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申具罰酌(신구벌작)
申:펼 신, 具:갖출 구, 罰:벌할 벌, 酌:잔질할 작.
어의: 신숙주와 구치관이 벌로 술을 마신다는 말로, 세조가 신숙주와 구치관 두 정승들과 술자리에서 희롱했던
고사에서 유래했다. 이러나저러나 결과는 마찬가지라는 의미로 쓰인다.
문헌: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고령사람으로 호는 보한재(保閑齋), 벼슬은 세조(世祖) 때 예문관 대제학(大提學), 영의정을 지냈고, 고령군高靈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1443년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시명(詩名)을 떨쳤으며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세종(世宗)을 도와 한글을 창제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또, 구치관(具致寬. 1406~1470)은 본관이 능성(綾城)으로 세조가 등극하는데 공을 세워 영상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구치관이 새로이 우의정에 임명되어 신(新) 정승이 되니, 신숙주는 구(舊) 정승이 되었다.
세조가 신(申), 구(具) 장승을 불러 주연을 베풀며 말했다.
“경들에게 물러볼 것이 있소. 대답을 잘하면 그만이지만 잘못하면 벌주를 마시기로 합시다. 먼저 신(新) 정승!”
세조가 새로 임명된 신(新) 정승을 불렀다. 그러나 신(申) 정승이 자기를 부르는 줄 알고 대답했다.
“예.”
세조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신 정승을 불렀는데 신 정승이 대답했으니 실수요. 자, 약속대로 벌주를 받으시오.”
세조는 신(申) 정승에게 벌주 한 잔을 주었다. 그리고 또 두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
“구(舊) 정승!”
이번에는 신(申) 정승을 불렀는데 구(具) 정승이 대답하니 세조가 말했다.
“나는 구(舊) 정승을 불렀소. 그런데 구(具) 정승이 대답했으니 또 벌주요.”
하여 구 정승도 벌주를 마셔야 했다. 이렇게 반복되는 신구벌작(申具罰酌)으로 세 사람 모두 대취하며 즐거워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申之婦德(신지부덕)
申:펼 신, 之:어조사 지, 婦:며느리 부, 德:큰 덕.
어의: 신 즉, 신사임당 부인의 덕망이라는 말로, 신사임당에게서 유래했다. 여자가 지녀야 할 모범적인 덕행을
빗대어 쓴다.
문헌: 율곡전서(栗谷全書)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은 강원도 강릉(江陵)의 북평(北平) 오죽헌(烏竹軒)에서 신명화(申命和)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학문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았으나 벼슬을 탐하지 않아 진사(進士)에 머물렀다. 사임당의 어렸을 적 이름은 인선(仁善)이었다.
그녀는 경문(經文)과 문장, 바느질과 자수에 이르기까지 두루 뛰어났다. 또 일곱 살 때부터는 안견(安堅)의 화법을 배워 산수도(山水圖)와 포도화(葡萄畵) 같은 정물화를 많이 그렸다. 성인이 되자 여성적인 섬세함이 무르익어 한시(漢詩)에도 능하여 감히 따를 자가 없었고, 붓글씨 또한 일가를 이루었다.
그녀의 화재(畵材)는 주로 꽈리와 잠자리, 수박과 석죽화, 가지와 벌과 나비, 오이와 개구리, 범부채와 매미, 바위와 도마뱀, 도라지꽃과 여치 등 대부분 꽃과 과일, 그리고 풀벌레 등이었다.
신사임당의 나이 열아홉이 되자 여러 곳에서 청혼이 들어왔다. 그녀의 아버지는 한양에 사는 스물두 살 난 이원수(李元秀)라는 청년을 사위로 맞기로 했다.
이원수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을 한 명문가였으나.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깊은 학문을 익힐 수가 없었다.
사임당은 결혼을 하자마자 아버지 신명화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관습대로 3년상을 마치고 시집이 있는 한양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맏아들 선(璿)에 이어 모두 4남3녀를 낳았다.
그녀는 자녀들의 교육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했다. 특히 3남 이이(李珥. 율곡(栗谷)는 세 살 때 문자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여덟 살 때는 한시를 지었다. 13세 때에 진사 초시(初試)에 급제했고, 그 후 아홉 번이나 급제하여 구도장원(九度壯元)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원수는 성격이 부드럽고 욕심이 없는 효자(孝子)였다. 그러나 쓰고 읽는 일은 아무래도 아내만 못했다. 그래서 사임당은 남편이 보는 데서는 책 읽는 것도 삼갔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시조를 지을 때도 한밤을 택했다. 또 자식들이 무엇을 물어보면 으레, 이렇게 말했다.
