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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평
문제의 중심에 늘 “시간”(「눈송이 지층」중)이 위치해있다.
까닭은 모든 시인에게 시간은 그 자체로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하나의 숙명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영원과 순간 사이에서 오롯이 빛나는 미지의 언어는 순간을 향유했던 시간의 다양한 문양들을
시말로 부조시켜 인간학을 영원 쪽으로 잇대어 놓는 일종의 마물이라 하겠다.
속절없이 시간의 선분을 위를 질주하던 생이 시말에 의해 운명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말하자면 허만하 시인에게 언어는 운명과 마주선 시간의 문양들을 입체적으로
부조시킨 것인데, 그것이 바로 시말이 주소하는 의미의 공간이다.
시간은 별을 몽상하던 “어제의 소년”(「별이 내리는 터전」중)을 현재의 시인으로 만들어 주었지만,
그것이 직조하는 선율은 언제나 “슬픈 주제”(「가야 토기」중)로만 휘어져 시간의 소립자가
기실 죽음의 파편으로 덧대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직감은 불길하고, 언어는 치명적이다.
시간이 말과 겹쳐지고 표현이 욕구된다.
시를 쓴다는 것은 시간의 파열음을 언어로 순치시키는 행위이자, 분열된 자아와 상면하는 극적인 순간이다.
특히 금번 상재한 『시의 계절은 겨울이다』는 시간의 산책자인 시인의 삶―시간―세계를 언어로 응결시킨
작품집인데, 그것은 바로 시간의 “심연”에 새겨진 존재론적 “모순”(「나는 피와 흙이다」중)을 입체적으로
부조시킨 존재의 언어에 다름 아니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 위에 언어를 위치시키고, 나의 모든 것들이 시말로 발화된다. 이중성이 욕망된다. 존재의 몸짓이 자아의 떨림으로 전이되어 인간학이 참구된다.
말하자면 시인에게 시말은 나와 세계 사이에서 공명하는 전율의 순간을 언어로 승화시킨 존재의 울림이다.
시간의 존재가 존재의 시간으로 역전된다. 마치 언어가 존재와 시간을 매개시켜 나의 토포스를 지시하듯이,
시인의 그것은 언어가 이 세계의 진정한 주체임을 천명한 것이라 하겠다.
“언어의 불길”(「시의 계절은 겨울이다」중)이 활활 타오른다. 물론 시간의 문양이 잿빛으로 변해 생의
이편과 저편 사이에 심각한 균열이 생겨 생 전체가 늘 파탄 나는 것으로 종료하지만,
시인에게 언어는 반복의 형식으로 사라지는 시간을 이 세계에 붙잡아두는 유일한 수단이다.
시간의 천변만화경이 펼쳐진다. 물론 본성상 시간은 차이의 욕망을 표현하면서 반복으로 재귀하는 동일성이 지배하고 있기는 하지만, 시간은 언어의 지층을 든든하게 떠받치는 말의 궁극적인 심급이다.
내밀한 “어둠의 깊이”(「모래사장에 남은 물결무늬처럼」중)가 촉지되고, “회한의 별빛”(「겨울비 지적도」중)이 추상된다. 시간은 “바람의 방향”(「집중」중)처럼 존재를 예기치 않은 곳으로 이끌어 자아를 분열시킨다.
어쩌면 자연인 허만하에게 분열은 치명적이다 못해 극적이기까지 한데, 분열은 자연인 허만하를 시인 허만하로 탈바꿈시킨 소이연所以然이 고스란히 노정되어 있다. 나는 무엇이며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나는 왜 이 시공간에 존재하며 어디를 향해 질주하는가? 존재에 관한 물음이 늘 주체의 파열을 부추기는 순간에, 나는 진정한 나를 참구할 수 있는가?
산다는 것은 시간의 파편으로 조각난 나와 상면하는 자아의 운동이자, 그 모든 인간학적 현실을 성찰하는 반성의 도정이라 하겠다. 물론 이 세계의 모든 대상들과 공명하는 바로 지점에 ‘나’의 존재론적 정체성이 총체적으로 노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따라서 나의 위치는 언어가 발화되는 순간에만 그 전모를 드러내지만,
시인에게 시말은 존재가 발현되는 숭고한 의미의 공간이다.
