라.”
“김 사도 요한은 진산 가새벌 사는 사람으로 그때 경포에게 잡힐 때는 서로 알지 못하였더니, 서울 갈 때에 수원 대황교에서 만나 함께 포청 추열할 때에,‘최 신부가 네 집에 자주 왕래한즉 너는 지금 자취를 알 것이니 말하라’하니, 이유는 큰 공소 주인이요, 성교를 많이 전한 연고니라. 무수한 형벌에도 끝끝내 가리키지 아니하고 옥중에 갇힌 지 6개월 만에 이 위의 두 사람과 같이 죽으니라.”
“김 사도 요한은 본디 충청 연산 사람이라. 부모의 교훈함을 잘 받아 열심 수계하더니, 후에 진산 가새벌 살 적에 병인년 군난에 그 형은 전주 가 치명하고 피하여 있더니, 정축년(1877) 군난에 다른 교우가 피하라 하되 안 피하고 여러 교우가 경포에게 잡혀‘네 천주학을 하느냐?’물으매‘내 과연 천주 성교를 봉행하노라’한즉 별로 다른 말없이 서울로 가 옥에 있은 지 석 달 후 상영(上營) 본부에 성교인 몇 사람 잡은 것을 주림으로 죽게 하라 하는 고로 음식을 아니 주어 굶어 죽으니 36세요, 증인은 대흥 우러내 사는 그 조카 김 토마스니 나이 28세라.”
“김 사도 요한. 연산 사람이라. 정축년에 다른 교우와 한가지로 경포에게 잡혀 서울로 와 옥에서 굶주려 죽으니, 나이 36세러라.”
김진소 신부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김영오 순교자도 1840년경에 가새벌에 이주하여 산 적이 있다. 이 기록을 보면 이미 기해박해(1839년) 이전부터 가새벌에 신자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모습은 알 수 없고 다만 위에서 인용한 병인박해의 기록을 통해서 후대의 모습이 드러날 뿐이다.
1866년에 김영삼, 1877년에 김요한, 1878년에 순교한 김춘삼의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김영삼은 김요한의 형인데 두 순교자의 기록을 보면 가새벌에는 병인박해의 영향이 아직도 미치고 있는 1876년에도 신부가 방문하여 공소를 치르는 마을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 공소의 형태는 물론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나 적어도 외국인 선교사가 방문하여 머물며 성사를 줄만한 촌락의 형태였다.
1866년에 잡힌 김영삼은 충남 연산 사람이었다. 부모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은 그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식솔들과 함께 가새벌로 이사했다. 그의 주변에 다른 신자들이 함께 살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그의 가족들 모두가 신자였다. 포졸들이 와서 처음에는 집안 식구 모두를 잡아가려 하였으나 결국 김영삼만이 대표로 잡혀갔고 두 달 후에 참수 치명하였다.
그의 동생 김요한(1877년에 순교)에 대한 기록은 보다 풍부하다. 김요한 역시 연산에 살다가 그의 형과 함께 가새벌로 이사였다. 형이 잡혀갈 적에 그는 함께 있었으나 잡혀가지는 않았다. 형의 체포 이후 잠시 피난하였는데 어느 날엔가 다시 돌아와 가새벌에서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의 집이 공소를 치르는 곳이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전라도를 담당하던 최 신부가 그 집에 자주 왕래하였다 한다. 여기서 최 신부는 1876년에 입국한 드게트 신부를 말한다. 드게트 신부는 입국하던 해에 관헌에게 잡혀 9월에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그가 잡힌 날짜에 비추어 계산해 보면 김요한은 1876년 후반의 어느 날 다른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6개월 후인 1877년 초에 옥에서 굶어 죽었다. 그가 잡히던 상황은 그의 형이 잡힐 때와는 다르다. “다른 교우가 피하라고 하되 안 피하고”있다가 여러 신자들과 더불어 잡혀갔다.
병인박해로 프랑스 선교사들 모두 순교하거나 중국으로 피신한 이후 한국에는 십여 년 동안 한 명의 성직자도 없었다. 1876년 이후 선교사들이 재입국하면서 이들은 각지에 흩어져 있는 신자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하였다. 가새벌도 그 중 하나로 다른 곳에 비해 안전한 곳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866년에 김영삼이 잡히는 것에서 보듯이 가족 모두가 신자였지만 대표 한 사람만 체포되었다. 그의 동생은 잠시 피난하였지만 다시 되돌아왔고 신자 공동체는 계속 유지되었다. 그 결과 십여 년 후에는 외국인 선교사가 방문하여 공소를 치를 수 있을 만한 곳이 되었다.
박해시대의 공소방문 상황을 잘 기록하고 있는 <<전라도 전도 약기>>에 따르면, 저자 박제원은 1885년에 죠스 신부를 모시고 가새벌에서 공소를 치렀다. 그의 기록 형태로 보아 가새벌은 신부가 며칠을 머물며 공소를 치를만한 큰 곳은 아니었으나 선교사가 머문 곳 중에는 진산 지역 유일의 공소였다. 이 시기에 가새벌에 얼마만큼의 신자가 살고 있었는지는 1885년과 그 이듬해의 교세통계표를 통해서 추측해 볼 수 있다. 1885년 죠스 신부가 가새벌을 방문했을 때의 교우 총수는 42명이었다. 이것은 가새벌 만의 신자수가 아니라 인근 돌막이(진산면 석막리)와 정금 공소의 신자들을 합한 것이었다. 이듬해의 통계를 보면 이 세 지역이 따로 표기되어 있는데 가새벌에는 11명의 신자가 있었다. 이 통계에서 보듯이 가새벌에는 많은 신자들이 살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병인박해 이전부터 계속해서 신자들이 거주하였고 진산 지역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김영오 순교자의 경우를 감안한다면 이미 기해박해 이전에도 신자들이 가새벌에 거주하였다.
4. 가새벌 사람들
가새벌이 속해 있는 진산 지역이 행정적으로, 또한 교회 안에서 여러 차례 구역개편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이곳이 접경지대이기 때문이다. 지방리 공소의 전신인 가새벌 공소의 형성은 접경지대로서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경계지역에 위치한 가새벌은 각지에서 이주해온 신자들의 의해 영향을 받으며 변화했다. 1876년에도 선교사의 방문이 있었고 1885년 이후 해마다 공소가 치러진 가새벌은 새로운 사람들의 영향으로 풍부해졌다. 몇몇 기록과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신자들의 신앙 역사를 되짚어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가새벌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840년경에 그곳으로 이주한 김영오의 사적에 나타난다. 충남 홍주 용면 불무동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난 그는 고산 빼재로 이주하여 살다가 기해박해를 맞았다. 관장의 선처로 풀려난 그는 가새벌에 정착하여 살다가 연산 상사바위로 이주한 후 거기에서 병인박해를 맞아 순교한다.