“그런 건 너희 아버지께서 더 잘 설명을 해주실 게다.”
하며 남편의 권위를 살려주기 위해 노력했다. 집안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도 그것이 아무리 급한 일일지라도 남편의 말이 떨어지기 전에는 절대로 행하지 않았다. 그만큼 남편에 대한 내조(內助)도 지혜롭고 현명하게 했던 것이다.
남편 이원수는 덕수(德水) 이(李)씨였는데 그의 문중에는 영의정을 지내고 있는 높은 분도 있었다. 하여 이원수는 혹 벼슬을 얻을까 해서 가끔 영의정 댁을 방문하곤 했다. 이를 눈여겨 본 사임당은 조용히 남편에게 충고했다.
“주제넘은 말씀을 드리는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만 그분 댁 방문은 삼갔으면 합니다.”
“허허, 집안 형뻘 되는 분인데, 출입하는 게 뭐가 어째서 그러는 거요?”
“집안 어른 찾아뵙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영감께서 혹 벼슬자리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게 아닌가 해서입니다. 그 어른이 지금은 높은 자리에 계시지만 아첨하는 자들에 둘러싸여 지내는 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원수는 아내의 말을 듣고 그 다음날부터 그 집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 후 얼마 가지 않아 사임당의 말은 사실로 나타났다.
당시 조정은 소윤(小尹), 대윤(大尹)으로 갈려 치열한 당파싸움을 벌이다가 명종(明宗)이 즉위하던 1545년, 소윤의 윤원형(尹元衡)이 대윤의 윤임(尹任) 일파를 몰아내느라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일어났다. 기묘사화(己卯士禍)였다.
이 사건으로 당시 영의정과 그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귀양살이를 갔다. 그러나 이원수는 아내의 충고를 받아들여 교류를 끊은 덕분에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남편이 할 일과 아내가 할 일을 자로 재듯이 엄하게 구별했던 사임당이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제시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남편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했던 것이다.
그녀는 단군 이래 가장 위대한 어머니로 남편에게는 현숙하고, 자식들에게는 엄하고, 자애로운 어머니였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身土不二(신토불이)
身:몸 신, 土:흙 토, 不:이니 불, 二:두 이.
어의: 몸과 흙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말로, 우리 땅에서 나는 농작물이 우리 몸에 잘 맞는다는 뜻으로 쓰인
다. 불이(不二)란 ‘둘이 아니고 한 가지’ 라는 의미로, 서로 연결되어 같은 기운을 받는다는 뜻이다.
문헌: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조선시대 의서(醫書)인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의 서문에는 ‘기후와 풍토 그리고 생활풍습은 같다.’ 고 했고,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사람의 살은 그 사람이 살고 있는 땅의 흙과 같다.’ 고 했다.
원(元)나라의 보도법사(普度法師)가 펴낸<노산연종보감>의 게송(偈頌 :부처님 공덕을 찬미한 노래) 중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글에서는 ‘몸과 흙은 본래 두 가지 모습이 아니다.’ 라고 했다. 또 ‘신시불이(身時不二)’라는 말도 있는데, 그 뜻은 ‘사람의 몸과 그 시절에 나는 음식은 둘이 아니다.’ 라는 말이다. 즉 제철에 나는 곡식과 채소, 그리고 과일을 먹어야 몸에 좋다는 뜻이다.
조선 인조(仁祖) 때의 학자 이수광(李睟光.1563~1628)은 이렇게 말했다.
“하늘은 움직임(動.동)을 주관하고, 땅은 고요함(靜.정)을 주관하며, 사람은 동(動)과 정(靜)을 주관한다. 그러므로 하늘은 땅을 겸할 수 없고, 땅은 하늘을 겸할 수 없으나 능히 겸할 수 있는 자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하늘은 사람의 부모요 땅 또한 사람의 부모다. 따라서 몸을 공경하지 않는 것은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사람이 그 몸을 공경하는 것은 하늘과 당천지를 공경하는 것이다.”
이는 곧 자연이 나고, 내가 곧 자연이라는 말이다. 즉 자연과 내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이다.
물아일체(物我一體)라는 말은 정신적인 경지를 이르는 말인 데 비하여 신토불이(身土不二)는 물질적인 상황을 이른다.
