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합천 반남박씨 박소 묘(인물이 나려면 三代가 필요하다)
1 반남박씨 문강공(文康公) 야천(冶川) 박소(朴紹)의 가계
* 반남박씨는 고려 반남호장 박응주를 시조로 하고 인구16만명(2015년)이다. 조선조 문과급제215, 상신7, 대제학2, 왕비2명을 배출했다.
반남박씨대종중은 13세를 기준으로 27개 소종중을 공인하는데 11세손 박소의 후손은 14개 소종중을 결성하고 있고 후손중 조선조에서 문과급제127, 상신6, 대제학2, 왕비2명등을 배출하여 대종중의 인물 대부분이 박소의 후손이다.
* 문강공 박소의 계대(系代)를 보면, 판전교신사 박상충(朴尙衷)은 3子를 두었는데 2남 박은(朴訔, 1370~1422)은 태종과 의기투합하여 두차례의 왕자난에 공을 세우고 좌의정 겸 판리조서를 역임하고 반남군, 금천부원군에 봉해졌다. 박은이 반남면에 세거하였고 반남군에 봉해진 연유로 비로소 반남을 본관으로 삼았다. 박은의 6세손(시조의11世孫, 代로 계산하면 10대손) 박소(1493~1534, 부친은 이조정랑 兆年, 어머니는 파평윤씨)는 중종때 사간으로 재직중 김안로에게 탄핵당하여 경남 합천에 있는 외가 윤씨집으로 피난하였다. 박소에게는 5남2녀가 있었는데 문과급제2명, 사마시3명이 합격하고 손자 17명과 함께 모두 출세를 하였다. 사람들이 아들5명과 손자17명을 5応 17東이라 불렀다.(김환수 다음스토리 참조) 13세기준 소종중은 총27개중 박소의 후손이 소종중 시조로 되어 있는 14개파를 보면, 박소의 차남과 다섯째가 각기 1개씩, 장남 박응천의 6子가 1개씩, 셋째 남일공의 두 아들이 1개씩, 넷째 졸헌공의 네명 아들이 1개씩 총합계 14개의 小宗派를 차지하고 있다. 박소의 후손들이 폭발적 성장을 하게 되는 시발점은 박소의 5子인데 어머니 홍씨가 孟母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훌륭하였다고 한다.
* 12세 장자 박응천(1516~1581, 사재감정)---13세 박동헌등 6형제가 각기 소 종중 시조
12세 차남 박응순(반성부윤공)---소종중 시조, 딸이 선조비 의인왕후, 묘는 남양주 일패동산35-13
12세 3남 박응남(남일공)---대사헌, 13세 2명의 아들이 각기 소종중시조, 묘는 의왕시 학의동 산87(여러 후손들 묘와 함께 있다)
12세 4남 박응복(졸헌공)---대사헌, 13세 4명의 아들이 각기 소종중시조, 박동량 박세채 박세당등 배출
12세 5남 박응인(도정공)---소종중시조
2. 박소 묘의 소점과 부인 홍씨의 자식교육
박소는 합천으로 피난와서 4년뒤 卒하였는데 부인 홍씨는 남편의 친구 李光이 소점한 곳(박동량의 기재잡기 참조)에 남편을 묻고 어린 자식들(19세 내지 2세)을 데리고 한양으로 올라가 친정 아버지 홍사부의 도움으로 자식들을 좋은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게하여 두명은 장원급제하고 세명은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홍씨부인은 40세에 과부가 되었으나 자식들을 잘 기른 덕에 진수성찬을 받으시고 85세에 卒하여 남양주시 일패동 자좌오향 언덕에 묻혔다가 남편 곁으로 이장되었다.
