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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4월14일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수도회] 세상 한복판에서 ‘하늘 일’을 행하는 영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사도 4,32-37
† 복음 요한 3,7ㄱ.8-15
★ 사도행전은 신자들의 공동체가 재산을 함께 소유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함께 나누는 아름다운 모습은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한 것을 넘어, 그들의 형제적 친교를 보여 준다
(제1독서).
★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코데모와 예수님 사이의 대화가 계속된다.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니코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듣고 당신께서 아시는 것을 증언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기도 생활도 중요하고 말씀의 증거도
중요하였지만, 가장 귀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형제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실천이었습니다. 그들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난 사람들이었기에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들을 실천하며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 복음의 이상을
실현하였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복음도 그리스 말로 같은 단어인 “위로부터”와 “다시”
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어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위로부터
(또는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니코데모는 이 말씀을 자기가 육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뜻으로 알아들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십니다.
니코데모는 바리사이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찾아왔습니다.
그렇지만 그도 “하늘 일”에 관한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세상일”에만 몰두한 나머지 현세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도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진리를 추구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지만, 그의
인간적인 논리로는 “하늘 일”을 담아내기에는 늘 부족하였습니다. 오늘
니코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도, 또한 예수님의 장례 때에 몰약과
침향을 가지고 다시 한 번 찾아온 것도(요한 19,39 참조),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의 한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요한 3,11). ‘너희’와 ‘우리’
의 경계가 그렇게 명확한 것은 아닙니다. 니코데모처럼 우리에게도,
진리를 찾는 마음과 그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계가
공존합니다. 우리가 현세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니코데모가 왜 하필이면 밤에 예수님을 찾아갔을까요? 일부에서는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그분을 찾아뵈었다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된
진리와 진실을 찾아 고뇌하고 방황하는 상황을 밤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세상 한복판에서 ‘하늘 일’을 행하는 영
2015년 나해 4월14일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요한 3,7ㄱ. 8-15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요한 3,13)
세상 한복판에서 ‘하늘 일’을 행하는 영
요즈음 우리 사회를 보면 참으로 답답하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 거짓과 부패, 갈등과 소외가 심화되고 대단한 꿈도 아닌 그저
인간이고 싶고, 소박한 기쁨을 맛보며 사는 것이 왜 그다지도 힘겨울까?
육의 영, 더러운 영이 판을 치는 이 현실 앞에 화사한 봄 햇살마저 가슴
시리게 다가온다.
요한복음의 육(肉, 사륵스)의 관념은 자연적인 인간 조건을 말한다. 곧,
스스로 고립되어 살아감, 고정 관념, 선입견 속에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지칭한다. 반면에 영(靈, 프네우마)은 숨, 기운, 바람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하느님의 시각, 하느님의 정신을 갖고 사는 태도를 말한다. 여기서
구원에 이르려면 육에서 영으로 넘어가야 하며, 사고방식과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 곧,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3,7) 이는 온갖 애착과
자기중심적이고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버리고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분의 심장으로 느끼며 그분 안에서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는
‘변화되어야 하는’ 회개의 삶을 말하며, 무디고 더렵혀진 마음의 창을
말씀과 성령에 의해 닦아내는 ‘죽음의 길’이다.
변화의 동기와 이유는 그리스도 때문이며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이므로 그리스도처럼 내면이 변화되고
변형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 성령의 역사하심에
자신의 삶을 맡겨야 한다. 내 뜻, 나의 사고방식, 나의 고정 관념, 나의
판단, 의지가 아닌 그분의 힘에 맡길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능력이요 겸손이다. 더러운 영(靈), 육의 영을 버리고 하느님의 영 안에
머물고자 하는 이는 굳어진 자기 모습이 부서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이 주는 새로움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성령 이끄심을
식별하여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찾고 그에 따라 움직인다. 또한 영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나의 과거의 관습적인 것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불확실과 불안정에 과감히 자신을 던지는 것을 말한다.
배척이 아닌 수용을 통하여 모든 사람과 일, 모든 관계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이다.
