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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ㆍ영해지역 유적답사 - 의병사(義兵史)에 길이 빛날 도해단(蹈海壇)
2013. 5. 4 영덕군 영해면 대진리(慶尙北道 盈德郡 寧海面 大津里) 대진해수욕장 근처에는 구한말 구국 항일의병활동(抗日義兵活動)을 펼쳤던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 선생을 추모하는 도해단(蹈海壇)이 있다.
도해단 위치안내도
‘도해단(蹈海壇)’이란 이름을 처음 들어보고 이름도 생소(生疎)하다. 단(壇)의 뜻은 제단(祭壇)을 의미 한단다.그러니까 도해단(蹈海壇)은 김도현(金道鉉, 1852-1914) 선생을 추모하는 제단(祭壇)을 일컫는 이름이다. 단(壇)은 죽은 사람의 찾을 수 없거나, 입향조(入鄕祖)나 한 가문에 시조(始祖)무덤이 없을 때 단(壇-祭壇)을 만들어 놓고 조상의 은덕을 추모는 행사를 한단다.
대진리 도해단 근처의 바다 -1
대진리 도해단 근처의 바다 -2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 선생은 영양군 청기면 소청리에서 출생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사건(弑害事件)을 계기로 사재(私財)를 들여 의병을 일으켰고, 그는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1842-1910)와 함께 영덕·안동·청송·의성 등 경북 동북부 일대에서 맹렬(猛烈)히 의병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을사조약(乙巳條約) 체결에 반대하기 위해 다시 비밀리에 의병을 일으켰다가 일제에 체포, 한일합방(韓日合邦)에 대한 울분으로 대진 앞바다에 투신(投身) 순국(殉國)한 의인(義人)이었다.
도해단 전경 순국지사들은 자신을 깨끗이 간직한 채 운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택했다. 각자 처지와 입장에 따라 단식, 음독, 할복, 권총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결 순국하였다. 이들 가운데 김도현(金道鉉) 의병장은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특이한 사례를 남겼다. 이른바 ‘도해(蹈海)’, <걸어서 바다 속으로 들어가> 순국했던 것이다.
도해단
1910년 국권을 상실하게 되자 순국의 뜻을 품었고 부친의 장례를 마친 뒤 산수암(汕水巖)에서 절명시(絶命詩)를 짓고 도해(蹈海)를 결행하였다. "바다에 빠진 시신을 수습하여 염(殮)하는 것은 뜻에 어긋나는 일이니 그렇게 하지 말라" 가족에게 일렀다한다. 그 날이 1914년 12월 23일(음 11.7) 동지로, 그의 나이 64세 때였다. 벽산선생은 순국 전날 대진 산수암(汕水巖)에서 지은 절명시(絶命詩)가 새겨져 있어,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도해단과 순국의인 김도현에 대해 해설하는 관선서당 송희준 박사
산수암
산수암(汕水巖) 절명시(絶命詩) 我生五百末 赤血滿空腸 오백년 말에 태어나 붉은피 빈 가슴속에 가득하네. 中間十九載 鬚髮老秋霜 중년의 19년동안 머리카락만 늙어 가을서리 내린 듯 하네 國亡漏未己 親沒心更傷 나라가 망함에 눈물은 하염없으며 어버이 여의니 마음 또한 아파라 獨立故山碧 百計無一方 홀로 선 옛 산은 푸른데 온갖 계책 헤아려도 아무른 방책이 없네. 萬里欲觀海 七日當復陽 만리길에 바다를 보고자 하니 이례가 마침 동짓날이라 白白千丈水 足吾一身藏 희디힌 저 천리길 물속 내 한 몸 넉넉히 간직할 만 하여라
이러한 벽산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영남유림이 1915년에 도해단과 도해비를 건립하였으나 일제시대 때 붕괴되어 1971년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친히 ‘千秋大義’라는 휘호와 함께 도해단을 복구하였다. 이에 영덕군이 50평의 규모로 제단을 확장하고 안내비(案內碑)를 설치하는 등 도해단 확장사업을 시행해서 ,매년 벽산선생의 생신일(음력 7월 14일)에 (絶命詩) 행사를 개최해오고 있다고 한다.
<천추대의>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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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영덕과 영해지방에서 신돌석 장군과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 선생 등 구국 의병 활동을 한
애국지사가 많았는 사실, 공부할 자료를 주셔서 무한 감사합니다.
도해단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줘서 고마우이....
요새 쪼매 바빠서 댓글만 잠깐 달고 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