1866년에 순교한 김영삼은 본래 그의 동생과 함께 충청도 연산에서 살고 있었다. 부모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은 두 형제는 무슨 이유에서 인지 이곳으로 이사를 했다. 형인 김영삼이 먼저 잡혀 순교하였고 동생인 김요한은 11년 후인 1877년에 역시 이곳에서 잡혀 순교하였다. 연산에서 이사해온 두 형제는 가새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형인 김영삼은 1866년에 이곳 신자들을 대표하여 잡혀갔고 동생 요한은 이곳의 공소의 주인이었다는 이유로 잡혀갔다.
순교자 김영삼 형제 이후 가새벌에 정착한 또 다른 사례는 김대건 신부의 집안에서 찾을 수 있다. 김대건 신부의 사촌인 김현학의 집안이 가새벌로 이사와 정착한 과정은 이 마을의 변화상을 잘 보여준다. 영남교회사연구소의 마백락은 김대건 신부와 관련하여 이 집안의 이주에 대해 면밀히 검토한 바 있다. 김현학의 아버지 김선식이 김대건 신부의 사촌이기 때문에 그 대상이 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가 1814년에 순교한 이후 이 집안은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던 솔뫼를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 그중 김대건 신부의 할아버지 김택현(1766~1830)은 삼형제(제봉, 제준, 제철)를 두었다. 막내인 제철(1803~1855) 가정은 1827년 정해박해 때 부친을 모시고 둘째 형인 제준(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가정과 함께 경기도 용인으로 피난을 갔다. 제철은 아들 넷(의식, 근식, 진식, 선식)을 두었다. 첫째인 의식(1824~?)은 1846년 병오박해 때 동생 근식과 함께 은진 강경리로 피난했다가 공주 금동에 가서살았다. 병인박해에 이르러서는 다시 결성으로 피난하였다. 셋째 진식(1827~1869)은 1846년 병오박해 때 덕산으로 피난했다가 병인박해를 만나 해미 포교에게 잡혀 1869년에 순교하였다. 넷째인 선식(1833~?) 가정은 1846년에 옥천으로 피난을 갔다가 병인박해를 만났다. 김선식이 순교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8살이었던 그의 아들 현학(1858~1929)은 부모를 잃고 남의 집 행랑과 정지에 불을 때주며 잔심부름으로 고생을 하며 자랐다. 조금 커서는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다가 박해를 피해 1868년을 전후하여 가새벌로 와 정착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공주 태생인 박루시아와 혼인하여 4남(경배, 선배, 창배, 흥배) 1녀를 두고 가정을 이루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딸 일남은 이의규 회장의 셋째 아들인 이종렬과 결혼하여 가새벌에 살았다. 네 아들은 이후 가새벌을 떠나 전라도와 충청도 각지로 이사를 했다. 큰 아들 경배(지별도)는 형제들 중 가장 늦게까지 가새벌에 살았다. 부유하지는 않았으니 그리 넉넉하지도 않던 살림이었는데 어느 해인가 수해를 만나 가지고 있던 땅이 거의 다 떠내려갔고 복구가 불가능하여 고향을 떠났다. 조금 남은 성한 땅은 대성골산에 묻혀 있는 아버지의 무덤 관리를 부탁하며 사위인 이종렬에게 벌초사례로 주었다. 창배의 아들 종면은 어머니와 할아버지의 묘가 대성골산에 있었으므로 이사 후에도 가새벌에 잘 다녀으나 해방 후 어머니의 묘를 이장한 후에는 발을 끊었다. 둘째 선배는 일찍 논산으로 이사가 살았다. 셋째 창배는 상마근리(상막현리)에 살다가 전북 함열의 와리라는 곳으로 이사하였다. 막내 흥배는 생활이 어려워 일제시대에는 일본에 가서 살다가 해방 후 되돌아 왔으나 곧 다른 곳으로 이사하였다. 이처럼 선대로부터 계속된 피난 생활은 김현학의 집안에도 이어졌다. 그 역시 박해를 피해 여러 곳을 전전하던 중 가새벌에 정착하였고 여기서 공주 태생의 여자를 만나 결혼하였다.
가새벌의 초대 공소회장인 이예규(1860~1915)의 집안은 한불조약(1886) 이후 이곳에 정착하였다. 전주 이씨 집안의 예규는 구교우 집 자녀였다. 이 집안은 병인박해를 피해 경상도 상주, 충청도 공주, 전라도 고산 등지를 전전하다가 가새벌로 이사하였다. 이예규가 이사해왔을 때에 가새벌과 그 인근은 개간이 잘 되어 있지 않은 척박한 땅이었다. 그는 개간에 재능이 있는 형 의규(1860~1940)에게 그곳으로 이사해올 것을 권하였다. 이사해온 형은 미개간지를 사들여 농토로 만들었고 이후 큰 부자가 되었다. 이씨 집안의 경제적인 성공은 그들의 열심한 신앙과 더불어 이 지역에 천주교를 전파하는데 큰 영향력을 미쳤다. 동생 예규가 이곳의 초대 공소회장이 된 이후 대대로 회장직을 역임하며 가새벌이 지방리 본당으로 발전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표2) 지방리의 역대 공소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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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비고 |
|
성명 |
비고 |
초대 |
이예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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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
이종렬 |
3대 공소회장 |
2대 |
이의규(마르코) |
이예규의 형 |
7대 |
송순용(요셉) |
|
3대 |
이종렬 |
이의규의 아들 |
8대 |
정청룡 |
정한규의 아버지 |
4대 |
이종대 |
이의규의 둘째 아들 |
9대 |
송영무(바오로) |
송순용의 아들 |
5대 |
방순서 |
|
10대 |
정한규 |
1968년 이후 계속 |
제9대 공소회장을 지낸 송영무(바오로)의 집안은 1904년을 전후하여 가새벌에 정착하였다. 1928년생인 송영무 회장의 아버지 송순용(요셉)은 제7대 공소회장이었다. 집안이 언제부터 신앙을 가졌는지 자세히 모르지만 병인박해 이전부터라는 것은 확실하다. 이 집안은 병인박해 이전 대전 삼성동의 백골이라는 곳에 살았다. 박해가 일어나자 피난을 했는데 송영무의 큰 할아버지는 진안군 장수로 갔고, 할아버지 송주옥(요한)은 무주로 갔다. 1890년경에 태어난 송주옥은 고산 구제리로 또 한 차례 이사하였고 14살을 전후하여 가새벌로 왔다. 송주옥은 2대 공소회장인 이의규의 딸과 결혼하였다. 집안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서 아들 송순용 대에 이르러서는 농사를 지어먹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여 숯을 구워서 팔았다. 나무가 많은 곳에서 숯을 구워 대전에 팔면 좁쌀 한 말 정도의 벌이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손자인 송영무는 안심리(전북 완주군 운주면)에 사는 신자 집 딸과 21살 때 결혼했다. 거리가 멀어도 신자들 간에는 교류가 잘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중매 결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제5대 공소회장을 지낸 방순서 역시 타지에서 이사를 왔다. 방순서는 6대째 신앙생활을 하는 남원 방씨 집안 사람이었다. 본래 남원에 살았는데 천주교를 믿는다하여 마을에서 쫓겨나 시장골(고산군 동산면), 이리(솜리) 등지로 떠돌다가 가새벌에 와 정착하였다. 이곳에 오기 전의 고향을 따라 ‘솜리양반’, 그 부인을 ‘솜리댁’이라 불렀다. 그 딸은 공소의 옛 사제관에 살면서 아버지로부터 전통적인 신앙교육을 받았다.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조만과를 하루도 빠짐없이 하며 살았다. 덕분에 아는 것은 많지 않아도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갖게 되었다 한다. 방순서는 지방리 공소의 옛 사제관 옆에 마련된 집에 기거하며 공소 관리도 겸하였다.