니코데모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 질문을 던지고 사라져버린다(3,9). 밤에
예수님(=빛)을 찾아와 빛을 대하자 빛 앞에 자신을 폭로시켜버렸다.
이처럼 우리도 새로이 태어나기 위하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하고,
부서지고 재(?)로 변하여 다시 태어나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3,12) 하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려는 ‘세상 일’
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느님을 계시해주시기 위해 보여주신 표징들을
일컫는다. 그렇다! 우리는 나날의 삶에서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사랑의
표지를 알아보지 못한다. 반면에, 예수님의 계시에는 세상적인 것과
무관한 절대의 신비와 진리도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늘 일’이다. 그러나
죄중에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이를 알아보고 받아들이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3,14-15) 십자가에 들어올려지시어 죽으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 부활, 승천의 과정이 모두 영의 질서이며 우리가 살아내야
할 길이리라! 매일의 삶에서 겪는 수고로움과 불편함과 고통과 시련은
주님과 일치하기 위한 과정이며, 육의 영에서 떠나라는 표지가 아닐까?
그런 것들을 회피하고 남의 탓으로 돌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자! 이제
우리도 ‘거짓 나’를 태워버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 ‘하늘 일’을 깨닫고
실천하는 일에 몰두해보자!
경제논리를 앞세우며, 304명의 고귀한 생명들의 죽음의 진실규명에
한발짝도 나서지 않는 철면피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저항에 나서는 것이
‘하늘 일’을 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권력과 재력을 가진 이들의 경제정의
침해, 기본 생존권에 대한 위협, 일상화된 거짓과 부패 앞에서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말하고 행동할 때이다. 어디든 하느님 부재(不在)의 상황을
더는 참지 말아야 한다. 영의 질서는 고통받는 형제자매들을 외면하고
인간이 발을 딛고 살아가는 세상을 떠나 저 허공에 있지 않으니...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인천] "신부들은 정말로 잘 살아야 해."
2015년 나해 4월14일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제1독서
<한마음 한뜻>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4,32-37
복음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7ㄱ.8-15
며칠 전, 차에 주유를 하고는 세차 가격 2,000원이라는 것을 보고는 세차
터널로 들어갔습니다. 너무나도 지저분한 제 차가 오랜만에 깨끗이 목욕을
했습니다. 세차 터널을 통과하고서 나오는데, 모자를 눌러쓴 어르신이
차에 남아 있는 물기를 닦아 주십니다. 깊은 주름의 얼굴, 그리고 모자
사이로 보이는 하얀 머리카락을 보니 편하게 차 안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너무나 죄송했습니다. 이 분의 일이니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2,000원으로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을까 싶더군요.
이런 마음을 가지고 운전을 하는데, 생각해보니 호사를 너무 많이 누리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트의 계산대에서 일하시는 분, 거리를
깨끗하게 해주시는 환경미화원, 아파트 경비를 맡으시는 분, 정말로 적은
시급을 받으면서도 친절하게 손님을 맞이하는 서비스업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 등등.... 그동안 참 많은 호사를 누리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감사의 마음보다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을 때가 많았으며, 친절한
말 한 마디도 제대로 건네지 못했음을 반성하게 되더군요.
얼마 전에 한 선배신부님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부들은 정말로 잘 살아야해. 만약 신자들이 교회에서 봉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살 수 있겠어? 그들에게 무조건 친절해야 하고, 더 좋은
모범을 보일 수 있도록 잘 살아야지.”
물론 사제가 없으면 미사를 할 수 없겠지만, 봉사하는 신자들이 없다면
교회가 제대로 유지되기도 힘들 것입니다. 즉,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서로에게 감사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당연한 것으로만 알고 있으니, 서로에게 감사하지도 못하고 또 서로를
탓하면서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이 “주님의 사랑을 어떻게 볼
수 있나요?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셨는데 그 성령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어요?”라고 물으십니다. 이 대답을 오늘 복음에서 찾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라고 이야기하시지요.