때론 “역사의 절단면”(「맨드라미의 정오」중)에 기입된 생에의 여율을 내밀하게 응시하면서, 때론 “추락하는 정신”(「추락」중)을 곧추세워 정신의 위의를 한껏 드높이면서,
허만하 시인은 자신에게 속한 그 모든 시간의 문양들을 역동적인 언어로 재구하고 있다. 마치 언어의 위상학적 토포스가 존재의 위치를 결정하듯이, 시인이 전개한 일련의 시말운동은 언어라는 위치 추적 장치를 통해서 시간의 파편으로 조각난 존재의 흔적들을 재구한 것임에 틀림없다.
모세혈관보다 가는 실금이 처음으로 찾아들었던 것은 풍화를 앞둔 바위 표면이 아니라 살아 있는 주체의 내부였다. 더러움에 물드는 손을 실감하면서도 굴욕적으로 타협하는 자아와 바다 빛 잉크로 피난도시 밤하늘 별빛의 눈물겨운 아름다움을 쓰는 또 하나의 자아 사이의 균열을 계절보다 먼저 느낀 시인. 오렌지 빛 알전구 불빛이 밀려드는 바다안개처럼 흐른 대폿집 비좁은 화장실에서 손을 씻는 그 시인의 등은 어떤 경사면보다 적막했다. 「균열」전문
시간의 앞면에 “적막”이 가로놓여 있을 때, 시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너무도 크고, 인간학은 두 개의 “자아”로 분열된 채 반목하고 있을 따름이다. 하나의 우주가 서로 다르게 이해되고 의식은 심각하게 균열된다. 시간의 주체가 욕망의 주체로 표현되는 한, 주체는 늘 분열된 것으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바로 “더러움”과 “아름다움”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학의 미적 거리라 하겠다. 미의 이념은 숭고하고 현실은 끊임없이 파열하는 욕망으로 인해 분열이 조장된다. 시인이란 운명적으로 미와 현실 사이에 놓여있는 균열을 촉지하는 자이자, 그것을 언어로 봉합하는 운명의 타자이다.
결코 봉합이 불가능한 자아의 균열 사이로 시간이 하염없이 흐른다. 이를테면 허만하 시인에게 균열은 시말의 선험적 가정인데, 그것은 언어가 육화되는 말의 궁극적인 심급이자, 세계의 심연과 조우하는 인간학적 사태이기도 하다.
두 개의 자아 사이에 비스듬히 빗금 쳐진 존재의 비극이 촉지된다.
시간의 선율이 미지의 세계로 흘러내려 인간학을 불능으로 기술하게 되지만,
시인은 언어와 상면하여 자아의 존재론적 위치를 시말의 양력과 부력 사이에 위치시키고 있다.
말을 찾아 떠나는 언어의 미적 층위는 너무도 무겁고 존재는 분열되어 한없이 가볍다.
까닭은 시간의 “풍화” 작용에 의해 존재의 심연에 치유 불가능한 “실금”이 자리하여 주체의
분열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인이 전개한 일련의 시말운동은 세계의 균열을 시말로 순치시키는 숭고한 시살이의 진경을 육화시킨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언어가 존재의 집을 규정하고, 미의 숭고한 이념을 승화시키듯이, 시인에게 언어는 분열을 봉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적 도구이다. 언어가 존재하는 곳에 “순결한 정신”(「외로운 벼랑」중)이 고스란히 기입되어 있다. 주체 내부에 가로지르는 균열이 발화되고, 나의 존재론적 위치가 지정된다. 설령 “시인의 등은 어떤 경사면보다 적막”한 비애에 젖어들지만, 따라서 그 모든 균열의 원인이 현실과 “타협하는 자아”에서 비롯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시인이 전개한 일련의 시말운동은 “자신의 운명”(「별이 내리는 터전」중)적 시살이를 정신성으로 고양시키는 것이라 하겠다.