1968년 이후 줄 곧 공소회장을 맡아온 정한규의 집안은 공주에서 이사를 왔다. 이 집안은 본래 안영리(공주시 탄천면) 대대로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 이 마을은 유교의 전통이 강한 마을로 천주교는 발붙일 만한 곳이 못되었다. 정한규의 증조할아버지 역시 신자가 아니었다. 그는 급제한 적은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꼭 과거 시험을 치르러 가곤 하였다. 그리 가난하게 살던 집안은 아니었는데 정한규의 할아버지 대에 이르러 집안이 급격히 기울었다. 할아버지가 집을 자주 비우고 돌보지 않아 할머니가 생계를 꾸려가다 보니 빚을 많이 졌고 더 이상 동네에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정한규의 아버지 정청룡이 열 두 살 되던 해(1910년 전후)에 그곳을 떠나 지방골(지방리)로 이사하기로 결정했다. 할머니의 친정이 그곳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집을 나가 들어오지 않은 상태여서 남은 가족들끼리 이사를 했는데 논산의 은진 대즐에 이르러 증조할머니가 병을 얻어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이 때 은진 공소회장이 이들을 측은히 보고 교우 집을 주선하여 임시로 기거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공소회장이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실지도 모르니 대세를 받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하였고 가족들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를 계기로 이사하던 모든 가족이 교우가 되었다. 증조할머니의 병이 쾌차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면서 모든 가족들이 문답을 배워 입교하였다. 집을 떠나 있던 할아버지는 이때서야 수소문하여 가족을 찾아왔다고 한다. 증조할머니의 사망 이후 정씨 일가는 본래의 목적대로 지방골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신자들이 사는 마을이 아니어서 수계생활이 어렵고 할머니의 친정에 너무 오래 머무는 것도 부담스러워 신자들이 모여 사는 가새벌로 재차 이사하였다. 가새벌 신자들의 주선으로 집을 마련하여 정착하였으나 본래 가진 것이 없어서 가난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농토 하나 가지고 있지 않았던 아버지 정청룡은 숯장사를 하였다. 대전에 있는 일본 사람들이 숯을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대둔산의 숯 굽는 곳에 가서 숯을 떠다가 대전에 내다팔아 연명하였다. 늦게 배운 신앙임에도 불구하고 수계생활에 열심했던 정청룡은 지방리 공소의 8대 회장이 되어 오랫동안 봉사하였다. 가난으로 말미암아 정한규를 비롯한 그의 형제들은 학교 한 번 번번히 다니지 못하고 동네의 야학에서 글만 겨우 배울 수 있었다. 정한규 회장은 가난의 원인을 제공한 할아버지를 오래도록 원망하였다. 그러나 어느 날인가 문득‘할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우리 집안은 계속해서 공주에서 살았을 것이고, 그리되면 신앙 역시 가지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정 회장은 할아버지 덕분에 신앙을 가지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상의 사례들은 가새벌의 몇 가지 특징을 드러낸다. 첫째 이 마을은 이주해온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본래부터 가새벌에 살고 있는 집안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기해박해 전에 이주해온 이도 있으나 병인박해를 전후하여 가장 많은 집안이 이주해왔다. 접경지대라는 특징 때문에 각지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쉽게 정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두 번째 특징은 이주해온 사람들이 이 마을의 주요 변수였다는 점이다. 가새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공소회장들 모두가 타지에서 이사를 온 사람들이었다. 특히 초대 회장을 지낸 이예규의 집안은 공소뿐만 아니라 농지개간을 통해 얻은 부를 통해서 지역사회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사실은 가새벌에는 토착세력이라 할 만한 씨족이나 경제력을 가진 집안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세 번째 특징은 천주교 신앙이 이주의 주요원인이었다는 점이다. 박해로 인해 안주할 곳을 찾지 못하던 사람들이 가새벌로 와 정착하였다. 본래 신자가 아니었던 정한규의 집안이 예외이기는 하지만 이 집안 역시 마지막에는 신앙상의 이유로 가새벌에 정착하였다.
가새벌과 그 인근은 척박한 땅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돌이 많아 농사를 짓기에도 좋지 않다. 이곳 하천에서는 상류에서 흐르던 물이 스며들어 다른 곳으로 솟아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그만큼 땅에 돌이 많기 때문인데 이는 물을 가두어 논농사를 짓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해준다. 지금도 배수가 지나치게 잘 되어 양수기가 없이는 논농사를 짓기 어렵다. 밭농사도 마찬가지여서 돌로 인해 밭을 일구기도 어렵지만 물의 부족으로 심어 먹을 수 있는 품종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척박한 땅에서 풍성한 것이라고는 피난하여온 사람들에 의해 가꾸어진 신앙뿐이었다.
5. 지방리 본당으로의 발전
한불조약 이후 선교사들의 활동이 점점 자유로워지면서 각지에 흩어져 있던 신자 공동체는 중심이 되는 공소를 중심으로 재편되어 갔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는 교통이 편리한 곳에 공동체의 주류가 형성되었지만 그 이전에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신자들이 많은 모여 있는 곳에 중심이 되는 공소가 형성되었다. 비슷한 조건이라면 한 공동체의 대표인 공소회장이나 구성원들의 역량이 영향을 미쳤다.