우리는 바람의 움직임이나 경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바람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바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또
느낌으로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람도 이런데 어떻게 거룩한
성령의 활동을 직접 체험할 수 있을까요?
성령이 내 안에서 어떻게 활동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듣고 느낌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삶 안에서
나와 함께 하는 성령의 활동을 얼마든지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특히
나를 도와주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를 도와주는 성령께서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다고 불평불만으로 살 것이 아니라, 내 이웃을 통해
충분히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마음가짐이
영원한 생명의 길에 좀 더 가깝게 갈 수 있게 합니다.
사람은 약하지만 신앙은 강합니다. 강한 주님께서 신앙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다 ‘틀렸다’, ‘끝났다’라며
포기하려해도 신앙인은 그 불가능 속에서 가능성을 찾아야 합니다.
신앙인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신앙인 좌절을 잃은
사람입니다.
깨끗해진 제 차의 모습. 오랜만에 목욕했네요. ㅋㅋㅋ
건강을 해치는 8계명
예전에 스크랩했던 글들을 보다가 ‘건강을 해치는 8계명’이라는 글을
발견했습니다. 그 8계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남과 비교하라.
2. 힘든 것만 고집하라.
3. 유행하는 식단을 맹목적으로 따르라.
4. 원인을 생각하지 않고 현상만 바라보라.
5. 빠른 해결책을 강구하라.
6. 많이 불평하라.
7. 생활에 격한 변화를 줘라.
8. 포기하라.
몇 가지는 조금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지만, 참 신앙인이라면 그래서
주님께서 제시하신 길로 가는 사람은 건강도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네요. 여러분은 건강하십니까?
이제는 어디를 가도 쉽게 꽃을 발견할 수가 있네요. 너무 예쁜
계절입니다.
◈ [수도회] 2015.04.14.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 4,32)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이제 함께 살기로 작정합니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공동생활을 시작합니다.
각자가 가진 것을 다 내어놓고 내것을 주장하지 않고
다 우리 것이라고 말합니다.
소유에 집착함이 없으니 모두들 영으로 자유로와집니다.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며 기쁨 가운데 아름답게 살아갑니다.
어찌 이게 가능할까요? 네 가능합니다.
수많은 수도공동체들이 바로 이러한 초대교회 공동생활을
모델로 삼고있지요. 수도자들에겐 내 것이라곤 없습니다.
다 우리 것일 뿐입니다. 많이 번다고 다 내것이 아니요.
집에서 청소만 한다고 무시당하지 않습니다.
수도공동체 안에는 아무도 궁핍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가난하면서도 모두가 부자입니다.
모두들 자기 것을 다 내어놓으니 가난하고
내어놓은 것을 다 모으니 늘 차고 넘칩니다.
왜 이러한 논리를 더 확장시키지 못하는 걸까요?
사실 내 것이라는 건 다 하느님이 주신 것이고
다른 사람의 수고의 댓가인데 왜 내것이라고 자꾸만 우기는지...
우리나라 국민총생산액을 총인구수로 나누면 모두가 궁핍하지 않고
모두가 풍요로울 텐데... 내것을 챙기려는 사람이 많을수록
우리는 더 궁핍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좀 내려놓읍시다.
내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제발 우기지 맙시다.
그래야 가난하고 궁핍한 형제가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야 부활하신 예수님을 참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재산이 많음을 부끄러워하는 분위기가 되기를
2015년 나해 4월14일 부활 제2주간 화요일
<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
복음: 요한 3,7ㄱ.8-15
< 재산이 많음을 부끄러워하는 분위기가 되기를 >
1923년 시카고 에드워드 비취 호텔에 7명의 미국 부자들이 모였습니다.
이 모임에 모인 사람들의 재산이 당시 미국 전체의 국고보다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 모임 이름을 마이더스의 모임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손만 대면 금으로 바뀌었다는 전설의 왕, 마이더스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황금을 가장 많이 가진 7인의 신화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온
미국의 매스컴이 이 에드워드 비취 호텔에 집중되었고 이목을 집중시킨
모임의 참석자들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동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25년이
지난 다음에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았습니다.