실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지형, 풍토, 인심 등의 자연 환경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자연과 사람과의 환경이 좋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풍수지리설을 응용한 택리지는 그런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생명체란 살아있는 세포의 거대한 조직체인데 성질이 다른 물체가 들어오면 거부반응을 나타내게 된다.
따라서 익숙한 환경의 물체가 아닌 새로운 이질적인 환경을 만나게 되면 기능이 저하되기 때문에 방해를 받아 병을 일으킬 수 있다.
신토불이는 전통적인 식생활, 즉 현실적인 물질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그러므로 사람은 각자의 체질에 맞는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신토불이의 실행법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信厚眞友(신후진우)
信:믿을 신, 厚:두터울 후, 眞:참 진, 友:벗 우.
어의: 믿음이 두터워야 진정한 친구다. 한 평범한 선비가 자식을 훈육했던 고사에서 유래했으며 진정한 친구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우쳐 주는 교훈이다.
문헌: 한국오천년야사(韓國五千年野史)
조선 제21대 영조(英祖) 때 전라도 부안(扶安) 단산(丹山) 고을에 김재곤(金在坤)이라는 선비가 남부럽지 않은 재산을 지니고 살았다. 그는 늘그막에 아들 하나를 얻게 되었는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이마가 시원스러워 이름을 용진(容珍)이라고 불렀다.
용진이는 친구 사귀기를 몹시 좋아해서 많은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와 놀곤 했다.
아버지 김재곤은 아들이 친구들과 즐기는 것을 굳이 탓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아무나 가리지 않고 사귀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어느 날, 아들을 불러 넌지시 물었다.
“용진아, 넌 오래된 친구가 많으냐, 새로 사귄 친구가 많으냐?”
아들이 대답했다.
“속담에 옷은 새것이 좋고 사람은 옛사람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오래된 친구들과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럼, 벗을 많이 사귀는 게 좋으냐, 아니면 적지만 깊게 사귀는 게 좋으냐?”
“사귀는 수효가 중요한 게 아니라 믿을 수 있는 벗이 몇이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사귀는 벗들은 모두 마음으로 믿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진실한 벗들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믿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야 많을수록 좋겠지, 그런데 이 아비는 친구가 하나 밖에 없다. 나에 비해 너는 너무 많은 친구를 사귀는 것 같더구나. 작은 고욤(크기가 작은 품종의 감) 일흔이 왕감 하나만 못하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
그러자 아들이 자신에 찬 눈빛으로 아버지에게 말했다.
“부처님이 살찌고 빼빼 마른 것은 석수한테 달렸지요. 저는 벗들에게 진심을 주고 있기 때문에 그들도 제게 진심을 주고 있다고 장담합니다. 미덥지 못하시다면 한번 시험을 해보시지요.”
“그래? 그렇다면 이렇게 해보자꾸나!”
아버지는 뒤뜰로 나가 큰 자루에 짚다발을 우겨 넣고는 그걸 지게 위에 얹었다.
“오늘 날이 어둑어둑해지거든 이걸 지고 네가 가장 믿는 친구를 찾아가 이렇게 말해 보거라. ‘친구. 내가 어쩌다가 그만 사람을 죽이게 되었는데 좀 숨겨줄 수 없겠는가?’ 그러고 나서 그 친구의 태도를 살펴보란 말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대로 그동안 가장 친하게 지냈다고 생각하는 친구를 찾아가서 아버지가 일러준 대로 했다.
친구는 그 말을 듣자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가 오래 사귄 벗이니 자네를 관가에 고발하지는 않겠네만 자네를 숨겨 줄 수는 없네.”
그러고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꽝’하고 대문을 닫더니 빗장까지 단단히 지르는 것이었다.
돌담 뒤에 숨어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아버지는 풀이 죽어 있는 아들을 보고 말했다.
“얘야, 실망할 것 없다. 넌 친구가 여럿 있으니 다음 친구를 찾아가 보자꾸나.”
아들은 허탈한 마음을 쓸어내리며 또 다른 친구의 집으로 갔다. 그러나 이 친구도 아까와 마찬가지로 쌀쌀하게 거절했다. 아들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숨을 헐떡거렸다.
아버지는 아들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지게를 내려놓게 했다.
“그럼 어디 이번에는 내 친구에게로 가보자.”