가새벌은 박해를 피해 이사를 온 교우들의 수가 증가하고 1885년 이후 계속된 선교사의공소 방문으로 확실한 위치를 잡아갔다. 더하여 지도력을 갖춘 한 집안이 이주해옴으로써 가새벌은 본당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맞았다. 위에서 간단히 언급했듯이 공주에서 이사해 온 이예규의 집안은 가새벌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가새벌 뒤에 위치한 대성골산에 있는 전주 이씨 집안의 한 무덤에는 다음과 같은 회고문이 새겨져 있다. 이 글과 그 후손의 증언, 그리고 현직 공소회장의 증언은 교회문헌의 기록과 더불어 신앙자유기에 가새벌이 어떻게 변모해갔는지를 말해준다.
“회고문. 이 말구 조부님은 대원군 천주교인 박해시 경상도 상주, 충청도 공주, 전라도 고산 산중 등지로 피난생활을 하시다가 1886년 한불수교조약에 의한 천주교 박해 완화로 이 고장 가새벌 빈민촌에 정착하시어 마을 앞 황무지 들판을 매수 옥토 전답으로 개간 년 수백석의 수확으로 갑부가 되시다. 이는 주님의 축복과 은혜로움이라 생각하시고 앞으로 주님 전교 사업에 헌신봉사하시기로 다짐하시고 무교우촌을 교우촌으로 전환하시는데 목표를 삼으시고 빈민에 사랑과 나눔의 실천으로 돌보시매 이에 감동되어 입교 신자는 날로 늘어 당신 집 옆 터에 소강당을 건립 공소의 기틀을 잡으시다. 복음전파는 계속되고 강당 협소로 성당 건립을 구상하시어 당시 되재 본당 주임 불란서 신부님께 품의 승인 후 1928년 자부담으로 현 성당을 건립하시고 성당 유지재단으로 대성골산 일대를 봉헌하시다. 또한 대구교구 주교님을 수차예방 초대 이 이냐시오 신부님을 모시게 되어 적막산천에 복음과 전교사업의 염원을 달성하시고 1940년 12월 27일 80세를 일기로 주님 품에 편안히 선종하시다. 장례하관시 현 성당 중심과 종각과 묘지에 쌍무지개를 박아 인근주민들은 회장님은 천당에 가셨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이 기록은 가새벌 공소가 어떻게 지방리 본당으로 발전해갔는지를 한 눈에 보여준다. 이와 더불어 <<전주교구 교세통계표>>에 나와 있는 기록을 참조하면 가새벌이 진산 지역의 중심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표3) 진산지역 교세 통계(1884~1910)
연도 |
공소명 |
신자수 |
평가내용 |
주임 신부 |
연도 |
공소명 |
신자수 |
주임 신부 |
1884 |
소라니 |
85 |
평가 내용 없음 |
조스 |
1894 |
안지렁이 |
40 |
빌모 |
1885 |
소라니 |
83 |
진산 |
20 | ||||
저귀골 |
24 |
저귀골 |
48 | |||||
윙골 |
24 |
구만이 | ||||||
가새벌 |
42 |
가새벌 |
34 | |||||
1886 |
저귀골 |
26 |
보두네 |
1895 |
가새벌 |
33 | ||
가새벌 |
11 |
구만리 |
33 | |||||
소라니 |
105 |
저귀골 |
21 | |||||
돌맥이 |
16 |
수수바위 |
14 | |||||
정금 |
15 |
안지렁이 |
38 | |||||
1887 |
가새벌 |
82 |
열심 |
1896 |
진산 |
11 | ||
웡골 |
32 |
약간 열심 |
구만이 |
33 | ||||
저귀골 |
30 |
열심 |
가새벌 |
32 | ||||
구만이 |
18 |
열심 |
저귀골 |
19 | ||||
1888 |
오항골 |
25 |
약간 좋다 |
1897 |
가새벌 |
47 |
미알롱 | |
구만리 |
14 |
약간 좋다 |
구만이 |
33 | ||||
저귀리 |
29 |
약간 좋다 |
저귀골 |
22 | ||||
가새벌 |
70 |
아주 좋다 |
진산읍내 |
33 | ||||
돌막이 |
14 |
미지근하다 |
돌막이 |
21 | ||||
1889 |
돌막이 |
15 |
좋지 않다 |
1898 |
가새벌 |
46 | ||
저귀골 |
26 |
약간 좋다 |
구만리 |
25 | ||||
구만이 |
16 |
약간 좋다 |
저귀골 |
18 | ||||
웡골 |
33 |
약간 좋다 |
읍내 |
37 | ||||
가새벌 |
48 |
약간 좋다 |
1899 |
가새벌 |
59 | |||
진산 |
14 |
약간 좋다 |
구만리 |
27 | ||||
1890 |
돌막이 |
19 |
좋은점 나쁜점이 다 있다 |
읍내 |
48 | |||
저귀굴 |
28 |
그저 그렇다. 회장 열심 |
1900 |
가새벌 |
70 | |||
구만이 |
14 |
한집이다. 그저 그렇다 |
구만이 |
35 | ||||
웡골 |
24 |
흔들리는 공소다 |
읍내 |
65 | ||||
가새벌 |
36 |
옛날보다 좋지 않다 |
1901 |
안지렁이 |
69 | |||
진산 |
17 |
세속 중에 열심한 신앙 |
가새벌 |
105 | ||||
1891 |
가새벌 |
39 |
약간 좋다. 아이들 교리공부 안했다 |
우도 |
구만리 |
27 | ||
구만이 |
16 |
1명 외에는 좋다 |
1902 |
안지렁이 |
59 | |||
저귀골 |
25 |
2~3명 외에는 좋다 |
가새벌 |
119 | ||||
진산읍 |
15 |
부족하다 |
1903 |
안지렁이 |
52 | |||
덜매기 |
16 |
좋다 |
가새벌 |
33 | ||||
막골 |
51 |
아이들 외에는 좋다 |
1904~1908년의 교세통계 없음 | |||||
1892 |
가새벌 |
61 |
좋다 | |||||
저귀골 |
18 |
좋다 | ||||||
진산 |
18 |
0점 몇 명 있다 | ||||||
돌막이 |
19 |
좋다 | ||||||
1893 |
가새벌 |
35 |
이후 평가 내용 없음 |
빌모 | ||||
구만이 |
7 |
1909 |
가새벌 |
161 |
베르몽 | |||
지렁이 |
10 |
1910 |
안지랭이 |
10 | ||||
저귀골 |
17 |
가새벌 |
170 | |||||
진산 |
18 |
이후 1952년으로 이어지는데 이때부터는 본당별 통계임 | ||||||
돌막이 |
19 |
1884년부터 30여 년 동안 진산 지역은 4~5개의 공소들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해가며 변모하였다. 가새벌은 1884년에는 선교사의 방문이 이루어질만한 곳으로 주목받지 못하였으나 1909년에 이르러서는 이 지역 유일의 공소가 되었다.