미국의 제일 큰 강철 회사 사장이었던 찰스 샤브는 거지로 죽었습니다.
농산물 곡물 수집업을 해서 거부가 된 아더 퀴터도 거지로 죽었습니다.
뉴욕 은행의 총재였던 리차드 위트니는 중한 죄를 짓고 감옥에서 복역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재무부 장관까지 지냈던 엘버트 홀은 사기죄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풀려 나와서 몸이 쇠약해진 상태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국제 은행 총재였던 네언 훼저와 월스트리트에서 가장 큰
회사 사장이었던 제시 리버모우는 자살했습니다. 또 미국 부동산의
대표적인 거구였던 이반 쿠버는 자살 미수로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그를
돌보아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출처: 홍정길, 301가지 감동 스토리]
부자가 다 이렇게 망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단지 부자라고 자신들끼리
만나서 선망의 대상인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교회 안에서도 많이 나타납니다. 재산이 많다는 이들이 모여
교회의 공식 단체로 인정받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이들은 어떻게
됩니까? 만약 초대교회 때에도 재산이 많다는 사람들끼리 교회 안에서
모임을 만들 수 있었을까요?
우선 오늘 독서에서 초대교회에는 궁핍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나옵니다. 그 이유는 당연히 그들 자신이 자신의 것을 자기 소유라
주장하지 않은 정신에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땅이나 집을 팔았다고
합니다. 바르나바라고 하는 사람도 밭을 팔아 그 돈을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습니다.
이들이 부동산을 팔았다는 것은 또한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항상 종말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당장 우리가 죽으면 남겨놓게 될 부동산들은 하느님
앞에서 꾸중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돈만 있으면 부동산을 사는 우리의
모습은 어쩌면 하느님의 섭리에 의탁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자신과
후손들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의 소치입니다. 계단식 논에서 한 논이
물을 막아버리면 밑의 논들은 말라버립니다. 그것을 잘 하는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밑에 있는 밭이 물 부족으로 병이
들면 그 병이 위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하는 것이
자신도 살리는 길입니다.
초대교회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진정으로 큰
자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창피스러운 일은 우리 가운데
궁핍한 사람이 있을 때여야 합니다. 그런데도 주위에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있는데 자신의 재산을 자랑할 수 있는 분위기라면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 재산의 많음을 부끄럽게 여기는 문화가
되어야합니다. 왜냐하면 주위에 가난한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에서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던 중 한 건물 밑 구석에 누더기를
뒤집어쓴 한 사람이 구걸하는 몸짓으로 손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동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자세히 보니 돈을 달라고 내민
손바닥에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주위에서 굶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 재산의 많음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어쩌면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를 바라보면서도
예수님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토마스와 같은 믿음은 아닐까요? 함께
성당에 다니고 있는 누군가가 궁핍하다면 미안해하며 최대한 도와야 할
것입니다. 내 주위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생기지 않게 만드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기본자세입니다. 부자와 거지 라자로에서, 거지 라자로를 방치해
놓은 것만으로도 부자가 지옥에 갔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부활 제2주간 화요일
2015년 나해 4월14일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제1독서
<한마음 한뜻>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4,32-37
복음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7ㄱ.8-15
한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남편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혼자서 자녀들을 키워야 했습니다. 자매님은 남편의 장례를 마치고
자녀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아빠의 장례비용을 치루고 남은 돈은 하느님께
바치려고 한다. 그러니 너희들도 그렇게 알아주면 좋겠다.’ 자녀들도
아빠가 좋아할 것이라고 하면서 하느님께 바치려는 어머니의 뜻을
따랐다고 합니다. 그 자매님은 생활 형편이 넉넉하기 때문에 나눈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이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누었습니다.
