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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레쉐브스키 주교와 초기 한글성경
-전도서 1장을 중심으로-
이환진*
愚者多言將來之事, 人不能知
身後之事, 孰能告人 (전도서 10:14,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
愚昧者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이 將來 일을 알지 못하나니
身後事를 알게 할 者가 누구이냐 (전도서 10:14, 간이국한문 개역한글판)
1938년에 나온 개역은 지금도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판(1961)과 개
정판(2004)의 어머니 성경이다. 이 성경의 출현은 알렉산더 피터스(Alexander
A. Pieters)가 없이는 불가능했다. 피득(被得)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는 이
선교사는 러시아인이었는데 본디 유대인이다. 그러니까 유대교에서 개신교
로 신앙을 바꾸어 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선교활동과 성경 번역에 지대한 공
헌을 남긴 인물이다. 하느님은 백여 년 전에 한국에 유대인을 보내셔서 우리
말로 성경을 번역하도록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유대인이 또 한 사람이 더 있다. 바로 쉐레쉐브스키(Samuel
Isaac Joseph Schereschewsky, 1831-1906) 주교이다. 시(施) 주교로 더 잘 알려
져 있는 이분은 중국에서 백여 년 전에 성경 번역 작업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
다. 피득(彼得)보다는 약간 이른 시기에 중국에서 선교 활동한 인물로, 본디
리투아니아 사람으로 유대인이었으나 미국으로 건너가 성공회 교인이 된 분
이다.
쉐레쉐브스키 주교는 중국어로 두 종류의 성경을 번역하였다. 하나는 쉐
레쉐브스키 관화역본(1875)이라고 부르는 구약성경이고 다른 하나는 쉐레
쉐브스키 쉬운 문리역(1902)이라고 부르는 성경전서이다.1) 앞의 관화역본
*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구약학.
1)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상제판)의 1912년판이 최근 우리나라에서 다시 발간되기도 하
였다. 金炅洙 편, 1912년에 발간된 漢文聖經 (서울: 書埶文人畵ㆍ이화문화출판사, 2010).
그런데 이 성경을 일일이 타이핑하고 펴낸 김경수 선생은 이 책이 쉐레쉐브스키의 쉬운 문리
역 성경(1902)인 것을 모르는 듯하다. 그의 편자 후기에는 이 한문성경의 이름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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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이름 그대로 북경말로 번역한 성경이다. 북경지방의 중국인들이 당시에
사용했던 언어로 번역한 성경을 말한다. 구약만 번역했다. 그가 유대인이었
기 때문에 구약에 친숙하여 이렇게 먼저 구약만 펴낸 것으로 짐작한다. 뒤의
쉬운 문리역은 말 그대로 문리체보다는 좀 쉬운 문체로 번역한 성경전서이
다.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그의 두 한문성경이 초기 우리말 성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
(1902)은 게일-이원모역(1925)과2) 개역(1937)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특
히 용어나 표현이 바로 시(施) 주교의 쉬운 문리역에서 많이 온 것을 알 수 있
다. 이 글에서는 특히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1902)이 초기 두 한글성경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쳤는지 전도서 1장을 예로 들어 살펴보고자 한다.
1. 초기 한글성경 번역가들과 한문성경
게일-이원모역(1925)의 서문과 개역(1938)을 번역한 피터스의 글 “구
약 개정에 대한 노트”(1940년)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우선 게일-이원모역
의 서문의 일부를 읽어보자.
“飜譯할 때에 前人의 譯本을 參照하는 것은 거의 第二原則이라
英國 一世 야고보의 譯本으로 볼지라도 前人 듼달의 譯本 中에서 十
分의 九나 引用한 故로 本 聖經을 飜譯할 때에도 히브리文 舊約과 헬라
文 七十人譯 舊約과 獨逸 루터 先生의 譯本과 一千八百八十一年에 改
正한 譯本과 英國 옥스벳大學 出身 모벳 氏의 最新譯本이며 鮮文으로는
現行하는 譯本과 유대人의 譯本이며 기타 日文譯本까지 參照하여 서로
比較하고 히브리와 헬라 字典에 萬分의 一이라도 遺漏하거나 模糊함이
없도록 努力하였노라“3)
요즘의 표기법으로 바꾸어 읽어보았다. 그러나 한자는 그대로 두고 인용한
것이다. 이 부분은 게일 선교사와 이원모 장로가 함께 쓴 “서언”(緖言)에 들
어 있는 두 번째 번역원칙이다. 이 가운데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이 “유대인의
2) 기일역(奇一譯)이라고 이름 붙어있는 성경을 구태여 게일-이원모역이라고 이름 붙이는
까닭은 게일과 함께 번역작업을 한 이원모 장로의 노력이 결코 소홀히 될 수 없다는 점과 용
어나 표현이 한문을 잘 알고 있던 이원모 장로가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3) 奇一, 新譯 新舊約全書, 影印本 (서울: 한국이공학사, 1986), 緖言. (원출판년도 1925)
쉐레쉐브스키 주교와 초기 한글성경 / 이환진 37
번역”이라는 표현이다. 이 유대인의 번역은 1915년에 나온 유대인들의 영어
번역(JPS)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럴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지만 아무래
도 한문성경을 말하는 듯하다.
“유대인의 번역”이라는 표현은 현행하는 한글성경과 일본어 역본을 말하
는 부분 가운데 들어 있는 것으로 한문성경을 가리키는 듯하다. 두 번역가가
말하는 한글성경이란 구역(1911)을 말하는 것이고 일어역은 메이지역
(1888) 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이러한 짐작이 맞는다면 동양
삼국의 번역 가운데 한문성경을 언급하지 않았는데 바로 한문성경 가운데 유
대인이 번역한 성경으로는 앞서 언급한 쉐레쉐브스키 주교의 두 번역을 가리
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가장 많이 보았던 한문성경은 역시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1902)이었으므로 이 성경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
각할 수 있다. 쉐레쉐브스키 주교는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글 개역의 번역 작업을 마무리하는 데 무려 10여 년이나 종사한
알렉산더 피터스는 이 작업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역본들을 참조하였노라고
말하고 있다. 앞서 말한 대로 “개역 구약 개정에 대한 노트”(Notes on Old
Testament Revision)라는 글이다.4)
“… 이 작업을 하면서 참고한 책은 다음과 같다. 독일어 성경은 루터
역과 개정역(the Revised), 영어 성경은 개역(Revised), 모펫역(Moffatt), 굳
스피드역(Goodspeed), 긴스버그(Ginsburg)의 영어역, 그리고 중국어 역본
두 개와 일본어 역본 하나이다.”