박소의 묘지에 관하여 친구 이광의 소점설외에도 “윤씨들은 야천의 아이들이 어려서 운구를 할 수 없음에 불쌍히 여겨 우거하던 집뒤 해좌 언덕에 장사지냈다(합천화양동 병사기 참조) 또는 화양리 괘산에 외조부 윤자선과 나란히 묻혔다는 설”이 있다. 재사를 건축하면서 작성한 丙舍記(병사는 묘지관리인용 건물을 말한다)의 내용이 정확할 것이다. 화양재가 1793년(정조17년) 건립된 것으로 보아 2백년 가까이 무연고 묘처럼 방치된 것이 아닐까? 박소 묘 위에 있는 묘는 고령박씨이다
3. 답사
* 반남박씨대종중 묘역은 인천서구대곡동산151-1에 있고 그 밖에 소종중 묘역이 각지에 있다. 이곳 경남 합천군 묘산리 화양리 산53에는 위로부터 11세 문강공 박소, 12세 감정공 박응천, 13세 활당공 박동현 즉 박소의 종손3대가 묻혀 있는 것이다. 박소의 5子(応字 항열이다)가 발복의 시발점인데 다수는 이곳을 발복처라고한다. 손자17명(東字 항열이다)이하 후손의 발복에대한 검토는 생략한다.
* 박소 묘역---박소묘는 원래 단독으로 조성되었고 부인 홍씨와 장남 박응천은 남양주 일패동에 있었는데 홍릉(명성왕후 묘) 조성으로 1900년 이곳으로 옮겨 부인 묘는 합장하고 박응천 묘는 박소 묘 아래에 이장하였다. 1989년 부인 묘(김씨와 신씨가 있다)를 박응천 옆에 쌍분으로 이장하였다. 맨 아래 박응천의 장남 동현(김씨의 소생) 묘인데 아마도 이장해온 것이라 추측된다.
* 박소 묘 앞에서 위로---곡장 뒤의 묘는 박소와 무관한 고령박씨
* 박소 묘---뒤에서 앞으로 본 모습
* 박응천 쌍분---넓고 급하게 내려오다가 와(窩)로 자리 잡았다. 변화가 있는 곳으로 생기가 감지되었다. 그러나 1900년경 4백년 지난 묘를 이장해온 것이므로 유골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 박소 묘는 많은 사람들이 조선백대 명혈로 칭찬하지만 생기가 없다는 부정적 견해도 적지않다. 혈을 맺기전에 잘룩하게 묶어주는 속기 결인이 있거나 혈장에 선익이 있다든지 두뇌가 확실하다든지 하는등으로 변화가 있어야 생기가 가득차게 된다. 이곳은 청룡이 없다시피 하였고 오른쪽 당판을 석축으로 높이 쌓아 조화롭지 않다. 박소 묘는 결혈지가 아니고 박응천 묘가 중등중급 혈이며 맨아래 박동현 묘는 차혈이다
4. 인물이 나려면 3대가 필요하다.
* 재물은 벼락부자가 가능하지만 인물을 배출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예부터 인물은 3대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첫 代는 부모나 조부모를 좋은 곳에 안장하고 혼처를 타도(他道)사람으로 구하여 좋은 유전자를 가진 2세를 만들고 1, 2대는 자식을 뒷바라지 할 재산을 모우고 2대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처를구하여 우수한 자질을 가진 3세을 낳아서 좋은 교육을 시켜야 인물이 된다는 것이다.
* 박소 후손의 발복은 걸출한 다섯 아들의 출현이 시발점이 되었고 그 전 단계로 다섯 재목을 출산하게 하는 발복처는 어디인가? 박소의 부모부터 소급하여 5~6대까지 추적해 보아야된다. 박모 풍수는 이곳은 기운이 없는 곳이라 단정하고 박소 선조의 집장지인 인천 대곡동 반남박씨 묘역을 답사한 끝에 박소의 모친 유씨 묘가 명혈로서 발복처라고 주장한다. 지도로 검토해보니 집장지는 연화도수(경사가 급한 경우) 또는 연화부수(경사가 완만한 경우)형으로 명혈이 맺힐 가능이 높다. 선조중 고위직에 오른 박은의 묘가 어떤지 궁금하다.
5. 결론을 말하자면 박소 묘는 혈이 맺히지 아니한 곳이다. 그러나 묘소에 올라가서 보면 풍광이 아름답고 무게가 있다. 10만명의 후손이 향불을 끊이지 않고 올리는 만년향화지지(萬年香火之地)로 손색이 없다. (20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