시흥5동 성당에 있을 때입니다. 혼자 사시는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여름에
폭우가 내려서 할머니의 집에도 침수 피해가 있었습니다. 성당에서도,
정부에서도 피해를 입은 할머니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할머니께서는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성당에서 드린 돈, 정부에서 지원해
준 돈을 도로 가져오셨습니다. 그리고 할머니께서 모으신 돈까지
가져오셨습니다. 할머니는 큰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니니, 더 큰 피해를
입은 분들을 위해서 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머니께서도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분은 아니셨습니다. 다만 더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시는 따뜻한
마음이 있으셨습니다.
작년에 교황님께서 한국에 오셨을 때입니다. 많은 분들이 자원봉사를 해
주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전례 봉사를 해 주셨고, 어떤 분들은 질서유지
봉사를 해 주셨고, 어떤 분들은 통역 봉사를 해 주셨고, 어떤 분들은 번역
봉사를 해주셨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이 만여 명이 넘었습니다. 다들
바쁘신 중에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봉사를 해
주셨습니다. 교황님의 방한을 준비하는 비용은 대부분 많은 사람들의
협찬으로 마련될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움직이면 기쁜 마음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소중한 것은 ‘靈’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주 아름답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소중한 것은 재물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의 제1독서에서 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공동체는 바로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하고,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도들과 공동체는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신앙은 관념이 아닙니다. 신앙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은총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다 버려야하는 여행준비
2015년 나해 4월14일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제1독서
<한마음 한뜻>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4,32-37
복음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7ㄱ.8-15
다 버려야하는 여행준비
해외여행을 많이 갑니다. 견문을 넓히고 외국이 옆집 같고 지구촌이지요.
세계여행은 학교에 있으면 좋을법한 인생과목 같고 큰 배움이라 봅니다.
여행 준비는 고추장 경비 옷 등 가져갈 게 많고 그래야 잘 돌아온다지요?
영원 세상에 갔다 온 사람이 있다면 이 역시 인생에 큰 참고가 될 겁니다.
그곳엔 모두 다 꼭 갈 겁니다. 그러니 이 여행준비는 모두 꼭 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왔다 갔다 하셨는데 그곳 여행준비는 가진 걸 다 버리라던데요?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요한 3,12)”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경계(境界)가 없으신 분 -성령의 힘-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4월14일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사도4,32-37 요한3,7ㄱ.8-15
제1독서
<한마음 한뜻>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4,32-37
복음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7ㄱ.8-15
경계(境界)가 없으신 분 -성령의 힘-
어제 원장수사와 대화 중 깨달음이 은혜로웠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묵상입니다.
삼위의 하느님 모두가 경계가 없으신, 그대로 사랑과 생명, 자유의 분임을
깨닫습니다. 공동체의 신비는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경계가 없으신 분입니다.
끊임없이 사랑으로, 생명으로 자유롭게 흐르는 분이십니다.
도저히 율법주의의 구획이 적용될 수 없는 분입니다.
듣고 보니 온전히 건강한 수도형제가 나를 포함하여 하나도 없었습니다.
정도와 양상의 차이일뿐 모두가 병자들이었습니다.
아니 깊이 들여다보면 모두가 그러합니다.
모두가 나름대로 본의든 아니든 커다란 십자가 하나씩 지고 삽니다.
사실 때때로 자기 탓없이 타고난, 정체불명의 희귀병을 앓는 형제자매들을
만나다 보면 이런 생각은 더 확실히 자리하게 됩니다. 결국 하느님을 만나
성인(聖人)이 되는 길뿐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살아있는 하느님의 신비입니다.
고정된 실체가 아닌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작은 요셉수도공동체지만 그대로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세상과 격리 유리된 수도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어제 저녁 식사 때만 해도 형제 셋은 휴가중이고, 형제 셋은 광화문에서의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수도자 주최의 추모 미사에 했기에,
형제 일곱만 남아 식사했습니다.
광화문 광장의 두 위대한 '애민(愛民)의 사람', 세종대왕 동상과 이순신
장군 동상 사이에서의 미사가 참 상징적이다 싶었습니다.
마침 어제 읽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중 짧은 구 일기문도
감동이었습니다. 절망의 순간에도 냉철하고 단정단단하기가 얼음
같습니다.