피터스가 개역의 개정 작업을 하면서 참고한 성경은 독일어 성경과 영어
성경과 중국어 성경 각각 두 종류 그리고 일본어 성경 하나이다. 이 가운데에
서 “중국어 역본 두 개”라는 표현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표현이다. 두 중국어
성경은 아마도 앞서 언급한 쉐레쉐브스키 주교의 두 역본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완역본인 구역(1911)이 브리지만-컬벗슨역
(1864)을 많이 참조하여 번역하였는데 이와 달리 개역(1938)은 쉐레쉐브스
키 쉬운 문리역(1902)의 표현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한문성경의 경우 그 출발점은 대표본(1854)이다. 흔히 문리성경(文理聖經)
으로 알려져 있는 이 성경은 책이름에 “문리”(文理)라는 말이 들어가서 이렇
게 부르는 듯하다. 특히 구약은 영국의 중국학의 기초를 놓은 제임스 렉
(James Legge)을 중심으로 영국 런던선교회 소속 선교사들 그리고 왕따오(王
4) 이환진, “알렉산더 피터스의 한글 개역 구약 개정 작업 - “구약 개정에 대한 노트”(1940년)를
중심으로”, 「성경원문연구」 22 (2008),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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稻)라는 중국인 학자가 함께 펴낸 번역본이다.5) 그러나 십년 후에 미국인 선
교사인 브리지만과 컬벗슨이 독자적으로 펴낸 성경이 바로 브리지만-컬벗슨
역(1864)이다. 이 성경 역시 그 문체는 문리체 성경이다. 따라서 우리가 참조
하려는 네 개의 한문성경 가운데 대표본(1854)과 브리지만-컬벗슨역(1864)을
문리성경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대표본(1854)이 수려
한 한문으로 번역된 성경이기에 이 번역을 문리성경으로 부르고 있는 듯하
다. 이와는 다르게 브리지만-컬벗슨역(1864)은 영어성경 KJV(1661)를 참조
하여 원문을 충실히 반영하려고 노력한 한문성경이기에 문리체이긴 하나 그
렇게 유려한 문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성경은 한글 최초의 완역
성경인 구역(1911)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6)
2. 쉐레쉐브스키 주교 그리고 그의 북경어 구약과 쉬운 문리역
이들 두 문리체 성경과 다르게 입말체로 번역한 한문성경이 있는데 바로
쉐레쉐브스키 주교가 번역한 관화역본이다. 이것을 쉐레쉐브스키 관화역본
(1875)이라고 부르는데 구약만 들어있는 성경이고 북경말로 번역한 성경이
다. 쉐레쉐브스키 주교는 사실 이 번역을 내놓은 뒤로 주교라는 호칭을 미국
성공회에서 부여받는다.7) 이 호칭에 대해서 현지 선교사들 사이에 설왕설래
하였지만 쉐레쉐브스키는 이 호칭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스스로 한문성경
번역이 자신의 선교적 사명이라고까지 여겼던 쉐레쉐브스키는 북경 지역에
파송 받아 그 지역 중국인들이면 누구나 쉽게 원문을 충실히 반영한 한문성
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지니고 있었다.8) 이렇게 해서 나
온 성경이 쉐레쉐브스키 관화역본(1875)인데 아마도 이 성경이 입말체로 번
역된 첫 구약 한문성경이 아닐까 추정한다.
정통 유대인이기 때문에 히브리어에 자유로웠고 또한 한문에도 능했던 쉐
레쉐브스키는 약 10여 년에 걸쳐 이 번역을 내놓는다. 그가 대본으로 사용한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은 야곱 벤 하임의 랍비 성경이었던 듯하다.9) 그리고
5) Hwan-Jin Yi, “James Legge, the Chinese Delegates’ Version of the Bible and Korean
Translations of the Bible”, 「신학과 세계」 (Theology and the World) 5 (September 2008), 9-35.
6) 이환진, “셩경젼셔의 번역 대본 고찰 - 시편과 잠언과 욥기를 중심으로”, 「성경원문연구」
27 (2010), 31-55.
7) Iren Eber, The Jewish Bishop and the Chinese Bible: S. I. J. Schereschewsky (1831-1906),
Leiden: Brill, 1999, 125.
8) Ibid., 96-97.
9) Ibid., 182, n. 32.
쉐레쉐브스키 주교와 초기 한글성경 / 이환진 39
그는 이 번역을 내놓기 위해 중세 유대인 학자들인 라쉬(Rashi)와 이븐 에즈
라(Ibn Ezrah) 그리고 19세기의 독일인 구약학자 드 베테(de Wette)의 주석을
많이 참조하기도 하였다.10) 이 번역의 공헌은 지금도 중국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화합본(和合本) 성경 가운데 1919년에 나온 국어체 한문성경의 모체가
된다는 사실이다.11)
그런 뒤 그는 성경번역에 대한 열망을 접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북경에서 오랜 세월 성경 번역 작업에 헌신했던 쉐레쉐브스키
주교는 어느 날 열병에 걸려 혼수상태에 빠지는데 몇 주 만에 겨우 회복되었
으나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12)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쉐레쉐브스키 주
교는 위의 관화역본을 개정하는 작업을 하였으며 곧이어 문리체 성경보다는
약간 쉬운 문리체로 성경 번역 작업을 하는데 이 성경은 일본에서 이루어졌
다. 건강상 일본으로 건너가 중국인 학자들과 함께 이 작업을 해낸 것이다.13)
그 성격을 보면 자신의 관화역본(1875)을 대본으로 삼아 대표본(1854)을 참
조하여 그 용어를 많이 빌려 온 흔적을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14) 또한 자
신의 관화역본(1875)은 구약만 있는 것인데 신약도 쉬운 문리체로 함께 번역
하였다.15) 몸이 마비되어 두 손가락으로만 타자를 쳐서 번역했다고 하여 “이
지성경”(二指聖經)이라고도 부른다.
경기도 이천에 있는 기독교문사 문서실에 보관되어 있는 한문성경 가운데
가장 많은 한문성경은 바로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1902)의 관주판(版)이
다.16) 본문은 같고 관주 작업을 하여 펴낸 것인데 한국인들에게 꽤 인기가 있
었던 듯하다. 관주(貫珠)가 붙어있는 이 성경에는 Bishop Shereschewsky’s
Version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기도 하다.17) 탁사 최병헌 목사와 같이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한학자들은 대표본(1854)을 많이 읽었고18) 일반 교인들 가운
10) Ibid., 189-190.
11) Ibid., 153, 248-249.
12) Ibid., 142-143.
13) Ibid., 146-153.
14) Ibid., 113-114.
15) Ibid., 242.
16) 2009년 여름에 감리교신학대학교의 한국교회사 교수이신 이덕주 박사와 함께 이곳을 방문
하여 확인하였다.
17) Ibid., 160.
