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현리 전투
먼저 사라진 군단장
인제에서 내린천이 흘러내리면서 이뤄진 비교적 넓은 땅이 현리 일대였다. 주변의 다른 지형이 강원도 특유의 산악과 계곡으로 이어지는 경우와는 조금 달랐다. 그러나 1951년 5월 17일 정오 무렵을 넘기면서 이곳은 이루 다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으로 가득 찼던 듯하다.
중공군과 북한군 공세에 밀려 철수해야 했던 국군으로서는 유일한 탈출구인 남쪽의 오마치 고개가 중공군 진지로 변해 있는 상황을 현리에 도착한 뒤 체감할 수 있었다. 결국 오마치 고개를 다시 확보하기 위한 공격의 채비를 다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북쪽에는 거대한 중공군 병력이 공격을 이어갈 기세였고, 남쪽은 좁은 고개를 중공군이 이중삼중으로 차단해 놓은 상태였다.
3군단을 이끌고 있던 유재흥 장군이 현리에 나타난 시점은 17일 오후 2시 무렵이었다고 국방부의 <6.25 전쟁사>는 소개하고 있다. 그는 예하 3사단장과 9사단장 등을 불러 작전회의를 열었다고 한다. 작전 목표는 오마치 고개 탈환이었다. 그 좁은 고개를 다시 뚫어 중공군 병력을 제거한 뒤 군단 전체의 안전한 철수를 도모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생각처럼 수월할 수는 없었다. 이미 30㎞를 이동한 중공군 20군 예하의 각 사단이 속속 이곳에 도착한 뒤였고, 현리에 모여들었던 한국군의 역량을 소멸시키기 위해 그들은 이미 고개 전면과 중심, 후면에 병력을 중첩적으로 배치한 뒤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3군단으로서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유재흥 군단장은 작전 경험이 상대적으로 풍부했던 3사단장 김종오 장군에게 작전의 지휘권을 위임했다. 그는 몇 가지에 달하는 작전 명령을 하달한 뒤 그날 오후 3시 30분 쯤 현리 내린천 주변의 간이 비행장에서 경비행기에 올라타고 하진부리의 3군단 전술지휘소로 복귀했다.
이 점은 뒤에서 다시 따져 볼 일이다. 군단 전체가 죽느냐 사느냐의 중요한 기로였다. 그럼에도 군단장은 먼저 그곳으로부터 빠져 나왔다. 잘 한 일일까. 아니면 비겁한 행동이었을까. 대부분은 유재흥 군단장의 처신을 커다란 문제로 삼는다. 그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리 전투의 최대 책임을 그에게서 묻는 사람도 있다. 그 점은 나중에 다시 적을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아무튼 3군단 전체의 운명이 걸린 다급한 상황에서 유재흥 군단장은 오마치 고개에 대한 공격 명령을 내렸다. 군단 전체의 철수 목표지는 창촌리였다. 그곳으로 다시 모여 다음의 작전을 도모코자 한다는 내용이었다. 9사단과 3사단에게도 비슷한 공격 명령을 내렸다. 9사단이 먼저 공격에 나서고, 그를 엄호하면서 3사단도 함께 이동한다는 내용이었다.
- 6.25전쟁 중 참호를 판 뒤 전투에 열중하고 있는 중공군.
아무리 생각해도 이는 엎질러진 물과 같았다. 수습을 하려고 해도 물은 이미 엎질러져 중요한 무엇인가를 적셔버리고 말았다. 사실, 이런 상황이라면 어느 누가 나서도 수습하기가 어려웠다. 중공군 공세에 밀려 허겁지겁 쫓겨 내려온 장병들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였을 것이다. 군단과 각 사단 지휘부의 정보 계통도 상황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나라면 그 때 어떻게 했을까. 자주 생각을 했던 대목이다. 나 또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여러 역량을 따져도 나 역시 그들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량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마음’이라는 측면에서 따져본다면 크게 아쉬운 부분이 하나 있다. 후퇴가 아니라 전진을 선택했으면 어땠을까 하느냐는 점이다.
군대는 아주 오랜 기간 전술과 전기(戰技)를 반복적으로 익히다가 우리의 생명과 안위를 위협하며 다가서는 적을 향해 나아가 싸우는 존재다. 그런 싸움에서의 커다란 전제가 바로 내 목숨을 던지는 일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움에 나서는 사람들이 바로 군인이다. 그런 원칙에 충실할 줄 알았다면 현리에서의 참혹하다 싶은 패배는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게 내 생각이다. 특출한 기개와 영웅적인 심리를 지니자는 것은 아니다. 그저 군복을 입었다면 적과 싸우다가 죽는다는 각오만큼은 있어야 했다는 얘기다. 60여 년 전의 현리 상황이 바로 군인으로서 목숨을 걸어야 할 때였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말처럼 쉬운 것은 없다. 아주 혼란스러운 상황을 지휘해 사기를 추스르고, 병력을 신속하게 재편하면서 거꾸로 적에게 맞서 싸울 만한 시간적 여유가 그 때 3군단장과 3사단장, 9사단장에게는 없었던 듯하다. 결국 그렇게 해서 국군의 참패는 현실로 나타나고 만다. <②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