별빛이 총총한 그믐날 밤,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친구 집에 이르러 황급하게 대문을 두드리자 한 사람이 대문을 열고 나왔다.
“아니 한밤중에 자네가 웬일인가?”
“잠을 깨워 미안하네만 내 아들이 말다툼을 하다가 그만 사람을 죽였다네, 좀 숨겨줄 수 없겠나?”
“아이고 어쩌다가 그런 일이……, 아무튼 어서 안으로 들어오게.”
친구는 국을 뜨겁게 끓여 음식을 내왔다.
“그 경황에 어디 저녁이나 들었겠나, 우선 따뜻하게 국물이나 좀 드시게, 참. 술 한 잔 하겠는가?”
아버지는 술 한 사발을 들이켜고 나서 아들을 돌아보았다.
“보았느냐? 진정한 우정이란 이런 것이란다.”
그러자 아버지의 친구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아버지는 친구에게 정중히 사과하며 말했다.
“내가 자네의 우정을 시험한 꼴이 되어 미안하네. 사실은 내 아들이 친구를 사귀는데 아무나 함부로 사귀는 것 같아 진정한 친구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려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 큰 결례를 해 미안하네.”
그러고는 아들을 보고 말했다.
“가는 길이 멀어야 타고 가는 말의 힘을 알 수 있으며, 사귄 지 오래되어야 벗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 사귀었어도 그 속에 믿음이 없으면 그건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없지 않겠느냐? 벗과 벗 사이에는 진정한 믿음이 있어야 진정한 친구니라.”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失期恥命(실기치명)
失:잃을 실, 期:때 기, 恥:부끄러울 치, 命:목숨 명.
어의: 때를 놓치면 목숨이 수치스럽다. 신라 원술랑(元述郞)의 고사에서 유래했으며, 어떤 일을 실행하는 시기
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는 말이다.
문헌: 삼국사기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자 660년, 당(唐)나라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을 조직하여 신라군은 육로로, 당군은 해로로 백제를 협공하였다. 협공으로 7월10일, 수도 사비성(泗泌城)이 함락됨으로써 백제는 결국 멸망했다. 그러나 신라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나라는 백제에는 부여륭(夫餘隆)을 도독으로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660년)를, 고구려에는 설인귀(薛仁貴)를 도독으로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668년)를 두어 백제와 고구려를 완전히 점령하려고 획책했다. 그래서 신라는 전날의 동맹국이었던 당나라와 싸워야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한편 고구려 백성들도 국권을 회복하고자 여기저기서 저항 운동을 벌였다. 신라 문무왕(文武王) 10년(670년) 4월에는 고구려의 검모잠(劍牟岑)이라는 장수가 고구려의 재건을 선언하고 나섰다.
그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조카 안승(安勝)을 왕으로 옹립하고,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
“우리는 당나라를 물리치고자 할 뿐 신라와는 아무런 유감이 없소. 그러니 양식과 일용품을 보내 우리를 도와주기 바라오.”
신라는 즉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한편, 더 나아가 전략적 요충지인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 지방인 금마 땅을 제공했다. 고구려 백성의 환심을 사야 장차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계산했던 것이다.
당나라가 그 일을 알고 신라에 항의를 했지만 신라는 모르는 일이라고 시치미를 떼었다.
문무왕은 14년(674년)에 조카딸을 안승에게 시집보냈다. 이로써 고구려 유민과 신라는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당나라 황제는 크게 노했다.
“신라가 등을 돌렸으니 이를 내버려 둘 수가 없다.”
마침내 신라와 당나라는 곳곳에서 충돌했다.
문무왕은 백제 땅에서 당나라를 쳐 가림성(加林城)을 탈환했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백제의 옛 도성인 사비성마저 빼앗고 군량미를 운반하는 당나라의 배 70척을 침몰시켰다. 이때 수장된 당나라 군사가 수천 명이었다. 그러자 당나라 고종도 4만의 군사를 보내 신라를 치게 했다.
당나라 대군은 두 패로 나누어 안시성(安市城)과 마읍성(馬邑城) 근처에 진을 쳤다. 신라에서는 선봉장으로 효천(曉天) 대장군을 비롯하여 의문(義文), 산세, 능신, 원술(元述) 등의 장수들을 보내 대적하게 했다. 원술은 김유신(金庾信) 장군의 둘째 아들이었다.