18) 崔炳憲, 韓哲輯要, 京城: 博文書館, 1922, 1; 이환진, “성서 번역가 탁사 최병헌의 잠언(23
장)과 시편(32편, 122편)과 역대하(6-7장) 번역문 분석 - 「죠션(대한) 크리스도인 회보」의 경
우”, 「성경원문연구」 17 (2005년), 45-71을 참조하라. 또한 대표본(1854)은 브리지만-컬벗슨
역(1864)과 함께 일본어 초기성경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다. 이에 대한 연구로는 강선아, “일
본어역 성서 번역사 - 전도서 1장-12장을 중심으로”,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9학
년도 석사학위논문 그리고 민영진, 전무용, “한국어 번역 성경에 나타난 중국어 성경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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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에서 한문을 읽을 수 있는 분들은 이 시(施) 주교의 번역(1902)을 선호한 듯
하다. 하지만 탁사의 글을 읽어보면 주로 대표본(1854)을 외워서 적고 있으나
후대에 갈수록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1902)을 참조한 흔적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이렇게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은 한글 개역(1938)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학 저작에도 많이 인용되어 신학화하는 데 중요한 역
할을 한다. 따라서 쉐레쉐브스키 주교의 두 성경은 중국인 그리스도인들과
한국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만큼 시
(施) 주교는 극동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의 언어생활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3. 전도서 1:1-10의 비교 분석
그러면 여기서는 전도서 1:1-10을 본문의 예로 삼아, 19세기에 나온 한문성
경인 대표본(1854)과 브리지만-컬벗슨역(1864) 그리고 쉐레쉐브스키의 두 성
경인 북경 관화역 구약(1975)과 쉬운 문리역(1902) 그리고 영어성경
ASV(1901)를 초기 한글성경인 구역(1911)과 게일-이원모역(1925)과 개역
(1938)과 함께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기로 하자. 각 역본의 이름은 발행년도
의 순서에 따라 표기한다. 다만 쉐레쉐브스키 주교의 두 성경은 이름이 길어
각각 “북경어 구약”(875)과 “쉬운 문리역”(1902)으로 줄여서 표기한다.
1:1
(대표본) 耶路撒冷王, 大闢之子, 宣播大道, 其言曰
(브리지만-컬벗슨역) 耶路撒冷王, 大闢之子, 傳道之言如左
(북경어 구약) 耶路撒冷王大貝的兒子柯黑列之言, 記在下面他說
(쉬운 문리역) 耶路撒冷王, 大衛子柯希列其言如左
(ASV) The Word of the Preacher, the son of David, king in Jerusalem.
(구역) 다윗의 아 예루살넴 왕 젼도쟈의 말이라
(게일-이원모역) 다윗의 아 예루살넴王이 傳道야 아
(개역) 다윗의 아달 예루살넴왕 젼도쟈의 말삼이라
이 구절에서 중심이 되는 말은 “전도”(傳道)인 듯하다. 한글 두 성경이 모
두 “전도”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런데 이 말은 브리지만-컬벗슨역(1864)의
“전도지언”(傳道之言)이라는 표현에서 비롯된 듯하다. 물론 “다윗의 아들 예
본어 성경의 영향”, 「성경원문연구」 19 (2006), 176-199를 참조하라.
쉐레쉐브스키 주교와 초기 한글성경 / 이환진 41
루살렘 왕”이라는 말은 두 한글성경의 공통 요소이다. 이 말은 게일-이원모역
(1925)과 개역(1938)이 똑같이 옮겼다는 말인데 이러한 번역 경향은 게일-이
원모역(1925)이 “짧게 줄인 풀이역”이라는19) 별명을 갖는다 하더라도 두 번
역가가 한 때 개역위원회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근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구역(1911)에는 이 절 전체가 표기법만 다를 뿐 개역(1938)과 똑같
이 “다윗의 아 예루살넴 왕 젼도쟈의 말이라”라고 읽은 것을 보면 개역
(1938)은 구역(1911)의 이 구절을 그대로 따른 것을 알 수 있다.
1:2
(대표본) 吾觀萬事, 空之又空, 虛之又虛
(브리지만-컬벗슨역) 傳道者曰, 太虛之虛, 太虛之虛哉, 凡所有者皆虛
也
(북경어 구약) 凡事都是虛空的虛空, 虛空的虛空, 都是虛空
(쉬운 문리역) 柯希列曰, 凡事虛中之虛, 虛中之虛, 皆屬於虛
(ASV) Vanity of vanities, saith the Preacher; vanity of vanities, all is
vanity.
(구역) 그 말에 범가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여 다
헛된 쇽엿도다
(게일-이원모역) 萬事가 空虛고 空虛니
(개역) 젼도쟈가 갈아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
도다
이 구절에서 구역(1911)과 개역(1938)이 다른 점은 앞부분이다. 구역(1911)
은 “그 말에 범가”라고 되어 있고 개역(1938)은 이것을 “젼도쟈가
갈아대”라고 간결하게 읽었다. 히브리어 본문을 따른 경우이다. 또한 구역
(1911)의 마지막에 나오는 “다 헛된 쇽엿도다”는 원문에 없는 것으로 생
각하고 빼고 읽었다. 그렇지만 구역(1911)의 이 표현은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
리역(1902)의 “개속어허”(皆屬於虛)를 그대로 읽은 것이다.
그런데 게일-이원모역(1925)의 경우 “전도자가 말한다”라는 부분은 빼고
또한 거듭 반복되는 “헛되다”(헤벨)는 말을 “공허하다”라고 단 두 번만 읽는
다. 줄인 풀이역이라는 말에 걸맞게 이 부분을 이렇게 간결하게 읽었는데 거
의 비슷한 표현이 나오는 12:8에서는 게일-이원모역(1925)이 “虛無고 虛無고 虛無도다”라고 읽어 히브리어 “헤벨”( הבל )을 “허무”(虛無)로 바꾸어
19) 閔泳珍, 國譯聖書硏究 (서울: 성광문화사, 1986), 150.
42 성경원문연구 제28호
읽었을 뿐만 아니라 세 번 반복하여 읽는 것이 다르다. 이 번역어는 가톨릭 성
경(2005)에서 채택하여 지금껏 이어지는 용어이기도 하다.
개역(1938)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는 물론
구역(1911)에서 온 것이다.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지만 “헛되다”가 네 번 반복
되는 것은 분명 구역(1911)의 전통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헛되고 헛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헛된 것 가운데서도 헛되다”( הבל הבלים )라고 되어 있지만
구역(1911)이나 개역(1938)의 번역가들은 모두 그냥 “헛되다”는 말을 반복적
으로 나열하여 읽는다. 초기 한글성경만이 지니고 있는 전통이다. 한문성경
이나 영어성경 ASV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개역(1938)은 이렇게 이 부분에서 구역(1911) 전통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12:8에서도 똑같이 찾아볼 수 있다. 개역(1938)은 “헛되고 헛
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하였는데 구역(1911) 또한 “헛되고 헛되도
다 모든거시 다 헛되도다”라고 읽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다”라는 말을 개역
(1938)이 빼고 읽은 것뿐이다. 이렇게 전도서의 핵심 표현이라 할 수 있는 “헛
되다”는 말은 대표본(1854)을 위시한 한문성경에서 구역(1911)과 개역(1938)
이 빌려왔지만20) 문장 구성은 독자적이다.