어둠이 없이 빛이 빛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애처로운 빛의 순수. 그것은 절망이 아닌 외로움이다. 따지고 보면 사람도 사물도 외로움으로 자신의 윤곽을 간신히 견디고 있다. 「윤곽」일부
어둠은 빛의 부재가 아니라, 순수한 어둠이 빈틈없이 과일처럼 안으로 충만해 있는 딴딴한 밀도다. 어둠이 없이 빛이 빛만으로 있는 순수는 눈부신 절망이다. 빛은 어둠을 만나 비로소 자기를 완성한다. 「간절곶 등대」일부
시말의 심연에 뜻 모를 “외로움”이 존재하고, 언어와 세계 사이의 균열은 심각하다. 까닭은 시간이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곳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그저 시간에 이리저리 이끌려 “절망”보다 더 깊은 고독의 심연을 응시하게 되는데, 그것이 “외로움”의 시적 정체이다.
시간이 의미의 체계를 아포리아로 이끌어가는 한, 생에 속한 그 모든 것들은 그리 명확한 개념으로 표현되지 되지 못한다. 사물의 “윤곽”은 불투명하고, 나의 존재론적 위치는 그리 쉽게 지정되지 않는다. “침묵”이 흐른다. 말이 사라지고, 개념이 흔적으로 퇴화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차라리 침묵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물 자체의 본성을 정확하게 기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빛의 순수”는 무엇이며 그것의 정체를 기술할 수 있는 언어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인간학적 아포리아가 생의 끝자락에 외로움을 부려놓을 때, 우리는 삶의 정체를 명확하게 윤곽지울 수 있는가? 모든 것이 휘어진다. 아니 본성상 인간과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진실은 곡면 위에서 휘어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로고스로 명명된 빛의 정체이자, 이 세계가 생성된 존재의 원리이다. 우주의 시원이 참구된다. 말하자면 “어둠”과 빛의 작용 속에서 진정한 “자기를 완성”하는 꿈을 꾸면서, 허만하 시인은 존재의 내밀한 “밀도”를 측량하고 있다.
때론 어둠과 “침묵의 두께”를 헤아리면서, 때론 “순수”와 “절망” 사이의 의미적 거리를 시말 속에 내파시키면서, “맹목의 시간”(「한 마리 매미가 우는 것은」중) 속에 가라앉은 “죽음의 심연”(「낙화암」중)을 응시하고 있다. 밤하늘을 영롱하게 가르는 “별빛”과 “지구의 바깥”으로 무한히 팽창된 어둠 사이에서 시인은 자신의 존재론적 위치를 가늠하고 있는데, 그것은 두 개로 분열된 자아를 봉합하여 진정한 자기를 성찰하고 있다.
이곳에 있는 나는 벌써
이곳에 없다 「절개지」일부
지구는 사라지기 이전의 이승의 기억을 자신의 육체에 상흔처럼 새겨둔다. 사람들은 짙푸른 바다 물빛의 과묵한 부름에 호응하여 낡은 지도 위를 음악처럼 흐르는 시간의 발자국을 강이라 부른다. 저물어가는 쓸쓸한 들길 한가운데서 불타오르는 눈송이처럼 치열한 정신 시간의 발자국. 「시간의 상흔」일부
“삶의 기슭”(「바람의 기슭」중)이 절개지로 파헤쳐져 시간의 “비탈” 위를 위험스레 종주한다. 자기에게 이르는 길은 너무도 멀고,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하염없이 떠밀려 미망의 세계 근방을 배회하게 된다. 도대체 나는 어디로 점점 떠밀려 존재의 끝자락에 당도하는가? “언덕의 기억”은 점점 황폐화되어 가고, 삶은 속절없이 생이 아닌 곳에 당도하게 된다. 나는 부재다. 나의 언어는 부재의 언어이다.
나는 “바로 그 순간”(「의자의 교감」중)을 향하는 주체였다가, “벌써” 이미 이곳이 아닌 곳으로 사라져버리는데, 그것은 영원을 영원히 전유하지 못한 나의 존재론적 운명 때문이다. 도대체 나는 “내 안의 비탈”을 어떤 태도로 올라야 하는가? “정신의 심지”(「석유 냄새의 방정식」중)를 곧추세워 시간의 내밀한 움직임을 예의주시하지만, 그저 불연 듯이 나는 내가 없는 곳으로 슬그머니 미끄러져 간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된다.
허망하다. 시간의 운동이 자아의 균열을 만들고, 마침내 인간학적 현실을 파열하는 것으로 종료시킬 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어쩌면 허만하 시인에게 시간에게 속한 모든 것들은 “어느덧”으로만 표상되는 미망의 흔적인지도 모른다. 아니 시간은 야금야금 생을 갉아먹어가 부지불식간에 인간학을 시간의 타자 편에 위치시키게 되는데, 그것은 “순수한 언어”(「그럴 수 없이 투명한 푸름」중)와 상면하게 되는 근본 원인이라 하겠다.