신라군은 석문(石門) 평야에서 당나라 군사와 일전을 벌였다. 평야에서의 싸움은 보병보다는 기병의 싸움인데 신라군의 말은 작아서 산악지대에서는 유리하지만 평야에서는 몸집이 크고 힘이 센 당나라 말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신라군은 밀리기 시작했다. 효천 장군은 당나라 군사가 쏜 화살을 가슴에 맞아 전사하고, 의문과 산세 또한 적군의 말발굽에 밟혀 죽었다. 능신 역시 적의 칼에 쓰러졌다. 신라군의 완전한 패배였다. 살아남은 장수는 원술 하나뿐이었다.
원술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자고 했으나 그의 부하 담릉(淡凌)이 한사코 말고삐를 놓지 않고 말리는 바람에 죽지 못하고 살아 돌아왔다.
김유신은 문무왕에게 아들 원술을 석문 싸움에서 패한 죄를 물어 사형에 처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왕은 다음 기회에 공을 세우게 하여 이번의 수치를 벗도록 하자며 만류했다. 김유신은 끝내 아들을 집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지고 돌아온 놈은 내 자식이 아니다.”
원술은 크게 탄식했다.
‘화랑도의 계율에 싸움에 임하면 절대로 물러서지 말라고 했거늘, 그것을 지키지 못한 이 수치스러운 몸을 어떻게 씻는단 말인가.’
원술은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해 태백산(太白山)으로 들어갔다.
문무왕 13년인 서기673년 7월, 신라의 큰 별 김유신이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문무왕은 크게 슬퍼하며 비단 1천 필, 벼 2천 섬, 악사 1백 명을 보내 김유신의 장례를 치르도록 했다.
원술은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어머니 지소(智炤)부인은 냉정하게 말했다.
“내겐 싸움에서 지고 돌아오는 자식은 없다. 그러니 집에 들어올 생각을 말아라.”
원술은 가슴을 치며 다시 태백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슬프도다. 내 어찌하여 그때 죽지 못했던고, 나를 말린 담릉이 너무도 원망스럽구나!”
김유신의 장례가 끝난 얼마 후 당나라가 신라의 북쪽으로 침략해 왔다. 원술은 왕을 찾아가 간청했다.
“석문싸움에서의 수치를 벗게 하여 주시옵소서.”
문무왕은 원술의 뜻을 선뜻 받아주었다. 싸움터로 나간 원술은 성난 호랑이처럼 닥치는 대로 적을 무찔렀다. 그 싸움에서 신라는 적으로부터 말 3만 필을 빼앗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문무왕은 원술에게 다시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원술은 그를 사양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나 오고 싶었던 집이던가, 이젠 떳떳이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집에 와 보니 어머니는 중이 되어 절로 떠나 버리고 없었다. 원술은 꿈에 그리던 어머니를 뵙지 못하고 흐느껴 울며 다시 태백산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몇 해 뒤에 혼자서 슬쓸히 죽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心通酒酌(심통주작)
心:마음 심, 通:통할 통, 酒:술 주, 酌:따를 작.
어의: 마음이 서로 통하면 술을 대작한다. 즉 서로 뜻이 통하면 어떤 일도 함께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쓰인다.
문헌: 한국오천년야사(韓國五千年野史)
고려 제16대 예종(睿宗. 재위1105~1122) 때의 윤관(尹瓘. ?~1111)으 북쪽의 여진족(女眞族)을 토벌하고, 아홉 개 성을 쌓는 등 많은 공적을 남긴 명장이다.
윤관이 국방을 지키는 군대의 원수가 되어 북정할 때, 부원수 오연총(吳延寵. 1055~1116)과는 전쟁에서 생사를 같이 할 만큼 마음을 주고받는 평생의 친구였다. 그래서 여진족을 토벌하고 돌아온 뒤에 두 사람은 자녀를 결혼 시켜 사돈 관계를 맺었고, 함께 대신의 지위에 올랐다. 관직에서 물러나 고령에 들어서는 작은 시내를 가운데 두고 인근에 살면서 종종 만나 전날에 고생하던 회포를 주고받았다.
어ㅡ 날, 윤관이 자기 집 술이 잘 익어 오연총과 한잔 나누고 싶어졌다. 그래서 하인에게 술을 지워 오연총을 방문하려고 가던 중 냇가에 당도했다. 그런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물이 불어 건너갈 수 없어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냇물 건너편을 보니, 오연총도 하인에게 무엇을 지워 가지고 오다가 윤관이 물가에 서 있는 것을 보고 큰소리로 물었다.