"맑음, 옥문을 나왔다"(1597,4,1)
"필공을 불러 붓을 매게 했다"(1597,4,2)
'맑음'은 자신에게 주어진 가혹한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겠다는 심정의
표현이고, '붓을 매게 했다'는 것은 과거에 매이지 않고 내일을
준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런 성군(聖君), 성웅(聖雄)이 있었기에 존재하는 대한민국임을
생각합니다. 새삼 믿는 이들 모두가 성인(聖人)으로 불림 받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참 성인은 누구입니까?
그 연민의 사랑으로 인해 성부, 성자, 성령의 하느님을 닮아 경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뛰어난 개방성, 유연성, 신축성을 지닌 이들입니다.
바람같고 구름같고 물같은 사람입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바로 예수님처럼 영에서 태어나 사랑따라 부는 바람같은 이가 성인입니다.
참 자유로운 하느님 사랑과 생명의 현존같은 존재들입니다.
사랑으로 자유롭게 흐름이 바람같고 구름같고 물같은 '성령의 힘'입니다.
자유롭게 흐르면서 시기적절한 때 생명의 비가 되어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구름이며, 유유히 흐르면서 메마른 대지에 생명을 주는 강물이고,
봄바람처럼 죽음의 겨울지낸 대지와 나무들을 사랑으로 스치면서
생명의 싹을 티우고 생명의 꽃을 피워내는 성령의 바람입니다.
이런 '사랑의 성령'이 끊임없이 흐르면서 위로하고 격려하고 치유하기에
유지되는 개인이요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성령 바람이 닿지 않는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개인 및 공동체는
물론 세상 속속들이 불고 싶은 데로 불어가는 사랑의 성령 바람입니다.
깨어있어 성령의 흐름에 민감히 호응하는 이들이 바로 성인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성령의 바람은 니코데모에게 불었고 사도행전의
신자공동체에 불었습니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부활하신 주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사도들입니다.
사도행전의 신자공동체는 결코 인간 노력으로 성취한 것이 아닌
순전히 성령의 선물로 주어진 유토피아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인류역사상 인간이 시도했던 유토피아 세상을 위한 폭력적 혁명은 모두
실패로 끝났습니다. 오직 부활하신 주님의 성령의 힘으로 유일하게
성공한 사도행전의 유토피아 공동체입니다.
진정 꿈의 공동체, 지상에 실현된 하느님의 나라 공동체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의 사랑으로 충만할 때 성인이요 유토피아 공동체입니다.
"신자들은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 가운데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
성령의 열매 공동체입니다.
여기에서 영감 받아 탄생한 수도공동체들이요
심지어는 공산주의 사상 역시 여기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성령의 힘이요, 경계가 없이 사랑과 생명으로 불고 싶은
데로 부는 성령의 바람, 사랑의 바람, 생명의 바람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어 내적일치와 더불어 위로와 치유의 구원을 선사하십니다.