1:3
(대표본) 光天之下, 營營操作, 何益之有
(브리지만-컬벗슨역) 人於日下, 凡所歷之勞苦, 有何益哉
(북경어 구약) 人於日下, 凡所勞碌經營的有何益處
(쉬운 문리역) 人於日下勞碌操作, 何益之有
(ASV) What profit hath man of all his labor wherein he laboreth under
the sun?
(구역) 사이 날아래셔 슈고 모든 슈고가 무 리익이 잇스리오
(게일-이원모역) 人生이 世上에셔 受苦나 所用이 무어시뇨
(개역) 사람이 해 아래셔 슈고하는 모든 슈고가 자긔의게 무엇이 유익
한고
이 구절에서 세 한글성경의 공통 용어는 “슈고”(受苦)이다. 물론 브리지만-
20) 물론 “헛되다”는 말은 1891년에 나온 스캇(James Scott)의 영한사전에서 온 것이라고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James Scott, English-Corean Dictionary (Corea: Church of England Mission
Press, 1891), 332를 보면 “Vanity” 항목을 “헛됨”으로 읽는다. 이와 달리 1890년에 언더우드
가 펴낸 한영자전에는 “Vanity” 항목을 “교만, 자긍, 헛것”으로 읽기도 한다. Horace Grant
Underwood, 韓英字典 한영뎐 (A Concise Dictionary of the Korean Language in Two
Parts Korean-English and English-Korean, Part II: An English-Korean Dictionary), Student
Edition (Tokio: The Yokohama Seishi Bunsha, 1890), 276 참조.
쉐레쉐브스키 주교와 초기 한글성경 / 이환진 43
컬벗슨역(1875)이 “노고”(勞苦)라는 비슷한 용어를 쓰고 있기는 하지만21) 한
글성경만의 용어라 할 수 있다. 이 용어는 물론 구역(1911)에서 비롯되었다.
1890년에 나온 언더우드의 한영뎐에는 “슈고”(受苦)라는 항목을
“Hardship, difficulty, suffering”으로 설명하고 있고(Part I, 138) 영어 ASV의
용어인 “Labor”를 동사로는 “쓰오, 힘쓰오, 일하오”로 명사로는 “, 일, 공
부”로 설명하고 있다(Part II, 152). 또한 1981년에 나온 스캇의 영한사전(192
쪽)에도 “Labour”는 “공부”로 “to Labour”는 “일다, 품팔다, 공부다”로 설
명하고 있는 것을 보면 초기 한글성경의 “슈고”라는 말은 영어성경 ASV의
“labor”를 옮긴 것으로 보기 어렵다. 이뿐만 아니라 1880년에 나온 한불뎐
(439쪽)에도 “슈고”라는 항목을 한자로는 “受苦”라고 표기하고 그 설명은
“Pein, difficulte, travail pénible, affliction, souffrance, lassitude, accablement”로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영어 “labor”와는 별 상관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
서 초기 한글성경의 “슈고”라는 용어는 한국어식 한자말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어서 나오는 부분에서 게일-이원모역(1925)은 그 번역 성격에 걸맞
게 “所用이 무어시뇨”라고 고유한 용어를 사용하면서 간결하게 읽었는데, 구
역(1911)을 따랐을 것으로 짐작하는 개역(1938)은 “모든 슈고가 자긔의게 무
엇이 유익한고”라고 읽어 구역(1911)의 “모든 슈고가 무 리익이 잇스리오”
와는 약간 다르게 읽었다. 물론 이 두 성경은 모두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
(1902)의 “하익지유”(何益之有)를 읽은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표현은
물론 대표본(1854)에서 온 것이다. 따라서 이 가운데 “익”(益)을 “유익”(구역)
과 “이익”(개역)으로 약간 달리 읽은 것이 다를 뿐이다.22)
물론 개역(1938)은 “자긔의게”라는 말을 집어넣어 읽었고 “무엇이 유익한
고”라고 하여 구역(1911)이 “무 리익이 잇스리오”라고 대표본(1854)이나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1902) 등의 한문성경을 그대로 읽은 것과 달리 풀
어 읽었다. 곧 이 부분에서 개역(1938)은 구역(1911)을 따르되 독자적인 판단
으로 문장 구조를 다르게 읽어 옮겼다. 구역(1911)은 히브리어 본문의 “무슨
유익(이익)이 사람에게”(마-이트론 라-아담)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읽었다.
구역의 번역 성격과 다르게 축자적 읽기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런데 개역
(1938)은 오히려 이 부분에서 문자적으로 문장을 구성하지 않고 “자기에게
21) 두산동아의 2005년판 백년옥편(217쪽)은 “노고”(勞苦)를 “힘들여 애쓰는 수고”라고 설
명하고 있다.
22) 게일의 한영자전(1914)은 “익”(益) 자를 이렇게 설명한다. “益 (더) To pour in more; to
increase. Progress. The 42nd Diagram. Many; profit; benefit; use”(131쪽). 이렇게 놓고 보면
“유익”(개역)이나 “이익”(구역)이나 비슷한 뜻을 전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개역
(1938)의 “유익”(有益)은 “쓰임”(use)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는 용어로 보이며, 구역(1911)
의 “이익”(利益)은 “이득”(profit)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는 말이 아닐까 짐작한다.
44 성경원문연구 제28호
무엇이 유익한고”라는 식으로 읽어 개역의 축자적 성격과는 다른 읽기를 드
러내고 있다.
구역(1911)의 “날아래셔”는 개역(1938)의 “해 아래셔”로 “날”이 “해”로 바
뀐 것을 알 수 있다. 대표본을 빼고 세 한문성경이 모두 “일하”(日下)로 되어
있어서 두 번역이 다 가능하다고 볼 수 있으나 개역의 경우 히브리어 본문의
“타하트 하-솨마쉬”( תחת השמש )를 보고 “해”로 바꾸었을 가능성이 크다.
1:4
(대표본) 世代迭更, 大地恒存
(브리지만-컬벗슨역) 一代旣逝一代又來, 惟地永存
(북경어 구약) 一代過去, 一代又來, 地是永遠長存
(쉬운 문리역) 一代逝, 一代來, 大地永存
(ASV) One generation goes and another generation cometh; but the
earth abideth for ever.
(구역) 셰는 가고 셰는 오되 는 영원히 잇도다
(게일-이원모역) 地球 恒常 잇스나 世代 變更며
(개역) 한셰대는 가고 한셰대는 오되 는 영원히 잇도다
개역(1938)은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1902)을 그대로 따른 듯하다. 물
론 구역(1911)과도 거의 같다. 이 경우는 구역(1911)이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
리역(1902)을 따른 경우일까? 물론 “는 영원히 잇도다”(땅은 영원히 있도
다)라는 말에서 “땅”[地]은 브리지만-컬벗슨역(1864)의 용어이다. 그러나 “영
원히 있다”라는 표현은 분명히 쉐레쉐브스키 관화역본(1875)의 번역어이다.