“대감, 어디를 가시는 중이오?”
윤관이 대답했다.
“술이 잘 익어 대감과 한잔 나누려고 가지고 나섰는데 물이 많아서 이렇게 서 있는 중이오.”
오연총도 역시 잘 익은 술을 가지고 윤관을 방문하려던 뜻을 말했다. 그러자 피차에 그냥 돌아서기가 안타까워서 몇 마디 환담을 하다가, 오연총이 윤관에게 말했다.
“우리가 말로 정담을 나누기는 했지만 술을 한잔 나누지 못하는 것이 정말 유감이군요.”
이에 윤관이 웃으며 말했다.
“정히 그러시다면 이렇게 하십시다. 대감이 소생에게 한 잔 들라고 하면 소생이 가지고 온 술을 대감의 술로 알고 한 잔 마시고, 소생이 그같이 대감에게 권하면 대감께서도 같은 방법으로 한 잔 드시면 되지 않겠소?”
오연총도 그렇게 하면 되겠다고 찬동했다.
이에 두 사람이 나무를 베어낸 등걸((査.사)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편에서 ‘한 잔 드시오!’ 하고 술잔을 들고 머리를 숙이면(頓首.돈수) 저편에서 한 잔 마시고 ‘한 잔 드시오!’ 하고 머리를 숙이는 일을 반복하면서 밤이 깊도록 가져간 술을 다 마시고 돌아왔다.
이 일이 당시 고관대작들에게 풍류화병(風流話柄. 멋있는 이야깃거리)으로 알려져서 서로 자녀를 결혼 시키는 것을 ‘우리도 사돈(査頓: 나무 등걸에 앉아 깊이 생각하면서 머리를 숙임)을 해볼까’ 라는 말로 회자되기 시작했고, 그 말이 오늘날 사돈(査頓. 혼인한 두 집의 부모가 서로 부르는 말)이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다보니 양가 집안의 여러 촌수를 좀 더 세분해서 지칭하는 용어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양가의 부모, 즉 같은 항렬끼리는 사돈, 또는 맞사돈, 아내 되는 사람은 안사돈, 사부인(査夫人), 사돈의 부모, 또는 형님은 사장(査丈), 사돈의 조부모는 노사장(老査丈), 노사부인(老査夫人)이라고 호칭하게 되었다. 이외에 사돈의 사촌형제 등의 친척은 통칭하여 곁사돈이라고 부르는 것이 통례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阿闍梨判(아사리판)
阿:언덕 아, 闍:화장할 사(망루 도), 梨:배 리, 判:쪼갤 판.
어의: 스승이 될 만큼 도덕이 높은 규범사(規範師)들의 모임,
즉 제자의 행위를 바르게 교육할 만한 덕이 높은
승려들의 모임을 말한다. 근래에는 질서가 없이 여럿이 어지럽게 어울린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문헌: 이판사판 야단법석(理判事判 野壇法席), 불교대사전(佛敎大辭典)
아사리(阿闍梨)는 인도의 소승불교(小乘佛敎)에서 학승의 행동을 바로잡아 주는 사범(師範)으로,
교육을 담당할 만큼 덕이 높은 스승, 또는 도가 높은 승려를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말의 진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 말의 뜻과는 상관없이 쓰고 있다.
위에 예시한 아사리판이라는 말이 그렇다.
석가모니보다 나이가 아홉 살이나 많은 가섭(迦葉)과 그 삼형제가 유력인사 2백20명을 데리고 왕사성(王舍城)의 석가모니에게 귀의했다. 승단(僧團)은 그로 인하여 세력이 급격히 팽창하였고 많은 지도자들이 대거 모여들었다. 그러다보니 조직 내에 승려로서의 품위와, 의, 식, 주의 법도가 통일되지 못해 문란했다. 심지어는 돌봐줄 지도자가 없어서 간호도 받지 못한 채 숨지는 승려도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세존은 당신을 대신해서 지도해 줄 화상(和尙) 제도를 만들어 돌보게 했다.
“지금부터 화상은 제자를 자식과 같이 사랑하고, 제자는 화상을 아버지같이 섬기도록 하라. 그렇게 서로 공경하고 보살피면 바른 법이 널리 퍼질 것이다.”
이렇게 해서 화상 제도는 덕이 높고 계율에도 밝은 스님이 맡게 되자 교단이 자연스럽게 발달하게 되었다.