"주님, 이 거룩한 파스카 신비로 구원을 이루시니
이 미사가 저희에게 영원한 기쁨의 원천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청주] 행동하는 믿음|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4월14일 부활 제2주간 화요일(요한 3,7.8-15)
제1독서
<한마음 한뜻>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4,32-37
복음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7ㄱ.8-15
행동하는 믿음
개나리 진달래, 라일락이 꽃을 피우며 계절의 변화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미선나무도 하얀 꽃을 피웠습니다. 긴 겨울의 추위를 견뎌 낸 나무들이
새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자태를 뽐내기 시작했습니다. 영양을 충분히
지닌 나무와 그렇지 못한 나무들이 드러납니다. 밑거름이 중요한데
웃거름으로 겉만 다스렸던 나무들은 힘이 없습니다. 밑거름이 충분하면
필요할 때마다 알맞은 영양분을 흡수하지만 밑거름이 충분하지 못하면
일시적인 효과를 내는 웃거름에 매달리게 됩니다. 결국은 튼실하지 못하여
쉽게 명을 다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밑거름이 소중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고 미사참례를 하며 기도에 충실한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그는 꾸준합니다. 그러나
기도생활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일시적인 효과를 찾아 헤맵니다. 세상에
떠도는 유명한 곳을 찾아 돌아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삶의 변화는
없습니다. 신심단체활동 등 생색내는 일에는 열심히 하면서도 미사에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큰 믿음을 지니려면 먼저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합니다. 기도생활로 밑거름을 줘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믿음의 생활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3,14-15).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람들이 모세의 손에
들린 구리뱀을 쳐다보았을 때 살았고, 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해하는 것에
멈춰서는 안 됩니다. 행함으로써 증거 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미래에 주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17,3).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영생이란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믿는 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분과 일치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관계는 이미 여기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믿음의 삶이 중요합니다. 알프레드 디 수자 신부는
말합니다.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것처럼 춤추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사람이 믿음만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생활 안에서 행동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합당히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고,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함의 힘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꽃비도 맞고 봄비도 맞으면서
2015년 나해 4월14일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제1독서
<한마음 한뜻>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4,32-37
복음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7ㄱ.8-15
꽃비도 맞고 봄비도 맞으면서
한 며칠 화사한 꽃비가 내리더니 이제는 달콤한 봄비가 내립니다.
온천지가 완연한 봄기운으로 기지개를 활짝 폅니다. 불어오는 바람도
이젠 예전같이 매서운 칼바람이 아니라 훈훈하고 따뜻한 봄바람입니다.
꽃비도 맞고 봄비도 맞으면서 들었던 생각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비가
되어 내리는구나! 세상 방방곡곡 그 어떤 지역, 그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고
골고루 풍성하게 내리는구나!”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영적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니코데모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니코데모의 내면에는 성령의 불꽃이 타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어렴풋이 예수님의 메시아 성을 인식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강한 주님
체험이 부족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나 바오로 사도가 경험했던 그 강렬한 하느님 자비 체험,
골수로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온 몸으로 느꼈던 절절한 은총 체험이
니코데모에게는 아직 없었습니다. 그저 머리와 이성으로만 자꾸
이해하려하니 이런 저런 의구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그래서
스승님의 말씀에 묻고 또 묻기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한복음 3장 8절)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요한복음 3장 9절)
참으로 묘한 것이 바람입니다. 물론 기압골이나 대기상태, 지형이나
태풍의 영향에 따라 이리 불고 저리 부는 것이 바람입니다. 느낌은 있으나
절대로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 그 누구도 바람의
존재 여부에 대해 의심하거나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 사람, 성령으로부터 새롭게 탄생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은 일이 이루어집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백번
깨어나도 성령의 그 감미로운 바람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 강렬하고
뜨거운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례로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묘하고 신비스런
성령의 바람이 스쳐지나갑니다. 때로 뜨겁게, 때로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게
하느님의 영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임하십니다. 그 결과 육으로만
살아가던 한 인간 안에 참된 내적인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에제키엘
예언자의 말씀이 고스란히 한 인간 안에 실현됩니다.
“나는 그들 안에 다른 마음을 넣어 주고, 그들 안에 새 영을 넣어주겠다.
그들의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워 버리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어,
그들이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그대로 지키게
하겠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에제키엘 예언서 11장 19~20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인간 측의 신앙 고백은 어찌 보면 하나의 도전이고
모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직 육에 따라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물질과
육체의 쾌락만을 최고로 여기고 추구하는 이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
무조건적인 하느님 사랑, 대가 없는 예수님 사랑, 거저 주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남의 중요성을 설파해야 되는 신앙인의 삶이 꽤나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기본이자 근간입니다. 이 부활
신앙이 사라져버린 그리스도교는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활 신앙은 확신 갖고 믿음 갖고 온 몸과 마음으로 수용하고
인정하고 고백해야 할 우리들 삶의 원리입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 부활은 당신과 함께 다시 시작하자는 우리 각자를 향한
강렬한 초대입니다. 새 인생을 출발하자는 초대, 영적인 삶, 위로부터의
삶을 다시 살아보자는 예수님의 간절한 초대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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