보두네 신부가 공소를 치른 1886~1890년의 평가를 보면 가새벌 공소는 초반 2년 동안에는‘좋다’,‘아주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나머지 후반 2년에는‘약간 좋다’, ‘옛날보다 좋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무엇이 평가의 기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교세통계표>>에 나와 있는 것만을 본다면 평가 점수가 떨어진 1888년부터 냉담자의 수가 기록되고 있다는 점이다.
교세통계표 외의 다른 기록들을 통해서도 가새벌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은 가새벌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동학농민운동 기간 동안 전라도의 선교사들과 신자들은 박해시대 이후 또 한 차례 큰 시련을 겪었다. 뮈텔 주교의 일기에는 을미의병(1895)에 놀란 진산의 신자들이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겁에 질려 산에서 이틀 밤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한 해 전에 겪었던 동학농민운동 기간의 박해에서 비롯된 신자들의 과민반응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가새벌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이곳 역시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가새벌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은 뮈텔 일기에서 발견된다. 1898년 11월 18일자 일기에는 “공주의 미알롱 신부로부터 전보가 왔다. 진산에서의 한 중대한 사건 때문에 서울에 올라온다는 통지이다.” 라고 간단하게만 언급되어 있다. 이 사건은 관련 인물과 시기를 고려할 때 가새벌에 구전되어 오는 산송사건과 관련이 있다.
맹(미알롱) 신부가 공소를 방문했을 때 가새벌에는 묘지를 둘러싸고 큰 문제가 발생해 있었다. 전임 전라감사가 조상의 무덤을 쓰기 위해 동유림(한 동리에서 공동소유하는 산으로 땔감을 마련하는 곳)을 무단 점유하였다. 그가 무덤을 쓰고자 하는 곳은 가새벌 바로 뒷쪽에 위치한 대성골산이었다. 전임 전라감사는 산 아래로 보이는 모든 지역의 동유림을 자기 소유라 주장하고 인근 모든 무덤의 평장을 요구하였다. 지역 주민들은 세도에 눌려 무어라 항의 한마디 못하였다. 이때 마침 미알롱 신부의 공소 방문이 있었다. 가새벌의 이의규 회장은 미알롱 신부에게 이러한 사정을 알리며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미알롱 신부의 후원을 받는 공소 신자들은 신부를 말에 태우고 이의규 회장을 앞장 세워 무덤을 꾸미기 위해 작업 중인 곳(현 공동묘지의 바로 옆의 비탈)으로 올라갔다. 여기서 담판이 이루어졌고 전임 전라감사는 동유림의 무단 점유와 주민들에게 강요한 평장 명령을 취소하였다. 다만 무덤을 쓴 곳만을 자기 소유로 하였다. 이 구전은 19세기 말에 유행처럼 번지던 양대인(洋大人)인 서양 선교사를 통한 문제해결 방법이 가새벌 공소에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드망즈 주교의 일기에는 가새벌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기록들이 나타난다. 1912년에 드망즈 주교는 가새벌 공소를 방문하여 공소를 치렀다. 단지 방문했다는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는데 11월 15, 16일 이틀 동안 이곳에 머물렀다. 진산뿐만 아니라 금산 지역까지 아우르더라도 드망즈 주교가 방문하여 공소를 치른 곳은 가새벌 한 곳이었다. 1909년 이 지역이 가새벌 공소 하나로 통합된 이후 그 체제는 계속 유지되었다.
또 다른 기록은 1916년에 발견된다. 일제는 강점 이후 등록제를 통해 한국의 모든 기관과 조직들을 통제하려 하였다. 천주교도 예외는 아니어서 각지의 성당 및 공소들을 등록해야만 했다. 천주교의 각 기관은‘포교소’혹은‘천주당’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되었는데 가새벌 공소는 1916년 2월 14일에‘천주당’이라는 이름으로 등록하였다. ‘금산 천주당’이라 되어 있는데 주소지는 금산군 진산면 상마근리로 되어 있다. 이미 서술했듯이 현재의 지방리는 상마근리, 장대동, 가장동, 가새벌, 산직촌이 합쳐진 마을이다. 상마근리는 가새벌 바로 북쪽에 붙어 있는 마을이다. ‘금산 천주당’이라 등록된 건물은 가새벌 공소를 가리키는데 정확한 위치는 상마근리라 불리는 곳에 있었을 것이다. 일제시대에 이르러 진산과 금산 지역 전체를 통틀어 공식적으로 등록된 것은 가새벌 공소였다. 같은 해 11월 6일 드망즈 주교는 가새벌 공소를 방문하였고 다음 날 성모 성탄을 주보로 하여 성당을 강복했다.
한동안 기록에 나타나지 않던 가새벌 공소는 1922년에 드망즈 일기에 다시 등장한다. 드망즈 주교는 이때에도 역시 판공 및 견진성사 거행을 위해 가새벌을 방문한다. 1916년처럼 이틀을 머물며 공소를 치룬 후에 장대울 공소로 이동한다. 장대울은 현재의 지방리 공소 건물이 위치한 지역 건너편을 말하는데 드망즈 주교의 기록대로 가새벌에서 5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다. 게다가 이곳은 대부분 개신교 신자들이 거주하는 마을이어서 천주교 신자는 몇 명뿐이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당연히 이곳의 신자들이 가새벌로 공소를 치르러 와야 했다. 그러나 굳이 여기에서 공소를 치룬 이유를 알 수 없다. 개신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개종운동의 일환이었거나, 이 시기를 전후하여 공소의 이전이 검토되었을 것으로 추측해볼 뿐이다.
1920년대에 이르러 가새벌의 신자들은 이의규 회장 집안을 중심으로 공소의 증축과 본당 승격 운동을 벌였다. 교세의 증가로 가새벌에 있던 최초의 공소는 너무 협소하여 증축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가새벌은 지형이 너무 옹색하여 더 큰 공소를 지을만한 곳이 못되었다. 이에 이의규 회장은 현재의 지방리 공소가 있는 땅을 기증하고 그곳에 공소 건물을 신축하였다. 공소의 신축은 신자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이씨 집안의 경제적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드망즈 주교는 1927년 11월 5일에 이곳을 방문하여 성당을 강복하였다. 공소의 주보는 이전과 같은‘성모 성탄’으로 결정되었다.
새 공소 건물이 완성되자 신부 영입 운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이의규 회장은 관할 본당 과 대구대목구를 여러 차례 방문하여 건의한 결과 드망즈 주교로부터 신부 파견을 약속받았다. 이때 드망즈 주교는 이 회장에게 주임 신부의 급여와 본당 운영을 위한 재원이 있는지를 물었다. 지방리 신자들과 이 문제를 논의한 이후 본당 운영을 위해 이씨 집안이 가새벌 뒤에 있는 산을 기증하고 신자들이 신부의 식량과 땔감 등을 조달하기로 결정하였다. 1929년 5월 25일 가새벌 공소는 이 지역의 행정 명칭을 따라‘지방리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초대 주임으로 목포 본당의 보좌로 있던 이성만(이냐시오) 신부가 임명되었다.