그리고 더 분명한 것은 “지시영원장존”(地是永遠長存)이라는 말에 분명히
“영원”(永遠)이란 말이 들어있다. 쉐레쉐브스키는 이 성경에서 “영원”이라는
말을 강조하기 위하여 “장존”(長存)이라고 “장”(長)을 집어넣어 그 뜻을 더
명확하게 하고자 했다.
따라서 구역(1911)과 개역(1938)은 이 구절에서, 앞부분은 쉬운 문리역
(1902)을, 뒷부분은 관화역본(1875)을 따라 읽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개역(1938)이 히브리어 본문을 대본으로 읽은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용어는 분명히 쉐레쉐브스키의 두 성경에서 빌려온 것이 분명하다.
1:5
(대표본) 日出日入, 運行不息
(브리지만-컬벗슨역) 日出日入, 而急趨於所出之處
(북경어 구약) 日頭出來, 日頭落下, 又往所出的地方急急轉行
쉐레쉐브스키 주교와 초기 한글성경 / 이환진 45
(쉬운 문리역) 日出日入, 趨歸其所, 復又出照
(ASV) The sun also ariseth, and the sun goeth down, and hasteth to its
place where it ariseth.
(구역) 날이 나오기도 고 날이 드러가기도 니 그 나오 곳으로
급히 가고
(게일-이원모역) 太陽은 出入야 運行이 쉬지 아니며
(개역) 해는 다가 지며 그 던 곳으로 니 도라가고
게일-이원모역(1925)의 “태양”(太陽)은 그 고유한 번역어이지만, 전체적으
로 이 부분에서 대표본(1854)을 따른 흔적이 보인다. “出入야”는 대표본
(1854)의 “일출일입”(日出日入)을 “출입”(出入)으로 줄여 읽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대표본(1854)의 “일”(日)을 “태양”(太陽)으로 바꾸어 읽었다. 그런데 이
어서 나오는 “運行이 쉬지 아니며”는 대표본(1854)의 “운행불식”(運行不
息)을 옮긴 것이 분명하다. 다른 성경에서는 모두 보이는 “급히”라는 표현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구역(1911)은 이 부분에서 전체적으로 브리지만-컬벗슨역(1864)을 따른 것
이 분명하다. 물론 앞부분의 “날이 나오기도 고 날이 드러가기도 니”
는 대표본(1854)에서 왔다고 볼 수도 있다. 두 한문성경이 똑같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1902)도 이 부분이 대표본(1854)과
똑같다. 여러 한문성경의 대표본(1854) 의존도를 보여주는 예이다. 그런데 구
역의 뒷 부분인 “그 나오 곳으로 급히 (가고)”는 브리지만-컬벗슨역(1864)
의 “급추어소출지처”(急趨於所出之處)를 거의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구역(1911)의 번역 성격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개역(1938)은 이 구절에서 구역(1911)의 “날”을 “해”로 바꾸어 읽었다. 뿐
만 아니라 “나오다 … 들어가다”를 “뜨다 … 지다”로 우리말다운 표현을 사용
하고 있다. 개역이 축자적인 번역을 지향하고 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물
론 영어성경 ASV의 “to arise … to set”를 반영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히
브리어 본문의 “자라흐”(* זרח )와 “보”(* בוא )라는 동사도 이 뜻을 지니고 있기
에 영어성경을 반영했다기보다는 히브리어로 확인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개역(1938)은 “그 던 곳으로 니 도라가고”라는 마지막 부분에
서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1902)의 “추귀기소”(趨歸其所)를 그대로 반영
하고 있다. 특히 “돌아가다”라는 표현은 이 쉬운 문리역의 “귀”(歸)를 반영하
고 있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 용어는 다른 한문성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1902)의 고유한 번역어이다. 그런데 개역(1938)의
“그 던 곳으로”는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1902)의 번역본문에는 없지만
46 성경원문연구 제28호
그 본문을 설명하는 할주(割註)를 반영하고 있다. 곧 그 할주는 “복우출조혹
작즉소유출조지소”(復又出照或作卽所由出照之所)라고 설명하는데 이 가운
데에서 “출조지소”(出照之所)를 “그 던 곳으로”라고 반영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1:6
(대표본) 風自北來, 復自南至, 廻旋靡定
(브리지만-컬벗슨역) 風行於南, 復旋於北, 旋轉而行, 風返旋于所旋之
處
(북경어구약) 風往南吹, 又轉到北,23) 南旋轉而吹, 從何旋轉, 復又旋轉
(쉬운 문리역) 風往南行, 復轉於北, 旋轉而行, 從何旋轉, 復又旋轉
(ASV) The wind goeth toward the south, and turneth about unto the
north; it turneth about continually in its course, and the wind returneth
again to its circuits.
(구역) 바이 남편으로 불다가 븍편으로 도리키고 이리 불며 뎌리 불
어 부던 곳으로 다시 도라가고
(게일-이원모역) 바람은 定한 方向이 업시 南으로 불다가 北으로 불며
(개역)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븍으로 도리키며 이리 돌며 뎌리 도라 부
던 곳으로 도라가고
개역(1938)은 이 구절에서 구역(1911)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다만
“남편”을 “남”으로 “븍편”(북편)을 “븍”(북)으로 “편” 자를 빼고 읽은 것이 다
르며 “븍편으로 도리키고”를 “븍으로 도리키며”로 “…고”를 “…며”로 바꾼
것이 다를 뿐이다. 물론 “불다”를 “돌다”로 바꾸어 “이리 불며 뎌리 불어”(구
역)를 “이리 돌며 뎌리 도라”(개역)로 읽은 것도 다른 점이다.
그런데 이렇게 개역(1938)과 거의 똑같은 구역(1911)은 뒷부분에서 “이리
불며 뎌리 불어 부던 곳으로 다시 도라가고”라고 독특하게 읽었는데 이 부분
은 브리지만-컬벗슨역(1864)의 “풍반선우소선지처”(風返旋于所旋之處)를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 “부던 곳”이라는 표현이 브리지만-컬벗슨역
(1864)의 “소선지처”(所旋之處)를 그대로 읽은 것인데 “(부던) 곳”이라는 뜻
의 “처”(處)가 바로 그 흔적이다. 다른 한문성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표현이
기 때문이다. 개역(1938) 역시 브리지만-컬벗슨역(1864)의 고유한 이 표현을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구역(1911)이나 개역(1938)은 독자적인
읽기를 보여주고 있다.
23) 미국성서공회 도서관에 있는 1875년판은 “北”을 “比”로 잘못 표기하고 있다.