허만하 시인에게 시간은 “참된 정신”을 훼손하는 “상흔”만을 남겨놓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시간의 발자국”이 인간학의 자취를 의미의 파편들을 생의 뒷면에 떨구어 놓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시원”이 참구되고, 인간학적 자취에 남아 있는 의미의 궤도가 추적된다. 물론 시간의 흔적들이 “망각”과 “기억” 사이에 존재하는 상흔을 표상하지만, 따라서 시간의 양력과 부력 사이에 “팽팽한 긴장”의 강도와 “미세한 높낮이의 차이”들이 기입되어 있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시인에게 시간은 존재의 의미가 참구되는 따라서 진정한 자기를 찾아 떠나는 의식의 도정이라 하겠다.
정신의 존재는 의미의 존재이고, 시간의 존재이다. 마치 강의 수많은 궤적들 내부에 기입된 시간의 흔적들이 상흔을 표상하는 강도와 차이의 흔적들인 것처럼, 시간의 존재는 존재의 시간 전체를 “고난”(「사랑의 별빛」중)으로 기록하게 된다. 비록 시인이 전개한 일련의 시말운동이 시간의 운동 전체를 참된 정신의 “활력”으로 그 의미론적 토포스를 지정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벼려진 정신에의 그 모든 운동은 망각과 기억 사이를 “상처”로 기록한 것에 다름 아니다.
날개를 치며 날아오르는 거대한 폭포처럼 수직으로 서 있는 벼랑은 암반이 아닌 정신의 밑바닥에 뿌리를 박고 있다. 사람들은 평생에 걸쳐 기어이 벼랑 끝에 올라서지만, 그것은 벌써 한 마리 날지 않는 또 다른 세계의 아슬아슬한 벼랑 끝이다. 「벼랑에 대하여」일부
날개는 갇힌 공간에서 태어나는 사상이다
한 방울 눈물이 모든 것을 말하는 이 시대에
무리를 떠나 날고 있는 한 마리 새여
바람의 벽을 헤치는 너의 날개 아직 성한가 「날개에 대하여」일부
벼랑은 시인이 위치하는 정신의 자리이자, 시말이 올곧게 육화되는 언어의 자리이다. “슬픈 결심의 표현”이 추락하는 정신에 의해 부조된다. 말하자면 벼랑은 정신을 떠받치는 존재의 밑면이자, 시간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존재의 주상절리들이다. 또 다른 비상을 위해 추락이 꿈꾸어진다. 물론 허만하 시인에게 벼랑은 “순간”과 “영원”(「눈동자 거울」중)을 변증법적으로 매개시키는 정신의 의지가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지만, 역으로 그것은 가장 완벽한 “최후의 낙하”가 가능한 죽음에의 욕망을 대리표상하고 있다. 모순이 파동치고, 존재에 응결된 그 모든 것들이 휘어진다.
수직의 정신성이 시간의 곡면에 기술된다. 마치 “수직”의 정신성의 “밑바닥”에 “평생”이라는 시간의 욕망이 매개되어 있는 것처럼, 벼랑은 인간에게 속한 모든 욕망의 체계를 파열시키는 양가적인 의식을 대변하는 구성체라 하겠다.
추락은 상승이고, 상승에의 의지는 또 다른 낙하의 자유이다. “고뇌의 내력”(「전후의 내력」중)이 추상되고, “세계의 아슬아슬한 벼랑 끝”에 다다른다. 말하자면 시인에게 벼랑은 존재의 존재성이 응시되는 인간학의 심연이자, 타나토스의 의미를 구조화시키는 올곧은 정신의 높이이자, 인간학을 상징하는 의식의 등가물이기도 하다.