본당으로 승격되기는 하였으나 이 지역의 경제사정은 그리 넉넉하지 못하였다. 신자 몇이 말을 빌려 본당 신부를 모셔오기는 했으나 사제관도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성만 신부는 신자들이 제공하는 이불과 필요한 도구들을 가지고 임시 숙소에서 거처하였다. 이듬해인 1930년에 지방리 성당 옆에 사제관이 완성되어 본당 신부가 상주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됨으로써 완전한 본당의 틀을 갖추었다.
6. 금산 본당과 지방리 공소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세계 교회는 외국인 선교사가 포교의 주체가 되었던 시대를 벗어나 현지인 성직자들이 교회를 운영해가는 방향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한국 내에서도 한국인 주교와 자치교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이에 힘입어 1928년에는 황해도 감목대리구가 신설되어 김명제 신부가 감목대리로 임명되었다. 1929년 대구대목구에서도 전라도 지역을 분할하여 또 하나의 한국인 자치교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드망즈 주교의 건강 악화로 인한 대목구장의 부재로 2년 후에야 현실화되었다.
1931년 5월 10일 전라도 감목대리에 김양홍 신부가 임명되면서 이제 막 태어난 지방리 본당은 큰 변화를 겪어야만 했다. 전라도 감목대리구가 한국인 성직자들의 자치 구역이 되면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대부분 철수함에 따라 성직자가 부족해졌다. 한국인 성직자 15명만이 남게 되자 지방리 본당의 이성만 신부는 모본당(母本堂)인 되재로 전임되었고 그 결과 지방리 본당은 2년간의 짧은 기간을 뒤로하고 되재 본당의 공소로 환원되었다.
본당의 지위를 잃은 지방리 공소는 사회 변동과 더불어 본당으로 재승격되지 못하였다. 군청소재지였던 진산이 면으로 강등되어 금산군에 예속되었듯이 지방리 공소는 발전해가는 금산에 모든 것을 내어주어야 했다. 중요 기관들이 금산에 설립되고 대전-금산간 도로가 완수되어 교통, 행정, 문화 등의 중심이 금산으로 옮겨짐에 따라 진산 지역은 상대적으로 점점 작아졌다. 이것은 교회 안에도 영향을 미쳐 이 지역에 다시 본당을 신설할 필요성이 제기되었을 때 금산이 본당의 중심지로 선택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이미 일반화되어 가고 있는 추세였다. 박해시대가 마감된 직후에는 신자들이 많은 곳을 중심으로 사목이 이루어졌으나, 이후에는 교통의 요충지에 본당이 설립되고 그곳으로 신자들이 모이는 형태로 점점 바뀌었다.
금산 본당이 자리를 잡기까지는 지방리 신자들의 많은 희생이 있었다. 미래를 내다보고 금산에 본당이 설립되기는 하였으나 아직 중심의 역할을 할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금산 지역에는 이전부터 이렇다 할 공소가 없었다. 큰 공소는 모두 진산지역에 위치해 있었고 신자들도 대부분 그곳에 편중되었다.
공소의 신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철저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어려움 준다. 그 중 하나가 대축일의 미사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4대축일(부활, 성탄, 성령강림, 성모승천)에는 본당에 가서 미사를 참석해야 하는데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았다. 미사는 아침에 거행되는데다가 전날 자정부터 지켜야 하는 공심제 규정은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보통 대축일 전날 금산 본당 주변의 신자 집으로 쌀을 가지고 가서 하루를 묵으며 미사에 참석했다. 그러나 금산 본당 주변에는 신자도 많지 않은데다가 새로 영세한 신자들이 많아 방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금산 지역은 전주에서 이사해온 2~3세대의 신자들이 주축이 되어 발전하였다. 본당 설립 및 초창기의 발전에 김기봉, 전교회장인 이국연, 여자 전교회장인 송말다 등이 큰 활약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5년 1월에 금산읍 중도리에 성당 대지가 매입되고 6월에 되재 본당에 있던 이성만 신부가 부임해옴에 따라 금산은 본당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이 진산 지역에 있었던 만큼 많은 것을 지방리 공소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설된 금산 본당은 일반 건물을 매입하여 임시 성당 및 사제관으로 쓰고 있는 상태였다. 반면 공소인 지방리에는 1927년에 이미 완성된 성당도 있었고 사제관도 정식으로 갖추어져 있었다. 이런 이유로 본당 주임인 이성만 신부는 여름이면 지방리 공소에 와서 신자들과 어울려 휴가를 즐기곤 하였다. 본당 신부에게 식량과 땔감을 공급하는 일도 많은 부분 지방리 신자들의 몫이었다. 지방리 신자들은 정기적으로 땔감과 식량을 금산 본당으로 날라다 주었다.
6ㆍ25전쟁 이후 금산 지역에 신자들이 급속히 늘어나고 산업화로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떠나면서 신자들이 급감한 지방리 공소는 더 이상 본당의 중심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금산 본당이 설립되어 성장하기까지 모태의 역할을 한 지방리 공소는 다른 지역의 농촌 공소들처럼 점점 힘을 잃어갔다.
7. 나머지 이야기들
지방리 공소는 한 때 본당 신부가 오래도록 머물며 판공을 치르고 9대의 미사를 봉헌하는 큰 공소(아홉대 공소)였다. 각 구역별로 날짜가 배정되면 정해진 날에 신자들이 공소로 와서 찰고와 고해성사를 받았다. 급한 일이 있는 사람에 한 해서만 예외가 허락되고 대부분의 신자들은 정한 날을 꼭 지켜 판공을 치렀다. 지방리 지역 주민의 대부분이 신자이다 보니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영향을 받으며 살았다. 대표적인 것이 주일과 대축일의 파공이다. 공소 신자들은 파공을 꼭 지켰기 때문에 주일과 대축일에는 일꾼 구하기도 어렵고 품앗이도 되지 않아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파공일에는 일을 하기가 곤란하였다.
