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14일 오전 9시, 외숙모님의 부음이 전해졌습니다. 상주인 사촌동생과 우선 통화를 하는데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져 통화가 힘들 지경이었습니다. 내게는 어머니와도 같은 분. 이 세상에 단 한 분밖에 안계시던 훌륭한 외숙모님. 외숙모님을 추모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내 눈에서는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립니다.
외숙모님과 나의 인연은 지금으로부터 61년 전인 196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내 나이 9살 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 서울로 유학을 와 외삼촌댁에서 살게 된 것이 그 시초였습니다. 외숙모님은 명문학교를 졸업한 엘리트 약사셨는데 처음으로 객지살이를 하는 나를 마치 친자식 마냥 살갑게 대해 주셨습니다.
그때 외숙모님에게는 갓 돌이 지난 꼬맹이가 하나 있었는데 외숙모님은 친아들, 생질 구분하지 않으시고 모두에게 골고루 애정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내 객지생활은 내 집이나 다름없이 편안하기만 했지요.
약국은 뚝섬 노룬산에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시골과 같이 몹시 낙후된 지역이었습니다. 여름이 되면 비포장도로의 빗물이 빠지지 않아 흙탕물이 잔뜩 고여 있었고, 루핑으로 지붕을 덮은 집은 겨울이면 웃풍이 거세게 불어 닥쳤습니다. 그래도 나는 외숙모님의 사랑으로 서울 살이를 잘 할 수 있었는데 외숙모님은 바쁘신 중에도 내 공부까지 돌보아 주셨답니다.
내가 1965년 서울 교대부속국민학교에 편입하게 된 것도 외숙모님의 특별 과외(?) 덕분이었지요. 6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약국에 딸린 조그만 방에서 밥상을 펴놓고 공부를 가르치셨는데 외숙모님은 학교 선생님 못지않게 훌륭한 교사셨습니다. 워낙 영리하신 분이라 나는 외숙모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지요.
나는 학교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외숙모님과 함께 약국을 보는데 나도 박카스 같은 간단한 약은 손님에게 팔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자상한 외숙모님이시지만 나는 함께 살았던 5년 동안 단 한 번 외숙모님께 야단을 맞았습니다. 따뜻한 봄날 동네 여자 친구와 함께 사촌 동생을 데리고 건국대학교 까지 놀러갔는데, 깜빡하고 외숙모님께 말씀을 드리지 않고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말도 없이 아이들이 없어져 버려 외삼촌과 외숙모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외숙모님은 나를 한 차례 야단을 치시고는 더 이상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나 역시 그런 실수를 더 이상 반복하지 않았고...... 지금 돌이켜 보면 외숙모님은 참으로 마음이 깊었고, 사랑으로 충만된 분이셨습니다.
다음해 외삼촌댁은 노룬산을 떠나 성수동으로 이사를 가셨는데 그곳에서 제재소를 운영하셨습니다. 한 여름날 외숙모님은 큰 고무 대야에 더운 물을 넣고 나를 목욕시키셨는데 그때 나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내 알몸을 보여 드렸습니다. 아마도 외숙모님을 어머니 같이 생각했기 때문이었겠지요.
우리가 약국에 살 때 막내 누나가 전학을 왔고, 제재소에 살 때는 둘째 누나도 전학을 왔습니다. 우리 식구가 셋이나 되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외숙모님이 조카들 문제로 불평을 하시거나 외삼촌과 다투시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답니다. 외숙모님은 훌륭한 교육자 집안의 규수라 그런지 몰라도 사리가 분명하고, 매사 행동거지가 올바르셨지요. 그리고 진실로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고매한 인품의 소유자셨어요.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외숙모님과 우리 남매들은 사정이 있어 서로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외숙모님은 그 뒤 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외삼촌은 주로 일을 만드시는 스타일이었고 숙모님은 수습을 하는 편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외숙모님은 연세가 많을 때까지 약국을 운영하셨는데, 자식들을 잘 키워 집안에 의사가 셋이나 되었답니다.
