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설
정지용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 들어
바로 초하로 아츰,
새삼스레 눈이 덮힌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하다.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롭어라.
옹송그리고 살아난 양이
아아 꿈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순 돋고
옴짓 아니기던 고기입이 오물거리는,
꽃 피기 전 철 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춥고 싶어라.
-<문장3호>(1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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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설
정환웅 해설
나 (시의 화자) 는 봄 날씨라고 생각하고 문을 열었다.
그랬더니 먼 산 꼭대기에 춘설이 내려 쌓여있다.
쌓여 있는 눈을 보니 내 이마가 다 차가워지는 것 같다.
시절은 2월 19일 아침인데
새삼스럽게 산꼭대기와
서늘하고 빛난 이마받이를 하고 있구나.
얼음에 금이 가고
봄 바람은 흩날리는 옷고름 모양의 고운 향기로
피어오르는 것 같구나.
지금껏 웅크리며 겨울을 보내며 살아온 것들이
옹송그리고 살아난 모습이
아아! 서러울 정도로 아름답구나.
미나리에 파릇한 새순이 돋고
움직이지 않던 고기가 입을 오물거리누나.
때늦은 봄눈이 내린 오늘
나 (시의 화자) 는 솜옷을 벗고
마지막 추위를 몸으로 맞고 싶다.
(설레는 마음으로 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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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정지용[ 鄭芝溶 ]
<요약>
1920년대~1940년대에 활동했던 시인으로
참신한 이미지와 절제된 시어로 한국 현대시의 성숙에 결정적인 기틀을 마련한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출생-사망 : 1902.6.20 ~ 1950.9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충북 옥천(沃川)
주요저서 : ≪정지용 시집≫, ≪백록담≫, ≪문학독본≫
<정지용의 삶과 활동>
1902년 6월 20일(음력 5월 15일) 충청북도 옥천(沃川) 하계리(下桂里)에서
약상(藥商)을 경영하던 정태국(鄭泰國)과 정미하(鄭美河)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연못의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태몽을 꾸었다고 해서 아명(兒名)을 지룡(池龍)이라고 하였고,
이름도 지용(芝溶)이라고 하였다.
가톨릭 신자로 세례명은 프란시스코(方濟角)이다.
9세 때인 1910년 옥천공립보통학교(지금의 죽향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12세 때인 1913년 동갑인 송재숙과 결혼했다.
17세 때인 1918년 서울로 올라와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하였다.
휘문고보에 재학하면서 박팔양 등과 동인지 ≪요람(搖籃)≫을 발간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교내 시위를 주동하다가 무기정학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1919년에 창간된 월간종합지 ≪서광(瑞光)≫에 ‘3인’이라는 소설을 발표하였다.
1922년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에 시작(詩作) 활동을 하였고,
휘문고보 출신의 문우회에서 발간한 ≪휘문(徽文)≫의 편집위원을 지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3년 휘문고보의 교비생으로 일본 교토[京都]의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대학에 다니던 1926년 유학생 잡지인 ≪학조(學潮)≫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 등 9편의 시를 발표하고,
그해에 ≪신민≫, ≪어린이≫, ≪문예시대≫ 등에 ‘다알리아(Dahlia)’, ‘홍춘(紅椿)’, ‘산에서 온 새’ 등의
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1929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뒤에는 휘문고보 영어과 교사로 부임하여 해방이 될 때까지 재임하였다.
1930년에는 박용철(朴龍喆), 김영랑(金永郞), 이하윤(異河潤) 등과 함께 동인지 ≪시문학≫을 발간하고,
1933년에는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김기림(金起林)·이효석(李孝石)·이종명(李鐘鳴)·김유영(金幽影)·유치진(柳致眞)·
조용만(趙容萬)·이태준(李泰俊)·이무영(李無影) 등과 함께 9인회를 결성하며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인물로 떠올랐다.
또한 그해에 새로 창간된 ≪가톨릭청년≫의 편집고문을 맡아 그곳에 다수의 시와 산문을 발표하였으며,
시인 이상(李箱)의 시를 소개하여 그를 문단에 등단시키기도 하였다.
34세 때인 1935년 그 동안 발표했던 시들을 묶어 첫 시집인 ≪정지용 시집≫을 출간하였으며,
1939년부터는 ≪문장(文章)≫의 시 부문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趙芝薰), 박두진(朴斗鎭), 박목월(朴木月), 이한직(李漢稷),
박남수(朴南秀) 등을 등단시켰다.
이 시기에는 시뿐 아니라 평론과 기행문 등의 산문도 활발히 발표했으며, 1941년에는 두 번째 시집인 ≪백록담≫을 발간했다.
이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그로 인해 사회 상황이 악화되면서 일제에 협력하는 내용의 시인 <이토>를 ≪국민문학≫ 4호에
발표하였지만, 이후 작품 활동을 중단한 채 은거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한국어와 라틴어를 강의하였고, ≪경향신문(京鄕新聞)≫의 편집주간으로 활동했다.
1946년 2월에 사회주의 계열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문학가동맹(朝鮮文學家同盟)의 아동분과 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그해에 시집 ≪지용시선(芝溶詩選)≫을 발간했다.
1947년에는 서울대학교에서 ≪시경(詩經)≫을 강의하기도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화여대 교수를 사임하고,
지금의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 초당을 짓고 은거하며 ≪문학독본(文學讀本)≫을 출간했다.
이듬해인 1949년 2월 ≪산문(散文)≫을 출간했으며, 6월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이 결성된 뒤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했던 다른 문인들과 함께 강제로 가입되어 강연 등에 동원되기도 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김기림(金起林). 박영희(朴英熙) 등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
이후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다가 사망하였다.
사망 장소와 시기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데, 1953년 평양에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북한에서 발행하는 ≪통일신보≫는 1993년 4월에 정지용이 1950년 9월 납북 과정에서 경기도 동두천 인근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발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