철저하게 지켜진 파공은 일제강점기 막바지에 이르러 작은 박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마을별로 도로 부역을 시킬 때에 파공 축일과 겹치게 된 경우 신자들은 부역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성탄절 날에 나와 부역할 것을 요구하였고 신자들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를 못 마땅히 여긴 순사들은 신자들의 집에 들어와 성물을 빼앗았으므로 일부 신자들은 성물을 숨기기도 하였다. 이런 사정을 안 본당 신부는 파공일이라 하더라도 부역의 경우에는 나가서 일할 것을 허락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형식적으로나마 미사나 공소예절 전에 황궁요배를 하는 것도 허락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지방리 공소는 일제에 의해 또 하나의 아픔을 겪었다. 전쟁을 위해 쇠붙이 헌납 운동이 강요되면서 공소에 걸려 있던 종도 그 대상이 되었다. 성모 마리아가 주보여서 성모상이 새겨져 있던 아름다운 종은 강제로 헌납되었다. 규모가 큰 본당의 경우 여러 가지 이유를 대거나 혹은 숨김으로써 헌납에서 제외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방리 공소에서는 저항하지 못하고 순사들이 정해 놓은 날에 가져다가 헌납해야만 했다. 몇몇 신자들에 의해 옮겨진 종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였다. 현재는 다른 종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6ㆍ25 전쟁 때에 지방리가 위치한 대둔산은 빨치산의 활동이 활발했던 곳이다. 지방리의 면소재지인 진산은 이들에 의해 지서가 불탄 적도 있었다. 진산면과 연산면의 경계가 되는 대둔산 자락에는 그때의 치열했던 싸움을 말해 주는 승전탑이 서 있다. 경찰관들이 빨치산을 상대로 싸운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지방리는 대둔산의 끝자락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이웃 마을인 두지리까지는 빨치산의 영향력이 미쳤으나 지방리는 비교적 피해가 적었다.
빨치산의 활동이 왕성할 때는 밤이면 노인들만 남겨두고 젊은 사람들과 여자들은 피신을 했다. 동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피신하여 밤을 새우고 새벽이 되면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일을 반복했다. 더 위험을 느끼면 대전 쪽으로 잠시 피난을 하기도 했다.
공소와 관련해서는 다소간 피해가 있었다. 당시 공소회장 집에는 본당에 보낼 쌀이 모아져 있었는데 빨치산들에게 빼앗겼다. 몇몇이 두서 말씩 나누어 가지고 갔다. 미사방울(미사 때 사용는 종)과 드망즈 주교가 승인한 공소설립 허가서도 6ㆍ25전쟁 중에 없어졌다.
지방리에는 오래된 장로교회가 하나 있다. 일찍이 신문학에 관심을 둔 유씨 집안을 중심으로 형성된 교회는 장대울을 중심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지방리 공소와 장로교회 신자들 간에 큰 갈등은 없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어서 그냥 보고 인사만 하고 지나치는 관계였다. 이들의 소원한 관계를 부드럽게 해 준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였다. 공의회 이후 교회일치 운동이 전개되면서 지방리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를 계기로 지방리 공소와 장로교회 간에 친선 체육대회가 개최되고 특별한 행사가 있을 경우 서로간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지방리에 장로교회가 설립된 지 90년이 되던 해에 지방리 공소회장은 내빈으로 초대되었다.
지방리 공소는 금산 본당에 부속된 공소이지만 지역사회와 행정기관 안에서는 단위 교회로 인정되었다. 대한적십자사에서는 매년 성금을 보내달라는 통지를 해왔고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종교 지도자 모임이 있을 때에 공소회장 역시 지역 교회 대표로 참석해야만 했다. 이러한 자리는 지역의 종교 지도자들과 교류를 갖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공소의 재정은 늘 넉넉지 못하였다. 현재 운영되는 교회 내에서 일반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헌금 제도는 70년대 이후에야 보편화되었다. 공소에서 사용되는 비용은 필요에 따라 거출하였다. 봄, 가을의 판공성사 비용이 가장 주요한 것이었는데 이것은 가정 형편에 따라 분담하여 거출되었다. 공소의 보수 및 유지에도 많은 비용이 들었다. 2005년의 경우 본당의 예산으로 공소를 수리할 수 있었으나 그 이전에는 공소 신자들의 모금으로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였다. 그도 모자라면 공소에 봉헌된 땅을 이용하였다. 이의규 회장에 의해 기증된 가새벌 뒷산에서 얻은 목재를 팔아 공소 수리에 이용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공소 수리를 위해서는 비용 마련도 중요하지만 노동력의 확보도 중요하였다. 예전에는 신자들이 노력봉사를 하여 일을 진행할 수 있었으나 젊은이들이 떠나고 신자들이 노령화되면서 노력봉사도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1980년대에 공소의 대대적인 보수가 진행될 때에는 대전지역 가톨릭 대학생연합회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현재는 매주 공소 예절 때마다 봉헌되는 헌금으로 공소의 비용을 충당하고 있다.
이의규 회장이 기증한 가새벌 뒷산에는 신자들의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신자들이 떠나가며 많이 파묘되었지만 여전히 특이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무덤들이 산비탈에 자리를 잡은 것이 아니라 정상에 오르는 능선을 따라 줄무덤의 형태로 되어 있다. 민간풍습으로 보편화된 풍수지리와, 산이 몹시 비탈져 등성이에는 묘를 쓰기가 부적합하기 때문에 이렇게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본래 어린아이들을 위한 무덤이 있었다. 어른들을 위한 무덤은 주변의 다른 산을 이용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산림법이 제정되어 통제가 이루어지면서 다른 곳에는 무덤을 쓸 수 없게 되어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는 여러 교우들의 무덤과 더불어 이씨 집안의 역대 회장의 무덤들이 있다. 여기에서 공소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이의규, 이예규 회장의 활동이 적혀 있는 묘비를 볼 수 있다.
비록 공소이지만 신자들이 많고 아이들도 많을 때는 성탄절을 맞아 공소에서 연극도 하였다. 그 많던 신자들이 떠나가고 외교인들이 이사를 와 지금은 여느 공소와 마찬가지로 노인들만이 있는 공소가 되었다. 2005년 현재 지방리 공소에서는 매주 10시에 회장의 인도로 공소예절이 거행된다. 매월 둘째 주일에는 본당 신부의 주례로 오후 3시에 미사가 있다. 지방리 공소는 본당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고 교통도 불편하여 자체의 공소예절이 허락된 곳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곳이 금산 본당의 모태가 되고,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성장한 지역에 설립된 공소라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지방리 공소는 신자들이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독립된 공소로서의 자리를 지켜가고 있다.