어쩌면 금번 상재한 『시의 계절은 겨울이다』는 “심연”, 즉 인간과 그것이 속한 세계의 심연을 시간 속에 응결시킨 것이자, 그 시간의 문양을 시인 자신의 자아와 극적으로 상면시킨 존재의 노래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시인에게 ‘나’라는 주체의 존재론적 층위가 시말을 발화시키는 의식의 근원이자, 반드시 규명되어야만 하는 인간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마치 새에게 “날개”가 하강과 상승을 매개시키는 존재의 심연이듯이, 시말은 나의 심연에 존재하는 “지상의 언어”를 숭고한 이념으로 승화시킨 존재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때론 산산이 조각나 파편처럼 휘날리는 “인생”의 의미를 참구하면서, 때론 “신화의 은유” 속에 침전된 “날개의 이데올로기”를 추상하면서, 시인은 자신이 처한 존재론적 토포스를 가늠하고 있다. 도대체 비상의 수단은 무엇이고, 그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왜 시인은 벼랑과 날개 사이에서 혹은 추락의 욕망과 상승의 의지 사이에서 시말을 추동하는가? 사실 이 지점이 중요한데, 그것은 말이 말해질 수 있는 언어의 곡면이자, 의미의 휨 작용이 일어나는 의식의 변곡점이기 때문이다.
허무와 허무가 서로를 비추는 1억 광년 하늘을 말굽소리도 없이 달리는 한 마리 말. 영하의 온도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말. 시여, 교만하지 마라! 중심도 없이 터지는 자욱한 불의 물보라 사이를 달리는 말의 영원은 태어나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한순간 별빛이다. 「말머리 성운」일부
인간의 언어로 오염되기 이전의
야생의 순수 「야생의 빗소리」일부
언어는 벌써 의미를 넘어
언어 이전의 침묵에 가까워지고 있다.
어떠한 언어도 닿은 적 없는 지평선 직전에서
그는 벌써 자기 자신의 배경이다 「오백 광년의 노을」일부
언어가 질주하고 파열하는 자리에 나의 온전한 모습이 존재한다. 까닭은 언어가 존재를 형용할 수 있는 순수한 표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언어의 지시적 한계가 세계의 한계이기는 하지만, 인간은 그 언어라는 기호를 통하지 않고는 어떤 의사소통도 가능하지 않다. 언어를 참구하는 시인, 언어에 온 생애를 기투하는 시인, 그가 바로 인간 허만하의 존재론적 정체이자, “자아의 정체”(「한 마리 매미가 우는 것은」중)를 심문하는 시인의 위치이다.
역으로 그것은 언어가 부조되고 응결되는 지점에 시인 허만하의 인간학적 토포스가 고스란히 노정된 것이라 하겠다. “태초의 어둠”이 응시되고, “허무와 허무” 사이를 가로지르는 “별빛” 같은 말이 추상된다. “세계의 기원”은 말의 기원이다. 비록 시인이 두개의 말(言語와 馬)사이에서 의미의 존재방식을 탐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두 개의 말은 이 세계를 규정하는 “말의 영원”이다.
“언어의 리듬”(「돌고래가 뛰어오르는 것은」중)이 부드럽게 이 세계를 가르자 말의 “순결한 질주”가 비로소 시작된다. 이를테면 시인에게 말은 “뜨거운 언어”가 시말로 육화되는 존재의 여율이기도 한데, 그것은 “어둠의 극한” 속에 움터져 나오는 말의 폭발이다. 설령 그 말이 표현의 한계로 인해 발화되자마자 “즉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만, 시인에게 “영하의 온도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말”은 영롱한 “한순간 별빛”처럼 존재가 투사된 의미의 구조에 다름 아니다. 때론 말의 “야생의 순수”를 추적하면서, 때론 말의 지층 내부에 기입된 “백악기”
어디쯤의 시간을 몽상하면서, 시인은 “인간”에 의해 오염되지 않는 순수한 기호를 찾아 떠나는데,
그것이 바로 시인이 시를 쓰는 이유이다.
“5월의 싱싱한 햇살”이 “1억 년 전의 빗방울 자국”에 투사시키면서, 시인은 존재의 시원을 참구하고 있다.
시간이 만든 “기억”의 “소실점”(「바다」중) 밑에 순수가 살아 숨쉬고,
시말 속에 기입된 “영원의 거울”(「흰 종이의 전율」중)이 존재의 의미를 반조하게 만든다.
“오백 광년”의 시간이 흐른다. “최후의 사랑”을 꿈꾸며 존재의 “비탈길” 위에서 언어와 세계 사이의 의미적 거리를 측정해보지만, “침묵”이 매개된다.