이것이 <사분율(四分律)> 33권에 기록되어 있는 화상의 탄생 유래다.
승단의 규모가 계속 커지면서 화상이 보살피고 지도해야 할 제자 수가 늘어나자 상대적으로 화상의 숫자가 턱없이 모자랐다. 그러자 새 화상을 구하지 못하여 언행이 흐트러지고 삐뚤어지는 비구가 늘어났다.
이에 석가모니는 승단의 조직을 보완하기 위하여 다시 새로운 제도를 만들었다.
“지금부터 아사리 제도를 만드노니 아사리는 제자를 자식과 같이 생각하여 보살피고,
제자는 아사리를 아버지 같이 받들도록 하라.”
아사리는 범어로 교수(敎授), 또는 궤범(軌範), 정행(正行)이란 뜻으로, 후학들에게 모범이 되며, 제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도 편달해 주는 스승을 가리킨다.
아사리는 크게 다섯 종류로 나뉜다.
첫째, 출가(出家)아사리는 출가를 결정해주는 큰스님을 말한다.
둘째, 수계(受戒)아사리는 계(戒)를 주고 수계절차를 주선해 주는 스님을 말한다.
셋째, 교수(敎授)아사리는 위의(威儀)를 가르치고 경계시켜 주는 스님을 말한다.
넷째, 수경(受經)아사리는 경전을 가르쳐 주고 그 뜻을 일깨워주는 스님을 말한다.
끝으로 의지(依支)아사리는 공부하고 참선하는 스님의 별칭이다.
이와는 별도로 <사분율행사초(四分律行事鈔)>에는 受戒式에 갖추어야 할 10명 아사리로, 삼사칠증(三師七證)이 있다. 삼사는 계를 주는 전계(傳戒)아사리, 수계절차를 주관하는 갈마(羯摩)아사리, 위의 작법을 가르쳐 주는 교수(敎授)아사리를 말하고, 칠증은 수계를 증명해 줄 7명의 아사리를 말한다.
이처럼 아사리는 불교의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중심인물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과거 유숭 배불사상의 영향으로 규범과 질서를 지키지 않는 난잡한 행동을 이르는 용어로 쓰여져 아사리판하면 질서 없이 우글거리는 것을 일컫게 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我又栗木(아우율목)
我: 나 아, 又: 또 우, 栗: 밤 율, 木: 나무 목.
어의: ‘나도 또한 밤나무다.’ 라는 말로, 조선시대의 학자 이이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자신도 어떤 무리와 맥을
같이 한다는 동질성을 표명할 때 쓰인다.
문헌: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불교대사전(佛敎大辭典)
조선 선조 시대의 학자 이이(李珥.1546~1584)는 호가 율곡(栗谷)이고, 아명(兒名)은 현룡(見龍)이며, 어머니는 신사임당(申師任堂)이다
현룡은 어렸을 적에 강릉 오죽헌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지냈다.
어느 날, 현룡이 서당에서 돌아오자 외할머니가 물었다.
“현룡아, 저 열매가 무엇인지 아느냐?”
“석류입니다. 제가 석류에 대해서 시를 한 수 지어 보겠습니다.”
현룡은 그 자리에서 시를 지어 외할머니에게 보여 드렸다.
“홍피낭리 쇄홍주(紅皮囊裏 碎紅珠).”
“무슨 뜻인지 설명해 보아라!”
붉은 주머니에 붉은 구슬이 부숴져 있다는 뜻입니다.“
할머니는 외손자의 재치 넘치는 문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외할머니는 한 스님으로부터 현룡이 귀인 상이기는 하지만 호랑이에게 물려갈 액운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외할머니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듣고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럼 , 현룡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밤나무 천 그루를 심으면 액운도 막고, 훗날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외할머니는 사위 이원수(李元秀)에게 이 말을 그대로 전하고 덧붙여 말했다.
“여보게, 사위! 나는 이 말을 하늘이 내려준 계시라고 생각하네. 밤나무를 많이 심으면 집안에도 유익할 뿐만 아니라 이웃에도 좋은 일이고, 현룡이를 위하는 일도 된다고 하니 꼭 그리하게나.”
하여 스님의 말대로 밤나무를 심기로 하고 온 고을을 뒤졌으나 묘목을 오백 그루밖에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머지 오백 그루는 알밤으로 심었다.