8. 맺음말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성장한 곳에 위치한 지방리 공소는 자연부락인 가새벌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 이후 진산 지역에는 신자들의 활동이 잠시 주춤하였으나, 고산지역에 흩어져 살거나 다른 지역에서 피난 온 신자들을 중심으로 재개되었다. 가새벌도 그 중 하나였는데 병인박해 이전부터 길게는 기해박해 전부터 몇몇 신자들이 이곳에 거주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김영삼, 1877년에는 동생인 김요한, 1878년에는 김춘삼이 가새벌에서 잡혀 순교하였다. 병인박해의 영향이 여전히 남아 있던 1876년에도 이곳에는 신부가 방문하여 공소를 치렀다. 1885년에 프랑스 선교사 죠스 신부가 방문한 이후 가새벌에서는 매년 공소가 치러졌고, 1910년을 즈음해서는 진산과 금산 지역의 중심이 되는 공소로 성장하였다. 공주로부터 이사해 온 이씨 일가의 활동은 이 공소의 성장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가새벌에는 일찍부터 공소가 형성되었으나 공소 건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16년에 이르러 첫 번째 공소 건물을 갖게 된 가새벌 공소는 신자 증가에 따라 새로운 건물을 필요로 하였다. 1927년에 새로운 부지에 건물을 지음으로써 현재의 지방리 공소가 마련되었다. 건물이 완성된 후 이의규 회장과 신자들은 본당 승격을 위해 노력하였고 그 결과 1929년에 초대 주임신부가 파견되었다. 그러나 1931년 대구대목구로부터 현재의 전주교구가 분리됨에 따라 성직자 부족으로 지방리는 다시 공소가 되었다. 이후 지방리에 신부를 파견할 것이 검토되었으나 금산에 그 자리를 양보해야만 했다. 군청소재지인 금산에 1935년에 본당이 설립되자 지방리는 관할 공소가 되었다. 공소였음에도 금산 지역보다 신자가 많고 기존의 성당과 사제관을 가지고 있던 지방리 공소는 금산 본당이 성장할 때까지 계속해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1963년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지방리 공소는 또 한 차례 변화를 겪었다. 전라북도에 속해있던 금산군이 충청남도에 편입되자 금산 본당을 대전교구에 편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전주교구의 결단에 의해 1980년 금산본당은 관할 공소와 더불어 대전교구로 이관되었다. 지방리는 현재 20여 호 정도의 신자들만을 가진 작은 공소이지만 그 역사적 가치로 말미암아 주목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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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언자 -
송영무(바오로) : 1928년 12월 21일 생(양력). 송순용의 아들. 2년간 공소회장.
정한규(시몬) : 1939년 생. 1968년 이후 현재까지 공소회장.
지방리 공소 안내문
■ 진산사건 사적지(史蹟地)
한국 천주교회 최초로 피의 증거자들이 탄생하는 계기가 된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있었던 곳을 흔히 전라도 땅으로 알고 있으나 바로 이곳이 진산이다. 진산(珍山)은 본래 전라도 땅이었으나 1963년의 행정개편으로 충청남도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진산사건은 1791년 윤지충(바오로)이 유교식 제사를 거부하여 발생한 사건을 말한다. 한국 교회 초창기부터 신앙을 받아들인 윤지충의 어머니 권씨 부인은 죽음을 앞두고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일은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1791년 5월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윤지충은 정성을 다하여 상례는 치렀으나 외종 사촌 형인 권상연(야고보)과 상의하여 유언에 따라 음식을 드리거나 신주를 모시는 등의 유교식 제사의식을 거행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당시 사회 안에서 폐륜의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체포령이 떨어지자 윤지충과 권상연은 진산 관아로 가서 자수하였고 전주에 있는 전라감영으로 압송되었다. 윤지충은 “만약에 제가 살아서건 죽어서건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하게 된다면 제가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증언하며 권상연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그들은 1791년 12월 8일에 전주 남문 밖(현재 전동 성당 부근)에서 참수로 순교하였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서남쪽 5.5km 인근에 있는 장구동(논산시 벌곡면 도산리 장고티)에서 태어났고, 지방리나 막현리 일대로 이주하여 성장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진산사건의 발단이 된 윤지충의 집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두 순교자의 고귀한 정신을 기억하며 이 자리에 기념한다.
■ 지방리 공소
진산사건이 발생한 후 이 지역에는 천주교가 잠시 주춤하였으나 새로운 신앙공동체들이 형성되었다. 지방리 공소는 그 중 하나이다.
지방리 공소는 본래 가새벌(지방2리 가사벌 마을. 동쪽 500m 사제관 있는 곳)에 있었다. 가새벌은 병인박해(1866년) 이전에 형성된 교우촌으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와 살던 곳이다. 병인박해가 시작된 이래 탄생한 세 명의 순교자가 가새벌 출신이다.
▶ 김영삼: 1866년 전주에서 순교(참수)
▶ 김 사도요한: 1877년 서울에서 순교(옥사). 김영삼의 동생
▶ 김춘삼(사도요한): 1878년 서울에서 순교(옥사)
박해가 끝난 후 가새벌에 큰 공소가 형성되자 초대 회장이 기증한 땅(현재 위치)으로 공소를 옮겼다. 1927년에는 교우들의 노력으로 성당(현재 건물)을 건립하고 그 해 11월 5일에 봉헌식을 가졌다. 이후 본당 유치에 적극 나서 1929년에 초대 주임 신부가 파견되어 지방리 본당으로 승격하였다. 그러나 성직자가 부족해지자 1931년에 다시 공소로 되었고, 이후 금산에 본당이 설립되면서 지방리는 계속 공소로 남게 되었다.
■ 진밭들 사적지
서쪽 2.2km 인근에 위치한 진밭들(금산군 진산면 두지리)은 긴 밭(長田)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박해시대에는 교우촌이 있었다.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일화가 있는 곳이다. 다음은 1856년 9월 13일에 최양업 신부가 쓴 편지의 일부이다.
“하루는 전라도 진밭들이라는 마을로 갔는데, 그곳은 얼마 전부터 거의 마을 전체가 교리를 배우며 세례 준비중이었습니다..... 제가 저녁나절에 신자 몇 명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한 다음, 아기 세례에 이어 대세받은 아기들에게 세례성사 보례를 집전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잠깐 눈을 붙였다가 닭이 울 때 일어나 미사를 드릴 예정을 하고, 영세 준비를 마친 어른 15명에게 세례성사를 집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백 명이 넘는 포졸들이 마귀 떼같이 몽둥이를 들고 쳐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제가 성사를 거행하고 있는 집을 둘러싸더니 미사 가방과 성작 등을 빼앗아 가기 위해 제가 있는 방까지 들어오려고 덤벼들었습니다...... 저는 몇몇 신자들과 함께 방 안에 있었는데 신자들의 도움으로 급히 미사 짐을 챙겨 들고, 뒤 창문으로 재빨리 빠져나와 캄캄한 밤을 이용하여 산 속으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저와 몇몇 신자들은 신발도 신지 못한 채 가시덤불 사이로 허둥지둥 이리저리 헤매었습니다.”(<<너는 주추 놓고 나는 세우고>>, 120-1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