쉐레쉐브스키 주교와 초기 한글성경 / 이환진 47
그러면서도 개역(1938)은 히브리어 본문의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반영하고
자 노력하고 있는데, 특히 “이리 돌며 뎌리 도라”는 “쏘베브 쏘베브 헬레크”
סובב סובב הולך) )에 나오는 “돌다”는 뜻의 동사(* סבב )를 그대로 반영하고자 한
노력을 찾아볼 수 있다.
게일-이원모역(1925)은 이 구절에서 독특한 표현을 선보이는데 그것은 “定 方向이 업시”라는 표현이다. 또한 “南으로 불다가 北으로 불며”라는 표현
도 바람이 반복하여 부는 모습을 이렇게 단순하게 표현하고 있다.
1:7
(대표본) 百川歸海, 海不見其溢, 河水從所來而來, 復從所來而去
(브리지만-컬벗슨역) 河悉流立於海, 而海尙不盈, 河所來之處, 河悉復
歸之
(북경어구약) 江河都往海裏流, 海郤不滿溢, 江河往何處流, 流了又流
(쉬운 문리역) 諸河流於海, 海不滿溢, 河往何流, 流而復流
(ASV) All the rivers run into the sea, yet the sea is not full; unto the
place whither the rivers go, thither they go again.
(구역)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흘너 드러가되 바다는 지아니도
다 강 물은 어 곳으로 흐르던지 줄곳 흐르니라
(게일-이원모역) 江河 넘치지 아니 바다로 쉬지 아니고 흘너
드러가니
(개역)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흘으되 바다를 채오지 못하며 어나 곳으
로 흘으던지 그리로 련하야 흘으나니라
개역(1938)의 앞부분의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흘으되”에서 “모든 … 다”
는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1902)에만 있는 “제”(諸)를 반영하는 표현이다.
물론 이어서 나오는 “바다를 채오지 못하며”는 대표본(1854)의 “해불견기
익”(海不見其溢)을 그대로 옮긴 듯하다. 특히 “견”(見)이라는 수동태 표현을
“채우다”라고 반영한 듯하다. 그렇지만 이어서 나오는 “어나 곳으로 흘으던
지”는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1902)의 “하왕하류”(河往何流)를 반영한 듯
하다. 물론 마지막 부분의 “그리로 련하야 흘으나니라”는 개역(1938)만의 고
유한 읽기로 보인다. 어디에서도 “연(連)하여 흐르다”라는 표현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모두 다 “그리로 다시 흐른다”는 식으로 읽고 있기 때문이다.
게일-이원모역(1925)의 시작 말인 “강하”(江河)는 두 번씩이나 반복되는
쉐레쉐브스키 관화역본(1875)의 번역어이다. 이어서 나오는 부분은 이 역본
의 번역 성격에 맞게 간결하게 줄여 읽고 있다.
구역(1911)은 개역(1938)과 거의 비슷하나 뒷부분에 나오는 “강 물은 어
48 성경원문연구 제28호
곳으로 흐르던지 줄곳 흐르니라”가 개역(1938)과 조금 다르다. 특히 “강 물
은”은 개역(1938)이 생략한 부분이다. 그리고 구역(1911)의 “줄곳 흐르니
라”를 개역(1938)은 “련하야 흘으나니라”라고 하여 “줄곳”을 “그리로 련하
야”로 고쳐 읽었다.
물론 히브리어 원문은 “강물은 나왔던 곳으로 돌아가 거기서 다시 흘러 내
린다”(민영진)라고도 읽을 수 있다. 민 교수님의 연구에 따르면 이 부분은 계
속되는 동작을 나타낼 수도 있고 반복되는 동작을 나타낼 수 있다.24) 히브리
어 동사 “슈브”( שוב )가 이런 기능을 둘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구역(1911)은 쉐레쉐브스키 북경관화역 구약(1875)을 따르고 게일-이원모역
(1925)과 개역(1938)은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1902)을 따랐다고 말할 수
있다.
1:8
(대표본) 萬物運動, 言之不能盡, 覩之不勝覩, 聞之不勝聞,
(브리지만-컬벗슨역) 萬物以勞苦而盈人不勝言之, 目不能飽於視, 耳不
能足於聞
(북경어 구약) 若將萬事一一題論, 必致疲乏, 人也不能說盡, 眼無時看
飽, 耳無時聽足
(쉬운 문리역) 若以萬事一一論之, 必致疲乏, 人不能言盡, 目無時視飽,
耳無時聞足
(ASV) All things are full of weariness; man cannot utter it: the eye is
not satisfied with seeing, nor the ear filled with hearing.
(구역) 만물의 슈고를 사의 말노 능히 다 수 업니 그런고로 눈은
보기에 부르지아니고 귀는 듯기에 지아니니라
(게일-이원모역) 萬物의 運動이 無盡야 눈으로 보며 귀로 드를 수
업거니와
(개역)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노 다 할수 업나니 눈은 보아도 죡함
이 업고 귀는 드러도 차지 아니 하는도다
먼저 게일-이원모역(1925)의 “萬物의 運動”은 대표본(1854)의 “만물운동”
(萬物運動)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 또한 “無盡여”의 “진”(盡) 또한 대표본
24) 민영진, “전도서 1:7b의 이해”, 「현대와 신학」 12 (1989년 5월), 7-20. 이 글의 영어 번역으로
는 Young-Jin Min, “Notes: How do the rivers flow? (Ecclesiastes 1.7)”, The Bible Translator,
42:2 (April 1991), 226-231을 보라. 대표본(1854)과 브리지만-컬벗슨역(1864)과 쉐레쉐브스
키 쉬운 문리역(1902)이 “복”(復)이라는 용어로 또 ASV도 “again”이라는 용어로 이렇게 읽
었다. 그런데 쉐레쉐브스키 북경관화역 구약(1875)은 “흐르고 또 흐른다”[流了又流]로 읽
어 계속되는 동작으로 이 용어 “슈브”( שוב )를 이해하였다.
쉐레쉐브스키 주교와 초기 한글성경 / 이환진 49
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보인다. 물론 쉐레쉐브스키의 두 한문성경도 이 용어
를 대표본(1854)에서 빌려온 듯하다.
구역(1911)과 개역(1938)의 “만물의 슈고”와 “만물의 피곤함”에서 “만물”
은 대표본(1854)의 시작 말인 “만물운동”(萬物運動)의 “만물”에서 온 듯하다.