아니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억겁의 시간 속에 “우주”는 무엇이고, “돌아보면
세계는 벌써 다른 이름의 세계”로 존재하는 그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일어날 수 있는 사태 너머에 존재하는
그 무엇인가에 대하여 늘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 마땅하다.
물론 허만하 시인의 그것이 “목숨의 고요”와 “죽음의 침묵”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죽음”(「눈동자 거울」중)을 시말 속에 응고시킨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답이 없는 것이 문제의 정답”(「석유 냄새의 방정식」중)이라는 사실 앞에 미궁에 빠지게 된다. 출구는 부재하고 입구와 출구가 뫼비우스의 띠로 엇물려 있다. 시간의 진리가 발설되지 못한다. “오백 광년의 장대한 노을”이 이 세계의 배후에 존재하는 한, 우리는 언어가 발화되기 이전의 침묵 속에 스스로를 유폐시켜야만 한다.
까닭은 세계를 언어로 “이름”하는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허만하 시인에게 언어란 영원히 풀 수 없는 아포리아 근방쯤에 위치한 일종의 마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세계의 한계 밑에 언어의 한계가 침전되어 옴짝달싹하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늘 “엄정한 논리의 향기”(「세잔의 시론」중)를 쫓아 “역광”으로 진리의 “그리움”을 표현해보지만, 언어는 “순결한 전율”(「뿔의 기억」중)을 내부에 내파되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
나는 언어가 그 위에 시를 쓰는 눈부신 설원이었다. 분명히 내 안에 깃들어 있으면서, 나와 무관히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언어. 나를 앞서 정신의 지도를 만들고 나를 앞서 영혼의 풍경을 빚어내는 누구의 것도 아닌 투명한 언어. 「나는 시의 현장이다」일부
나의 언어는 우주를 횡단하며 휘어질 줄 모르는 별빛의 직선이다. 영하의 겨울 하늘 하늘 별자리의 명석한 깜박임이다. 정신과 육신이 갈라서기 이전의 캄캄한 소용돌이가 내뿜던 은빛 시간의 물보라. 불멸을 허용하지 않는 시간의 물보라에 젖었던 광물의 침묵. 기어이 꽃잎처럼 입술에 떨어지는 최초의 언어를 낳고 마는 침묵의 인내. 나는 이름 없는 한 송이 들꽃의 고독과 호명되기를 애절하게 기다리던 미지의 꽃 이름 틈새에서 치열하게 내리는 폭설처럼 타오르는 언어의 불길이다. 「시의 계절은 겨울이다」일부
“시는 벙어리 소녀 눈빛의 순결한 반짝임이다”(「바다 물빛에 대한 몇 가지 질문」중). “시는 하루살이의 날개”(「하루살이의 날개」중)처럼 빛나는 순결한 생에의 열망이다. 따라서 시는 언어라는 단독자와 상면하는 순간에만 움터오는 미지의 “추억”(「기다림은 언제나 길다」중)이기도 한데, 그것은 “물질의 빛”(「철길에 대한 에스키스」중)을 반조하는 “외로운 되풀이”(「세잔의 시론」중), 즉 반복의 도정이다.
“인간의 은유”(「석유 냄새의 방정식」중)가 추상되고, “흰 종이에 기억시키는 일”(「흰 종이의 전율」중)이 시 쓰기를 추동하는 존재론적인 운동인 한, 시말은 “앙상한 의지”(「불타오로는 가을 숲까지」중)와 “요절한 나비의 영혼”(「나비의 이륙」중) 사이에서 배회하는 무의 운동이다. 정신의 온전한 의미가 참구되고, 나의 존재론적 위치가 찾아진다. 도대체 나는 시를 통해서 나의 어떠한 면모를 시말 속에 응고시키는가? 분명 허만하 시인의 『시의 계절은 겨울이다』는 나의 존재론적 토포스를 시말 속에 응고시킨 것이라 할 때, 나는 시를 통해서 어떤 나와 극적으로 상면하는가?