현룡의 아버지는 구해온 묘목과 씨밤을 파주의 미추산에 정성껏 심었다. 그리고 3년이 되자 현룡의 외할머니는 밤나무를 한 그루 한그루 헤아려 보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한 그루가 모자랐다.
“……구백구십팔, 구백구십구.”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며 두 번 세 번 헤아려 봤지만 아무래도 한 그루가 모자랐다.
“구백구십팔, 구백구십구…… 왜 한 그루가 안 보일까?”
그때였다.
“여기 있소. 나도 밤나무요(我又栗木.아우율목).”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가보니 잎 윗면을 보면 분명 밤나무인데 그 뒷면은 하얀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밤나무와는 다소 달랐지만 나무 스스로 자기도 밤나무라고 하니 그 뒤부터는 그 나무를 ‘나도 밤나무; 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천 그루의 밤나무를 심어 액운을 때우라는 스님과의 약속을 지켰다.
율곡은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우리나라의 큰 인물이다. 그의 행적 중의 하나로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아홉 차례나 장원급제를 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별칭이다.
또 율곡은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더불어 영남학파에 이어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태두가 되었으며 퇴계와 쌍벽을 이룬 대학자였다.
그는 장차 있을 왜란에 대비하여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는 등 통찰력을 지닌 큰 인물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峨嗟失期(아차실기)
峨: 산 이름 아, 嗟: 슬플 차, 失: 잃을 실, 期: 기회 기.
어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탄식소리와 때를 놓쳤다는 말로, 예언자 홍계관에서 유래했다.
문헌: 대동기문(大東奇聞)
조선 제13대 명종(明宗) 때 홍계관(洪契寬)은 점괘로 앞날에 일어날 일을 귀신같이 잘 맞혀서 유명했다.
그가 지금까지 남의 점괘만 뽑아 주다가 하루는 자기의 수명에 대하여 점괘를 보니 모년 모월 모일 횡사할 운명이었다. 그래서 다시 살 수 있는 복점(卜占)을 찾아보니 바로 그 시각에 용상(龍床: 임금이 앉는 자리) 밑에 숨어 있으면 죽음을 면할 수 있다는 점괘가 나왔다. 그는 자기 운명이 걸린 문제라 사실을 폐하께 알려 특별히 윤허를 득하고 그날이 되자 용상 밑에 숨어 있었다. 그때 마침 쥐 한 마리가 용상 앞을 지나다가 잡혔다. 왕은 홍계관의 점술을 시험해보고 싶어져서 용상 밑에 있는 그에게 물었다.
“지금 이곳을 지나는 쥐가 있는데 모두 몇 마리인가?”
“예. 세 마리입니다.”
왕은 쥐가 분명 한 마리가 지나가다가 잡혔는데 세 마리라고 하자 그가 점괘를 잘 맞히지도 못하면서 용상 밑까지 차지하고 있는 것이 무엄하다고 생각하여 형리에게 그를 끌어내 사형시키라고 했다.
“고얀놈. 왕을 능멸해도 분수가 있지, 한 마리의 쥐가 지나갔는데 세 마리라고?”
홍계관은 사형장이 있는 당현(堂峴) 남쪽 한강 모래밭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그냥 그렇게 억울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형리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형을 잠시만 더 지연해 준다면 분명히 살아날 길이 있습니다. 하오니 제발 시간을 끌어 연장해 주십시오.”
형리는 그의 말대로 상당한 시간을 지연시켜 형을 늦추어 주었다.
한편, 왕은 그를 형장으로 보내 놓고 그래도 미심쩍어 그 쥐의 뱃속을 갈라보게 했다. 과연 뱃속에 새끼 두 마리가 들어 있어 어미 쥐까지 합치면 세 마리가 맞았다. 왕은 크게 감탄하고, 급히 형을 중지시키라 했다. 내시는 죽을힘을 다하여 달려 당현 고개에 올라가 형장을 내려다보니 막 형을 집행하려고 칼을 번쩍 쳐드는 절박한 순간이었다. 그래서 큰소리로 고함을 치고 손을 흔들어 주지시키려 했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어 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만 사형이 집행되고 말았다.
내시가 대궐로 돌아와서 임금에게 사실을 고했다. 임금은 크게 후회하여 ‘아차!’(峨嗟: 잘못을 깨달았을 때 갑자기 나오는 탄식소리) 하고 탄식했다. 이런 연유로 당현을 아차현(峨嗟峴)이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아차산변이 그곳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자료출처-http://cafe.daum.net/palp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