물론 브리지만-컬벗슨역(1854)의 “만물이노고”(萬物以勞苦)의 “만물”도 대
표본(1854)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구역(1911)의 “슈고”는 물론 구역(1911)의 고유한 읽기이지만 브리
지만-컬벗슨역(1864)의 “노고”(勞苦)와 비슷하다. 이 “슈고”라는 번역어는 개
역(1938)의 1:13에서 “슈고하게 하신 것이라”라는 표현에 또한 등장한다. 이
와 달리 개역(1938)은 여기서 “만물의 피곤함”으로 읽는데 “피곤함”은 쉐레
쉐브스키의 두 한문성경에 나오는 “피핍”(疲乏)을 옮긴 것이 분명하다. “피
핍”(疲乏)은 “피로함, 쇠약함”이라는 뜻(동아 1173)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영어성경 ASV의 “weariness”를 옮긴 것으로 볼 수도 있다. 1891년에 나
온 스캇의 영한사전(339쪽)에 “Wearied, weary”를 “곤다, 피곤다”라고 설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구역(1911)의 “사의 말노 능히 다 수 업니”는 대표본(1854)의
“언지불능진”(言之不能盡)이나 이 표현을 거의 그대로 따른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1902)의 “인불능언진”(人不能言盡)을 거의 그대로 반영한 듯하
다. 특히 구역(1911)의 “능히”라는 말이 그 흔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구역(1911)의 “사의 말노”나 개역(1938)의 “사람이 말노”에 들어
있는 “사람”은 원문에는 없는 표현으로 쉐레쉐브스키의 두 한문성경에만 등
장하는 표현이다.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1920)은 할주(割註)에서 이 점
을 분명히 표현하고 있다. “또는 만물 운동을 말로 다 할 수 없다”는 뜻으로
“혹작만물운동언지불능진”(或作萬物運動言之不能盡)이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역(1911)이나 개역(1938)의 “사람”은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1902)에서 비롯된 표현인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 부분에서 구역(1911)은 “그런고로 눈은 보기에 부르지아니고
귀는 듯기에 지아니니라”라고 읽는데 이 부분에서 “그런고로”는 구역
(1911) 만의 독특한 읽기이지만 이어지는 부분은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
(1902)의 할주에서 비롯된 부분이다. 그 할주는 “원문작목불포어시이불만어
문”(原文作目不飽於視耳不滿於聞)이라고 하여 “원문에는 눈은 보기에 배부
르지 않고 귀는 듣기에 차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다. 다만 개역(1938)의 “눈은
보아도 죡함이 업고”라는 표현은 개역만의 독특한 읽기이다. “족함이 없다”
는 말은 브리지만-컬벗슨역(1864)의 “이불능족어문”(耳不能足於聞) 가운데
50 성경원문연구 제28호
“불능족”(不能足)을 옮긴 듯한 인상을 준다. 아니면 영어성경 ASV의 “the
eye is not satisfieth with seeing”을 그대로 옮긴 듯하다.
1:9
(대표본) 有必復有, 成必再成, 天下之物, 咸非新創
(브리지만-컬벗슨역) 曩所有者後將復有之曩所作者後將復作之, 則日
下無所新創
(북경어 구약) 已有的事後必又有, 已成的事後必又成, 日下並無新事
(쉬운 문리역) 已有之事, 後必復有, 已成之事, 後必復成, 日下並無新
事
(ASV) That which hath been is that which shall be; and that which hath
been done is that which shall be done: and there is no new thing under the
sun.
(구역) 임의 잇 일이 후에 다시 잇고 임의 일운 일이 후에 다시 일우
리니 날 아래 도모지 새 일이 업니라
(게일-이원모역) 過去事가 다시 잇고 現在事가 後에도 잇서 世上에 새
일이 업니
(개역) 임의 잇던 것이 후에 다시 잇겠고 임의 한일을 후에 다시 할지
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업나니
구역(1911)과 개역(1938)의 공통 용어 가운데 특징적인 것은 “임의”(이미)
라는 용어이다. 그런데 이 표현은 쉐레쉐브스키의 두 한문성경 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어이다. 곧 “이미”라는 뜻의 “이”(已)가 바로 그 용어인데 구역
(1911)과 개역(1938)은 “임의 … 임의 …”로 반복하여 쉐레쉐브스키의 두 성
경과 똑같이 그대로 읽는다. 그런데 두 번 반복되는 “후에”라는 말은 브리지
만-컬벗슨역(1864)의 반복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쉐레쉐브스키의
두 성경에는 이 말이 반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역(1911)에 반영되어
있는 브리지만-컬벗슨역(1864)의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것을 개역
(1938)은 그대로 물려받고 있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중요한 용어는 “있다”[有]와 “이루다”[成]인 듯한데,
구역(1911)의 “있다 … 이루다”라는 반복적인 표현을 개역(1938)은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있다 … 하다”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표현한다. 구역(1911)의
“있다 … 이루다”라는 표현은 대표본의 “유(有) … 성(成)”에서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 구조는 브리지만-컬벗슨역(1864)도 그대로 따른다. 또한 쉐
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1902)도 그대로 따랐는데 구역은 이 전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달리 개역(1938)의 “있다 … 하다”라는 표현은
쉐레쉐브스키 주교와 초기 한글성경 / 이환진 51
영어성경 ASV의 “be … do”의 구조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곧 영어성경 ASV의 입김을 한글 개역(1938)에서 찾아볼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히브리어 본문의 “하야(* היה ) … 아싸(* עשה )”를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보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리고 개역(1938) 마지막 부분의 “새것이 업나니”는 분명히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1902)의 “(日下並)無新事”를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히브리어 본문에도 같은 말이 나오지만 정확하게는 “새로운 것이 아무
것도 없다”로 히브리어 본문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1:10
(대표본) 如言新創, 何諦視之, 則自昔已然
(브리지만-컬벗슨역) 有何者, 人可論之云. 視哉斯乃新也, 蓋我儕之先
上古己久有之矣
(북경어 구약) 有一件事人若指著說, 這是新事, 那知在我們已前的世代
已經有了
(쉬운 문리역) 若有事, 人指之曰, 斯乃新事, 不知在我儕以先之世已有
矣
(ASV) Is there a thing whereof it may be said, See, this is new? it hath
been long ago, in the ages which were before us.
(구역) 무 일이 잇 사이 닐기를 볼지어다 이 거시 새 일이라
고 가히 수 잇냐 우리 젼 셰샹에도 임의 잇섯니라
(게일-이원모역) 무일이던지 새일이라 지말나 過去世代에도 잇섯 니라
(개역) 무엇을 가라쳐 닐아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잇스랴
우리 오래 젼셰대에도 임의 잇섯나니라
개역(1938)의 앞부분인 “무엇을 가라쳐 닐아기를”은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
리역(1902)의 “약유사, 인지지왈”(若有事, 人指之曰)에서 “약”(若)만 빼고 그
대로 읽은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나오는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또한 쉐레
쉐브스키 쉬운 문리역(1902)의 “사내신사”(斯乃新事)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또한 “우리 오래 젼셰대에도 임의 잇섯나니라”도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
(1902)의 “재아제이선지세이유”(在我儕以先之世已有)를 거의 그대로 반영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오래 젼셰대”에서 “세대”라는 말은 “세”(世)를
약간 바꾸어 읽은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1:4에도 나오는 “세대”라는 용어
는 물론 대표본(1854)의 용어이다. 이 구절에서 대표본(1854)은 이 용어를 사
용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52 성경원문연구 제28호
이와 달리 구역(1911)의 “무 일이 잇 사이 닐기를”은 브리지만-
컬벗슨역(1864)의 “유하사, 인가론지운”(有何事, 人可論之云)을 그대로 반영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어서 나오는 “가히 수 잇냐”는 “인가론지운”
(人可論之云) 가운데 “가”(可)를 반영한 듯하다.