타불라 라사(tabula rasa) 혹은 여백의 존재성. 시인에게 언어는 미지의 가능적 질료이자, “영혼의 풍경”이 투명하게 표백되는 순정한 의식의 산물이다. 태초에 언어가 있고, 비로소 이 세계가 규정된다. 말하자면 언어는 세미오틱 코라이자 쌩볼릭이기도 한데,
그것은 아직 구체적으로 부조되지 않는 “시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침묵”이 매개되고, 언어의 날 것과 극적인 상면이 이루어진다. 역으로 말과 상면만이 시인의 존재론적 위치를 규정하는 것이기도 한데, 그것은 시의 현장만이 나의 “정신의 지도”를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정신이고, 이 세계의 주체이다.
설령 “투명한 언어”가 존재 그 자체보다 앞선 그 무엇이자, 나와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궁극적인 기제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순백의 공간을 가르는 문자는 “새로운 세계”를 정초하는 나의 존재론적 위치라 하겠다. 말의 심연이 투시되는 꼭 그만큼 존재의 심연을 응시하면서, 시의 공간 내부에 자신의 존재론적 운명 전체를 기투하고 있다.
때론 “눈부신 설원” 같은 말의 곡면을 아슬아슬하게 종주하면서, 때론 “침묵의 깊이” 속에 스스로를 침전시키면서, 허만하 시인은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시말로 발화시키고 있다.
어쩌면 시인이란 운명적으로 겨울의 정신과 만나는 시간의 타자인지도 모른다. 냉혹했으며 더 이상 생이 존재할 수 없는 “세계의 극한”에 스스로를 위치시키면서, “여린 언어”의 싹을 틔우는 고난의 도정이 바로 시인이 위치하는 존재론적 자리라 하겠다.
“불멸”의 언어를 소망하지만, 혹은 “직선”의 언어로 우주의 심연을 직접 투시하고자 하지만, 언제나 존재의 자리에 “침묵”이 매개된다. 말을 찾아 겨울의 한복판을 질주하며 역설이 넘쳐나는 “파토스의 얼음”에 “언어의 불길”을 지핀다. 도대체 나는 무엇이며, 어떤 언어와 상면할 때, 가장 잘 살아낸 시인의 운명인가?
역시 언어의 심연에 침묵이 매개된다. 설령 시인의 그것이 겨울의 한 복판에 서서 “은빛 시간의 물보라”를 정면으로 응시하지만, 시말은 늘 “정신과 육신”이 상호 이반되는 모순 속을 가로지른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일치되는 혼융의 상태를 꿈꾸지만, 언어의 절단면에 늘 “고독”만이 침전된다. 때론 시간의
역사를 완벽하게 장악하는 불굴의 “강인함”을 키워가는
“초록색 풀”의 면모를 추상하면서, 때론 존재의 미세한 여율을 온몸으로 감득하는 “감수성” 또한 키워가면서, 시인 허만하는 새로운 말―우주를 건축해가고 있다. 마치 “인내” 속에서만 모든 분열을 봉합할 수 있는 “최초의 언어”가 생성되듯이, 시인의 그것은 모든 것이 결빙된 “예니세이 강”가 어디쯤을 배회하면서, 순수한 말의 위의를 정갈하게 참구하고 있다.
나의 존재론적 위치가 말이다. 나는 시간의 절멸 위에 소생을 꿈꾸는 언어이다. 나는 말의 수인이다. 또 나는 섬광 같은 “명석한 깜빡임”이기도 한데, 그것은 시의 에스프리가 나의 존재론적 위치를 결정하는 말의 입체화의 순간이다. 분명 금번 상재한 허만하 시인의 『시의 계절은 겨울이다』는 올곧은 절벽의 정신성을 견지한 채 자신에 속한 운명을 언어의 날 것과 적극적으로 상면시킨 것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시인에게 시를 쓰는 행위는 시간에 속한 덧없는 나의 진면목을 참구하여 투명한 언어로 부조시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모든 인간학적 사태들을 “침묵”으로 회귀시키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시인은 그 달아나는 시간을 언어 내부에 응결시켜 시간 속에 위치한 자아의 참모습을 탐구하고 있다.
**김석준: 충남 아산 출생. 1999년 《시와시학》에 시, 2001년《시안》에 평론 등단.
시집: 『기침소리』
저서: 『현대성과 시』『비평의 예술적 지평』『감히 시인에게 말을 걸다』』『무덤 속의 시말』
『박찬일 시세계의 본질-상징에의 저항』
2011년 미네르바 작품상(평론)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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