나와 막내 누나는 아주 가끔씩 외숙모님을 뵈러 갔는데, 우리가 가면 외숙모님이 무척 반가워 하셨습니다. 아마도 5년 간 함께 살았던 인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뵙지 못했는데 그만 마지막 가시는 모습도 보지 못하고 보내드려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렇게 부음을 받고 보니 더더욱 마음이 아프답니다. 당장이라도 빈소를 찾아야 도리겠지만 그저께 관상동맥 스텐트 시술을 했기 때문에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해 조문을 못하고 대신 장남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상주에게 양해하라고 당부하기는 했지만 내 마음이 그게 아니었지요. 형제들 중 가장 숙모님께 사랑을 많이 받았고, 신세를 많이 졌던 나로서는 조문도 하지 못해 정말 죄스러울 뿐입니다.
사랑하는 외숙모님!
어머니같이 존경하고 따랐던 저였기에 숙모님을 저승으로 떠나보냄에 아프고 비통한 마음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애통해 하는 제 마음을 이 추도문에 담아 함께 하늘로 보내오니 저승에서라도 이 글 읽어보시고 부디 좋은 곳으로 승천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기도해 주소서.
삼가 머리 숙여 조의를 표합니다
첫댓글 외숙모님께서는 정말 작가님을 많이 사랑하시나 봐요. 끝까지 고생 안 시키시려고, 먼 길 오지 마시라고 그 날을 고르신걸거에요. 이 글을 읽은 저 또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겠습니다. 그리고 자비로운 마음도 배우겠습니다.
저도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계속 울었더니 어떤 어른이 이런 말씀을 해 주시더라구요. 아버지는 씩씩한 모습의 딸을 좋아하지, 울고 있는 딸의 모습을 보면 하늘에서도 슬프실거라구요. 그러니 마음 추스리시고 얼른 회복하시길 바래요. 힘 내세요!
안유정님! 첫댓글을 달아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내용도 오히려 저보다 더 훌륭하게 제시해주셨고요.
게다가 외숙모님의 명복까지 빌어주셔서 정말 고맙고요. 이제 저도 슬픔을 딛고 일어나 서서히 몸을 추스리고
제 일상으로 돌아가렵니다. 하지만 외숙모님의 인자하시고 진지한 모습이 시도때도 없이 떠오르는 것은 막을 길도
없고 막지도 않을 것입니다
훌륭하신 외숙모님이시군요.
그 외숙모님과 함께 생활하신 작가님의 성품도
외숙모님을 닮으셨을 것 같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작가님의 고마우신 글 감사히 받았습니다.
외숙모님의 명복을 빌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저는 고인을 따라가려면 텍도 모자라지요.
이제 슬픔을 딛고 열심히 살아가렵니다. 감사합니다.
외숙모님이 어머니와 선생님 같으셨군요.
쉽지 않았을 텐데 정말 고마운 분이십니다.
존경하는 선생님의 댓글과 격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진정 제 외숙모님은 저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올바로 이끌어주신 훌륭한 모성상 그대로였습니다.
어머니로서, 숙모로서, 딸로서, 약사로서 처절하리 만큼 삶과 싸우신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오늘 작가님을 처음 뵀네요.
우연인지 작가님과 12년을 이웃하며 살아온 덕분인지 낯설지 않았네요.
또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평행이론처럼 같은 경험을 많이 했네요.
저는 숙부님과 숙모님 도움,
작가님은 외삼촌과 외숙모님 도움,
오늘의 우리가 있는 이유는
누군가의 관심 사랑 더분이란 걸 새삼 기억합니다.
해옹 조우연 -
새벽 3시가 되어갑니다
어제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왔습니다
엇비슷한 삶의 궤적을 가졌다는 것 - 아마도 서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