4. 맺는 말
전도서 1장 전체 가운데 나머지 부분인 1:11-18도 분석하였지만 지면 관계
상 이 글에 다 싣지 못하였다.25) 쉐레쉐브스키 주교의 두 한문성경인 북경 관
화역 구약(1875)과 쉬운 문리역(1902)이 초기 한글성경에 미친 영향은 위의
분석과 거의 같다.26) 이렇게 위의 분석은 전도서 1:1-10에 국한한 것이지만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1902)의 영향이 초기 한글성경인 개역(1938)과 게
일-이원모역(1925)에 얼마만큼 들어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개역(1938)은 모
두 10절 가운데 적어도 5절-6절에서 부분적으로 그 용어와 표현을 빌려와 읽
고 있다. 곧 한글 개역(1938)의 약 50-60%의 번역어와 표현이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의 영향인 듯하다. 게일-이원모역(1925)은 3절에서 용어와 표현
을 빌려왔다. 구역(1911)도 3절에서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1902)의 영향
을 보이고 있다.
또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쉐레쉐브스키 주교가 그의 쉬운 문리역(1902)
을 펴낼 때 자신의 관화역본(1875)을 대본으로 삼고 대표본(1854)을 참조하
여 비교적 운율을 맞추고자 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
역(1902) 속에는 그의 관화역본(1875)도 들어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27)
25) 초기 한글성경에 구체적으로 어떤 표현과 용어가 들어와 있는지 분석한 것도 지면 관계상
싣지 못한 점을 양해 바란다. 자세한 사항은 초기 한글성경과 한문성경의 영향관계를 연구
한 단행본을 펴낼 때 싣기로 한다.
26) 필자는 잠언과 아가 그리고 애가를 같은 방식으로 분석해 보았는데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
리역(1902)이 개역(1938)에 미친 영향은 위의 분석 결과와 거의 같다. 곧 50-60%의 영향을
용어와 표현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구역(1911)과 게일-이원모역(1925)의 경우도 거의 비슷
하다.
27) 쉐레쉐브스키의 두 한문성경은 우리말 초기 성경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데 이는 성경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탁사 최병헌 목사 또한 그의 대표 저서, 만종일련(萬宗一臠)에서 자
신의 웨슬리적 토착화 신학을 말하는 가운데 “上主를 見하는 자니”라는 부분에서 쉐레쉐브
스키 쉬운 문리역(1902)의 마태복음 5:8과 누가복음 10:27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盡心盡性고 盡意盡力하야 上主를 愛며 愛隣如己야
上主의 誡命을 守 者들이오
쉐레쉐브스키 주교와 초기 한글성경 / 이환진 53
<주요어>(Keywords)
쉐레쉐브스키 주교, 개역(1938), 구역(1911), 게일-이원모역(1925), 쉐레쉐
브스키 쉬운 문리역(1902), 쉐레쉐브스키 관화역본(1875), 대표본(1854), 브
리지만-컬벗슨역(1864).
Bishop Schereschewsky, Korean Revised Version (1938), Korean Old
Version (1911), Gale Version in Korean (1925), Schereschewsky’s Easy Wenli
Version (1902), Schereschewsky’s Peking Colloquial Old Testament (1875),
Wenli Delegates’ Version (1854), Bridgman and Culbertson’s Version (1864).
(투고 일자: 2011. 1. 20; 심사 일자: 2011. 2. 25; 게재 확정 일자: 2011. 3. 14)
心이 淨潔 자 福이 有니 彼等이 上主를 見 것이오
특히 위의 표현 가운데 “진심진성(盡心盡性)고 진의진력(盡意盡力)야”라는 표현은 누가
복음(10:27)에 나오는 표현이지만 마태복음(22:37)에도 거의 같은 표현이 나온다. 이 표현은
탁사 신학의 핵심 구절이라고 말할 수 있다. 탁사는 그의 마지막 신학적 요약인 “수양(修養)
의 요결(要訣)”에서도 특히 “심”(心)과 “성”(性)의 관계를 중용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기 때문
이다. 이렇게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1902)은 한국인 신학자들의 신학화에도 지대한 공
헌을 남긴다. 이렇게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1902)은 한글성경 개역(1938)의 표현과 용어
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신학화 작업에도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유대인 쉐레쉐브스키
주교는 중국의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언어생활과 신학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54 성경원문연구 제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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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성경원문연구 제28호
<Abstract>
Bishop Schereschewsky and the Earlier Korean Bibles
Prof. Yi, Hwan-Jin
(Methodist Theological University)
Born as a Lithuanian Jew and an American immigrant, Bishop Samuel Isaac
Joseph Schereschewsky (1831- 1906) has deeply influenced Chinese and Korean
Christians with two of his Bible translations, that is the Peking Colloquial Old
Testament (1875) and the Easy Wenli Version (1902). More specifically, the
Korean Revised Version (1938) and Gale’s Korean translation (1925) were
heavily indebted to his Easy Wenli Version in terms of their dicta and wordings.
In case of the Korean Revised Version (1938), about 60% of its wordings have
been influenced by Bishop Shereschewsky’s Easy Wenli Bible (1902).
Schereschewsky was given the title of a mission bishop by the American
Episcopal Church after he completed the Peking Colloquial Old Testament
(1875). He participated in the project to translate the Bible in colloquial
Mandarin. In this project he was in charge of translating the Old Testament
because of his excellent knowledge of Hebrew and Aramaic. During his
translating job, he consulted many commentaries written by Jewish medieval
scholars such as Rashi and Ibn Ezra. He also read many German commentaries
written by German scholars like de Wette because he had a background of
German scholarship that he had gotten in Germany during his teenage years.
His second Bible translation in classic Chinese, Easy Wenli Version (1902),
was done by his first Old Testament Version together with the Delegates’s
Version in Wenli (1854). As a matter of fact, his first Chinese translation can be
said to be the mother version of the Chinese Union Version (1919), which is still
in use by Chinese Christians. His second version in Easy Wenli heavily
influenced earlier Korean Bibles like the Revised Version (1938) and Gale’s
Version (1925). Moreover, his Easy Wenli Bible, together with the Wenli
Delegate’s Version, was used by Korean theologians like Rev. Choi Pyung Hun
for his theology of indigenization.
In summary, Bishop Schereschewsky was a pioneer in Bible translation in
쉐레쉐브스키 주교와 초기 한글성경 / 이환진 57
China and Korea by the turn of the last century. Two of his Bibles should be
acknowledged as landmarks for Bible translations in Asi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